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20. 02:27ㆍ여행 이야기
강원 원주 치악산 상원사(雉岳山 上院寺)를 찾아서
- 전각 둘러보기 1 -
방에서 더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마냥 있다가는 사진을 담을 수 없을 것 같아 밖으로 나
와 도량 내의 전각과 주변을 담고자 했습니다.
안개 걷힌 일주문 모습
안개가 걷혔다 해도 순식간에 또 자욱해지니 변화무쌍합니다. 안개가 걷힌 순간 종각의
모습을 담고 싶어서 정파님과 일주문쪽으로 달려갔습니다.
다시 담아 본 삼존불
일주문에서 바라본 범종각
소나무가 있어 운치를 더해 줍니다.
대웅전과 범종각 모습
원주실 위로는 심검당(尋劍堂) 오른쪽은 대웅전입니다.
축대 밑의 밭
대웅전(大雄殿)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8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불기 2532년(1988) 경덕스님에 의해 재건되었습
니다. 안에는 석가삼존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여기에 주련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靑山疊疊彌陀窟(청산첩첩미타굴) 첩첩한 푸른 산은 아미타불 법당이요,
蒼海茫茫寂滅宮(창해망망적멸궁) 망망한 푸른 바다 부처님의 적멸보궁
物物拈來無罣碍(물물염래무가애) 물물은 오고 감에 걸릴 것이 없는데
幾間松亭鶴頭紅(기간송정학두홍) 솔밭의 학머리를 몇 번이나 보았는가!
대웅전편액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
중앙에 본존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
(普賢菩薩)이 협시하고 있습니다. 문수보살은 지혜(智慧)를 보현보살은 행원(行願)을 상징
합니다.
신중탱화(神衆幀畵). 불기 3,015년(1988) 11월15일 봉안.
신중탱화화기(神衆幀畵畵記)
화기를 보면 『佛紀 三千十五年 戊辰 十一月 十五日 神衆幀畵點眼于雉岳山 上院寺 奉安
證明 宗正性徹和尙. 金魚 柳川 蓬萊. 供司 朴古敬. 住持 敬悳和尙』
이 화기를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기 3,015년(1988) 무진년 11월 15일 신중탱화가 치악산 상원사에 점안하여 봉안되
다. 증명법사 종정성철화상. 금어 유천 봉래. 공사 박고경. 주지 경덕화상.』
여기서 불기가 3,015년으로 되어 있음을 봅니다. 서기로는 1988년입니다. 올해는 불기
2555년입니다. 이것을 환산해 보면 불기 2532년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우리나라
는 과거 불기를 전자와 같이 썼습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까지 지금의 불기를 쓰지 않고 북방의 불기를 써왔습니다. 그러니까
북방의 전통적인 불기는 기원전 1,027년 갑인년 4월 8일에 탄생하여 기원전 948년 임신년
2월15일에 열반하셨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불기를 썼습니다.
그 근거는 《전등록(傳燈錄)》에 있습니다. 전등록은 불교가 어떻게 법등(法燈)을 밝혀 왔
는지 알려 주는 중요한 책입니다. 이에 이르기를,
『보요경(普耀經)에 "부처님이 탄생하실 때 큰 광명을 놓아 시방세계를 비추시니 땅에서
금련(金蓮)이 솟아 발을 받들자 동서남북으로 각각 칠보씩 걷고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아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시니 때는 주소왕(周
昭王) 24년 갑인(甲寅) 4월 8일이었다."』
이에 근거하여 북방불교에서는 불기 3000년설을 써왔습니다. 그런데 1956년 제4차 세계
불교도대회가 네팔의 수도 카투만두에서 열렸는데 나라마다 불기가 달라 통일하기로 결의
하여 1956년을 불기 2500년으로 정하였습니다. 불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상식방을 열
어 보세요.
두 아이가 부처님께 그릇에 흙을 담아 공양하는 모습
법당에 있는 벽화인데 담아 보았습니다. 두 아이가 흙을 가지고 소꿉장난을 하며 놀다가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자 공양을 올린다며 흙을 그릇에 정성스럽게 담아 부처님전에 공
양을 올렸는데 부처님은 이를 어여삐 여기시고 흔쾌히 받으시고 장차 훌륭한 사람으로 성
장할 것이라 예언하셨습니다. 두 아이는 그 공덕으로 한 아이는 왕이 되고 한 아이는 장
군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난타여인의 등공양
부처님이 계시는 기원정사에 국왕으로부터 부호, 선남선녀들이 장엄한 등불을 달았는데,
이에 가난한 여인 난타도 등불을 달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 머리를 잘라 겨우 동전 두 닢으
로 기름을 사서 등불을 정성스레 밝혔습니다. 새벽에 목련존자가 등을 거두기 위해 나가
보니 마침 세차게 불던 바람에 모두 꺼졌으나 오직 가난한 여인의 등불만 남아 빛나고 있
있었습니다. 그래서 끄려고 하였는데 꺼지지 않아 애쓰고 있는데 부처님께서 이를 보시고
"그 등불은 너희 힘으로는 끌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매우 깨끗한 마음으로 보시를 한 것이
기 때문이다." 그러시면서 부처님께서 이 연인에게 미래에 등광불(燈光佛)이 될 것이라고
수기를 주셨습니다.
산신각(山神閣)
산신각 옆의 계곡
여기의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하는데 많이 녹아서 이와 같습니다.
안개 속의 산신각입니다.
산신각은 대웅전 뒷편 좌측에 높이 있습니다. 산신각이 독립적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여기에 주련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靈山昔日如來囑(영산석일여래촉) 그 옛날 영산에서 부처님의 부촉받아
威振江山度衆生(위진강산도중생) 강산에 위엄 떨쳐 중생을 제도하고
萬里白雲靑嶂裏(만리백운청장리) 만리 뻗은 흰구름 푸른산 봉우리를
雲車鶴駕任閑情(운거학가임한정) 구름 수레 학을 타고 한가로이 지내시네.
산신각 편액. 구당(丘堂) 선생의 글씨
구당 여원구(丘堂 呂元九) 선생은 1932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한 서예가이며 전각자로서
전국전각학회 명예회장이며 국새(國璽)를 전각했다고 합니다. 특히 사찰ㆍ고궁 등의 현판
을 많이 썼고, 반야심경, 천수경 금강경 등을 쓰고 돌에 새긴 불심 깊은 세예ㆍ전각가입니
다.
칠성탱화. 불기 2539년(1995) 7월 7일 봉안. 금어(金魚) 봉래(蓬萊)화상.
산신탱화
화기가 가려져 있어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칠성탱화와 같은날 봉안되었을 것 같습니다.
산신 옆의 호랑이가 녹호(綠虎)로 특이합니다.
산신각에서 바라 본 모습
-전각 둘러보기 2-
심검당(尋劒堂)
검(劒)은 반야검(般若劒)을 말합니다. 검 중에 취모리검(吹毛利劒)이 있는데 이 검은 날에
다 털을 올려 놓고 불면 털이 잘릴 정도로 날카로운 검입니다. 반야검은 이 취모리 검처
럼 날카로워 온갖 번뇌망상을 베는 검입니다. 그러므로 심검당은 반야를 찾는 집이니 스
님들의 수행처를 말합니다.
심우당(尋牛堂) -길상님 사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심우당(尋牛堂)은 진리를 찾는 집이란 뜻으로 스님
들의 수행처를 말합니다. 지금은 주지 스님 주석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주련이 있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佛身普徧十方中(불신보변시방중) 부처님 몸 두루하여 시방세계 충만한데
三世如來一體同(삼세여래일체동) 삼세의 여래 또한 모두가 한몸일세.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항부진) 넓고 크신 자비원력 항상하여 다함 없고
汪洋覺海渺難窮(왕양각해묘난궁) 넓고 넓은 깨침바다 헤아리기 어렵다네.
주련을 찍고서 건물을 찍으려 했는데 깜빡하여 못 찍어서 길상님께 사진을 부탁드려 올리
게 되었습니다. 길상님 감사합니다. ^^
심우당(尋牛堂) 구당(丘堂) 선생 글씨
독성각(獨聖閣)
독성각은 대웅전 뒤편 우측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독성각 앞에는 커다란 바위가 양 옆에
있어 문과 같은 구실을 합니다. 그래서 이를 금강문(金剛門)이라 합니다.
독성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금강문(金剛門)이라 음각되어 있습니다.
독성각편액. 역시 구당(丘堂) 선생의 글씨입니다.
독성탱화(獨聖幀畵)
독성나반존자(獨聖那畔尊者)
나반존자는 독성(獨聖)이라 일컫는데 한국불교 고유의 신앙대상으로, 부처님 재세시 빈두
로파라타존자(賓頭盧頗羅墮尊者)와 동일한 대상으로 여겨지는 독특한 성인입니다. 나반존
자에 대한 기록은 어떤 경론(經論)이나 사기(史記)에 나타나지 않지만 의식문인 제반문(諸
般文)에 독성재의문(獨聖齋儀文)에 나옵니다.
"우러러 고하노니 독성존자께서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미륵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기 전인 그 중간세에 출세하나 진계(塵界)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숨기고 드러냄이 자재
하니, 혹은 층층대상(層層臺上)에서 좌선하거나 혹은 낙락장송의 소나무 사이로 소요하며
왕래하거나, 혹은 물이 잔잔히 흐르고 은은한 산 속에 한 칸의 난야(蘭若)를 지어 놓고는
앉거나 눕거나 하며 노닐고, 꽃은 환하게 피어나고 새는 지지배배 노래하며 성색(聲色)이
분연(紛然)한 가운데 자유롭게 경행(經行)하며, 노을 같은 흰색 납의(衲衣)로 어깨를 반쯤
드러내고 앉아 도를 즐기기도 하니, 눈빛 같이 희고 긴 눈썹은 눈을 덮었다....
오늘 헌공하는 제자가 지극한 마음으로 청하옵나니 영산회상의 부처님으로부터 '너는 열
반에 들지 말고 말세중생(末世衆生)의 복전(福田)이 되라는 당부를 받고 항상 천태산(天台
山)에 있으면서 홀로 오매(寤寐)에 걸쳐 정혜(定慧)를 쌍수(雙修)하고 열반에 들지 않으므
로써 중생의 복전이 되고 있으니, 용화회상(龍華會上)의 미륵부처님을 기다리고 계시는 나
반존자와 아울러 항상 존자를 따르는 모든 권속(眷屬)들께서는 이 도량에 강림하시어 저희
들의 공양을 받아 주옵소서." 하였습니다.
또한 운심게(運心偈)에 이르기를 "삼명(三明)을 이미 증득하고 자신과 중생의 이익을 모두
원만하게 이루었으며 신통력이 자재하신위대한 성인 나반존자님께 귀의합니다.(南無三明
已證 二利圓成 神通自在 大聖那畔尊者)"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의식문에 나오는 나반존자의
모습으로 볼 때 부처님 재세시 빈두로파라타존자(賓頭盧頗羅墮尊者)와 동일한 인물로 추
정되고 있습니다.
빈두로존자는 영원히 세상에 머물며 외적인 특성으로 흰머리와 긴 눈썹을 가진 것이 특징
인 점입니다. 어려서 출가하여 아라한과를 얻었으나 세속인들에게 신통력을 드러냈다가
부처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은 바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염부제에 머무는 것
을 허락하지 않고 서구야니주에 가서 교화하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돌아오는 것은 허락
되었지만 열반에 드는 것은 허락되지 않아서 영원히 남천(南天)의 마리산(摩梨山)에 머물
며 중생을 교화한다고 합니다.
독성각의 금강문 바위는 형상이 돼지를 닮았습니다.
해우소(解憂所)
앞으로 이 일대는 정비하여 요사채를 신축할 예정이라 합니다.
범종각
범종각이 있는 이 바위는 나르는 거북이 형상이라 합니다.
주지 스님께서 이곳 지세(地勢)에 대하여 설명하고 계십니다.
정파님과 덕명님께서 진지하게 경청하고 계십니다.
대웅전 앞에는 범종각이 있습니다.
상원사 범종각
범종각은 용마바위 옆에 건축되어 있습니다. 상원사하면 꿩의 거룩한 보은의 이야기가 떠
오릅니다. 이 절을 중창한 신라 말의 무착스님과 꿩과 구렁이에 대한 전설이 지금도 회자
되고 있습니다.
범종각(梵鐘閣)
범종각편액 . 구당(丘堂)선생 글씨.
범종(梵鐘)
상원사 보은의 종에 얽힌 전설을 양각한 목판.
상원사 보은의 종에 얽힌 전설은 <불교이야기>방 32번과 33번을 열어 보세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니 잘 읽어 보세요. 여기에 적을 수 없어서 불교이야기방에
올렸습니다.
삼층석탑 2기.
강원도에서 이탑일금당(二塔一金堂)의 가람배치법을 보여 주는 유일한 예.
삼층석탑
『대웅전 앞에 있는 2기의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후기 석탑의 정형을 따라 2중으로
된 기단(基壇)위에 세 층의 옥개(屋蓋)를 올렸는데 옥개석의 낙수면은 가파르고 처마 부분
의 반전은 거의 없으며, 옥개석 받침이 단(段)을 분명하게 조각하지 않는 등 빼어난 모습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상륜부(上輪部)에는 노반(露盤)ㆍ복발(覆鉢)ㆍ보주(寶珠)가 남아 있는데, 원형의 큰 보주에
연꽃 무늬를 새겨 넣어 특이한 느낌을 주고 있다.
강원도에서는 법당 앞에 2기의 석탑을 세운 이탑일금당(二塔一金堂)의 가람배치법을 취한
사찰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전통사찰총서 상원사편에서-
다음은 상원사 성보인 광배에 대하여 알아보고 상원사에는 또 하나의 전설이 있는데 그것
은 용마바위(龍馬岩)에 대한 전설입니다. 또 그 밖의 이모저모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상원사의 성보와 이모저모 둘러보기-
전각을 둘러보고 있는데 주지 스님께서 나오셔서 경내의 이모
저모를 설명해 주시고 앞으로의 상원사에 대한 비젼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용마바위에서 용마바위에 대한 전설을 들려 주시는 고광 주지스님
-용마바위 전설-
치악산 상원사에서 동남간으로 제천땅 백련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의 주지스님은 여자
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는 스님이면서도 아내를 두고 세속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 스님은 치악산 남대봉 기슭에 있는 상원사의 주지도 겸했답니다. 이 스님은 백련사와
상원사를 용마(龍馬)로 왕래했는데, 용마가 번개처럼 날쌔어 두 절을 오갈 수 있었다고 합
니다. 불제자로써 마땅히 불도에만 정신을 쏟아야 할 터인데도 여자를 너무 좋아하여 백
련사에는 본처를 두고 상원사에는 소실을 얻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지스님이 상원사
에 가는 날이 잦아져 백련사에 있는 본처가 뒷조사를 해봤더니, 상원사에 젊은 소실을 두
고 있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스님과 몰래 살고 있는 처지이기는 하나 본부인은 시
기심과 질투심이 저주와 증오로 바뀌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를 막아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화가 난 본처는 내놓고 싸울 수도 없어 속으로만 앓고 있다가 스님이 타고 다니는 용마를
굶겨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저 놈의 말만 없으면 스님은 첩이 있는 상원사를 자주 가
지 못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되도록 말에게 죽을 적게 먹이기로 했습니다.
하루 저녁은 스님의 눈치가 소실집을 가려는 눈치가 보이자 바로 이때다 하고 저녁 말죽을
반의 반으로 줄여 먹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밤이 되자 슬슬 부인의 눈치를 살피던 스님
이 여느 때와 같이 슬그머니 빠져나가 마굿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말잔등에 올라 앉아
서 상원사 용마바위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날따라 말죽을 적게 먹여서 시장기를 참고
있었던 용마는 여느 때와 같은 방법으로 힘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 뛰었다 하면 천
리도 마다 않는 용마였지만 도무지 기운이 나지 않았습니다. 겨우 상원사까지 이르러 그
래도 뛴다고 뛴 것이 힘이 미치지 못하여 앞발만 상원사 바위에 걸쳤다가 떨어지고 주지
스님은 말이 바위에서 떨어지는 순간에 바위 끝에 손을 짚고 뛰어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이것이 본처의 소행임을 알고 소실과 상원사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 때 스님의 손자국과 용마의 발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고 말이 떨어지며 흘렸다는 핏자국
이 또한 남아 있어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용마바위"라고 불렀다 합니다.
여기가 용마의 발자국이라 합니다.
종각을 짓기 전에는 이 바위에 붉은빛이 많았는데 그것이 용마가 흘린 피라고 합니다.
여기가 스님이 짚었던 손자국이라 합니다.
새로이 조성할 산신각 터에서 바라본 상원사 경내
스님과 함께 우리는 산신각 위 공터에 올라갔는데 상원사 경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앞으
로 산신각은 지금의 산신각보다 더 높게 우리가 오른 터에 신축될 것이라 합니다. 이 터가
산신각으로서는 적지라 하십니다. 요 앞에 보이는 지붕이 산신각입니다. 앞으로 몇 년이
흐르면 상원사는 잘 정리된 모습으로 많은 기도객을 맞이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희귀목 계수나무
계수나무
이 나무는 대웅전 앞 한쪽 뜰에 서 있는데 수령이 엄청 오래 되었다고 합니다. 이 절을 중
창한 신라 말 경순왕의 왕사(王師)였던 무착대사(無着大師)가 중국에서 묘목을 얻어와 심
은 것이라 합니다. 이 나무는 일반 계수나무와는 완전히 다른 희귀목이라 합니다. 높이
17m가 넘는 이 거목은 낙엽송보다 조금 넓은 잎의 일부가 가을부터 겨울 사이에 노란색으
로 변했다가 이듬해 봄에는 다시 푸른색으로 바뀌는 특이함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수나무의 껍질에서 나는 향내는 전혀 없다고 합니다. 이 계수나무는 가을에 흰꽃이 핀
다고 합니다. 가을에 와서 그 꽃을 보고 싶습니다.
상원사의 성보(聖寶) 광배(光背).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5호.
광배의 주인공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은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광배에 어
울리지는 않으나 이를 찾는 분들로 하여금 예를 갖추라고 석불을 모신 것 같습니다. ^^
광배에 대하여 설명하시는 주지 스님
스님께서 이를 설명하실 때 운무가 몰려왔습니다. 여기의 날씨가 얼마나 변화무쌍한 지
금방 물러갔다가 금방 몰려옵니다.
스님께서 특별히 광배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광배는 옛날 이곳에 매우 훌륭한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성
보(聖寶) 문화재입니다.
불상의 가슴 뒷부분에 해당하는 곳에는 원(圓)이 조각되어 있고, 그 주위에는 쌍잎의 8엽
(八葉) 연화문(蓮華紋)이, 다시 그 주위를 당초문(唐草紋? 靈氣紋)이 새겨져 있으며, 가장
바깥쪽으로는 화염문(火炎紋)이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광배 앞에는
연화대석(蓮華臺石)의 일부가 놓여 있습니다.
광배 뒷모습
이건 사진이 흐린 것이 아니고 운무가 잔뜩 끼어서 그런 겁니다. ^^
향불교에서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운무에 싸인 산신각
기와불사
이상 상원사 구석구석을 모두 둘러보았습니다. 이곳의 날씨가 변화무쌍해서 운무가 바람
에 물러갔다가 다시 오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래도 담을 것은 담는다고 노력했습니다만 어
찌 다 담겠습니까? 우리는 다시 원주실에 들어가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경내를 둘러보신 정파님, 덕명님, 보화님, 비니초님은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더 머무르고
싶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러자 길상님은 자주 찾아 달라고 밝은 미소로 화답하셨습니다.
주지 고공스님께서도 찾아와 주셔서 고맙다고 하시면서 자주 와서 기도하면 좋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또한 정진하고 기도하라고 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향불교 송년회 때 나누어 주라고 상원사 정경이 담긴 달력을 보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주문한 달력이 안 나왔지만 나오면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더 머무르고 싶은 생각에 미적미적 하산을 미뤘는데 시간은 자꾸만 뒤를 밀으니 할 수 없
이 일어 났는데 시계를 보니 4시 40분이 넘었습니다.
길상님을 뒤에 두고 돌아셨는데 정말 돌아서기 아쉬웠습니다. 주지 스님께서도 다음에 다
시 오라고 하시며 밖에 나와 배웅을 해 주셨습니다. 두 분을 뒤로하고 4시 50분 상원사
를 물러나왔습니다. 오직 건강하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상원사가 청정수월도량으로
영원하길 합장하고 물러났습니다.
너무 늦은 탓일까 산중의 해는 금방 지는 법이어서 우리는 어두운 산길을 눈에 불을 켜고
내려왔습니다. 그래도 산길은 훤하게 보여 무사히 하산했습니다. 시계를 보니 5시 43분
이었습니다. 올라갈 때는 1시간 43분이 걸렸는데 하산은 57분만에 주차장까지 내려왔습
니다. ^^
우리는 6시 백우거에 올라 상경을 서둘렀습니다. 비니초님이 백우거를 다시 몰아 무사히
귀경하였습니다. 이건 여담이지만, 귀경 도중 여주 휴게소에서 간단한 유부우동으로 저녁
을 먹고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었는데 주유하시는 분이 바퀴에 공기가 많이 빠졌다며 공기
압을 체크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보니 뒷바퀴의 바람이 상당히 많이 빠져 있었습니다.
모르고 그대로 달렸다면 큰 낭패를 볼 뻔하였습니다. 다행히 주요소에 공기압 체크 장치
가 있어 공기를 주입하고 무사히 귀경할 수 있었습니다. 아,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었지만
상원사 부처님의 가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동행해 주신 정파님, 보화님, 덕명님, 비니초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반갑게 맞아주
신 고공스님과 길상님께 감사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올립니다. 지금까지 순례기를 읽어 주
심에 감사드립니다. 기회가 되면 다시 상원사에 오를 것을 다짐해 봅니다.
함께 가실 분 손드세요!!!
감사합니다. 백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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