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연 김창흡의 설악산 은둔과 한시표현| 설악 이야기

2015. 8. 1. 22:58산 이야기

 

 

 

 

       삼연 김창흡의 설악산 은둔과 한시표현| 설악 이야기

두릉산인 | 조회 35 |추천 0 | 2014.11.05. 12:36

 

삼연 김창흡의 설악산 은둔과 한시표현

 

첨부파일 삼연 김창흡의 설악산 은둔과 한시표현.hwp

 

이경수

국문요약

   삼연 김창흡은 강원도 인제군의 설악산 지역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춘흥잡영(春興雜詠)>, <갈역잡영(葛驛雜詠)>, <갈역잡영무술(葛驛雜詠戊戌)> 등 방대한 분량의 시를 창작하였다. 삼연은 은둔지 설악산 지역의 자연을 인간의 속세를 벗어난 자연 생성의 근원이 되는 초월적인 세계로 인식하고 이를 시로써 표현하였다. 설악산 지역의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한 시들과 함께 주민들의 특이한 생활상을 소재로 한 시들도 창작하였다. 그리고 은둔생활 속에서 가지고 있던 자신의 내면세계를 시로 표현하였다. 설악산 지역 주민들의 현실생활에 대한 애민의식이나 비판의식을 시로 표현하였다. 삼연의 설악산 지역 은둔문학은 강원도 인제군의 자연과 생활을 시로써 형상화한 지방문학으로서의 의의가 있다. 그리고 17세기말 18세기초 한국의 대표적인 은둔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키워드 : 삼연, 김창흡, 설악산, 강원도, 인제군, 은둔, 은둔문학, 지방문학, 갈역잡영, 춘흥잡영

1. 서론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에 관한 그간의 연구는 생애와 문학 활동 전반에 대한 검토에서부터 시론(詩論)과 시문의 특징,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화풍(畵風)과의 연관성 문제, 성리학적 사상의 특징 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삼연의 생애를 특징짓는 중요한 행적은 부친이 당쟁으로 희생되자 중년 이후의 생애를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설악산 지역을 중심으로 은둔생활로 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의 대부분은 이러한 은둔생활 속에서 창작되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설악산 지역의 은둔은 그의 은둔생활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葛驛雜詠>을 비롯한 대표적인 시들은 설악산 은둔생활 속에서 이루어 진 것이기 때문에 설악산 은둔생활과 그러한 생활을 한시로 표현한 것은 삼연의 생애와 시세계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아직 은둔자적 관점이나 설악산이란 지역적 관점에서 그의 생애나 문학이 검토된 바가 없다. 이 글에서는 삼연의 시 작품을 설악산 지역에서의 은둔생활 체험의 표현이란 측면에 초점을 두고 분석하고자 한다.

 

   우선 삼연의 설악산 지역 은둔의 행적을 정리한 다음 은둔생활 속에서 설악산 지역의 자연과 생활을 어떻게 시로 표현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설악산 지역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삼연이 어떠한 내면세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또 이를 어떻게 시로 표현했는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에 의해 설악산 지역이란 지역적 특색을 기반으로 한 삼연 문학의 특징적 면모가 구명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그가 은둔했던 강원도 인제군의 설악산 지역도 그의 시 작품 분석에 의해 그 문화적 의미가 재해석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설악산 은둔의 행적

   김창흡의 생애는 兪拓基<年譜>, 金亮行 <行狀>金邁淳<家史> 三淵集에 수록된 시문들에 산견되는 기록들을 통해 개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청년시절부터 관직에 나가는 대신 산수 유람을 즐기면서 자연 속에서 은둔자적 생활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것이 특징적이다. 그의 은둔생활은 조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퇴거해 있으면서 가문의 거점이었던 양평을 생활 근거지로 하면서 강원, 경기지역의 철원, 포천, 인제, 춘천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중년 이후의 강원도 인제군의 설악산 지역 삼연의 은둔생활에 있어 가장 특징적인 장소이며 생애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삼연의 설악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은둔의 행적을 개괄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675(23) 가을에 훗날의 은둔지가 되는 곡백연이 있는 인제의 한계산(寒溪山)을 유람하였으며 9월에는 갑인예송의 패배로 영암에 유배되어 있던 부친 김수항(金壽恒)에게로 갔다. 1678(26)에는 철원으로 이배된 부친을 찾아갔으며 1679(27) 7에는 철원의 용화촌(龍華村) 삼부연(三釜淵)에 은거하여 삼연(三淵)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이 기간에 백부인 김수증(金壽增)춘천의 화악산 곡운 은거하였고 중씨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포천백운산에 은거하여 일문이 인접한 지역에 각각 은둔생활을 하며 서로 왕래하였다.

   1680(28) 4월 경신환국으로 부친영의정에 제수되고 백부 김수증회양부사가 되자 삼연은 상경하여 백악산을 중심으로 시사를 결성하여 시작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속리산, 청평산, 금강산 등을 유람하거나 철원 삼부연 은거하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1689(37) 2 기사환국으로 부친진도유배되자 따라갔으며 4 부친 사사(賜死)되자 8월에 포천백운산 아래에 은둔하였다. 이 무렵 김수증춘천화음동에 들어가 만년에 이르기까지 은둔생활을 하게 되고 김창협양평에 주로 은거하였는데 일문이 포천, 춘천, 양평 세 곳에서 서로 가까이 은거하면서 내왕을 하였다.

 

   1691(39)에는 김수증과 함께 춘천곡운으로부터 인제한계산까지 유람을 다녀왔고 1692(40) 여름에는 양구(楊口)에 우거하였다가 8 인제갈역촌(葛驛村) 곡백연(曲百淵)에 들어가 은거하였으며 11에는 철원삼부연으로 돌아왔다. 갈역촌은 현재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의 내설악에 위치한 백담사 계곡 지역 해당된다.

   1693(41) 이후에는 양평벽계(蘖溪)에 우거하면서 인제곡백연을 자주 왕래하는 생활을 하였다. 1694(42)에 부친의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산수자연을 유람하거나 은둔지에서 은둔생활을 계속하게 되는데 1695(43)에는 강릉, 신흥사, 상원사 등을 유람하였고 1697(45) 가을에는 인제의 합강정(合江亭)을 유람하였다.

  1698(46) 봄에 곡백연의 입구에 백연정사(百淵精舍)라는 4-5간 규모의 판옥(板屋)으로 된 정사를 짓고 장기간 은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는데 이 정사는 谷口板屋”, “石門板屋등으로 지칭되고 있다. 이 무렵 은둔지 곡백연의 자연 환경을 김수증에게 보낸 편지에 구체적으로 기술하기도 했다.

   1705(53) 8월에 세자익위사 익위로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며 9월에는 갈역촌으로 와서 수렴동, 오세암, 봉정암, 비선대 등을 거쳐 양양, 강릉, 간성 등을 유람하고 10월에 미시령을 넘어서 곡백연으로 돌아왔는데 이때의 기행은 <雪嶽日記>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 무렵에 정사를 보수하고 정사 동쪽에 샘을 파서 우물을 만들었으며 곡백연에서 평생을 은둔할 뜻을 굳히고 벽운사 동쪽에 벽운정사(碧雲精舍)를 짓기 시작하였다.

   1707(55) 10월에는 춘천청평산을 거쳐 설악산으로 들어갔으며 벽운정사가 완성되었다. 1708(56) 9월에는 설악산으로부터 춘천의 곡운으로 들어갔으며 10월에는 벽운정사가 불에 타버려 심원사(深源寺)로 옮겨 거처하였다.

1709(57) 9월에 조원봉 아래에 영시암(永矢菴)이 완성되었는데 홍태유(洪泰猷) <遊雪嶽記>에 의하면 심원사보다 몇 리 더 들어간 곳으로서 곡백연 입구로부터는 30리 이상 더 들어간 수렴동 골짜기의 매우 험한 곳이었다고 한다. 제자 조명리(趙明履)에 의하면 영시암은 너무나 궁벽한 곳에 고립되어 있었으므로 삼연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할 정도로 극한적으로 험벽한 곳에 은둔지를 마련한 것이었다. 봉정암 아래의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한 영시암매월당 김시습 은거하던 터가 있는 골짜기라는 점에서 삼연은 각별하게 그곳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은둔생활의 근거지로 삼게 된다.

    영시암에 거처하면서 설악산을 비롯한 양양, 강릉, 속초, 간성 등 주변의 동해안 지역과 금강산을 유람하거나 양평벽계(蘖溪)를 내왕하는 생활을 하다가 1714(62) 2 함께 거처하던 여신화상(汝信和尙) 최춘금(崔春金)이 호랑이에게 물려 간 사건이 발생하자 설악산 은둔생활을 포기하고 나오게 된다. 영시암에서 나와 5월에 양평의 벽계로 돌아와 있다가 11김화(金化) 수태사(水泰寺), 평강(平康) 부석사(浮石寺) 등으로 거처를 옮겨 지낸 다음 1715(63) 여름에 춘천백부 김수증이 은둔생활을 하던 곡운으로 들어와 정사를 짓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삼연은 마지막 은둔지로서 택한 춘천의 곡운을 온 집안이 끝까지 떠나지 말고 지킬 것을 자손들에게 권유하였다고 한다. 곡운에 머무르면서 포천과 양평을 오가는 생활을 하다가 1718(66)는 속초와 강릉을 가는 길에 다시 한번 갈역촌을 들러 미시령에 올라가 화암사를 방문하기도 했다.

 

 

 

3. 설악산 지역 자연의 형상화

   삼연은 인제의 곡백연을 왕래하는 노정이나 은둔지에서 접하는 경물들을 많은 시로써 표현함으로써 설악산 지역의 자연을 형상화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삼연은 강원도의 인제라는 지역을 서울로부터의 거리나 지형적인 험준함으로 인하여 세속을 벗어난 세계로 인식하면서 이를 시 속에 표현하고 있다. <인제도중>이라는 시에서는 자신의 은둔지로서의 인제를 다음과 같이 신선의 세계에 가까운 곳으로 표현하고 있다.

올해도 또다시 인제에 이르니

초여름 새로 개인 날에 풀빛이 가지런하네

강 좌우로 푸른 나무에 꾀꼬리 울고

바위를 오르락 내리락하며 말은 푸른 산을 지나가네

이 몸이 온통 그림 속에 있는 줄도 모르고

눈에 보이는 경치마다 문득 시를 짓네

한계산 안팎의 옛 은둔지와 새 은둔지에

오두막 엮어 놓고 늘 신선 세계에 가까이 가려 하네

 

今年又復到麟蹄 初夏新晴草色齊 綠樹鶯啼江左右 靑嵐馬度石高低

不知身世渾圖畵 偶觸風光輒品題 表裏寒溪新舊隱 結巢常欲近丹梯

(三淵集9, <麟蹄途中>)

   여러 차례 찾아오는 인제이지만 언제나 그림 속에 들어 온 듯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공간이어서 경치를 예찬하는 시를 짓게 된다고 하면서 그러한 곳에 마련한 은둔지는 세속을 벗어나 신선의 세계에 가까워지는 곳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한계령에서 내려오는 물과 내린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의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합강정의 풍경에 대하여는

두 물이 서로 만나는 곳에

절로 우뚝 솟은 정자

단청은 구름 속에 아득하고

풍악소리는 여울에 맑고 시원하네

봄 골짜기에는 멀리 꽃이 흘러나오고

가을 물가에는 조각 달이 멈추었네

초연하게 옥황상제 세계에 올라온 듯한 마음

시 읊기를 마치니 넓기만 한 물가

 

(邂逅相逢水 岹嶢自起亭 丹靑雲縹緲 琴筑瀨淸泠

春洞遙花出 秋沙片月停 超然上皇意 嘯罷但虗汀

                                               『三淵集6, <合江亭>)

라 하여 속세를 벗어나 천상(天上)에 오른 듯한 느낌을 주는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설악산을 두고 읊은 <秋感>의 제11수는 곡백연의 은둔지가 있는 설악산 지역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인데 다음과 같다.

한계산의 한줄기 길이 곡연으로 통하니

설악산 웅장하게 만 개의 옥 봉우리를 열었네

봉정암은 구름 아래에 높고 높고

큰 바다는 달 뜨는 동쪽에서 넘실넘실

넝쿨 잡고 홀로 천 길 폭포 찾아가고

고사리 꺾으며 멀리 오세암의 동자를 쳐다보네

바로 그때에 머리 깎고 출가(出家)할 것을

어찌하여 다시 속세의 먼지 속에 떨어졌는가

 

(寒溪一道曲淵通 雪嶽雄開萬玉叢 鳳寺岹嶢雲在下

 鯨波滉瀁月生東 捫蘿獨造千尋瀑 折蕨遙瞻五歲童

信合伊時仍落髮 胡然復墮苦塵中

三淵集5, <秋感> 其十一 屬雪嶽山)

 

   제1연과 제2연에서 한계산으로부터 더 들어간 설악산봉정암오세암의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곡백연의 은둔지의 자연을 묘사한 후에 제3연에서는 그러한 곳에서 경험하는 속세를 벗어난 경지를 서술하고 있다. 4연에서는 그러한 탈속의 세계에 머물지 못하고 속세로 다시 돌아온 것을 후회하는 심경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시는 양평에 우거(寓居)하면서 곡백연의 은둔생활에 대한 동경을 읊은 것이다. 설악산 은둔지의 자연을 매우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속세를 벗어난 은둔의 세계로서의 곡백연이 지닌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자신이 은둔하던 곡백연의 자연 환경을 여러 편의 시들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送養謙往留麟衙 仍使視谷口板屋>에서는

 

천 개의 골짜기 대설로 평평한데 / 다만 외롭게 뾰족 솟은 산 하나 // 구름 어린 절벽에 곰의 굴 얽혀있고 / 얼음 덮인 잔도는 말발굽 떼기도 어렵네(大雪平千峽 孤尖只一山 雲崖熊館錯 氷棧馬蹄艱)”라 하였고

 

<伏次伯父下寄韻>의 제3수에서는 격령과 폐암의 천길 폭포 / 신선도 흰 사슴도 발을 댈 수 없는 곳(隔嶺閉巖千仞瀑 僊人白鹿不容蹄)”이라 하여 그 지형의 험준함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설악산 은둔지의 자연은 인간의 세계를 벗어난, 조물주가 창조한 천지의 근원과도 같은 세계로 묘사되기도 한다. 영시암의 동대에 올라 읊은 <暮登東臺>는 자신이 거처하는 은둔지의 주변 자연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비 갠 저녁 산의 노을

나의 동대를 비추네

길게 읊조리며 기대니

신령스런 정취 하늘에서 나오네

개울 물에는 백룡이 도약하여

만개의 골짜기를 우레처럼 울리네

동남쪽에는 금부용이며

봉정은 또한 높고 높구나

신선이 춤을 추는 듯

예쁜 얼굴을 사람에게 보이네

높이 바람에 떡갈나무 잎 날리고

비는 이리저리 흩어져 뿌리네

두건과 옷소매 함께 날리며

흰 구름은 서서히 다가오네

채미(採薇)하던 봉우리 쳐다보니

청한자(淸寒子)는 어디에 있는가?

어둑어둑 저물어 오는데

즐거운 가운데 슬픈 마음 일어나려 하네

* 원주: 산속에 매월당의 옛 거처가 있다.

 

(新霽暮山紫 照曜我東臺 長嘯一徙倚 神情出九垓 溪流白龍跳

吼作萬壑雷 東南金芙蓉 鳳頂亦崔嵬 如睹姑射僊 脕顔向人開

高風吹槲葉 雨散仍徘徊 巾袂與飛動 白雲冉冉來 望望採薇岡

淸寒安在哉 蒼然暮色至 恐惹樂中哀 山中有梅月堂故居

三淵集9, <暮登東臺>)

    봉정암 아래의 영시암 주변을 속세를 벗어난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神情”, “九垓”, “白龍”, “姑射등의 시어에 의해 인간의 세계가 아닌 자연의 근원이 되는 초자연의 세계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김시습이 은둔했던 사적을 인용함으로써 영시암 주변이 지닌 은둔자의 세계로서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고 거기에 권위까지 부여하고 있다.

<갈역잡영>51수에서도 비가 내리는 곡백연의 상황을 구름의 뿌리가 뇌동하며 고래 같은 파도가 솟아오르는 듯 / 하늘이 울며 바람을 일으켜 봉정을 흔드네(雲根雷動鯨波湧 天吼風生鳳頂搖)”라 하였는데 雲根”, “鯨波”, “天吼”, “鳳頂 등의 시어에 의해 인간 세계의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 조물주가 자연을 운행하는 초인간적 세계로 일로 표현하고 있다.

삼연은 때로는 설악산의 깊숙한 곳을 탐승하면서 그 절경을 시로써 형상화하고 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수렴동, 오세암, 봉정암, 쌍폭, 한계폭포, 토왕성폭포, 미시령, 천후산 등을 탐방하며 읊은 시들이 여러 편 남아 있다. 그 중 영시암의 바로 뒤쪽에 높이 솟아 있는 봉정을 매우 성스러운 존재로 인식하며 이를 시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寄鳳頂>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높은 곳 천제의 자리에 올라 폭포를 끼고

의젓하게 그대는 천상의 존재

그렇게 바람을 일으키며 속세의 먼지 벗어나

참으로 달과 함께 걸으며 별들을 내려다 보네

늙어서도 산에 오르는 스님은 무슨 힘이던가

잠심(潛心)하여 기도하니 설악의 신이 계신 듯

동쪽 정자에 누워 고달픈 나를 탄식하니

아득하여 신선 한중(韓衆)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네

 

(高攀帝座挾天紳 冉冉君爲上界人 然後培風出埃壒 眞成步月俯星辰

衰能濟勝僧何力 禱旣潛心岳有神 頹卧東亭嗟我憊 杳如韓衆莫能親

三淵集拾遺9, <寄鳳頂>)

    제1연에서 봉정이 인간 세상 위에 존재하는 천상 세계의 천제의 자리와도 같은 곳이라고 서술한 후에 제2연에서는 조물주가 운행하는 바람, , 별 등과 함께 나란히 거닐 수 있는 상황을 경험하게 하는 곳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제3연에서는 봉정암이 설악산의 신령을 접하여 초인적 능력을 갖게 하는 신성한 장소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와같이 초월적 세계로서의 봉정을 형상화하고 의미를 부여한 다음 제4연에서는 그러한 세계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탄식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삼연<上伯氏>에서는 봉정에 대하여 어제 봉정에 올라 천고의 시름을 씻어내었다(昨登鳳頂 以盪千愁)”라고 하고 <贈元雲瑞出山序>에서는 높고도 빼어나며 아름다움이 모인 곳, 성스러운 자리로서 한 점 티끌도 없는 곳, 만리 밖까지 밝게 보이는 곳(巍然圓秀 集厥勝美 擬諸聖位 則一疵不存 萬理明盡)”이라고 표현하는 등 봉정을 속세를 떠난 성스러운 장소로 인식하면서 이를 자주 예찬하고 있다. “帝座”, “上界”, “培風”, “步月”, “俯星辰”, “岳有神”, “聖位”, “萬理”, “千愁등의 시어나 표현은 매우 과장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일상적 세계를 벗어난 초월적 세계로 인식된 봉정을 형상하기 위하여 이러한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다. <雙瀑得飛字>에서도 조화옹(造化翁)이 천기(天機)를 운행(運行)하는 데 마음을 썼네(化翁其亦費心機)”라고 하는 등 삼연은 설악산의 자연을 읊은 시들에서 자주 과장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들은 설악산이 세속적 인간 세계를 벗어나 조물주의 만물운행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초월적 세계라는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준다.

  

 

 

4. 설악산 지역 생활의 형상화

   삼연은 설악산 은둔생활 속에서 지역 주민들을 비롯하여 그곳에서 영위하는 자신의 생활을 여러 편의 시로써 형상화하고 있다. <龍山>, <麟蹄途中>, <三亭浦>, <萬宜驛>, <豐年> 등의 시는 인제 지역 산촌의 전형적인 모습을 개괄적으로 요약하여 형상화하고 있는데 <龍山><麟蹄途中> 2수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용산은 인제 협곡의 꼭대기에 있는데

백성들은 깊은 구름 속에서 생활하네

고한(高寒)의 낙()이 절로 있으니

순박한 마음이 따라서 있네

은하수는 판잣집에 드리우고

절구, 방아 소리는 솔숲에 은은하네

시냇가에서 잠자는 길고 긴 밤

마치 태고의 소리를 듣는 듯하네

 

(龍山麟峽頂 民物與雲深 自有高寒樂 仍存淳朴心

星河垂板屋 杵碓隱杉林 永夜溪邊枕 如聆太古音

三淵集9, <龍山>)

 

산으로 돌아오니 비는 새로 그쳐 아름다운데

읊조리며 먼 산을 바라보니 엷은 안개가 어렸네

은은한 비둘기 소리는 더욱 멀게 느껴지고

고요한 가운데 개 짖는 소리는 그윽하기만 하네

푸른 숲 찍어내어 두루 화전을 일구었고

기장 방아 찧은 뒤라 물레방아 멈추었네

내일 곡백연에서는 나를 맞이하느라 수고로울 터이니

일이 없게 할 수 없으니 한가한 중에도 시름하네

 

(還山佳意雨新收 吟望遙岑淡靄留 隱隱鳩鳴猶覺遠

寥寥犬吠不妨幽 斫開綠藪燒畬遍 舂過黃粱水碓休

明日曲淵勞應接 未能無事亦閒愁

三淵集9, <麟蹄途中> 其二)

   높은 산지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는 인제 지역 주민의 생활을 묘사하면서 그러한 생활을 태고 시대와도 같은 순박함을 지닌 것, 별천지와도 같은 고요한 풍경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판잣집, 화전, 기장, 물레방아 등의 시어를 사용하여 인제 지역 산촌의 전형적인 생활을 형상화하고 있다.

곡백연의 생활을 읊은 시들 중에는 설악산 지역의 생활을 보다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은데 <春興雜詠>, <葛驛雜詠> 등의 장편 연작시가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葛驛雜詠 戊戌>의 제138수에서는

호미질하고 달 뜬 연못가에 돌아오는데

버들 그늘 속에서 농사짓는 이야기들

민요를 부르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장차 구공(九功)을 서술하려네

 

(鋤歸池月上 農語柳陰中

未可無謳唱 吾將述九功

三淵集15, <葛驛雜詠 戊戌> 其百三十八)

라 하여 은둔지 주변 주민들의 생활을 시로 표현해 내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를 밝히고 있다.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삼연옹의 <갈역잡영>은 인제의 풍요(風謠)라고 일컬어진다(三淵翁葛驛雜咏 雅謂麟峽風謠)”고 한 것은 <갈역잡영>이 이러한 의도적 목적을 가지고 인제 지역 주민들의 생활상을 표현한 작품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삼연은 설악산 기슭의 산촌에서 전염병과 호환에 시달리며 보리농사에 의존하여 곤궁하게 살아가는 곡백연 지역 주민들의 전형적인 생활 모습을 한 폭의 풍속도처럼 그려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갈역잡영무술(葛驛雜詠戊戌)>을 이어서 지은 <又賦>를 들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갈역에서 머물며 아무런 흥취없어

시름겨운 얼굴로 설악산 마주하네

백성들은 역병을 앓느라 고달프고

소는 밭 갈기를 마치니 한가롭네

보리가 누워있는 둥글둥글한 들판

소나무가 서 있는 얕은 물굽이

오히려 호랑이를 무서워하는 생각에

저녁 되기도 전에 문을 닫았네

 

(葛驛留無興 愁顔對雪山 民因經疫憊 牛自輟耕閒

 麥偃團團野  松扶淺淺灣 猶存畏虎意 未夕掩荊關

三淵集15, <又賦>)

   화전밭에서 보리농사로 곤궁하게 연명하면서 호환(虎患)을 걱정하고 전염병에 시달리는 생활이 삼연이 목도한 곡백연의 주민의 전형적인 생활 모습으로서 시에 형상화되고 있다.

삼연은 설악산 지역 산촌의 특이한 생활 풍속을 구체적으로 자세히 시 속에서 묘사하기도 했는데 특히 산촌의 농업 풍속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화전을 위주로 하는 농업의 특색을 자주 시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갈역잡영> 19에서는

골짜기에 원래 논이 없었는데

보를 막아 물을 대도록 주선해 놓았더니

교활한 종놈이 차츰 화전의 편리함을 알고

기껏 애쓴 논농사를 포기하고 가뭄 든 해를 탓하네

 

(峽裏從初無水田 規陂引漑費周旋

 黠奴漸解燒畬利 抛却前功只罪年

三淵集14, <葛驛雜詠> 其十九)

라 하여 화전 농업에 의존하고 논농사를 짓지 않던 관습 때문에 자신이 논을 만들어 주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던 것을 아쉬워하고 있는데 당시 인제 지역의 화전 농업의 풍속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곡백연에서의 자신의 한적하고 소박한 생활을 형상화한 <춘흥잡영> 20에서도 “울타리 아래에 두어 마디 농사군 소리 들려오고 / 산 아래는 종일토록 화전의 도끼 찍는 소리(籬底農談聞一二 斫畬終日下層岡)”라 하여 화전을 개간하는 농민들의 생활 모습으로써 결구를 삼고 있는데 화전 농업이 곡백연 생활의 배경을 이루는 전형적인 이미지로서 시 속에 제시되고 있다.

   농사에서 재배하는 작물의 종류나 특성, 재배법 등 농사짓는 생활의 세부적인 사항까지 시에서 언급함으로써 농촌의 생활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갈역잡영무술>의 제30수에서 제33수까지는 보리농사를 짓는 생활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 중 30수에서는 귀보리라는 토속적인 작물의 명칭에 해당되는 한자 술어인 鬼麥이란 전문 용어를 시어로 사용하여 농사짓는 풍속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제139수에서는

기장 김매고 호미 씻기도 전에

보리 찧는 소리 시끄럽네

농가는 어느 날에야 조용해질까

이렇게 새벽부터 밤까지 지내네 //

 

(耘粱鋤未洗 舂麥語多喧

農家何日靜 以此送晨昏

三淵集15, <葛驛雜詠 戊戌> 其百三十九)

 

라 하여 기장과 보리와 같이 척박한 산지에 적합한 작물들을 위주로 하는 농사로 힘겹게 살아가는 생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갈역잡영>39

나라에서 가뭄을 걱정하여 기우제 지내니

비가 와도 오히려 벼를 구해 내기 어려운데

돌밭의 기장은 연약해도 걱정하지 않으니

비 한 방울에도 해근(蟹根)이 생긴다네

 

(邦家憂旱費祈禜 得雨猶難救稻粳

不患磽田粱黍弱 才逢一滴蟹根生

三淵集14, <葛驛雜詠> 其三十九)

라 하여 척박한 화전 농토에서 가뭄에도 잘 견디는 기장이란 작물의 특성을 시의 소재로 하고 있는데 실뿌리를 지칭하는 토속어에 해당되는 蟹根이라는 한자 술어를 사용하여 농사짓는 생활 모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 밖에 곰이 출현하여 농작물을 해치는 것, 곰을 잡아서 요리해 먹는 것, 산에서 벌목을 하는 모습, 벌목한 나무로 배의 노를 만들어 곡식과 바꾸어 먹는 것, 황장목 벌목의 노역에 동원되는 것, 보릿고개에 산나물을 채취하여 연명하는 것, 전염병으로 주민들이 고통 받는 것 등을 소재로 한 시들이 있다. <大水歌>와 같이 폭우로 인해 수해가 난 모습을 고시 형식으로 읊은 것도 있는데 이러한 시들은 당시 설악산 지역의 독특한 생활상을 시로써 형상화해 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주민들의 생활뿐만 아니라 설악산 지역에서의 자신의 생활을 시로써 표현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작품은 곡백연에서의 삼연 자신의 곤궁한 생활 체험을 소재로 한 것이다.

마을마다 적막하게 초가집 문 닫았으니

전염병에 누가 일어나 호미질하러 가랴

보리가 나기 전에는 산나물을 먹으니

늙은 이 몸이 어찌 음식 초라한 것 탄식하랴

 

(村村閴寂掩蓬廬 病起誰能去把鋤

麥未登塲猶菜色 老夫寧嘆食無魚

                『三淵集拾遺11, <葛驛雜詠之三> 其五)

산나물 뜯는 아이 호미질도 못하니

사방 마을이 같은 병을 앓는데 어찌하랴

먹을 것 아무 것도 없어 신흥사로 쌀 얻으러 가니

석가여래는 나를 비웃지 마소서

 

菜色山僮莫把鋤 四隣同病欲何如

蕭條乞米神興去 舍衛如來莫哂余

(三淵集拾遺11, <葛驛襍詠 之三> 其四十一)

   보리농사 위주의 산촌에서 보리밥을 먹으며 지내다가 춘궁기의 보릿고개를 산나물로 연명해야 하는데 그나마 전염병으로 산나물마저 뜯을 사람이 없어서 신흥사로 곡식을 빌러 가는 자신의 빈곤한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은둔지 설악산에서의 삼연 자신의 고행에 가까운 삶의 모습을 시로써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5. 은둔자의 내면세계 표현

   세속과 격리된 곡백연에서 은둔자로서 추구했던 자신의 내면세계를 삼연은 여러 편의 시로써 표현하고 있다. 곡백연에서 창작한 시들에 나타난 은둔자로서의 그의 내면세계는 다음과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곡백연에서 삼연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추구한 것은 속세의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은 채 깨끗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은둔의 세계였다. 이러한 속세를 벗어난 은둔 세계를 추구하는 자신의 의지를 여러 편의 시로써 표명하고 있는데 <伏次伯父寄示韻> 2<復疊前韻> 2수에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고금의 은둔의 뜻은 많은 궤범(軌範)이 있지만

먼지 속에서는 속세를 벗어나기 결코 어렵네

백곡연한계산(寒溪山)매월당이 있던 곳

더러운 때가 내 몸을 오염시키지 않기를

 

(古今隱義雖多軌 塵裡終難得出塵

嶽白溪寒梅月所 庶無葷垢汚余身

三淵集拾遺6, <伏次伯父寄示韻> 其二)

가을 벼랑에 단풍 지고 봄 냇물에는 도원(桃園)의 꽃

여름의 달도 얼음을 품은 듯 더위와 먼지를 끊어 주네

만약 최후의 무궁한 맛을 말한다면

판잣집 삼경 밤에 눈 위에 누운 것 같은 몸

 

(楓落秋厓桃水春 懷氷暑月斷炎塵

若言最後無窮味 板屋三更卧雪身

          『三淵集拾遺6, <復疊前韻> 其二)

   춘천에 은둔하고 있던 백부 김수증 시에 차운한 위의 시에서 삼연은 매월당이 은거한 바 있는 설악산의 곡백연에서 속세의 더러움으로부터 벗어난 참다운 은둔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곡백연에서 추구하는 속세의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은 자신의 은둔자로서의 정신세계를 얼음같은 달빛이나 차가운 눈의 이미지에 의해 형상화하고 있다. 은둔자의 세계를 추구하려는 의지는 <還山次伯氏韻>에서도

세상의 길 험하기 백뇌관(百牢關)보다 더하니

바위 속에 거처하니 어찌 홀로 자는 한가로움이 없으랴

산림(山林)인들 저자인들 어느 은둔을 부러워하랴

흰 머리에 서로가 푸른 구름 속을 지키네

 

(世途險過百牢關 巖處寧無獨寐閒

 堪羨何家大小隱 白頭相守碧雲間

三淵集9, <還山次伯氏韻>)

라 하여 세속을 끊고 자연 속에 은둔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春興雜詠>제8에서도 저마다의 마음의 자취는 고금에 유유하건만 / 원컨대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을 따라 일생을 마치려네(今古悠悠各心迹 願隨沮溺以長終)”라 하여 은둔자로 일생을 마치려는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은둔생활 중에도 세속적 갈등을 벗어나지 못하고 번민하는 심경이 시에 노출되기도 한다. <還山夜坐>에서는 밤에 소쩍새 우는 소리를 들으며 괴로운 심경에 사로잡혀 산으로 돌아온 맛 깊기도 하고 얕기도 하니 / 가슴 속 바다의 달리는 파도 아직 반쯤 가라앉지 않네(還山意味看深淺 胸海奔濤半未平)”라 읊고 있는데 곡백연에 와서도 현실에 대한 불만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상태가 드러나 있다. 은둔생활 속에서 불교의 세계를 추구해도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하는 심경을 <갈역잡영> 35수에서는 나 역시 한계산에서 참선(參禪)에 들어가도 / 슬픔이 가득한 이 마음 누가 불쌍히 여길까(余亦寒溪看栢樹 塞悲心事有誰憐)”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삼연은 곡백연에서 은둔자로서 세속의 일들을 모두 잊고 초연한 자세로 물외(物外)의 경지를 추구하는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시로 표현한다.

들 밭의 참새떼 해 저무는 줄 모르고

어찌 그리 분주하며 다투어 시끄럽게 구는가

곡백연 개울가의 세상을 잊은 늙은이는

다만 사립문 닫고 여는 것만 마음 쓰네

 

(野田黃雀不知昏 何自奔奔競作喧

百曲川邊忘世叟  關心開閉只柴門

三淵集14, <葛驛雜詠> 其十)

 

 

초연하게 관조하는 물외(物外)의 몸

작은 것을 추구하니 죄 없는 사람에게 부끄럽네

밝고 밝아서 속일 수 없는 것 있으니

나를 죄 주는 것은 설악의 신령

 

(觀迹超然物外身 求諸方寸愧平人

昭昭自有難欺者 罪我其惟雪岳神

(三淵集14, <葛驛雜詠> 其二十四)

   갈등을 일으키는 세속적인 가치는 모두 잊고 설악산의 공간 속에서 현실 밖의 초연한 세계를 관조하면서 만물의 밖에 존재하는 참다운 세계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곡백연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맑고 참다운 경지를 접하는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오래 내리던 비에 흰 구름이 보이니

반갑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 듯하네

창 사이로 와서 만나니

머리맡에서 청진(淸眞)을 만나네

 

(久雨見白雲 欣如逢好人

 牕間來邂逅 枕上會淸眞

  三淵集15, <葛驛雜詠 戊戌> 其五十二)

 

 

고요히 누웠다가 맑게 앉으니

빈 연못에 언뜻 부는 바람

시냇물에는 만상(萬象)이 흘러와

모두가 작은 가슴 속에 들어오네

 

(靜卧仍淸坐 池虗乍有風 溪山流萬象 都入寸襟中

三淵集15, <葛驛雜詠 戊戌> 其六十三)

물 아래 비 갠 산봉우리 있으니

넓은 물에 푸른 산 그림자 깊네

가느다란 물고기들 저녁 햇살 지는 것 알고

다투어 뛰어오르니 어찌 무심하랴

 

(水底多晴嶂 沖瀜影翠深

 纖鱗知夕景 競躍豈無心

三淵集15, <葛驛雜詠 戊戌> 其六十五)

   만물의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며 그 이치를 파악하여 자연에 내재하는 진리를 접하고자 하는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은둔지 설악산의 자연 속에서 세속적인 갈등으로부터 벗어나 오염되지 않은 진리를 체득하고자 했던 삼연의 내면세계가 시 속에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관조 속에서 만물에 내재한 도리(道理)를 발견해 내려고 하는 점은 삼연이 곡백연의 은둔생활 중에도 성리학자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은둔지에서 접하는 일상적인 생활의 현상 속에서도 격물치지(格物致知)”하는 입장에서 거기에 내재하는 이치를 찾아내어 시로 표현한다. <갈역잡영무술>제5657수에서는 꿀벌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꿀벌과 같은 미물의 행동에도 조물주가 부여한 이치가 들어있음을 시로 읊고 있으며 제108수에서는

오이를 조그만 밭에 심었더니

바야흐로 넝쿨이 구불구불 퍼지네

점점 사립을 타고 올라가니

어찌 성정(性情)이란 것이 없겠는가

 

(靑瓜著小圃 目下見延縈

 冉冉登柴架 寧非有性情

三淵集15, <葛驛雜詠 戊戌> 其百十八)

라 하여 오이를 재배하는 일상생활 속의 사소한 일들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발견해 낸 만물이 지닌 자연의 법칙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이 밖에 <갈역잡영>의 제4수와 제5수는 집에서 기르는 개와 닭을 읊은 시인데 한가롭게 누워있는 개나 병아리들에게 먹이를 찾아 주는 암탉의 행동으로부터 도심(道心)이나 천륜(天倫)을 발견하고 이를 시로써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시들은 은둔생활 속에서도 성리학자로서의 자세에 투철했던 삼연의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삼연은 유학자적 입장에서 곡백연의 주민들이 처한 곤궁한 생활에 대한 애민의식이나 그러한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시로써 표출하기도 한다. <갈역잡영무술>제33에서는

보리가 아직 익지 않으면 사람이 다 굶주리고

보리가 익으면 사람이 한가하지 못하니

마을에서는 밤새도록 방아를 찧어

내 마음 도리어 괴롭게 하네

 

(未熟人盡餒 旣熟人未閒

 村舂徹晨夜 使我脚心酸

三淵集15 <葛驛雜詠 戊戌> 其三十三)

라 하여 보릿고개를 넘기는 주민들의 고통스러운 생활에 대한 연민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주민들의 고궁한 생활 속에서 자신의 소박하고 빈한한 생활에 대하여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자세를 시로서 표출하기도 한다. <갈역잡영무술>53에서는

 

 

밥상에는 울타리 동쪽의 보리

물병에는 버드나무 아래 샘물

늙은이의 분수로는 안분지족하니

험하고 힘든 해를 잘 보내네

 

(盤受籬東麥 甁承柳下泉

 粗安窮老分 利過險艱年

三淵集15, <葛驛雜詠 戊戌> 其五十三)

라 하여 보리밥으로 연명하는 소박한 생활일지라도 흉년을 무사히 넘기는 것에 만족하는 유학자로서의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곡백연의 곤궁한 생활상에 대한 애민의식의 표출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갈역잡영무술>제13에서는

백성들 굶주려도 관가에서 구제하지 않으니

개처럼 여위어도 누가 불쌍히 여기나

도둑을 막아도 공훈(功勳)과 작록(爵祿)이 없으니

다만 하늘을 향해 곡할 수 밖에

 

(民飢官不養 犬瘠復誰憐

 禦盜無勳祿 惟應哭向天

三淵集15 <葛驛雜詠 戊戌> 其十三)

라 하여 관가에서 주민들의 피폐한 민생을 돌보지 않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57수에서도

황장목 산에는 금법(禁法)이 있는데

백성들의 도끼 난마처럼 모여드네

누가 나쁜 짓을 하도록 시키던가

도적질 주범은 관가라네

 

(黃腸山有禁 民斧集如麻

誰敎猱升木 主盜卽官家

     『三淵集15 <葛驛雜詠 戊戌> 其百五十七,)

라 하여 황장목을 벌채하는 관가의 비리를 비판하고 있다. 그 밖에 <춘흥잡영>37에서는 길 가에 자주 빈 마을이 있으니 / 산촌의 백성들 조세와 부역에 고통받는 것 민망하구나(道傍往往空村塢 悶見山氓困稅徭)”라 하여 관가의 부역과 조세에 시달려 폐촌이 된 상황을 묘사하면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곡백연의 은둔생활 속에서도 삼연은 유학자로서 학문이나 시국, 역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뚜렷이 하고 이를 시로써 표현하고 있다. <갈역잡영>의 많은 작품들이 자신의 학문적인 태도를 표명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학문이 쇠퇴하고 풍속이 타락한 현실에 대한 개탄이나 주자의 학설을 둘러싼 분분한 논쟁에 대한 변증,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과 비판 등을 시로써 표현하고 있다. 설악산 지역의 궁벽한 산촌에서 극한적인 은둔의 생활을 실천하면서도 그러한 상황 속에서 견지하고 있었던 자신의 유학자적 태도와 입장을 시로써 표현해 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6. 결론

   삼연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지역에서 1692년부터 1714년까지 12간 은둔생활을 하면서 인생의 후반기를 보냈는데 이러한 은둔 체험을 바탕으로 방대한 분량의 시를 창작하였다.

   삼연은 설악산 은둔생활 중의 시에서 설악산 은둔지의 자연을 인간 세계를 벗어난 신선의 세계, 조물주의 만물운행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초월적인 세계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러한 세계의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매우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시로 표현하고 있다.

 

   삼연은 설악산 은둔지의 지역 주민들을 비롯하여 그곳에서 영위하는 자신의 생활을 여러 편의 시로써 표현하고 있다. <춘흥잡영>, <갈역잡영>, <갈역잡영무술> 등의 장편 연작시에는 설악산 지역의 생활을 소재로 한 많은 작품들이 있는데 삼연이 목도한 당시 설악산 지역 주민들의 특징적인 농업이나 풍속 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들어 있다.

   삼연은 설악산 지역에서 은둔자로서 추구했던 자신의 내면세계를 여러 편의 시들 속에 표현하고 있다. 설악산의 은둔생활 속에서 세속적인 갈등으로부터 벗어난 신선의 세계를 추구하거나 자연에 담긴 만물의 이치를 체득하고자 했던 삼연의 내면세계가 <복차백부기시운> <환산차백씨운>, <갈역잡영>, <갈역잡영무술> 등의 시에 표현되고 있다.

   삼연은 설악산 지역의 궁벽한 산촌에서 극한적인 은둔의 생활을 실천하면서도 그러한 상황 속에서 견지하고 있었던 자신의 유학자적 태도와 입장을 시로써 표현해 내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은둔지에서의 자신의 빈한한 생활에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자세나 설악산 지역 주민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애민의식(愛民意識)이나 비판의식(批判意識)을 담은 시들도 <갈역잡영>, <갈역잡영무술> 등에 여러 편 들어 있다.

   삼연이 설악산 지역의 은둔생활 속에서 그곳의 자연과 생활을 표현한 시들은 17세기말 18세기초 강원도 인제군 지역의 자연과 생활을 방대한 시로써 형상화 내었다는 점에서 문학의 지방적 특색의 표현이란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한편 은둔생활 중의 삼연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들은 설악산 지역의 자연과 생활이 형성한 17세기말 18세기초의 대표적인 은둔자의 문학세계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종호. 삼연 김창흡의 시론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이승수. 김창흡 생애와 시세계의 변모. 한양어문 9. 한양어문학회. 1991.

김남기. 삼연 김창흡의 시문학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고연희. 김창흡, 이병연의 산수시와 정선의 산수화. 한국한문학연구 20. 한국한문학학회. 1997.

이경구. 김창흡의 학풍과 호락논쟁. 한국사론 36.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96.

안대회. 삼연 김창흡의 <갈역잡영> 연구. 한국한시연구 제1. 한국한시학회. 1993.

채환종. 삼연 김창흡의 사회시 연구. 어문연구 제27. 어문연구학회. 1995.

金邁淳. 臺山集. 영인본. 한국문집총간 294. 민족문화추진회.

金壽增. 谷雲集. 영인본. 한국문집총간 125. 민족문화추진회.

金壽恒. 文谷集. 영인본. 한국문집총간 133. 민족문화추진회.

金壽興. 退憂堂集. 영인본. 한국문집총간 127. 민족문화추진회.

金昌協. 農巖集. 영인본. 한국문집총간 161-162. 민족문화추진회.

金昌翕. 三淵集. 영인본. 한국문집총간 165-166. 민족문화추진회.

申維翰, 靑泉集. 영인본. 한국문집총간 200. 민족문화추진회.

洪泰猷,耐齋集. 영인본. 한국문집총간 187. 민족문화추진회.

 

cafe.daum.net/ganghanyeon/WCrU/6   강원한문고전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