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운정사(谷雲精舍)를 찾아서①

2015. 7. 22. 13:26여행 이야기

 

 

 

 

 

      

곡운정사(谷雲精舍)를 찾아서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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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운구곡을 답사할 때 반드시 둘러보아야 할 곳은 곡운정사지(谷雲精舍址)이다. 김수증화천에서 처음 거주하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왜일까? 나도 몇 번이나 지나치곤했다. 온통 곡운구곡에 정신이 팔려서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설치되지 않은 것도 큰 이유가 될 것이다. 곡운구곡은 커다란 돌에 각각의 명칭을 써서 길가에 세워 놓았지만 곡운정사지에 대한 것은 없다. 


    설령 관심을 갖고 정사터로 가보려 해도 진입로를 찾을 수 없다. 번번히 개인 소유의 밭을 통과하곤 했다. 나중에 주민에게 물어보니 곡운구곡7곡 명월계 표지석에서 개울을 따라 올라가다가 폐철수집하는 곳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들어와야 한다고 가르쳐준다. 
    화음동정사지 송풍정삼일정 등이 복원되고, 터는 완전히 복원되지 않았지만 관리가 되는 것에 비해 곡운정사지는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복잡한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조속히 체계적으로 복원되어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답사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는 곡운정사지는 문헌자료와 유적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곡운정사가 주목받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거주지라는 상징적 의미 때문에 빈약한 자료를 중심으로 곡운정사를 재구성해 본다. 먼저 주변의 지형을 살펴본 후, 곡운정사에 딸린 건물들을 찾아 발걸음을 시작한다.

 

 

귀운동(歸雲洞)이라 불리게 된 석실(石室) 

 

   하나의 바위벼랑을 돌아드니 고여있는 물이 맑고 깊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간에서 용연(龍淵)이라 부르는데, 가물면 마을 사람들이 제사지내며 빈다. 그래서 와룡담(臥龍潭)이라 이름한다. 靑嵐山(청람산)의 중맥(中脈)이 여기에 이르러 다한다. 울창한 산기슭이 구불구불 내려와 동북쪽을 베고 서남쪽을 향하며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니, 동서로 수백 보이고 남북으로 백여 보이다. 물의 형세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활을 당긴 형세이다. 그 안은 평탄하고 넓으며 온화하고 그윽하여 농사지으며 살만하다. 화악산의 푸른빛이 책상을 마주하는 듯하다. 그 앞에는 용담(龍潭)이 있어 귀운동(歸雲洞)이라 하였다. 뒤늦게 마을사람들은 옛날에 석실(石室)이라 부른다는 것을 들었다. 이곳은 도산석실(陶山石室)과 부합함이 있어 매우 기이하였다. 그래서 신석실(新石室)로 불렀다.  (김수증(金壽增), 「곡운기(谷雲記)」, 『곡운집(谷雲集)』)
 
   
    곡운정사가 있던 곳의 본래 명칭은 석실(石室)이었다. 그런데 김수증이 터를 잡고 살면서 귀운동(歸雲洞)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중에야 마을 사람들이 이곳을 석실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고 신석실(新石室)이라 불렀다. 석실은 김수증이 화천으로 오기 전에 살던 곳의 지명이다. 지금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일대이다. 경기도의 석실(石室)은 김수증의 할아버지인 김상헌(金尙憲;1570∼1652)에 의해 본격적으로 건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사당을 중건하였으며 인근에 송백당도 마련하였다. 김상헌은 이곳 석실을 매우 사랑하여 중국 심양에 억류되어 있을 때에도 석실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시로 남겨놓는다. 김수증은 할아버지한테 석실을 물려받았다. 아버지 상을 치른 후 묘 아래에 도산정사(陶山精舍)를 세웠다. 현재 김번의 묘와 김상헌, 김상용, 김수증, 김창협 등의 묘가 있으며,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 등 많은 유적이 있다. 우연의 일치란 표현을 이럴 때 쓸 수 있을 것이다. 석실에서 살던 김수증이 은거지를 택해 들어온 곳이 석실이라니! 지금은 곡운영당이 있던 곳이라 해서 ‘영당동’이라고도 부르지만, 행정구역상 ‘용담리’이다.
  김수증은 자신이 터를 잡은 귀운동(歸雲洞)에 대하여 시를 한 수 남긴다.

 

호젓한 집 깊고 고요하며 옆에는 돌아드는 물굽이,
숲 그림자 산 빛에 가려 어슴푸레한 곳에 있네.
한 구비 맑은 물결은 와룡(臥龍)이 있는 곳이라,
구름을 뿜어내며 늘 보호해주고 푸른 소나무는 잠궈주네.
幽居冥密傍廻灣。林影山光掩映間
一曲澄泓龍臥處。噴雲長護碧松關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의 심정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날카로운 세상의 인심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욕망을 김수증은 자신의 집터를 통해 보여준다. 집 앞의 물굽이는 일차적인 보호막 역할을 하며, 숲도 한 몫 한다. 물속의 용은 구름을 뿜어내며 귀운동을 막고 있고, 물가 소나무들은 관문을 잠그듯이 서 있다. 이만하면 맘 놓고 편히 쉴 수 있지 않을까? 이곳이 귀운동이고 지금의 용담리이다. 여기서 김수증곡운정사를 짓고 이 땅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귀운동일대.gif

<귀운동 일대>

 

  

 

청람산, 그리고 백월봉과 신녀봉

 

   평강(平康)의 분수령(分水嶺)으로부터 백 여리를 달려오다 굽어지면서 김화(金化)의 대성산(大聖山)이 된다. 또 20 여리를 달려 수리산(守里山)이 된다. 그리고 한 갈래가 구불구불 남쪽으로 5리 쯤 가다가 큰 시내에 닿아 우뚝하게 멈춘다. 속명(俗名)이 우아하지 않아서 지금 청람산(靑嵐山)으로 고친다. (「곡운기」)

 

   강원도 어디인들 산이 없으랴만 여기도 주변이 온통 산이다. 그 중 먼저 주목할 산이 청람산이다. 김수증이 청람산이라 고치기 전에 이름이 있었으나 바꾸었다. 곡운구곡도 중 농수정도 가운데 우뚝 솟은 산이 바로 청람산이다. 지금은 등산로를 개발하여 지역주민들과 탐방객들을 맞고 있다. 등산로를 따라 청람산 정상에 오르면 곡운구곡 중 3곡부터 9곡까지 조망할 수 있다


   용담리 주변에 있는 산 중에 백월봉(白月峰)이 있다. 문헌에만 등장하는 산이라 주변사람들도 모르는 눈치다. 김수증이 곡운 주변의 경관을 읊은 시 중에 등장한다.

 

 

청은대(淸隱臺) 주변에 높이 솟은 산
오르니 경운산(慶雲山) 볼 수 있네.
옛 일 추모하자 생각은 끝 없는데
서리같이 흰 달은 허공 속에 차갑네. 


淸隱臺邊聳翠巒。登臨可望慶雲山
幽人弔古無窮意。白月如霜碧落寒

 

 

    청은대3곡인 신녀협 북쪽 언덕에 있다. 김시습이 노닐었던 곳이다. 그 옆에 우뚝 솟은 산이 있으니, 바로 백월봉이다. 김수증은 그곳에 올라 자주 경운산을 바라보곤 했던 것 같다. 경운산청평사를 품고 있는 산으로 오봉산 또는 청평산을 말한다. 김시습청평사에서 한동안 머물렀었다. 김수증이 백월봉에 오른 까닭은 청평산을 바라보며 김시습을 떠올리고 자신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김시습의 절의 정신은 서리같이 흰 달로 은유되어 김수증의 가슴속에 들어왔고, 산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물안골에서 바라본 백월봉.gif

<물안골에서 바라본 백월봉>

 

 

  2곡 청옥협을 지나 사창리쪽으로 가다가 왼쪽을 보면 다리가 하나 놓여있다. 건너편 마을 이름이 물안골이다. 예전에 물레방아가 있어 물레방아골이라 불렀었다. 김수증 ‘물레방아골’이란 남긴다. 

 


신녀봉(神女峯) 앞 물레방아 마을,
시내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신선의 마을 같네.
첩첩 산과 깊은 골짜기라 찾을 수 없고,
보이는 건 맑은 물과 돌에 부딪치는 물소리뿐. 


神女峯前水碓村。隔溪遙認有仙源。
重巒邃壑無尋處。惟見淸流觸石喧


    3곡 신녀협 뒤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 신녀봉이다. 청람산과 조그마한 계곡을 끼고 마주하고 있다. 신녀봉도 주변 사람들에겐 이름 없는 뒷산이다. 신녀봉 앞으로 신녀협이 펼쳐지고, 신녀협 조금 아래 시내를 건너는 유일한 수단인 ‘물안교’를 건너면 ‘큰물안골’이다. ‘작은물안골’ 신녀협 앞쪽에 있다. 큰물안골은 대부분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 펜션을 운영하고 있다. 예전에 물레방아가 있었던 곳을 물어보니 이사 온 지 10년 남짓 되었다고 하신다. 큰물안골에서 바라본 백월봉은 김시습의 절개처럼 우뚝 서 있고, 왼쪽으로 신녀봉이 다소곳하게 보인다. 

 

 

신녀협 위의 신녀봉.gif

왼쪽부터 청람산, 신녀봉, 백월봉.gif

<신녀협 뒤의 신녀봉>

<왼쪽부터 청람산, 신녀봉, 백월봉 >


                    

 

매월당의 시구절을 취한 채미곡

 

    또 동서(東西)에 매월공(梅月公)의 옛 자취가 몇 리가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있다. 근처에 있는 하나의 언덕과 계곡도 당시에 매월공의 지팡이와 짚신이 이르는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사라져버리고 수백 년이 흘러서 나를 슬프게 만든다. 그래서 공(公)의 시어(詩語)를 취해서, 그 뒤의 작은 골짜기를 채미곡(採薇谷)이라 이름 붙이고 머물러 살 곳으로 삼았다.(「곡운기)」)

 

    채미곡곡운정사로 들어가는 통로인 고철 수집하는 곳을 끼고 돈 후, 곧바로 산으로 향하면 된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좁은 농로길은 이내 경사가 급해지더니 바로 포장이 끝난다. 비포장 길을 따라 올라가면 묵정밭이 오른쪽으로 펼쳐지고, 밭 옆에 조그만 도랑이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그야말로 조그만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이곳이 채미곡이다.
  고사리를 캔다는 ‘채미’는 백이(伯夷) 숙제(叔齊) 때문에 유명해졌다. 문왕의 뒤를 이은 무왕이 은(殷)나라를 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를 보고 백이 숙제는 무왕(武王)의 말고삐를 잡고 막았으나, 무왕은 대군을 끌고 나가 은나라를 무찔렀다. 그러자 백이, 숙제는 주(周)나라에 살면서 곡식을 먹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하고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어먹고 연명하면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 노래가 유명한 「채미가(采薇歌)」이다.

 

 

저 수양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노라.
폭력을 폭력으로 갚고도,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우임금 때의 좋은 시절, 홀연히 사라졌도다.
나 어디로 가야하나, 목숨도 이제 다해버렸구나.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虞夏, 忽焉沒兮  
我安適歸矣, 命之衰矣     

 

 

    백이 숙제는 신하의 도리 그가 섬기는 임금에게 반기를 드는 것에 반대 입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왕은나를 치는 것을 극력 반대한 것이다.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우자 수양산으로 들어가서 절의를 지킨다. 주나라의 곡식을 먹는 것조차 스스로 용납할 수 없어 산에서 고사리를 뜯어먹으며 연명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고사리를 캔다는 것은 자신의 절의를 지키는 최소한의 행위이다.
  김시습에게 세조주나라무왕과 같은 인물로 인식된다. 자연스럽게 백이 숙제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그들의 상징적인 행위인 고사리 캐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백이 숙제가 채미가를 불렀듯이, 김시습「채미곡(采薇曲)」을 읊조렸다.   

 

산천에서 태평하게 늙어감이 왜 해롭겠는가.
요임금 시절에도 허유(許由) 같은 백성 있었네.
수양산의 고사리 맛 달기가 꿀 같으니,
천종(千鍾)으로 이 몸 속박함이 어찌 부럽겠는가.


山澤何妨老大平。放勳時有許由氓。
北山薇蕨甜如蜜。何羨千鍾縛此生

 

 

채미곡.gif

<채미곡>


  

  현실에서 무서운 흡인력을 가진 물질적인 힘은 모든 가치를 초라하게 만들며 빨아들인다. 물질의 노예 되었으나 알지 못하고 그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아웅다웅 싸우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현실이다. 그러나 김시습은 물질적으로는 빈한하지만 그것을 즐긴다. 그 함은 자신의 의(義)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시습을 평소 존경한 김수증용담리 뒷산의 조그마한 골짜기에 ‘채미곡’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권혁진 : 강원대 강사(한문학), 강원한문고전연구소 소장

 

 

≪참고문헌≫
『곡운집』『기원집』『뇌연집』『의암집』『월곡집』 『문곡집』『주자대전』『삼연집』『운석유고(雲石遺稿)』『강원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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