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연 김창흡의 곡구정사를 찾아서①

2015. 7. 22. 13:18여행 이야기

 

 

 

 

 

      

삼연 김창흡의 곡구정사를 찾아서①

 

문화통신 조회 수 1283 추천 수 0

 

길종갑 화백을 만나다

    화천군 사내면 삼일리 있는 화음동정사지(華陰洞精舍址)를 몇 번 방문했었다. 지난 여름에도 곡운구곡을 둘러본 후, 친구에게 자랑할 겸 이곳을 찾았다. 무더위 속에 바지를 걷고 개울을 건너 인문석으로 갔다. 동행한 친구는 이런 곳이 있었냐며 존경하는 눈초리다. 피서객들은 월굴암 밑에서 고기를 잡느라 정신이 없는데, 천근석월굴암에 새겨진 글자를 확인하며 사진을 찍었다.

    집으로 돌아와 화음동정사를 방문한 어유봉(魚有鳳;1672~1744)「동유기(東遊記)」를 읽다가 ‘쿵’하는 소리를 들었다. 화음동정사 밑에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거주한 곳을 방문한 기록이 제법 길었다. 이전에도 읽었었다. 그때는 왜 그냥 지나쳤을까? 단순히 큰아버지인 김수증을 뵈러 삼연이 곡운(谷雲)에 들렀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무심했던 것 같다.

   화음동정사 들렀던 다른 기록들도 살펴보았다. 오원(吳瑗;1700~1740)1720년 이곳을 들른 후 「곡운행기(谷雲行記)」를 지었는데, 여기에도 삼연의 거처에 대해 언급되어 있었다. 남유용(南有容; 1698년~1773년)1722년 3월 이곳을 방문한 뒤  「유동음화악기(遊洞陰華嶽記)」를 남겼는데, 여기도 삼연의 집 대한 기록이 있었다! 김창흡의 연보를 찾아봤다. “숙종 41년(1715) 여름, 곡운(谷雲) 화음동(華陰洞)에 우거하다.  가을, 곡운동구(谷雲洞口)에 곡구정사(谷口精舍)가 완성되다.” 이때 김창흡의 나이는 63세였고, 그가 거처할 집은 ‘곡구정사’ 이름을 얻게 되었다.  

    바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겨우 진정해가며 지도를 펼치고 곡구정사의 위치를 가늠해봤다. 「동유기(東遊記)」에 묘사된 곳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지만 지도는 더 상세한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화천문화원 전화를 걸어 곡운구곡화음동정사지에 대해 잘 아는 분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곡운연구회 회원인 길종갑씨가 적임자 같다고 연락처를 알려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길종갑씨는 농사짓는 화가로 유명했으며, 화천군의 문화유적에 애정을 갖고 보호하는데 열심이셨다. 전화를 하니 전시회 때문에 춘천으로 나오는 중이란다. 몇 시간 후 전시장을 찾았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사창리 주변 문화유적에 대하여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창흡곡구정사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다 답사를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틀 후 흥분 속에 답사를 할 수 있었다.   

 

 

삼일리로 들어가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비 속에 답사를 강행하고 싶었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기나긴 하루였다. 밥을 대충 먹고 사창리로 향했다. 곡운구곡을 지나 삼일리로 들어서니 멀리 화악산 웅장한 산세를 보이며 앉아있다. 그 밑으로 보이는 삼일리 마을 비닐하우스 때문에 하얗다. 사창리 일대는 토마토 농사가 유명한데, 삼일리의 토마토는 마을의 주요한 소득원이라고 한다. 길가의 농산물 판매장마다 토마토가 수북이 쌓여 있다.

   삼일1리 마을회관 앞에 멈췄다. 「동유기(東遊記)」에 ‘길 가에 두 개의 조그만 돌이 있는데, 화음동문(華陰洞門)이란 네 글자를 새겨 놓았다.’란 기록이 있어 길화백께 본적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예전에 신작로를 낼 때 파손될까봐 마을회관 앞에 세워놓았다고 말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글자가 새겨진 돌은 국기 게양대 옆에 서 있었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니 돌엔 ‘화음(華陰)’ 두 자만 새겨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두 개의 조그만 돌이 있다고 하였는데, 다른 하나의 돌은 어디로 갔는지 홀로 서 있다.

  돌은 검은 회색이다. 30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단아한 예서체의 ‘화음(華陰)’은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이 거처하던 곳이 가까이에 있을 알려준다. 홀로 서 있는 돌은 망부석의 심정이리라. 길가에 외롭게 서 있는 돌은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의 쓸쓸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나마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는 ‘화음(華陰)’이 새겨진 돌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삼일1리전경.jpg

삼일1리마을회관.jpg

화음이라 새겨진돌.jpg

삼일1리 전경

삼일1리 마을회관

화음(華陰)이라 새겨진 돌


 

 

삼연이 노년에 거처하던 곡구정사

 

   " 드디어 계곡을 건너 몇 리 쯤 갔다. 홍랑(洪郞)이 길옆으로 와서 맞이했다. 박후실(博厚室)로 들어가 선생님께 인사했다. 박후실은 선생님이 새로 땅을 정해 지은 것이다. 집은 세 칸이며, 꺾어지게 해서 유구당(悠久堂)을 만들었다. 유구당 앞에 고명루(高明樓)를 세웠고, 널판지와 기와로 담장을 둘러쌓았다. 문은 견고했으며, 집의 뼈대는 그윽하고 조용해서 좋아할만했다. "

(어유봉, 「동유기」)  
 
  마을회관에서 화음동정사지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보면 길옆에 송가네 민박집이 있다. 집 바로 앞에 계곡이 있는데, 그곳에 앞으로 살펴 볼 몇개의 유적이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이 부근이 곡구정사가 있던 곳임에 틀림없다. 김창흡이 주로 머물던 곳은 박후실(博厚室)이었다. 남유용(南有容)「유동음화악기(遊洞陰華嶽記)」에서 " 박후실(博厚室)은 삼연선생님이 한가히 생활하던 곳인데, 안석과 지팡이 거문고와 책들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창흡「박후실(博厚室)에서 섣달 그믐날에」란 시를 남긴다.

 

깊은 산속 촛불 켜고 있으나 기쁘지 않고,
은하수 기울자 새벽 추위가 시작되네.
바스락 소나무에 부는 바람 폭죽놀이 아니니,
쓸쓸한 판자집은 작은 설 지내지 못하네.
겨울 내내 눈밭에 눕는 것 참을 수 있으나,
오늘 밤 해 넘기기 참으로 어렵구나.
휘장 넘어 장이야 멍이야 하인들 놀고 있는데,
젊은 시절 즐거이 놀던 서울을 생각하네.


窮山秉燭不成歡。星漢斜飛欲曉寒。
淅瀝松風非爆竹。蕭條板屋缺椒盤。
終冬卧雪猶能耐。此夕忘年也是難。

隔幌呼盧僮隊戱。少年行樂憶長安

 

 

 

   그믐날 밤에는 다가오는 새해를 밝게 맞이한다는 뜻에서 곳곳에 불을 밝혀둔다. 이렇게 불을 밝히고 밤을 지키는 것이 수세(守歲)이다. 이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고 하여 잠을 자지 않는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민가에서는 다락·마루·방·부엌에 모두 등잔을 켜놓는다. 흰 사기접시 하나에다 실을 여러 겹 꼬아 심지를 만들고 기름을 부어 외양간·변소까지 환하게 켜놓으니 마치 대낮 같다. 그리고 밤이 새도록 자지 않는데 이것을 수세라고 한다.”고 알려준다.

  숙종 41년(1715) 가을 곡구정사(谷口精舍)가 완성되었는데, 이때 김창흡의 나이는 63세였다. 노년의 김창흡은 곡구정사의 박후실에서 한 해를 보내며 시를 지었다. 은하수가 기울 때까지 밤을 세운 그의 심사는 새해를 맞이하는 희망보다 회한에 차 있다. 밤새도록 들리는 것은 소나무를 거칠게 흔들며 통과하는 매서운 바람소리와, 시끌벅적하게 장기를 뛰는 하인들의 들뜬 소리뿐이다. 쟁반에 산초를 담아 약주와 함께 웃어른께 올려야하지만 올릴 사람도 없고,  젊었던 시절만 생각하는 노년의 추운 겨울이다. 박후실은 김창흡이 노년을 보내던 곳이었고, 노년의 회한을 이렇게 시로 남긴 것이다.   

  김창협의 거처는 단촐하였다. 부속건물 중의 하나가 유구당(悠久堂)이다. 이름처럼 오랫동안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유구당은 흔적도 없고, 관련된 기록도 거의 없다. 그의 시 속에서 겨우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꼭꼭 닫았다 때를 기다려 문을 여니,
산들산들 봄바람 얼굴을 스치네.
뜰에 가득한 두터운 눈 모두 녹아내리자,
묵은 뿌리에서 돋는 파릇한 싹 앉아서 바라보네.


深深閉戶待時開。拍拍條風拂面來。
融盡庭陰盈丈雪。坐看新綠著陳荄

 

 

  입춘날 기둥에 써 붙여놓는 것을 춘첩(春帖)이라 한다. 새봄에 유구당에 붙이기 위해 삼연이 지은 시이다. 겨울날 암울했던 김창흡의 마음은 봄날의 따뜻한 봄볕에 눈 녹듯 녹은 것 같다. 뜰에 새로 돋는 싹을 보며 한가롭게 앉아있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고명루(高明樓)에 붙인 시에서도 봄날의 흥취에 한껏 고양된 삼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크도다! 성대한 사물의 변화여.
가슴 속 살아있는 물건과 거니노라.
봄이 와 장서각(藏書閣)을 허술히 닫아두니,
내버려둔 책갈피에 푸른 이끼 생기네.


物化洋洋大矣哉。胸中活物與徘徊。
春來虗掩藏書閣。一任牙籤浸碧苔。

 

 

    매번 봄이 오면 느꼈던 것이지만 노년의 김창흡에겐 새삼스러운 자연의 변화였던 것 같다. 주변의 사물들이 기지개를 켜듯 그의 마음속에도 한 해를 기대하는 싹이 트고 있었다. 책읽기도 잠시 그만두고 봄날을 만끽하기 위해 화음동을 거닐고 있는 삼연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곡구정사터인 송가네 민박집.jpg

곡구정사터인 송가네 민박집

 

 

 

 

두 개의 못, 상담(上潭)과 하담(下潭)

 

   " 문을 나서 동쪽으로 수 십 보 옮겨 물과 바위가 뛰어난 곳으로 다가섰다. 물은 화음동(華陰洞)의 입구쪽에서 흘러온다. 여기저기 뒤섞인 돌 사이로 흘러오는데 자못 멀다. 이곳으로 흘러와 큰 돌을 만나는데, 맑고 힘차며 기이하고도 크다. 그리고 눈과 서리같이 희고 깨끗하다. 바위는 길게 뻗어 있으면서 층층이 쌓였는데, 위와 아래로 배치되어 있으며 좌우로 섞여 펼쳐져 있다. 거의 수 십 보이다. 큰 돌을 만난 후 내달리던 물이 부딪치며 쏟아지고, 모였다가 흩어진 후 엉키며 휘돌아서 상담(上潭)이 된다. 또 물을 뿜어내며 날다가 떨어지는 것이 주렴을 걸어놓은 듯하고 흐르는 물을 걸어놓은 것 같다. 물이 모여서 하담(下潭)이 된다. 평평하고 넓으며 잔잔하고 깊은 것이 상담(上潭)과 비교했을 때 몇 배이다. 연못 가운데 죽어(竹魚)가 많아 종종 통발을 설치하여 잡는다. "  (어유봉, 「동유기」) 

 

   차를 타고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은 곡구정사터와 그 앞 계곡의 풍광을 알 수가 없다. 그저 계곡 주변에 있는 흔한 민박집과 유원지 중의 하나라 생각하고 무심히 지나칠 것이다. 주변 경치를 유심히 보며 지나가는 사람일지라도 무성한 나무 때문에 뛰어난 경관이 있다는 것을 알 도리가 없다. 이 길을 지나는 무수한 사람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또는 화음동정사지터란 목적지가 바로 위에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려가는 우리 삶의 방식은 중간에 잠깐 여유를 갖고 쉬는 것을 죄악시한다. 앞으로만 달리는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스쳐 지나간다.

    민박집에서 길을 건너 계곡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눈은 두 배로 커지고 입은 절로 벌어진다. 마을 옆을 흐르는 시내의 모습이 아니라, 곧바로 깊은 산속으로 들어온 듯하다. 규모가 엄청 크다는 것에 먼저 놀라고, 계곡 속의 바위섬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그리고 장쾌한 계곡물소리에 정신을 빼앗긴다.

    정신을 차려보니 바위섬을 지나 물가에 있다. 어제 비가 하루 종일 내려서인지 계곡물은 위압감을 줄 정도로 하얗게 부서지며 세차게 흐른다. 하담(下潭)은 물의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폭포 바로 밑은 짙푸른 색에 흰 물줄기가 걸쳐있다. 김창흡은 여기서 종종 통발을 설치해 죽어(竹魚)를 잡았다고 한다.         

   죽어(竹魚)라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붕어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국립수산과학원에 문의를 했다. 죽어(竹魚)가 우리나라에 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없고, 중국에는 죽어(竹魚)가 있다고 한다. 중국의 경우 ‘누치’와 비슷한 물고기를 지칭한다고 친절히 설명해 준다. 그러면서 강원도 화천 등의 일부 지역에서 열목어댓닢어’, ‘잎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결국 어유봉은  기존에 사용하던 한문으로 된 여항어(餘項魚) 대신, 지역 방언으로 쓰였을 댓닢어‘죽어(竹魚)’라는 표현으로 기록한 것 같다고 추가로 설명해 주었다. 김수증은 바로 위 화음동정사에서 열목어를 잡았다고 했으니, 죽어는 열목어와 동일한 물고기일 것이다.

   내친 김에 백과사전을 찾아봤다. “국내의 분포지는 낙동강과 한강인데, 낙동강에 서식하는 것은 천연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는 멸종된 것으로 보인다. 정선군 고한읍 서식지천연기념물 제73호 지정되어 있다. 몸은 가늘고 긴 편이며 옆으로 납작하고, 비늘은 작아서 옆줄비늘수가 123~180개이다. 몸의 바탕은 황갈색이며 어린 개체에는 몸의 옆면에 9~10개의 흑갈색 가로무늬가 나타난다. 머리·옆면·등지느러미·기름지느러미에는 눈동자보다 작은 자갈색 점이 흩어져 있는데 특히 등쪽에 많다. 한여름에도 수온이 20℃ 이하인 산간계류를 선호하며 수서곤충, 개구리 등을 잡아먹는다. 유속이 완만한 여울과 소(沼)의 중간부분에서 자갈을 파고 산란을 한 다음 묻어서 보호한다. 전장 20~30㎝인 개체들은 흔히 볼 수 있으며 전장 40㎝ 이상 되는 개체는 드물다.”

  하담(下潭)에서 몇 미터 올라가면 또 하나의 조그만 못과 앙증맞은 폭포가 나타난다. 상담(上潭)이다. 상담의 바닥은 너럭바위다. 속이 다 보일정도로 투명한 못은 주변의 바위를 물결 속에서 일그러트린 후 가만가만 흐르다가 어느 순간 속도를 내면서 하담으로 내달린다. 상담 주변은 물이 조금 줄어든다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깡총 뛰어 건널 수 있을 정도이다. 하담이 남성적인 계곡의 아름다움을 과시한다면, 상담은 부드러운 여성미를 조근조근 보여준다. 한 공간에서 음양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품고 있는 곳이 상담과 하담이다. 

하담과상담.jpg

상담.jpg

하담.jpg

하담과 상담

상담(上潭)

하담(下潭)


 

 

권혁진 : 강원대 강사(한문학), 강원한문고전연구소 소장

 

 

 

 

 문화통신은 문화커뮤니티 금토에서 발간하는 온라인 문화정보지입니다.
주소 : 200-120 강원도 춘천시 중앙로67번길 56(약사동) | 전화 033-251-9363 | E-mail : geumto@hanmail.net
Copyright © 2000 munhwatongsin.co.kr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