신라 화랑(花郞)의 기원에 대한 고찰

2015. 7. 11. 05:12우리 역사 바로알기

 

 

 

 

      

 

 

신라 화랑(花郞)의 기원에 대한 고찰 신라사 / 한국고대사

 

2014.01.13.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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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사를 논할 때 빼놓기 힘든 주제가 바로 화랑(花郞)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화랑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과 학설이 병존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 한번 정리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하여 거칠고 조잡한 글을 올립니다. 

*사료로는 고려 때에 지어진 <삼국사기>, <삼국유사>및 조선시대에 지어진 <동사강목>을 참고하였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남당 박창화의 <화랑세기 필사본>은 참고하지 않았음을 미리 밝혀두고자 합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묘사된 화랑들의 모습.)

1. 삼국사기 진흥왕본기의 기록
   37년(576년)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일찍이 임금과 신하들이 인물을 알아볼 방법이 없어서 걱정하다가 무리들이 함께 모여서 놀게 하고 그 행동을 살펴본 후에 발탁해서 쓰려고 하였다. 마침내 미녀 두 사람 즉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을 뽑고 무리 3백여 명을 모았다.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였는데, 준정이 남모 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되자 끌고 가 강물에 던져서 죽였다. 준정이 사형에 처해지자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졌다.

   그 후에 다시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들었는데,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혹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알게 되어 착한 사람을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진흥왕(眞興王) 三十七年 (576년 미상 음력)

 

 

    <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 37년(576) 봄에 아름다운 남모와 준정이라는 두 미녀를 뽑아 그들로 하여금 무리를 이끌고 다니며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찾으려는 목적으로 원화를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남모와 준정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시기하여 서로를 죽이고 사형당하기에 이르자 그 일로 인하여 애써 모아놓은 무리가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에 신라 조정에서는 미녀가 아닌 미남자들을 택하여 화랑으로 삼고 원화를 대신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화랑의 기원은 곧 원화가 됩니다.
   그러므로 김대문 (金大問)은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말하기를 어진 보필자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 라고 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은 난랑비(鸞郞碑)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는데, [이것을] 풍류(風流)라고 한다. 가르침의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仙史 ,화랑의 행적이 기록된 사서로 추정)에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는데, 실로 이는 삼교(三敎)를 포함하고 뭇 백성들과 접(接)하여 교화한다. 이를테면 들어와서는 집안에서 효를 행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함은 노 (魯)나라 사구(司寇 ,공자)의 가르침이고, 하였다고 자랑함이 없는 일을 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 (周)나라 주사(柱史 ,노자)의 뜻이며,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는 것은 축건태자 (竺乾太子 ,석가모니)의 교화이다”라고 하였다.

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진흥왕(眞興王) 三十七年 (576년 미상 음력)

   이와 같은 화랑제도는 후대의 신라인들에게 인재를 양성하고 선출하여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데 있어서 아주 훌륭한 제도로 평가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는 위의 기록들에 자세히 나타납니다.

   통일신라 시대의 문인 김대문은 지금은 전하지 않는 <화랑세기>를 통하여 화랑이 우수한 관료와 뛰어난 군인을 양성하였다고 평가하였으며, 통일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문인인 최치원은 <난랑비>의 서문에서 화랑의 도를 이른바 '풍류'라 칭하며, 유교와 도교 및 불교 등의 3교의 가르침을 골고루 받들어 조화를 추구하였다고 극찬하였습니다.
   당(唐)나라의 영호징(令狐澄)은 《신라국기 (新羅國記)》에서 말하기를 귀족의 자제 중에서 아름다운 이를 택하여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서 이름을 화랑 이라고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높이 받들어 섬겼다.라고 하였다.

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진흥왕(眞興王) 三十七年 (576년 미상 음력)
   한편 귀족 자제로써 미소년을 가려 화랑으로 삼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숭상한다는 신라의 풍습은 외국인들의 눈에는 아주 신기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당나라 사람인 영호징은 지금은 전하지 않고 <신당서>의 예문지의 기록에나 짤막히 언급되는 <신라국기>라는 책에서 이를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데, 당시 당나라 사람들의 눈에도 화랑도는 특이한 풍습으로 인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삼국유사의 기록
   제24대 진흥왕 (眞興王) 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삼맥종 (三麥宗)인데, 또는 심맥종 (深麥宗)이라고도 한다. 양(梁)나라의 대동(大同) 6년 경신(庚申)(540)에 즉위하였다. 백부(伯父) 법흥왕 (法興王)의 뜻을 흠모하여 일념으로 불교를 받들어 널리 불사(佛寺)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제도하여 승려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왕은] 천성이 풍미(風味)하고 신선(神仙)을 매우 숭상하여 민가의 낭자 중에서 아름답고 예쁜 자를 택하여 받들어 원화(原花)로 삼았다. 이것은 무리를 모아서 인물을 뽑고 그들에게 효도와 우애, 그리고 충성과 신의를 가르치려함이었으니,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이기도 하였다. 이에 남모랑 (南毛娘)과 교정랑 (峧貞娘)의 두 원화를 뽑았는데, 모여든 무리가 3,4백명이었다. 교정은 남모 를 질투하였다. [그래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남모 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고, 취하게 되자 몰래 북천 (北川)으로 메고 가서 돌로 묻어서 죽였다. 그 무리들은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서 슬프게 울다가 헤어졌다. [그러나] 그 음모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노래를 지어 동네아이들을 꾀어 거리에서 부르게 하였다. 남모의 무리들이 노래를 듣고, 그 시체를 북천 중에서 찾아내고 곧 교정랑 을 죽였다. 이에 대왕은 영을 내려 원화를 폐지시켰다.

   여러 해 뒤에 왕은 또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다시 명령을 내려 좋은 가문 출신의 남자로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명칭을) 고쳐서 화랑 ( 花郞 )이라고 하였다. 처음 설원랑 (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초이다. 이 때문에 명주 (溟洲)에 비를 세웠다.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고쳐 선행을 하게하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온순하게 하니, 5상(五常) , 6예(六藝) , 3사(三師) , 6정(六正)이 왕의 시대에 널리 행해졌다. 

   < ≪국사(國史)≫에는 진지왕(眞智王)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576년)에 비로소 화랑 을 받들었다고 하였으나, 아마도 사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다. >

- 三國遺事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미륵선화∙미시랑∙진자스님(弥勒仙花·未尸郎·真慈師)
  

 

<삼국유사>에서도 화랑의 기원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그 내용이 <삼국사기>와는 살짝 다르면서도 상세한 면이 있습니다. 이 기록에도 진흥왕 때에 원화를 설치하였으나, 남모랑과 교정랑 등의 두 원화가 서로를 시기하다가 결국 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되면서 원화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진흥왕은 몇 년 후에 다시 좋은 가문 출신의 남자로서 덕행이 있는 사람을 뽑아 화랑을 삼아서 앞서 폐지한 원화를 대체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화랑 중에서도 그 으뜸을 국선(國仙)이라 한 듯 한데, 설원랑이라는 사람이 최초의 국선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다만 국선이 곧 화랑과 동의어이므로 굳이 국선을 화랑의 우두머리라 보지 않는 시각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설원랑이 최초의 화랑이 됩니다.

3.동사강목의 기록
   겨울 10월 신라에 지진이 있었고,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 신라가 남녀(男女) 아이를 뽑아 풍월주(風月主)라 불렀다.
신라의 군신(君臣)이 인재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답답하므로, 무리를 모아 떼지어 놀게 하여 그 의(義)로운 일을 행하는 것을 본 연후에 등용하려고, 소년 중에서 용모가 단정한 자를 뽑아서 풍월주(風月主)라고 부르고 착한 선비를 구하여 도중(徒衆)을 삼아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권장하였다. 

   뒤에 또 용모가 아름다운 소녀를 가려서 원화(源花)를 삼게 하매, 남모(南毛)와 준정(俊貞) 두 사람이 뽑혔고, 두 원화가 무리 3~4백 인을 모았는데, 두 사람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俊貞)이 남모(南毛)를 자기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고는 끌어다 강물에 던져 죽였는데, 이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도중들이 화목함을 잃고 흩어졌으므로, 왕은 영(令)을 내려 원화를 폐지했다.

- 동사강목 경신년 신라 진흥왕(眞興王) 원년(540)

   조선시대에 지어진 <동사강목>의 기록에는 진흥왕 원년인 540년 10월에 소년 중에서 용모가 단정한 자를 뽑아 풍월주로 삼았으며 뒤에 또 아름다운 소녀를 가려 원화로 삼았으나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기록에 나타났던 남모와 준정 간의 질투와 살인사건으로 인해 원하 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봄 신라가 화랑(花郞)을 두었다.
이 때에 신라에 풍월주(風月主), 원화(源花)의 법이 폐하여진 지 이미 여러 해였다. 

   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다시금 영(令)을 내려 귀인(貴人)과 양가(良家)의 자제 중에서 얼굴이 아름답고 덕행이 있는 자를 선발해서 분장을 시켜 화랑(花郞) 또는 국선(國仙)이라 이름하였다. 이에 설원랑(薛原郞)을 얻어 받드니, 국인들이 존경하고 섬기었다. 

   이로부터 도중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많은 데는 천여 인에 이르렀다. 혹은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악기를 가지고 서로 즐기며 산수(山水)를 유람하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잘잘못[邪正]을 알게 되어서 착한 사람을 뽑아 이를 조정에 추천하니, 어진 정승과 충성스러운 신하,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 속에서 많이 나왔다. 후인들이 이 낭도(郞徒)들의 설교하던 연유를 자세히 기록하여 선사(仙史)라고 이름하였다.

   신라인 김대문이 《화랑세기(花郞世記)》를 지었고, 또 최치원 난랑비(鸞郞碑)의 서(序)에 이르기를,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하였는데, 설교(設敎)의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기술되었다.” 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전하여 오지 않고 있다.

- 동사강목 병신년 신라 진흥왕 37년(576)

   이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 원년인 540년에 풍월주와 원화의 제도를 설치했다가 폐지한지 오랜 세월이 흘른 진흥왕 37년, 즉 576년에 다시 이와 비슷한 제도를 부활시켰으니 이를 화랑 또는 국선이라 이름하였으며, 이에 설원랑이 최초의 화랑(국선)이 되어 국인들이 존경하고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동사강목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 따르면 본래 540년에 신라 조정에서 풍월주(남자)와 원화(여자)를 뽑아 인재를 가려내는 제도로 이용하였으나 이를 폐지하였다가 576년에 진흥왕이 이 제도를 부활시키되 여자를 뽑지 않고 오직 남성인 화랑을 뽑게 되어 신라의 사회 제도로 정착되었다는 것이 됩니다. 즉 순서에 따르면 풍월주 - 원화 - 화랑 순이니 풍월주가 원화의 기원이요, 화랑의 기원도 되는 셈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眞興王) 37년에 비로소 원화(源花)를 받들게 되었다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진흥왕이 즉위하여 신선(神仙)을 많이 숭상하였다. 용모가 아름다운 민가의 낭자(娘子)를 택하여 원화로 받들고 무리를 모으고 선비를 뽑아 효제 충신(孝悌忠信)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곧 남모랑(南毛娘)과 준정랑(俊貞娘)을 취하였는데, 이들 두 원화는 3~4백 명의 무리를 모았다. 그런데 준정이 모랑을 질투하여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북천(北川)에 끌고 가 묻어 죽였다. 모랑의 무리는 그의 거처를 몰라 슬피 울부짖고 있었는데, 준정의 모살(謀殺)임을 아는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노래로 만들고 거리의 아이들을 유인하여 그 노래를 부르게 하므로, 그 무리가 듣고 북천 중에서 모랑의 시체를 찾아낸 다음 곧 준정을 죽였다. 이리하여 왕이 영을 내려 원화를 폐지하게 하였다가, 여러 해를 지난 후 왕은 또 나라를 일으키려면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영을 내려 양가(良家)의 남자로 덕행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화랑(花郞)으로 고치게 하고, 비로소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았으니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초이다.” 하였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는, 《삼국유사》의 진흥왕 원년 조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용모가 단정한 동남(童男)을 선발하여 그를 풍월주(風月主)라 부르고 착한 선비로 무리를 구성하여 효제 충신을 장려한다.” <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이것을 법흥왕(法興王) 원년(514)에 있었던 일이라 하나 고증할 수 없다  >하였으니, 이는 《삼국유사》를 요약하여 만든 글인데, 본사(本史)와 같지 않다. 나는 이제 두 가지를 취하여 참고 수정한다.

- 동사강목 부록 상 신라가 화랑을 두다

 

   한편 동사강목 부록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신라가 화랑 제도를 시작하였던 시기를 고증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기록에는 위의 기록과는 달리 <여지승람>을 인용하며 화랑이 처음 설치되었던 때가 진흥왕 원년(540)이나 진흥왕 37년(576)이 아닌 법흥왕 원년(514)이라고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화랑의 기원에 관한 기록은 그 내용의 뼈대는 동일한 듯 하나, 시기에 관해서는 기록마다 소소한 차이가 있는 편입니다.

4. 화랑도 창설의 의의와 사회적 기능
   앞의 글에서 밝혔듯이 화랑도(花郞徒)의 창설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병존하고 있어 그 정확한 창설 시기나 구성은 알기 힘듭니다. 다만 주목해야 할 부분은 화랑도가 처음 창설되었던 때가 <삼국사기>, <동사강목>에서는 진흥왕 때로, <삼국유사> ,<동사강목>에서는 법흥왕 때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때는 신라에서 점차 왕권이 신장되어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입니다.

   특히 법흥왕은 지증왕 대 이후로 신장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불교를 수용하여 신민(臣民)의 사상적 통합을 꾀하였으며 율령을 반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치력을 강화하는 등 국가 통치 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습니다. 특히 율령 반포는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바로 골품제(骨品制)가 이 때에 이르러 국가적 신분정책으로 지정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7년 봄 정월에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모든 관리의 공복(公服)과 붉은 색, 자주색으로 위계(位階)를 정하였다.

- 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法興王 七年 春 一月 (528년 미상 음력)


15년에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 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法興王 十五年 (528년 미상 음력)
   지증왕과 법흥왕이 쌓은 기반으로 바탕으로 하여 상당한 국력을 비축한 신라는 진흥왕 대에 이르러 마침내 고구려와 백제 등과도 군사적 대결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으며 마침내 관산성에서 백제와 가야의 연합군을 크게 무찌르고 한강 유역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시기에 화랑도가 창설되었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일단 화랑도의 기원은 촌락공동체를 기반으로 성장한 일종의 청소년단체로 여겨지는데, 율령의 반포를 통해 본격적인 골품제사회가 시작되던 이 시기에 신라인들은 이를 국가에서 공인한 정식 단체로 인정하고 노력을 기울여 그 규모를 확장시켜 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는 오랫동안 신라의 전통으로 뿌리깊게 남아있던 청소년단체를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서며 전통을 이어나간 것으로, 전통사회의 풍습과 새로운 율령이 조화를 이룬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에는 인재의 육성도 중유한 이유였겠으나, 실상 화랑도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의의 중 하나는 바로 신분 간의 갈등 완화에 있다고 봅니다. 이른 여러 기록을 통해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임신서기석>에는 두 화랑이 스스로 공부를 하며 학문을 닦겠다는 일종의 맹서(盟誓)에 관한 내용이 포착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기록은 화랑도가 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 및 서약(誓約)의 형식을 통하여 조직되었다는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서약단체적인 화랑도의 이러한 성격은 화랑도가 신라사회, 특히 골품제가 지향하는 혈연주의나 씨족적 결합주의를 초월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기록을 통해 보면 화랑도는 서로 다른 여러 골품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화랑도 집단의 수령이라 할 수 있는 화랑들은 대개 진골 출신의 귀족 자제들 중에서 뽑혔으나, 화랑을 따르는 낭도들은 중앙 왕경에 기반을 둔 (진골에 속하는) 고위 귀족 출신 외에도 하급 귀족, 평민, 승려 등 다양한 계층의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요컨데 화랑도라는 조직은 신분의 지휘고하를 막론하여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로 구성된 초계급적 수련단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역시 골품제 등을 비롯한 신라의 엄격한 신분제 사회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신분간의 갈등을 완화시켜 줄 수 있는 화랑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한편 청소년 시절에 맺어진 다양한 신분 간의 연대감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져 사회 구성원들의 일체감 및 유대감을 형성함으로써 결론적으로 국가의 단결력을 높이는 효과가 생겨납니다.1 이는 훗날 신라의 통일전쟁 기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오늘날에 비해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극히 짧았던 고대 사회에서는 나이가 어린 인재들을 교육시켜 최대한 빨리 고급 인력으로 양성하는 것이 중대한 국가적 과제였으므로 이러한 화랑도의 중요성은 보다 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이러한 군사적 역할은 화랑도의 본래 목적과는 상당히 다르며, 당시 시대상으로 인해 생겨난 부수적 역할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1.사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사강목>
2.저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7: 삼국의 정치와 사회3 - 신라,가야> , 2003 , 국사편찬위원회


* 조잡하고 황잡한 글이오나 시간이 된다면 언제든지 수정하여 내용을 보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삼국유사> 권2 기이2에 실린 <효소왕대 죽지랑 기사>에서 화랑인 죽지랑이 위기에 처한 낭도 득오를 도와주는 부분이나, 죽지랑이 죽은 후에 득오가 그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향가 등을 보면 이러한 유대감은 청소년기에 시작되어 죽기 직전까지 유지되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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