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가운데 있는 완재정(宛在亭)
상담(上潭) 위로 곧바로 가니 바위를 깎아 다리를 설치했다. 길이는 10여 장(丈)이며, 양쪽 언덕을 건너질렀다. 서쪽 벼랑은 돌의 형세가 높고 평평하면서 넓다. 정원의 섬돌 모양을 하고 있는데, 또 그 위에 스스로 한 층을 이루었다. 똑바른 것이 마치 건물 자리 같다. 그곳의 형세를 따라 정자를 세우고 완재정(宛在亭)이라 이름 붙였다. 정자의 남쪽으로부터 갈라진 계곡물 한 줄기가 굽이치며 돌면서 북쪽으로 흐르는데, 못을 이루고 있다가 흐른다. 도랑으로 끌어들여 물레방아가 받아들이고, 아래의 연못에서 합쳐진다. 양쪽 물의 사이에서 정자를 품고 있으니, 이것이 정자가 이름을 얻은 까닭이다. (어유봉,「동유기」)
바위로 된 섬에서 남쪽의 형세가 제일 높다. 너럭바위 위에 넓고 평평한 바위가 한 층 더 쌓인 모양을 하고 있다. 바로 이 자리가 완재정(宛在亭)이 있던 자리이다. 바로 옆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계곡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김창흡은 화악산의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다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하늘이 섬돌 모양 바위 만드니
바위는 하얀 정자를 떠받들고 있네.
봄날 흐르는 물 난간에 부딪치자,
흥취 일어나 맑은 물소리와 함께 하누나.
天造堂壇勢。巖擎白板亭。
春流來觸檻。興會入瀯泠。
정자터에서 아래로 조금 떨어진 곳에 바위를 깎아 홈을 만든 자리가 자연스럽게 나있다. ‘바위를 깎아 다리를 설치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그리고 홈에서 계곡 쪽으로 한두 발자국 떨어진 곳에 커다란 홈이 두 개 보인다. 처음에 무슨 용도로 바위에 구멍을 뚫었는지 쉽게 헤아릴 수 없었다. 절구 확이라고 보기엔 구멍의 넓이가 좁아보였다. 더구나 옆의 네모난 구멍은 도무지 나의 상상력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첫 번째 답사 때는 막연히 절구 확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귀가하여 곡구정사에 관련된 자료를 다시 읽었다. 오원(吳瑗;1700~1740)의 「곡운행기(谷雲行記)」를 살펴보다가 완재정에 관한 부분에서 소리를 질렀다.
일찍 완재정(宛在亭)으로 나왔다. 흐르는 계곡물에 손을 닦았다. 정자는 박후실 앞 수십보 앞에 있다. 두 계곡 사이로 가니 반석(盤石)을 깎아 기둥을 세웠다. 완재정의 뜻은 ‘완연히 물 한가운데 있네’에서 취하였다. 바위는 밝고 깨끗하며, 여울이 흐르다 부딪친 후 꺾어진다. 옆에 산 같은 벽이 자못 기이하며 의태(意態)는 매우 그윽하며 묘하다.
‘두 계곡 사이로 가니 반석(盤石)을 깎아 기둥을 세웠다’라는 기록은 두 개의 구멍에 다리를 떠받드는 기둥을 설치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다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원형의 구멍은 이해가 되지만 네모꼴의 홈은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도대체 왜 다른 모양의 홈을 만들었을까? 며칠 동안 자료를 뒤적였으나 이것과 관련된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김창흡의 문집을 펼쳐보아도 입을 꼭 다물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 혹시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둥근 것은 하늘을, 네모난 것은 땅을 의미한다. 아니면 하도낙서(河圖洛書)와 팔괘(八卦)를 상징하는 것일까? 네모난 것은 하도의 배열 형태를, 둥근 것은 팔괘의 형태를 상징한다. 두 가지 가능성을 두고 계속 고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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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를 깎아 홈을 만든 부분 |
다리 기둥을 세웠던 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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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놓였던 곳 전경 |
계곡에서 바라본 완재정터 |
일동일정(一動一靜)의 이치를 깨우쳐준 물레방아
정자의 남쪽에서 거의 몇 발짝 떨어진 곳에 흙을 올려 언덕을 만들었다. 솟아오른 것이 섬 같다. 구불구불 옆으로 가다가 하담(下潭)가에 닿는다. 푸른 소나무와 꽃과 나무가 그 위에 울창하다. 다리 입구에 서서 바라보니 물레방아가 은은히 숲의 나무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한다. 무척 기이하다. (어유봉, 「동유기」)
곡구정사 앞 계곡 가운데의 커다란 바위는 마치 섬처럼 있다. 정자 터의 좌우로 물이 흘렀으나 지금은 정자 터의 좌측으로만 커다란 물줄기가 흐른다. 예전에 도랑을 파서 정자의 우측으로도 흐르게 해서 물레방아를 돌렸다. 지금은 정자 터 남쪽의 오른쪽은 많은 돌들로 메워져 있어 예전의 도랑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시멘트로 만든 농수로를 따라 흐르던 물이 넘쳐 흐르면서 물레방아가 있던 곳으로 흐른다.
바위섬 곳곳에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바위틈 사이에서 소나무뿐만 아니라 단풍나무와 참나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물푸레나무와 자작나무도 보인다. 아광나무는 정자 터 옆 억새 사이에 있다.
나무와 함께 계곡을 지키고 있는 것은 섬의 북쪽 끝에 있는 물레방아터이다. 민박집 아저씨가 절구확처럼 생긴 곳이 있다며 직접 낙엽을 치우니 바위 위에 직경 50㎝ 정도 되는 절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삽으로 메워졌던 흙을 파내니 깊이도 50㎝ 정도 된다. 홍석주(洪奭周)의 『연천선생문집(淵泉先生文集)』에 물레방아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신축년(辛丑年;1721) 봄에 정혜공(靖惠公)이 곡운으로 삼연선생을 방문하였다. 함께 구곡(九曲)을 유람하였다. 완재정 북쪽에 이르니 물레방아가 있는데, 바위와 계곡 사이에서 은은히 오르내렸다. 삼연선생이 정혜공을 보며 말하길, “물레방아에 일동일정(一動一靜)의 이치가 있네. 이것을 보면 또한 도(道)를 깨달을 수 있는데, 그대는 이것을 아시오?” 정혜공이 말하길, “그렇습니다. 차고 비는 이치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정혜공이 기억하고 있다가 그 일을 적기를, “삼연선생을 모시고 박후실에서 잤다. 닭이 세 번 울자 선생께서 이불을 끌어안고 주역을 외우셨다. 읽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손과 발을 움직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라고 했다.
정혜공(靖惠公) 홍상한(洪象漢;1701∼1769)이 1721년에 곡구정사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 때 삼연은 그냥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물레방아에도 일동일정(一動一靜)의 이치가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삼연은 곡구정사에 거주할 때 주역을 탐독하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완재정 옆에 있는 원형의 구멍과 네모난 구멍도 주역과 연관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원형은 팔괘를 뜻하고, 네모난 구멍은 하도낙서를 상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이러한 생각은 화음동정사의 인문석을 답사할 때 더욱 굳어졌다. 여하튼 물레방아터의 절구는 곡구정사의 몇 안 되는 유적지 중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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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아터 |
물레방아 옆 개울 |
석천(石泉)을 찾아서
다리에서 동쪽으로 가서 언덕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깎아 세운 듯한 벽이 있다. 석천(石泉)이 그 아래에서 나온다. 맑고 차가워서 떠서 마실 만하다. (어유봉, 「동유기」)
첫번째 답사 때는 계곡물이 많아 완재정 건너편으로 갈 수 없었다. 일주일 뒤에 다시 찾으니 계곡물이 많이 줄어서 돌을 징검다리 삼아 쉽게 건널 수 있었다. 완재정에서 계곡을 건너면 바로 산이다. 그러나 남쪽으로 올라가면 계곡과 산 사이에 공터가 형성되어 있다. 민박집에서 설치한 그늘막과 방갈로가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다. 공터와 산이 만나는 곳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칼로 자른 듯한 조그만 절벽이 나타난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 때문에 바위 전체가 홍건히 젖어 있다. 아마도 어유봉은 이 바위 밑에 있던 샘물을 마셨던 듯하다. 샘터는 찾을 수 없고 무성한 풀과 낙엽만이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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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재정 건너편 절벽 |
석천이 있던 곳 |
흰사슴이 인도한 백록암(白鹿庵)
어유봉의 「동유기」에 언급하지 않은 것이 남유용의 「유동음화악기(遊洞陰華嶽記)」에 실려 있다. 전설과 같은 남유용의 기록은 아련한 옛날로 이끌고 간다.
완재정(宛在亭) 위에 앉아 물 동쪽을 바라보니, 흰색 사슴 비슷한 짐승이 숲 속에 엎드려 있었다. 가서 보려고 목란교(木欄橋)를 지나 계곡을 건너 차츰 가까이 갔다. 사슴은 갑자가 뛰어 소나무 숲 사이에 서서 사람을 돌아보며 오래도록 가지 않았다. 네 사람이 지팡이를 풀숲에 버리고 등나무를 잡고 벼랑을 올라갔다. 겨우 사슴이 있는 곳에 이르렀으나 있던 곳을 잃어버렸다. 부리는 붉고 몸은 파란 조그만 새 수백 마리가 숲을 에워싸고 슬피 우니 놀란 사람이 서로 알리는 것 같았다. 차츰 앞으로 걸어갔다. 조그만 길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다가, 길이 끊어지자 석굴이 있는데 모양이 방이 있는 가마 같았다. 작아서 세 사람을 받아들일 정도이다. 앞에 버티고 있는 두 나무 기둥이 있어 올라가 조그만 난간에 기댈 수 있다. 높이는 겨우 곧바로 앉을 수 있으며 설 수 없다. 그러나 경계는 매우 고요하며 넓다. 반수암(伴睡庵) 아래서부터 동구(洞口)까지 모든 승경을 해가 지도록 다할 수 없는 것을, 앉아서 한번 돌아보며 손에 잡을 수 있다. 아마 삼연선생이 만년에 여유롭게 노닌 것은 일부러 기이한 곳으로 나와 앉거나 누워 승경을 거느리려는 계획 때문인 것 같다. 암자를 새로 지었으나 이름을 짓지 않았다. 나는 백록암(白鹿庵)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까의 흰 사슴이 아니면 손님을 이끌어 이곳으로 오게 해서 이 기이함을 얻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석천(石泉) 위로 조그마한 골짜기가 있다.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파이프관을 설치한 것이 눈에 뜨인다. 빼곡한 나무들과 넝쿨, 그리고 켜켜이 쌓인 낙엽 때문에 쉽게 나갈 수 없다. 인적이 없는 산에서 몇 번이나 미끄러지곤 했다. 조금 올라가자마자 경사가 급해졌다. 가파른 산세 때문에 나무를 잡고 조금씩 올라가야만 했다. 얼마 되지 않아 땀이 흐르자 습기 찬 안경은 자꾸 벗겨지려한다.
몇 분 지났을까. 왼쪽 위로 바위가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벌통이 앉아 있다. 비를 가릴 정도의 공간이 있지만 세 사람이 앉아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 위쪽으로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바위가 보인다. 또 몇 번 미끄러지며 가까이 가자 벌통이 앉아 있다. 제법 넓은 공간이어서 몇 사람이 쪼그리고 앉을 수 있을 것 같다. 남유용의 표현대로라면 바위 밑에 생긴 공간을 이용해 암자를 만들었던 것 같은데, 암자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주변의 산을 돌아보니 이곳 이외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을 찾기 어렵다. 비록 울창한 나무들 때문에 계곡이 선명하게 보이진 않으나, 계곡 건너편 도로와 산이 나무 사이로 바로 앞에 보인다. 석굴 위쪽으로 올라가니 산자락이다. 삼일리가 눈앞에 펼쳐져있고, 저 멀리 사창리까지 조망할 수 있다.
<백록암 터>
먼 곳에서 공부하러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담(下潭)의 서쪽 두둑은 땅이 평평하고 넓다. 손질하여 단풍나무•삼나무•복숭아나무•버드나무를 나란히 심었다. 그 위 조금 높은 곳으로 가서 서실(書室) 세 칸을 세워, 와서 배우는 손님과 친구를 맞이해서 머무르게 했다. 이것은 모두 선생이 즐거움으로 여기는 것이다. (어유봉, 「동유기」)
어유봉의 발길은 석천에서 다시 하담(下潭) 옆의 서실(書室)로 향한다. 하담 옆은 높은 석축이 견고하게 서 있다. 민박집에서 만든 그늘막과 놀이를 할 수 있는 공터가 석축 위와 아래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이 공터에 서실을 지었는지, 아니면 공터 위쪽 도로에 서실이 있었는지 확실치 않다. 그 당시에 정성스럽게 심은 단풍나무•삼나무•복숭아나무•버드나무도 볼 수 없다. 이제는 잣나무와 느티나무들이 놀러온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그 당시 삼연은 찾아 온 문인들과 학문을 토론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던 것 같다. 방문한 문인들은 서실에서 숙식하며 공부했으니, 서실은 지금의 게스트하우스 역할을 한 셈이다. 삼연의 서실(書室)에 머무르던 문인들은 자신들의 발길을 기록으로 남겨 삼연의 곡구정사를 재구성하는데 도움을 주며 삼연을 기억하게 한다.
삼연의 학문세계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할 처지가 아니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도 나는 일부분만을 알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곡구정사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성급하게 말할 수 없다. 아마 몇 년이 지난 후에 말할 수 있을지 확언하기조차 어렵다. 대신 왕조실록에 실린 김창흡에 대한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삼연의 모습을 그려본다. 물론 이것도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기엔 미흡할 것이다. 그의 졸기(卒記)는 두 개인데 앞의 것은 이러하다.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 진선(進善) 김창흡(金昌翕)이 졸(卒)하였다. 김창흡의 자는 자익(子益)이고, 호는 삼연(三淵)인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고, 젊은 날 호탕한 기상을 드날렸으며 약관에 진사가 되었다. 일찍이 『장자(莊子)』를 읽다가 마음속에 환하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때부터 세상일을 버리고는 산수(山水) 사이에서 방랑하였다. 고악부(古樂府)의 시 짓는 방법을 이끌어 쇠퇴한 것을 중흥시켰다. 또 선가(仙家)·불가(佛家)에 탐닉하여 오랫동안 스스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는데, 집안의 화를 당하자 비로소 그 형 김창협(金昌協)과 함께 학문에 종사하니, 그 견해가 때로 크게 뛰어났다. 만년에는 설악산에 들어가 거처를 정하고 『주역(周易)』을 읽었는데, 스스로 ‘정자(程子)·주자(朱子)가 이르른 곳이라면 또한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어그러지고 격렬한 데 가까워 무릇 세상일에 대하여 혹은 팔을 걷어붙이고 긴 글을 지어 정권을 잡은 사람들을 배척하였다. 말이 걸핏하면 다른 사람들의 선조를 범하여 자못 처사로서 의논을 함부로 한다는 이름을 얻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를 많이 애석하게 여겼다. 조정에서 숨어 있는 훌륭한 선비로 추천하여 여러 차례 사헌부 관리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7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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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실 터로 추정되는 하담 옆 공터 |
에필로그
우연히 삼연의 곡구정사를 만났다. 물론 이전에도 삼연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특히 그의 도사적 풍모는 호기심을 자극했다. 청평산과 관련된 기록에서 삼연이 매월당과 함께 일컬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주 접했다. 그의 명성은 청평산과 관련된 자료에 빠짐없이 등장했다. 삼연이 지은 「석천곡기(石泉谷記)」를 읽으며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철원지역에서 느치계곡으로 더 알려진 석천계곡과 삼부연폭포 주변을 답사하면서 그의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곡운구곡과 광덕계곡으로 불리는 칠선동계곡의 여행기 곳곳에 삼연은 불쑥불쑥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곡구정사에서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장님 코끼리 만지듯 나는 삼연의 일부분만 보았을 뿐이다. 앞으로 더 자주 만나게 될 것이고, 몇 년 후 삼연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길 기원한다.
마지막으로 첨언하면 곡운구곡을, 그리고 화음동정사지를 찾는 분들은 곡구정사를 지나치지 말고 곡구정사터의 완재정에 앉아 일동일정(一動一靜)의 이치를 생각해보길 권한다. 그렇다면 삶을 좀 더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어유봉, 『기원집(杞園集)』
오원, 『월곡집(月谷集)』
남유용, 『뇌연집(䨓淵集)』.
김창흡, 『삼연집(三淵集)』
홍석주, 『연천선생문집(淵泉先生文集)』
『조선왕조실록』
권혁진 : 강원대 강사(한문학), 강원한문고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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