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1. 23:13ㆍ산 이야기
영시암과 삼연 김창흡에 대한 고찰 설악 이야기
<영시암과 삼연 김창흡에 대한 고찰>
[영시암]
吾生苦無樂[오생고무락] 내 생애에 괴롭고 즐거움이 없으니
於世百不甚[여세백불심] 속세에서는 모든 일이 견디기 어렵네
投老雪山中[투노설산중] 늙어서 설산(설악산의 약칭)에 투신하려고
成是永矢庵[성시영시암] 여기에 영시암을 지었네
[출전:인제군지]
[영시암춘첩]
髮白心愈活 :머리는 세었으나 마음은 한층 살아나고
形枯道益肥 :모습은 말랐으되 道는 더욱 살쪄 간다
安危山外事 :안위[安危]는 산 밖의 일이니
長암碧雲쇠 :영원히 벽운정사를 열지 않으리라
[선생:58세때/1711년]
*벽운정사: 삼연선생이 지은 집으로 나중에 영시암의 유허가 된다.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의 저자인 김금원(金錦園)은 설악산을 세상에 널리 알린 두 김 선생이 있다고 했는데 한 사람은 매월당이고 또 한 사람이 김삼연이라 했다.
김삼연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그 가계(家系)를 잠깐 짚어 보아야 왜 그가 설악산에 은거했는가를 알게 된다.
삼연의 관향은 안동이며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심양으로 잡혀가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유명한 시조를 남긴 김상헌(金尙憲)이 그의 증조부다.
영의정을 지낸 부친 김수항(金壽恒)은 기사환국(己巳換局)<숙종16년(1689)에 있었던 사화로 왕비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되고 장희빈이 중전으로 승격되면서 정권이 노론에서 남인으로 넘어가는 엄청난 사건이다.
숙종의 비 민씨는 아기를 낳지 못해 늘 근심과 걱정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데 임금의 총애를 받은 후궁 장희빈은 아들을 낳았고, 그아이가 원자(原子)로 책봉되었다.
장희빈을 사랑하던 숙종은 그녀를 왕비로 승격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이 반대하였고, 그래서 숙종은 이들을 숙청하고 남인을 등용했다.
희빈이 낳은 아이의 세자 책봉문제가 나오자 노론의 총수 송시열은, "임금의 보령이 이제 겨우 29세시고 중전은 23세로 아직 젊으신데, 후궁의 아들로 세자를 책봉한다는 것은 시기상조다." 라고 극구 반대했다.
숙종은 송시열의 말을 묵살하고 그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정권을 남인에게 넘긴 것이다.
숙청된 노론 중 김수항(金壽恒)도 있었다.> 때 사사(賜死)되었으며 맏형도 숙종 때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으로 영의정을 지내고 사사된 김창집(金昌集), 둘째형은 대제학을 지낸 김창협(金昌協), 삼연 김창흡(金昌翕)은 셋째이며 넷째는 김창업(金昌業)으로 학문으로는 형 삼연과 일세에 그 이름을 떨쳤던 형제들이다.
우리 역사에는 부자가 양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내고 모두 사사된 가문은 이 가문밖에 없다.
김상헌의 형 김상용(金尙容)은 병자호란 때 강화에 비빈(妃嬪)을 호종(護從)하다가 강화도가 오랑캐의 병사에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필자가 이 가문의 세보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세보 첫 장을 넘기니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자결하기 직전에 쓴 ‘일모강도신력무나하(日暮江都臣力無奈何:해가 저무는 강화도에서 저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다.)’라는 그의 절필이 있어 보는 사람을 엄숙해지게 하였다.
삼연은 이러한 명문에서 태어나 영욕(榮辱)의 생애를 보냈다.
삼연이 숙종 15년(1689)에 그 부친 김수항이 사사된 기사화변을 겪은 뒤에 세상에 뜻이 없어 찾아든 곳이 여기 내설악이고 그가 이곳에 세운 정사(精舍)가 영시암(永矢庵)이다.
‘영시암기’에 있는 바와 같이 ‘영불출세위서(永不出世爲誓)’ 즉 ‘다시는 인간세상에 나가지 않기를 맹세하였다’.
정사의 이름도 영시(永矢)로 지어 길이 맹세한다는 뜻을 나타냈고 세상의 영욕과는 절연하였다.
삼연이 영시암을 짓고 여기서 기거하는 동안 그를 만나려 많은 사람이 찾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암기(庵記)’의 ‘혹식심지인만리쟁추 혹양기지사육합운회(或息心之人萬里爭趨 或養氣之士六合雲會:혹 휴양하려는 사람이 먼 곳에서 다투어 몰려왔고 혹 기를 기르려는 선비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라는 구절로 보아 선비들의 내왕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이 다녀간 뒤에 시문으로 세상에 설악을 알렸기에 삼연은 매월당과 함께 설악을 외부에 알린 공로자라고 금원은 말한다.
매월당의 설악에서의 역정은 그의 연보나 문집을 통하여도 상세하게는 알 수 없으나 삼연은 여기서 6년을 있었다.
그는 또 설악에서 여러 편의 시문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서도 장편 5언의 앞구절이다.
“오생고무락(五生苦無樂) 어세백불감(於世百不堪)
노투설산중(老投雪山中) 성시영시암(成是永矢庵)”
(내 삶은 괴로워 즐거움이 없고 / 세상 모든 일이 견디기 어려워라 / 늙어 설악 산중에 들어와 / 여기 영시암을 지었네.)
부친의 사사를 겪은 그의 고뇌가 세속에서는 견디기 어려워 늘그막에 설악을 찾은 심회를 노래하였기에 삼연의 심경이 짐작이 간다.
다시는 세상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입산한 그가 6년 뒤에 여기를 떠나야 할 사건이 생겼다.
그가 들어올 때 식비(食婢)를 데리고 왔는데 그 식비가 범에게 물려가 인정에 그대로 살 수 없어 설악산을 떠났다.
그후 수춘산(壽春山)으로 갔다고 노산의 ‘설악행각’에는 있으나 수춘은 춘천의 옛 이름이니 춘천의 어느 산으로 갔는지 수춘산이 따로 있어 거기에 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강릉에 왔던 것은 기록에 남아 있다.
여기서 강릉 선비들에게 붙잡혀 강릉 경포변의 호해정(湖海亭)에서 장기간 두류하면서 글을 가르쳤다.
강릉 선비들이 명문 안동 김문의 가계를 모를 리 없고 만나 본 일은 없으나 그의 학문과 이름은 익히 듣고 있어 멀리서 성화(聲華)를 우러르던 참이었을 것이다.
망외(望外)의 분복(分福)으로 공경하던 삼연이 스스로 강릉에 왔으니 이곳 선비들이 다투어 가까이 모시려 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리하여 삼연의 거처는 호해정으로 정하여 졌고 여기에 이 지역의 선비들이 모여 그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삼연이 머물다 떠나간 뒤에도 삼연의 문인은 물론 삼연을 흠모하던 많은 사람이 호해정을 찾았다고 한다.
삼연은 내설악 영시암에서만 있은 것이 아니고 6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느라 설악산의 명소를 찾아다녔던 것이다.
외설악의 비선대(飛仙臺)에도 들러 지은 ‘비선대’ 오언율시 한 수가 있고 그 가운데 ‘명산을 두루 밟으며 다녔다’는 시구가 있다.
갈역잡영(葛驛雜詠)을 비롯한 인제도중, 합강정 등 설악에서 많은 시문을 남겨 강원도 문화에 기여하였다.
부친과 사백(舍伯) 양대가 영의정을 지냈던 명문에서 태어나 본인도 학문이 깊어 문장과 학문이 일세를 용동(聳動)하던 석학으로 한때 비색한 가운(家運)에 세사에 뜻을 버리고 설악산에 영시암을 짓고 우거하였던 탓으로 그를 찾아왔던 사람들이 처음 설악을 접하고 그 경색에 놀라 돌아가 시문을 통하여 설악을 세상에 알려 천하의 설악이 되었다.
삼연은 설악에 시문을 남겼고 도내에서 선비를 길러 이 고장 문화에 공헌한 바 크다.
삼연이 창건하여 중도에 없어진 영시암이 근년 그 후손들에 의하여 중창되고 있다고 하나 필자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출처 [최승순 강원대명예교수]
cafe.daum.net/ganghanyeon/WCrU/4 강원한문고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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