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자대전 부록 제6권

2015. 8. 3. 10:48잡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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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다른 표기 언어 宋子大全

 

요약 테이블
시대 조선
성격 시문집
유형 문헌
수량 215권 102책
소장/전승 규장각 도서
창작/발표시기 1787년
분야 종교·철학/유학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송시열(宋時烈)의 시문집.

[서지적 사항]

215권 102책. 목판본. 1787년(정조 11)에 간행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송시열의 문집은 ≪송자대전≫의 간행에 앞서 두 종류가 더 있다. 즉, 1717년(숙종 43)에 민진후(閔鎭厚)의 건의에 따라 왕명에 의하여 교서관(校書館)에서 철활자(鐵活字)로 간행한 ≪우암집 尤庵集≫과, 이보다 앞서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가 편집한 이른바 황강본(黃江本) 수백 권이 있다.

교서관에서 간행한 ≪우암집≫은 본디 본집과 별집 9권을 포함하여 167권이었고, 뒤에 간행한 ≪경례문답 經禮問答≫을 합하여 191권이 되었으며, 나중에 부록 및 1732년(영조 8)에 연보 5권이 간행되었다.

교서관본은 일명 운관본(芸館本)이라고도 하는데, 대체로 송나라 장식(張栻)의 문집인 ≪남헌집 南軒集≫의 범례를 따른 것이다.

  

   ≪송자대전≫은 운관본 ≪우암집≫의 본집과 별집, ≪경례문답≫·부록·연보 등과 황강본을 대본으로 하여 이를 교정, 첨삭하고 ≪주자대전 朱子大全≫의 편차 방식에 따라 엮은 것이다. 문집의 제목을 ‘송자대전’이라고 한 것은 이미 조야(朝野)에서 송시열이 ‘송자(宋子)’로 일컬어지고 있었고, 당시 사림의 중론을 따른 때문이다.

≪주자대전≫의 편차 방식을 따랐으므로 ≪우암집≫과는 그 편집의 차례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또 ≪우암집≫에는 연보가 1726년까지의 기사만 있었으나 ≪송자대전≫에는 1750년부터 1787년까지의 기사를 추록하였다. 이 판본은 평안 감영에서 각인되었는데, 이 때문에 기영본(箕營本)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1907년(순종 1)에 병화로 소실되자, 1929년 후손과 지방 유림들의 협력으로 대전 가양동 소재 남간정사(南澗精舍)에서 대전(大全)의 중간(重刊)이 이루어졌다. 이 때 ≪송서습유 宋書拾遺≫ 9권 4책과 ≪송서속습유 宋書續拾遺≫ 1권 2책도 아울러 간행되어 모두 225권 108책에 달한다.

 

   그 밖에 1977년≪송자대전≫을 영인, 반포하면서 ≪송자서 宋子書≫를 편집,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송자대전부록≫에서 발췌한 1책과 정조가 지은 ≪양현전심록 兩賢傳心錄≫중 송시열에 관한 것 2책, 송시열의 언행록 1책, ≪송자대전수차 宋子大全隨箚≫ 5책, ≪송자대전목록≫ 3책, ≪화양연원록 華陽淵源錄≫ 1책 등을 묶었다.

[내용]

   ≪송자대전≫의 권두에는 8편의 어제(御製) 묘비명과 제문, 그리고 어필(御筆)의 발문과 <대로사묘정비명 大老祠廟庭碑銘>이 수록되어 있어 그의 정치적 위상을 엿볼 수 있다.

권1에는 부(賦) 1편과 오언고시·칠언고시 수십편, 권2에는 오언절구·칠언절구, 권3에는 오언율시, 권4에는 칠언율시가 수록되어 있다.

권5에는 <기축봉사 己丑封事>와 <정유봉사 丁酉封事>가 있다. <기축봉사>는 효종 즉위초에 시무(時務) 및 유학의 정치적 이상을 13개 조항에 걸쳐 개진한 것으로서 특히 마지막 조항인 “정치를 잘하여 오랑캐를 물리치라(修政事以攘夷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권6에서 권21까지 16권에 걸쳐 소(疏) 및 소차가 실려 있다. 소는 대체로 사직소가 주종을 이루고, 차의 경우는 퇴귀(退歸)에 관한 것과 시정(時政)에 관한 것이 주종을 이룬다. 이를 통하여 선비의 진퇴의 의리(義理)와 송시열의 인격, 그리고 당시의 정치적 실상을 실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다.

권23에서 권25까지는 서계(書啓), 권26은 헌의(獻議)로서 형식은 소·차와 구별되나 내용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다. 대체로 예학(禮學)에 관한 논의가 많고 그 밖에 시정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권27에서 권129까지 무려 103권에 걸쳐 수천 통의 서한이 수록되어 있다. 대상은 대신·사우·문인·자손들로부터 각지 서원의 원생들에까지 걸쳐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안방준(安邦俊)·이경여(李敬輿)·이후원(李厚源)·송준길(宋浚吉)·유계(兪棨)·홍명하(洪命夏)·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정태화(鄭太和)·이완(李梡)·이단하(李端夏)·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민유중(閔維重)·박세채(朴世采)·김만중(金萬重)·김석주(金錫胄)·남구만(南九萬)·조지겸(趙持謙)·권상하·김창협(金昌協)·이희조(李喜朝)·김간(金榦)·윤증(尹拯)·나양좌(羅良佐) 등 당시 정계·학계의 인물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권130에서 권136까지는 잡저가 수록되어 있다. <호연장질의 浩然章質疑>·<주자언론동이고 朱子言論同異攷>·<근사록오본변증 近思錄誤本辨證>·<퇴계사서질의의의 退溪四書質疑疑義>·<간서잡록 看書雜錄>·<예설 禮說>·<논어말즉시본설 論語末卽是本說>·<시민여상설 視民如傷說> 등과 과의(科義)였던 <일음일양지위도 一陰一陽之謂道> 등 그의 성리학적 철학 사상과 도학정치 사상 등을 담고 있다. 그 밖에 여러 편의 자설(字說)과 <독락정기후설 獨樂亭記後說> 등이 있다.

권137에서 권139까지는 서(序)가 수록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농가집성서 農家集成序>·<포은선생시집서 圃隱先生詩集序>·<구황촬요서 救荒撮要序>·<근사록석의후서 近思錄釋疑後序>·<청음선생유사서 淸陰先生遺事序>·<회덕향안서 懷德鄕案序>·<사계선생유고서 沙溪先生遺稿序>·<논맹혹문정의통고서 論孟或問精義通攷序>·<주자대전차의서 朱子大全箚疑序> 등 각종 시문집과 국가 시책에 의하여 출간된 주요 문헌·연보·족보 등에 대한 서문을 수록하고 있다.

권140에서 권145까지는 기(記)로서 주로 정사(精舍)·의창(義倉)·당재(堂齋)·누(樓)·서원 등에 대한 것이다.

권146에서 권149까지는 발문 및 후서(後書)들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효묘어필첩발 孝廟御筆帖跋>·<숭정황제어필발 崇禎皇帝御筆跋>·<퇴계선생진적발 退溪先生眞蹟跋> 등을 들 수 있다.

권150에는 <지지와명 知止窩銘> 등 12편의 명과, 1편의 <주일재잠 主一齋箴>, 4편의 찬(贊), <장손은석혼서 長孫殷錫婚書>를 비롯한 7편의 혼서, <옥천군학성묘중수상량문 沃川郡學聖廟重修上梁文> 등 5편의 상량문이 수록되어 있다.

권151에는 <소현서원고주자문 紹賢書院告朱子文> 등 70편의 축문, 권152·153에는 <여동춘초려제사계선생문 與同春草廬祭沙溪先生文> 등 15편의 제문과 애사 1편, 권154에서 권170까지는 <포은정선생신도비명 圃隱鄭先生神道碑銘>·<남명조선생신도비명 南冥曺先生神道碑銘> 등 96편의 신도비명이 수록되어 있다. 신도비가 종2품 이상의 관원들에게 해당하는 것임과, 그리고 그 대상의 다양함을 생각할 때 송시열의 정치적·학문적 위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권171에는 <능주정암조선생적려유허비 綾州靜庵趙先生謫廬遺墟碑>·<자운서원묘정비명 紫雲書院廟庭碑銘> 등 유허비·묘정비명, 그리고 정려비(旌閭碑) 등이, 권172에서 권180까지 9권에는 송익필(宋翼弼)의 묘갈을 비롯한 108편의 묘갈명이, 권181에는 <영릉지문 寧陵誌文>·<인경왕후지문 仁敬王后誌文> 등 3편의 능지가, 권182에서 권188까지는 김상헌·김집·송준길·김수항 등의 묘지명이, 권189에서 권201까지는 묘표, 권202에서 권205까지는 시장(시狀)이, 권206에서 권211까지는 조헌(趙憲)·김장생(金長生)·윤황(尹煌), 그리고 송시열의 아버지 갑조(甲祚) 등의 행장이, 권212에는 송준길의 유사(遺事)와 김장생·김집 등 송시열의 두 스승의 어록이 실려 있다.

권213에서 ≪송자대전≫의 마지막 권인 권215까지는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등 <삼학사전 三學士傳>과 <임경업장군전>, 포수(砲手) <이사룡전 李士龍傳> 등을 비롯한 의인·충장(忠將)·용사(勇士)·효열(孝烈)들의 전기 및 <은진송씨가전 恩津宋氏家傳> 등이 실려 있다.

 

   ≪송자대전부록≫은 모두 19권으로 권1에는 교서(敎書) 3편과 사제문(賜祭文) 12편, 권2에서 권12까지는 연보, 권13은 묘표 및 화상찬(畫像贊), 권14에서 권18까지는 문인들이 기록한 송시열의 어록, 권19에는 <기술잡록 記述雜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송서습유≫에는 권머리에 <효종대왕밀찰>·<명성대비언찰 明聖大妃諺札>이 있고, 권1은 시·서계(書啓)·서(書), 권2에서 권6까지도 서(書)로서 주로 문인과 가인(家人)에게 보낸 것들이다.

권7에는 <악대설화 幄對說話>·<고산구곡가번문 高山九曲歌翻文> 등 6편의 잡저, 권8에는 각종 서(序)·발·전(箋)·축문·제문·신도비명·묘지명·묘표·유사가, 그리고 마지막인 권9에는 경연 강의가 수록되어 있다.

≪송서속습유≫는 1권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시 7수, 서간문 56편, 발 1편, 그 밖에 묘갈명·사제문·일기·묘지·묘표후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1977년에 은진 송씨 문중에서 간행한 ≪송자서≫에는 ≪송자대전부록≫에 수록된 것 중에서 어제(御製)의 사제문 등을 초록하였고, 또한 정조가 지은 주자와 송자를 대비한 ≪양현전심록≫ 중 송시열 관련 부분, 문인들이 기록한 송시열의 언행록과 ≪송자대전수차≫ 그리고 ≪송자대전목록≫ 및 ≪화양연원록≫을 수록하고 있다.

≪화양연원록≫에 따르면, 사우(師友)로는 김장생·김상헌·김집·안방준·이경여·이후원·송준길·유계·정태화를 비롯하여 142인이 올라 있다. 문인으로는 권상하·김창협·이희조·민유중·김만중 등을 포함하여 800여인의 이름이 올라 있다.

[의의와 평가]

   ≪송자대전≫은 다른 사람의 문집에 비하여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표제의 특이성이다. 현존하는 문집 중에 ‘자(子)’가 붙은 것으로는 유일하다. 문집 자체가 ≪주자대전≫의 편차 방식을 취하고 있기도 하지만, 정조 대에 이르러 송시열은 주희와 더불어 나란히 현자(賢子)로 일컬어져 ≪양현전심록≫이 정조에 의하여 저술되기도 했으며, 학자로서 최고의 명예인 문묘(文廟)에,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최대의 명예인 그가 섬기던 효종의 묘(廟)에 배향되는 영광을 얻었고, 또한 조야에 걸쳐 ‘대로(大老)’라는 극존칭을 얻은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송자대전’이라는 표제가 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송자대전≫에는 여느 문집과 달리 대부분의 내용이 소·차·서(書)·명·축문·제문·신도비명·묘갈명 등이라는 점이다. 이 책의 경우 시는 4권, 잡저는 7권이다. 특히, 서(書)는 권27에서 권129에 이르기까지 103권에 해당하여 전체의 절반 정도에 이른다.

그의 정치적·학문적 위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증좌가 아닐 수 없다. 실로 17세기뿐 아니라 이후 조선의 정치나 사회·학술 사상의 연구에 있어 ≪송자대전≫의 소·차·서(書) 등은 필수불가결의 자료라고 아니할 수 없다.

셋째, ≪송자대전≫에 일관하고 있는 정신은 ‘직(直)’으로 압축되는 그의 춘추대의와 북벌, 존주정신(尊周精神)이다. 송시열의 성리학적 철학 사상과 예학은 주로 그의 잡저 및 서간문과 소에 산재되어 나타난다. 그 밖에 문집에는 수록되지 않은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 朱子語類小分≫·≪이정서분류 二程書分類≫·≪논맹문의통고 論孟問義通攷≫·≪심경석의 心經釋疑≫ 등을 통하여 규찰할 수 있다.

 

   송시열의 성리학적 철학 사상은 주자―이이(李珥)―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선에서 전개된다. 그는 평생 주자를 독신(篤信)하였으며, 그 역사적 상황이 동일하다고 보아 주자의 철학 사상이나 그가 건의한 정책은 그대로 17세기의 조선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효종 즉위 초에 올린 <기축봉사>도 실상 주자의 <기유의상봉사 己酉擬上封事>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철학 사상의 체계 및 그 논리적 정합성에 있어서는 송시열은 주자나 이이·김장생 등 그의 스승들보다 일관성을 견지한다. 예컨대, 송시열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계승하지만 이 성리학적 기본 개념이요 전제를 당시의 학술 쟁점에 적용함에 있어서 매우 철저하다.

그의 형도기삼단설(形道器三段說)·사단칠정합일설(四端七情合一說)·성정일리설(性情一理說)·천리인욕설(天理人欲說) 등은 모두 기발이승일도인 한 이원적 설명은 용납될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당시 학계의 주요 쟁점의 하나였던 이황(李滉)의 이발설(理發說)이 잘못되었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그는 <주자언론동이>의 저술에 착수하였으며, ≪주자대전차의≫를 저술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기발이승일도에 의한 정학(正學)의 천명(闡明)을 통하여 송시열은 당대의 시대적 사명이 춘추대의의 구현에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그대로 민족의 정치적·문화적 자주성의 회복과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가 특히 의리 정신의 구현을 강조하고 그러한 인물들의 전기를 지어 표장(表章)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한말 이항로(李恒老) 문하의 유중교(柳重敎)·김평묵(金平默)·유인석(柳麟錫)·최익현(崔益鉉) 등, 의병운동의 선봉에 섰던 인물들이 모두 송시열을 대의(大義)의 연원으로 추앙하면서 도통을 직의 심법을 기준으로 삼아 공자·맹자·주자에서 송자로 이어가고 있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977년 사문학회에서 ≪송자대전≫ 7책 및 ≪송자서≫ 1책을 영인, 간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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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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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보(年譜) 5
숭정(崇禎) 42년 기유. 선생 63세

 


1월 초하루는 을미(乙未) 원조(元朝)에 예궐(詣闕)하여 안부를 묻고 하반(賀班)에는 참례하지 않았다.
○ 2일(병신) 정시무과파방당부의(庭試武科罷榜當否議)를 바쳤다.
○ 3일(정유) 금호문(金虎門) 안 별소(別所)에서 세자(世子)를 접견하고 이어서 차자(箚子)를 올려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구례(舊例)에, 부(傅)와 빈객(賓客)이 당(堂)에 올라 배례(拜禮)하고는 곧바로 물러갔다. 선생은, 처음 옥질(玉質)을 접견하고 차마 갑자기 물러갈 수 없다 하고, 또 옛사람이 서로 접견하면 반드시 말을 하여 서로 권면(勸勉)하고 규계(規戒)하였다 하여, 드디어 빈객(賓客) 민공 정중(閔公鼎重)과 함께 잠깐 동안 세자와 마주 앉아 몇 마디 말로 수작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비록 의리에는 어그러짐이 없으나 조정의 의식에 어긋남이 있다 하여 차자에서 황공하다는 뜻으로 대강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전자에 억지로 지체한 것은 다만 미정(微情)에 기다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소원이 이미 끝났고 돌아가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니, 바라건대 미정(微情)을 양찰(諒察)하시어 신이 고향에 돌아가 죽게 해 주소서.”
하였더니, 비답하기를,
“어제의 일은 아름다운 일이요 어그러짐이 없으며, 또한 전례가 있는데, 경이 어찌하여 불안하게 여기는가. 차자 끄트머리에 돌아가겠다는 말은 이게 무슨 말이며, 이게 무슨 말인가. 경이 입성(入城)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를 가르쳐 주는 지극한 뜻이 바야흐로 간절한데 나를 여지없이 버리고 이처럼 떠나려 하니, 다만 성의가 믿음을 받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더욱 부끄럽도다. 그리고 국사가 어려움이 많아 근심 걱정이 많으니 이야말로 함께 구제할 시기인데, 경이 어찌 차마 버리고 떠나랴. 모름지기 나의 뜻을 체득하여 영원히 떠나갈 계획을 일삼지 말고 안심하고 머물러 있으면서 간절한 소망에 부응해 주기 바란다. 후일 면대할 때에 또한 조용히 이르리라.”
하였다.
○ 4일(무술) 소대(召對)에 입시(入侍)하여 정릉(貞陵)을 복구하기를 청하였다.
《심경(心經)》의 강을 마치고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차자로 종묘(宗廟)에 전알(展謁)하시기를 청한 것은 다만 속례(俗禮)의 허배(虛拜)처럼 하려는 것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전배(展拜)만 할 뿐이라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거행하려 한다.”
하매, 선생이 아뢰기를,
“성교(聖敎)가 참으로 좋습니다.”
하였다. 동춘(同春)이 또 세자(世子)도 함께 나아가서 배례를 거행하기를 청하였더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도 이렇게 하는 것을 좋게 여긴다.”
하였다. 선생이 이어서 아뢰기를,
“종묘의 예절에 대해 이미 말이 나왔습니다. 신이 소회가 있었는데, 선조(先朝) 때에 진달하려다가 미처 하지 못하였습니다.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는 곧 태조(太祖)의 왕비(王妃)이십니다. 승하한 뒤에 정릉(貞陵)에 장사를 모셨는데, 국례(國禮)에 오히려 고려 제도를 써서 조석으로 재(齋)를 올렸습니다. 태조대왕께서 추념(追念)함이 매우 간절하시어, 매양 정릉의 경쇠 소리를 들으신 뒤에야 수라(水刺)를 드셨다 하니 태조의 성정(聖情)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능침(陵寢)이 매몰(埋沒)되어 제릉(齊陵)에 미치지 못하고, 또 태묘(太廟)에 배식(配食)도 되지 못하였으니, 예에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기(國忌 임금이나 왕후의 제삿날)에 휘일(諱日 죽은 날)을 쓰지 않은 것은 애당초 어떤 일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매, 선생이 아뢰기를,
“이와 같이 아뢰는 것이 극히 황공하오나, 대개는 이러합니다. 태조대왕이 개국(開國)하신 뒤에 정도전(鄭道傳) 등이 태종(太宗)을 얽어 모함하고 신덕왕후의 아들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일이 실패한 뒤에 신덕왕후의 소생인 소도(昭悼)와 공순(恭順) 두 왕자가 비명에 죽었으므로 그 뒤에 능을 성동(成洞)에 옮겼습니다. 이 때문에 배식(配食)되지 못하였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덕왕후는 다른 계비(繼妃)와는 다르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이 말을 아뢰는 것이 매우 미안하오나, 고려 때에 경외처(京外妻)가 있었으므로 태조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신덕왕후를 경처(京妻)로 삼았습니다. 태조대왕(太祖大王)께서 은례(恩禮)가 아주 지극하셨는데, 지금까지 태묘에 배식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미안합니다.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정신(廷臣)에게 널리 의논하여 태묘에 배향(配享)하고, 능묘(陵墓)를 고쳐 봉축(封築)하여 여러 능(陵)과 같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이 감히 만번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조용히 다시 생각해 보아서, 모든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선생이 또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에는 경계(經界)를 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국전(國典)에는 20년 만에 한 번씩 양전(量田)하도록 규정되었습니다. 경기(京畿)는 이미 고쳐 양전하였고, 충청도는 바야흐로 양전하고 있으니, 반드시 적당한 사람을 얻어야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감관(監官)을 다 사대부(士大夫)로 차정(差定)하였으니, 마땅히 그중에서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일 잘하는 사람을 재간에 따라 조용(調用)하여 격려 권장하는 소지로 삼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정(田政)이 정해진 뒤에는 반드시 보오법(保伍法)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비록 상앙(商鞅)이 행하던 것이나, 환난(患難)에 서로 구제하는 것은 민속(民俗)을 후하게 하는 것이니, 대개 주공(周公)의 제도에 근본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보오법(保伍法)을 행하지 않으면 민중을 정돈할 수 없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호적(戶籍)을 거듭 밝히고 있으니 보오법을 차례로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제(田制)를 수행(修行)하고 나면 군정(軍政)은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위법(五衛法)은 이미 중대한 법전이니 만큼 오늘날에 와서 닦아 밝히는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향약(鄕約)의 법으로 말하면, 이것이 말무(末務)이기는 하나, 지금 풍속이 점차 불미하게 되어 가니, 이도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아내를 얻되 동성(同姓)을 얻지 않는 것이 옛날 예법입니다. 국가에서 이미 옛날 예법을 따르고 있으나 민속은 아직도 변혁(變革)되지 않습니다. 이는 금지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니 앞으로는 관향(貫鄕)은 다르더라도 성자(姓字)가 같은 경우에는 서로 혼인하지 못하도록 금제(禁制)로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다 그대로 좇았다. 또 승도(僧徒)를 금지하기를 청하면서,
“전에 중 각성(覺性)이란 자가 한번은 말하기를 ‘승군(僧軍)의 총수가 제가 아는 바로도 17만이 된다.’ 하였는데, 이는 다 양민(良民)으로서 부역(賦役)을 도피한 자입니다. 만약 연한을 정해 두고 금제(禁制)하여 차례를 삭제해 버리면 어찌 국가의 힘입는 바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양인(良人)이 모역(母役)을 따르는 법은 실로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선묘조(宣廟朝)에 건청(建請)한 것입니다. 양민(良民)이 날로 줄어드는 것이 다 이로 말미암았는데, 그때 바로잡아 행하지 못한 것이 애석합니다. 지금 속히 제도를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니, 상이 후일에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인륜을 밝히는 것보다 앞서는 일이 없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심지원(沈之源)의 집안일은, 위에서 처치하신 것이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원은 이미 계후(繼後)하는 아들이 있는데도 자기 소생의 아들로 주사(主祀)하게 하였으니, 예제(禮制)에 크게 어그러짐이 있습니다. 마땅히 조정에서 개정(改正)하고 따라서 제도를 정해야 합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종법은 먼저 세족(世族)의 집안에서 행하여 양식이 만들어진 뒤라야 아래 사대부(士大夫)로 하여금 행하게 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지금 심지원은 곧 거실 세가(巨室世家)로 사대부들이 법받는 바이니,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드디어 명하여 다시 제도를 정하고 개정하도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저번 날 요무(妖巫)의 일을 차진(箚陳)할 적에 그 이름을 잘못 아뢰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배덕(倍德)입니다. 이 일은 신이 차마 말에 나타내지 못하겠습니다. 나라에 기강(紀綱)이 있으면 진실로 이미 죽음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혹 몰라서 금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알고서도 금하지 않으셨다면 매우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대개 이 무당(巫堂)은 망녕되이 선왕(先王)을 빙자하고서 요사한 짓을 부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수금(囚禁)하고 과죄(科罪)하도록 하였다.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한 말에 ‘기(氣)가 막힌 자에게 만약 배꼽 가운데 기해(氣海)에 뜸질하면 기가 화평하여져 사지(四肢)에 달한다.’ 하였으니,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이는 반드시 인심을 수습해야 함을 비유한 것입니다.
조복양(趙復陽)은 정신이 혼망(昏茫)하여 국시(國試)를 그르치기는 하였으나 사실은 딴마음이 없었으며, 또한 그 지성으로 나라를 걱정한 것은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박장원(朴長遠)은 일이 비록 잘못되었으나 그 효도와 우애, 맑고 삼가는 것은 조신(朝臣)의 모범이 되니 모두 오래도록 폐기(廢棄)해서는 불가합니다. 이단상(李端相)은 전부터 시종신(侍從臣)으로서 시골에 물러나 살면서 벼슬을 좋아하지 않고 독서에만 전념하니, 당상관(堂上官)으로 발탁하여 연석(筵席)에 출입하도록 해야 합니다. 김만기(金萬基)도 시종신으로서 오래도록 외읍(外邑)의 수령으로 있는데, 비록 보장(保障 요새(要塞))의 곳이라 하더라도 외직이 가볍고 내직이 중하니, 속히 소환(召還)해야 합니다. 김익경(金益炅)은 조정의 정사(政事)에 간여하였다 하여 아직도 죄폐(罪廢) 중에 있습니다. 인물을 진퇴(進退)할 때에 삼사(三司)의 관원은 으레 가부(可否)를 논하는 일이 있는데, 이것 때문에 죄를 얻는 것은 참으로 과중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근래 공경(公卿)들 중에 아경(亞卿 육조(六曹)의 참판)이 더욱 사람이 부족합니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데에는 반드시 여망(輿望)이 있는 사람을 거두어야 하는 것이니, 이민적(李敏迪)도 탁용(擢用)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한 말은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므로 마땅히 채택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 5일(기해) 차자를 올려 보내온 춘번(春幡)을 돌려보냈다.
선생이 생각하기를 ‘무익한 일을 하여 유익한 것을 해치지 말라는 말로 어전과 소와 차자 등에서 여러 번 아뢰었고, 지금 이 춘번(春幡)도 무익한 것 중에 더욱 심한 것으로서 이는 장차 물건으로써 희롱하고 사람으로써 희롱하는 것[玩物玩人]이 되고 만다.’ 하여 차자를 올려 극력 말하니, 비답하기를,
“오늘 이 일은 어찌 기뻐하되 실마리를 찾지 않을 뜻이 있겠는가? 지금 면대하여 다 이르고자 한다.”
하였다.
○ 소대(召對)에 입시(入侍)하였다.
《심경(心經)》을 강하다가 말이, 조정암(趙靜菴)이 여색을 멀리한 일에 이르자, 선생이 동춘(同春)과 함께 정암의 학문과 자품(資稟)의 아름다운 것과 참소를 받아 화를 당한 사유를 죽 들어 아뢰고, 다시 을사사화(乙巳士禍)에 미쳐서 현사(賢邪)의 소장(消長)의 분변에 대해 정성스럽게 말하여 기휘(忌諱)하는 바가 없으니, 상도 마음을 터놓고 받아들였다. 선생이 또 모역(母役)을 따르는 일에 대해 속히 제도를 정하여 변통하기를 청하였더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해서 상주하여 처치하게 하였다. 또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묘(陵墓)의 일에 대해 아뢰기를,
“송조(宋朝) 때에 전씨(錢氏 오월왕(吳越王) 전유(錢鏐))의 능묘에 잡초가 우거지매 길가는 사람도 탄식하였으므로 오히려 능묘를 수리하고 사당을 세웠는데 하물며 신덕왕후는 위호(位號)가 떨어지지 않았음에리까. 그 능묘가 이와 같이 매몰되니 사체에 있어서 급히 수개(修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관(禮官)에게 말하여 봉심(奉審)한 뒤에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노산군(魯山君)의 상사에 거두어 주는 사람이 없었으되, 그 고을의 아전 엄흥도(嚴興道)가 곧 가서 곡(哭)하고 스스로 관곽(棺槨)을 마련하여 염(斂)하고 장사하였으니, 지금 이른바 노산군(魯山君)의 묘가 그것입니다. 그 절의는 후인들이 일컬어 마지않습니다. 신이 전조(銓曹)에 있을 때에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려 하였으나, 있는지 없는지를 몰라서 끝내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듣건대, 그 자손이 본군(本郡 영월)에도 있고 괴산(槐山) 지방에도 있다 합니다. 그 국가에서 절의를 붙들어 장려하는 도리에 녹용(錄用)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該曹)에 말하여, 방문해서 녹용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마땅히 일체가 되어야 하는데, 궁녀(宮女)를 선택(選擇)하는 명령이 내사(內司 궁궐 안의 관사)에서 나오게 되니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옛날 임금은 재변을 만나면 수성(修省)하여 혹 궁녀를 방출(放出)하는 일도 있었으니, 이와 같은 때에 어찌 반드시 궁녀를 간택(簡擇)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비록 부득이한 데에서 나왔으나, 그 인연하여 폐단을 만드는 자는 엄히 조사하여 처치하겠다.”
하였다.
○ 6일(경자) 서연(書筵)에 나아가서 《소학(小學)》을 강하고 이어서 소대(召對)에 입시하였다.
국제(國制)에, 서연(書筵)에는 회강(會講) 이외에 사(師)ㆍ부(傅)가 입참(入參)하는 일이 없으되, 선생은 상규(常規)를 벗어나서 입강(入講)하려고 하여, 궁관(宮官)을 시켜 이 뜻을 세자(世子)에게 품달(稟達)하고 드디어 동춘(同春) 및 빈객(賓客) 민공 정중(閔公鼎重)과 같이 들어가서 편례(便禮)로 진강(進講)하였더니, 세자는 섬돌을 내려와서 맞이하고 전송하였다. 승지가 ‘후일에도 매양 진참(進參)하겠다.’는 뜻으로 아뢰었더니, 상이 이르기를,
“부(傅)가 서연(書筵)에 참여하려는 것은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불초한 세자를 개도(開導)하여 도와 성취시켜 주는 것이 곧 내가 바라는 바다. 계사(啓辭)에 의하여 하라.”
하였다. 서연이 파하자, 드디어 소대에 입시하여 동춘과 함께 《심경(心經)》을 진강한 다음,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송(宋) 나라가 남도(南渡)한 뒤에 온갖 것이 궤열(潰裂)되어 수습할 수 없으므로 그때 말하기를 ‘반드시 한 자 베, 한 말 곡식도 아껴서 일체 낭비를 없애 버린 뒤에 중흥(中興)을 의논할 수 있다.’ 하였으니, 오늘날의 형세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약 낭비를 없애 버리고 재용(財用)을 절약하지 않으면 어찌 군국(軍國)의 일에 여가가 있겠습니까.
또 말하기를 ‘대승기탕(大承氣湯)의 증세에 사군자탕(四君子湯)을 써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이 말은 대승기탕(大承氣湯)의 증세에 써야 하고 사군자(四君子)의 느슨히 보(補)하는 약제(藥劑)를 써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송(宋) 나라가 남도(南渡)한 뒤에 나라가 망하게 될 형세가 있음이 마치 사람이 숨이 끊어지려는 것과 같은데, 진작 분발하려는 계책은 하지 않고 날마다 나른하고 느긋하게 함을 일삼으므로 그렇게 비교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형세도 송(宋) 나라가 남도한 뒤와 다름이 없는데, 나른하고 느긋하게 하여 진작하는 기상이 전혀 없으니, 이러고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대승기탕(大承氣湯)의 증세에는 사군자탕(四君子湯)을 써서는 안 되니, 상께서는 이 말을 깊이 체득하여 일상생활에 잊지 마소서.”
하였다. 민공 정중(閔公鼎重)이 상에게 아뢰기를,
“세자(世子)가 입학할 때에, 유생(儒生)의 복장을 이제 고쳐야 하니, 중국의 난삼(欄衫) 제도를 따르소서.”
하니, 상이 건(巾)과 의복이 같지 않은 것으로써 맞지 않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지금 유생이 착용하는 두건(頭巾)이 무방한 듯하나, 흰 도포 푸른 옷깃[粉袍靑衿]은 이미 상고할 만한 문구가 있으니, 중국 제도를 따라 고치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민공이 또 태안(泰安)에 포구(浦口)를 파는 일로 진달하기를,
“봄철이 다가왔으니, 속히 의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해마다 배가 부숴져서 죄 없는 사람이 많이 빠져 죽게 되니 실로 불쌍합니다. 만약 포(浦) 파는 것을 어렵게 여기시면, 우선 포 파는 곳에다 창고를 설치하여 거두어들인 세곡(稅穀)을 물이 순한 곳으로 옮겨 실어야 배가 부숴지는 근심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창고를 설치하는 계책이 가장 안전한 것입니다.”
하였다.
○ 7일(신축) 차자를 올려 일을 논하였다.
선생이 생각하기를 ‘이처럼 나라가 위태로운 날에 외방(外方)의 병기가 아이들의 장난감과 같으되 여러 병영(兵營)에서도 손을 대는 곳이 없으며, 이제 국가의 재용이 매우 부족하여 또한 부응하기 어렵습니다. 오직 외방 노비(奴婢)가 바치는 쌀과 포목(布木)의 수효가 꽤 많으니, 만약 이 쌀과 포목을 덜어내어 여러 병영에 부쳐 주면, 여러 병영도 그 일을 닦아 거행할 수 있고 노비들도 그 왕래하며 수납(輸納)하는 노고와 요구하고 막아 버리는 폐단이 없게 될 것이다.’ 하여 드디어 차자를 올려 말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차자 사연은 실로 근본을 염려하는 깊은 의도인 것이니, 강정(講定)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 9일(계묘) 서연(書筵)에 나아가서 그대로 소대에 입시하였다.
《심경(心經)》의 강을 마치고, 공물(貢物) 감하는 일에 대해 논급(論及)되자, 선생이 아뢰기를,
“긴요하지 않은 물건은 그 공물을 파하고 그 가미(價米)를 헤아려 궐내에 받아들여서, 궐내에서 무역하여 쓰고 남는 것이 있거든 공족(公族) 중에 가난한 이에게 주면 이도 또한 구족(九族)을 친애(親愛)하는 뜻이니,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민공이 또 태안(泰安)에 창고를 설치하는 일에 대하여 아뢰니, 선생이 아뢰기를,
“이는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이 건의한 것으로써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만약 창고를 설치하는 일로 오로지 김좌명(金佐明)에게 위임하여 내려 보내어 본도의 감사와 함께 상의하여 시행하게 하면 일이 성취될 수 있고, 김좌명에게도 계술(繼述)하는 아름다움이 있게 됩니다.”
하고, 선생이 또, 노비(奴婢)의 공물(貢物)을 여러 병영(兵營)에 떼어 주어 기계를 장만하는 일에 대하여 거듭 청하니, 상이 호조 판서에게 묻기를,
“각 고을에 남겨 둔 공목(貢木)의 수효가 얼마나 되는가?”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각도의 군수(軍需) 중에 화약이 더욱 부족하니, 미리 조치하여 완급(緩急)의 용도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매, 선생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그렇습니다. 이제 만약 노비의 공물을 떼어 주어 조치하게 한다면, 반드시 다 무명으로 할 것이 아니라 삼베 혹은 쌀로 얻는 대로 바치게 하고, 또한 반드시 일시에 다 바치게 할 것이 아니라 궁하고 쇠잔한 노비들이 만약 그 힘에 따라서 얻는 대로 바치도록 한다면 일시에 작목(作木)하여 상납하는 것에 비하여 어렵고 쉬움이 저절로 구별될 것이요, 또한 빈궁한 백성에게 은혜가 미칠 것입니다. 이는 또한 공사(公私) 양쪽이 편의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 말을 경청(傾聽)하였다.
○ 10일(갑진) 왕세자알묘의(王世子謁廟議)를 바쳤다.
○ 소대에 입시(入侍)하였다.
좌의정 허적(許積)이 안흥(安興)에 조창(漕倉)을 설치하는 것의 폐단되는 일로써 상에게 아뢰기를,
“서울에서 낭청(郞廳)을 보내어 10여 만 석의 곡식을 감검(監檢)하여 받아들이매, 여러 날 머물러 있어서 주전(廚傳)의 폐단이 있습니다.”
하고, 또,
“곡식 섬을 창고에 내고 들이거나 마질하고 옮길 때에 반드시 감축할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조선(漕船)이 부숴지는 일은 거의 없고 혹간 있는데, 거짓으로 부숴뜨린 것이 대부분이니, 이는 다 사공(沙工)들이 미곡(米穀)을 도둑질한 소치이지 반드시 지세가 험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조창을 설치한 뒤에 파선(破船)되는 근심은 전보다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하므로, 선생이 아뢰기를,
“신이 아뢴 바는 인명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설령 수백 휘[斛]의 쌀을 손실한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죽음을 구제한다면 전하께서 반드시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전부터 성상의 하교에 매양 ‘미곡의 침몰로 잃어버리는 것을 크게 아깝게 여길 것이 아니고 인명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불쌍히 여길 일이다.’ 하셨으니, 이는 인정(仁政)입니다. 조창을 설치한 뒤로 내고 들이고 운반할 즈음에 줄어듦이 없지는 않으나, 반드시 파선되어 물에 빠져 죽는 근심이 없다면, 이는 이해(利害)가 분명합니다. 또 신이 어제 이미 진달한 사곡(私穀)을 붙여 싣지 못하는 것은 이 일이 공(公)에는 이로우나 사(私)에는 해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양 죄 없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다에 빠져 죽게 하는 것이 불쌍하기 때문에 다른 일은 따지지 않고 이런 일을 한 것뿐이다.”
하였다. 허적이 또 공물을 감하는 것의 불가함을 아뢰기를,
“공물의 대가는 매우 많으나, 국가에서 갑절의 대가를 주는 것은 도성 백성으로 하여금 이를 힘입어 보전하게 하려는 것이니, 이제 만약 다 혁파한다면 폐단을 반드시 제거하지 못하고 먼저 도성의 백성에게 원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므로, 선생이 아뢰기를,
“모든 각사(各司)의 공물을 일시에 다 혁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 너무 심한 것은 없애버리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또한 많으며, 저들도 힘입어서 보존할 것입니다. 또 공물은 주인(主人)의 이익이요 국가의 해인데, 어찌 이들의 원망을 걱정할 수 있겠습니까. 각사의 공물의 폐단이 한이 없어서, 국가의 경비가 다 이에 돌아가니, 신의 생각으로는, 이런 일을 다 혁파하지 않으면 마침내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였다. 허적이 또 공물을 혁파하기 어려운 상황을 갖추 진달하였는데, 잗단 말이 많았다. 선생이 아뢰기를,
“조정의 의논이 이와 같이 갈라짐이 많으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공물은 주인(主人)의 무리들이 하는 일 없이 편안히 앉아서 국가의 곡식만 허비하니, 이는 다 요행으로 사는 백성입니다. 만약 나라를 위하려 한다면 어찌 요행으로 사는 백성으로 하여금 원망하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의 사람 중에 그런 무리가 한없이 많은데, 앉아서 국가 곡식의 경비를 도둑질해서 농사 짓지도 않고 의복과 음식을 잘 입고 잘 먹으니, 만약 다 변통하지 않으면 국사가 마침내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또 백관에게 녹을 더 주는 일을 불편하게 여겨 말하기를,
“지금 비록 녹을 약간 더 주더라도 어찌 사람의 염치를 면려(勉勵)할 수 있겠습니까. 낭비를 없애는 때를 당하여 남겨 두어 수재와 한재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어떠한가?”
하매, 선생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녹은 농사를 대신할 만큼 넉넉하지 못하니, 녹을 더 주는 일은 참으로 좋습니다만, 만약 경비의 부족을 염려한다면, 이 말도 한 방법이 됩니다. 그러나 만약 일체의 낭비를 다 제거한다면,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반록(頒祿)의 수량으로 주더라도 부족할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또 ‘공사천(公私賤)이 모역(母役)을 따르는 법’을 논하므로 선생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일은 사천(私賤)이 공천(公賤)보다 나으니, 이 법이 아마도 중간에 폐지될 듯합니다.”
하고,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정초군(精抄軍)을 신설할 일로써 상주하여 정하기를,
정초군의 삼보(三保)도 어영군(御營軍)의 규정과 같이 상번(上番) 때에 급료(給料)를 주고 또 거기에 소용되는 쌀로 반드시 관에서 거두어들인 뒤에야 다 거두어들여져서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훈국(訓局)의 군병이 도성에서 편히 앉아 늠료(廩料)를 소비하고 있으니 국가의 저축이 고갈되는 것은 실로 이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리고 매우 교만하고 한악스러워 제어하기 어렵고, 태만하여 쓸데가 없습니다. 만약 어영청(御營廳) 군병이 상번(上番)하는 규례(規例)에 의하여 남북(南北)의 군으로 나누면 국가에서는 양병(養兵)하는 폐단이 제거되고, 경사(京師)의 근본이 되는 곳도 소홀한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이완(李浣)을 보고 이 제도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불가하다고 대답하였으니, 대개 이완의 뜻은, 도성에서는 친병(親兵)이 없어서는 안 되고 또 이 군사가 오로지 국고의 늠료(廩料)를 의지하고 있으므로 갑자기 제거할 수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이는 반드시 일시에 혁파할 것이 아니라, 결원이 있으면 보충하지 말고, 또 그 수효를 어영(御營)의 군사로 옮기며, 만약 시골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가 있거든 또한 들어주어 어영의 역(役)을 따르게 하면 몇 년이 못 되어 다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이 끝내 협의되지 않았다. 그래서 훈국(訓局)의 군사는 혁파되지 않고, 정초군(精抄軍)도 별도로 한 군영이 되어, 국가에서 양병하는 비용과 훈국의 군사가 교만하고 태만한 습관은 전과 같고, 별초군(別抄軍)의 액수를 채울 때에 소요만 더할 뿐이므로 선생이 개탄하였다.
○ 차자를 올려 돌아가기를 빌었더니, 우례(優禮)로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 13일(정미) 차자를 올려 교졸(轎卒)을 내린 명을 사양하였다.
상이 병조 판서 홍공 중보(洪公重普)의 말을 써서 본조(本曹)로 하여금 교졸(轎卒)을 정해 보내서 말 타는 노고를 대신하게 하였다. 선생이, 정자(程子)ㆍ왕 형공(王荊公)의 ‘사람으로써 짐승을 대신하지 않는다.’는 말조중봉(趙重峯)이 집안사람으로 하여금 지고 이고서 걸어가는 것을 익히도록 한 일을 끌어대어 차자를 올려 극력 사양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으나, 선생은 끝내 받지 않았다.
○ 15일(기유) 왕을 모시고 태묘(太廟)를 배알(拜謁)하였다.
선생이 예궐(詣闕)하니, 판부사(判府事) 정공 치화(鄭公致和)가 와서 말하기를,
“세자(世子)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라서 영녕전(永寧殿)에 배례하지 않는 것이 미안합니다.”
하므로, 선생이 곧 예조의 낭관(郞官)을 불러, 예조 판서에게 말하게 하기를,
“비록 《국조오례의》에 없는 것이기는 하나 영녕전은 태조(太祖)의 사친(四親)을 모셨으니, 어찌 배례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고, 드디어 계품(啓稟)하게 하여 윤허를 받고, 이어서 국가의 헌장(憲章)이 되었다.
○ 16일(경술) 차자를 올려 분황(焚黃)의 휴가를 청하였더니, 윤허하지 않았다.
○ 17일(신해) 소대에 입시하였다.
강서(講書) 및 논사(論事)를 마치자, 상이 이르기를,
“어제 경의 차자를 보았으나 면유(面諭)하고자 하였으므로 비답하지 않았다.”
하매, 선생이 대답하기를,
“노병(老病)이 이미 극도로 심하여 국가에 도움이 없으므로 매양 전원에 돌아가 다시 책이나 정리하면서 여생을 마칠까 하였는데, 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전후의 따뜻한 유지(諭旨)는 감히 받들 수 없음이 있습니다. 또 분황하는 일은 사정이 절박하니, 하루아침에 죽어 버리면 선신(先臣)의 영에 미처 고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의 관례(冠禮)가 머지않으니, 경이 외방에 있더라도 오히려 불러와야 하는데, 하물며 경이 여기에 있으니 어찌 갑자기 돌아가게 하겠는가. 관례가 지난 뒤에 조용히 날이 따뜻하기를 기다려 갔다 돌아옴이 좋겠다.”
하였다.
○ 20일(갑인) 소대에 입시(入侍)하였다.
강서(講書)를 마치자,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호조 판서가 진달한 재량하여 감하는 일은 다 신이 아뢴 바, 낭비를 제거하자는 그 뜻입니다. 상께서 이런 훌륭한 거조가 계시니, 아랫사람은 성상의 뜻을 체득하여 처지에 따라 미루어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이 띠고 있는 중추부(中樞府)를 말하더라도 녹사(綠事 중추부의 아전)의 수가 너무 많아서 이는 매우 긴요치 않으니 또한 감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아조(我朝)에서 치평(治平)이 성하기로는 기묘(己卯) 연간만한 때가 없으나, 그때에 추치(騶直)를 집에 들여오지 않은 것으로써 사부(士夫)의 청절(淸節)로 삼았으니, 오늘날 이른바 구채(丘債)는 일체 혁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감사(監司)는 반드시 구임(久任)으로 하여야 공효(功效)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구임하게 하려면 반드시 식구를 거느리고 가야 하니, 이는 속히 재량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논의는 전부터 있었으니 사세가 진실로 그러하다. 후일 여러 대신(大臣)이 등대(登對)할 때에 품정(稟定)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 21일(을묘) 조참(朝參)에 들어가 일을 아뢰었다.
선생이 반열에 나와서 아뢰기를,
옛말에 ‘선비는 말을 전달하고, 백성은 말을 한다.’ 하였으니, 유사(儒士)와 서민이라도 소회가 있으면 오히려 아뢰었습니다. 지금 백관 중에 반드시 소회를 아뢰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요, 위사(衛士) 중에도 어찌 그런 사람이 없겠습니까. 나아와서 주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회가 있는 자에게는 나아와서 주달하게 하라.”
하고, 이어서 사관(史官)을 명하여 유지(諭旨)를 전하게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수명(修明)하는 일은 이미 아뢰었으나, 오래도록 수명하는 거조가 없으니, 이 조회 보는 때에 총재(冢宰) 이하의 관원으로 하여금 각각 육전(六典) 중에서 행해야 할 일을 곧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접때 민정중(閔鼎重)이 아뢴 바, 공물을 재량하여 감하자는 것은 다 재용을 절약하는 방도입니다. 재량하여 감한 뒤에 황조(皇朝)의 예에 의하여 하시렵니까? 공물인(貢物人)에게 맡겨서 하시렵니까? 신은 공물을 다 혁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낭비가 너무 많기 때문에 바로잡으려 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전처럼 공물인에게 맡기면 지나친 폐단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또 옛날에 임금이 종족을 후대(厚待)하여, 사여(賜與)가 절도가 있고 접견이 때가 있었는데, 근래에는 이런 일이 전혀 없으니, 참으로 미안합니다. 모든 종실(宗室)이 전하에게는 친소(親疎)의 구별이 있으나, 조종(祖宗)의 처지에서 보면 다 지친(至親)이십니다.”
하고, 또 신진(新進)을 침학(侵虐)하는 폐단에 대하여 진달하기를,
“조가(朝家)에서 금단(禁斷)을 거듭 밝힌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금령(禁令)을 업신여기고 오히려 전의 습관을 답습하고 있으며, 무인(武人)에 이르러서는 요구하는 바 비용이 적지 않으므로 시골의 빈궁한 사람이 면신(免身)할 수 없어서 벼슬살이를 하지 못하기도 하니 일이 극히 놀랍습니다. 일체 통렬히 금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선생이 또 나아가 아뢰기를,
“국가에서 숭상하여 장려하는 바는 도학(道學)과 절의(節義)에 있을 뿐입니다. 송(宋) 나라가 망할 때에도 오히려 배 안에서 《대학(大學)》을 강론하였으니, 임금과 신하가 마침내 정도(正道)를 지키며 죽고 오랑캐에게 더럽힘을 당하지 않은 것은 실로 강학(講學)한 효험입니다. 한(漢) 나라가 망할 무렵에 조조(曹操)가 한정(漢鼎)의 곁에서 배회하고 마침내 감히 찬탈(簒奪)하지 못한 것은 실로 절의의 효험입니다. 국가의 병자년(丙子年) 난리에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3인은 절의가 숭상할 만한데도 아직도 포증(褒贈)을 받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흠전(欠典)입니다.”
하니, 장선징(張善澂)이 아뢰기를,
“3신은 일찍이 증직(贈職)되었습니다.”
하므로, 선생이 아뢰기를,
“아직도 정표(㫌表)하는 거조는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번거로워서 거행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선생이 또 나아가 아뢰기를,
“임금의 도는 반드시 집안사람을 먼저 바루어야 하는데, 근래에 모든 궁가(宮家)의 전답(田畓) 절수(折受)가 매우 민폐가 됩니다. 양서(兩西 관서(關西)와 해서(海西))는 변방 지역인데 모든 궁가(宮家)에서 절수한 것이 없는 데가 없으니, 어찌 전하의 집안사람으로 하여금 백성과 이익을 다투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와 같은 유는 아울러 혁파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뒤로 양서(兩西)에는 모든 궁가가 절대로 절수(折受)하지 말도록 엄중히 신칙하는 것이 옳다.”
하매, 선생이 아뢰기를,
“신의 의견으로는 이 뒤로 금단할 뿐만 아니라, 전일 절수한 곳도 아울러 혁파해야 합니다.”
하였다. 선생이 또 나아가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명분을 바로잡는 데에 있으니 옛사람은 이에 삼가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익평위(益平尉)가 사는 궁(宮)은 곧 선왕(先王)의 잠저(潛邸) 때 임어하시던 곳이요, 동평위(東平尉)인평위(寅平尉) 등 모든 부마(駙馬)의 궁은 곧 대궐(大闕)의 터여서, 모두 인신(人臣)으로서는, 감히 들어가 살 곳이 못됩니다. 국가에서 비록 집을 지어서 주게 하였더라도 모든 부마가 어찌 감히 안연히 들어가 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에서 사급(賜給)하신 곳이므로 지금 다시 의논하기 어렵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성상의 의사는 매우 후덕하시나, 저들로서 어찌 감히 들어가 살겠습니까. 국가에서 다른 집을 고쳐 지어 주는 것이 사리에 매우 합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그 간살은 일체 법전(法典)에 의하는 것도 금제(禁制)를 밝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말은 옳게 여기면서도 일은 어렵게 여겼다. 이어 이르기를,
“판부사(判府事 송시열을 말한다)가 조정에 있으면서 매사를 상의하여 하니, 내가 매우 기쁘게 여긴다.”
하였다.
○ 25일(기미) 차자를 올려 신덕왕후(神德王后)를 태묘(太廟)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였다.
이때 상이 선생의 건의에 따라서 특별히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정릉(貞陵)을 봉심(奉審)하게 하고, 꼭대기에서 내리누르고 있는 수목을 베어 내어 재사(齋舍) 및 수관(守官)을 두게 하였으나, 태묘에 배향하는 일은 오히려 어렵게 여겼다. 선생이 또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이는 큰 윤기(倫紀)를 밝히고 큰 법을 세우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이른바 큰 윤기란 부자(父子)ㆍ군신(君臣)ㆍ부부(夫婦)이며, 이른바 큰 법이란 군신ㆍ부자ㆍ부부 세 가지 사이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밝지 못한것이 있고, 세 가지 사이에서 행하는 것 중에 한 가지라도 미진한 것이 있으면 중국이 이적(夷狄)에 빠지고 인류가 금수로 돌아가므로, 성인이 스스로 행하는 것과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대개 이것으로써 우선을 삼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유독 신덕왕후의 능침(陵寢)의 의식이 손상됨이 있고 배향의 예가 오래도록 결여된 것은 이는 당시 예관이 예의(禮儀)를 알지 못하고 망녕되이 헤아려서 이와 같이 되어 구차하게 그대로 따라서 오늘날에 이른 데 불과하니, 태조대왕의 영이 몹시 상탄(傷歎)하고 진노(震怒)하실 것이요, 태종대왕도 또한 위축되고 불안하여 오르내리고 좌우에서 모실 때에 근심하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며, 겸하여 일국의 신민도 모두 성자 신손(聖子神孫 성군(聖君)의 자손이란 뜻)이 태종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지 못함을 의심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묘향(廟享)의 의식을 오히려 의심하고 주저하시니, 신은 진실로 성의(聖意)의 소재를 알겠습니다만, 능향(陵享)이나 묘식(廟食)은 예에는 다를 것이 없는데, 하나는 두고 하나는 폐하니 일이 근거가 없습니다.”
하고, 이어서 태조조(太祖朝) 태학생(太學生) 채증광(蔡增光)이 지은 장소 및 권근(權近)이 지은 흥천사(興天寺)의 기문(記文)을 정리하여 올려서, 예관으로 하여금 아울러 묘향(廟享)의 의식을 의논하게 하기를 청하였더니, 상이 비답하기를,
“이 일은 중대하여 가벼이 행할 수 없으니, 후일 등대(登對)할 때에 상의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이에 영부사(領府事) 이경석(李景奭)이 한편의 속류(俗流)와 함께 힘껏 저지하였으나, 조신(朝臣) 및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소장을 교대로 올려 극력 청하여 마침내 승부(陞祔)하였다.
○ 28일(임술) 삼청동(三淸洞)을 유람하였다.

2월 초하루는 갑자(甲子) 3일(병인) 차자를 올려 병을 이유로 서추(西樞)와 양연(兩筵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의 여러 소임을 해면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였다.
이날 빈청(賓廳)에서 신하들을 관례로 면대할 적에 상이 특명으로 선생 및 동춘을 같이 들어오게 하였으나, 선생이 마침 병으로 입대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차자를 올려서 서추(西樞) 및 영경연(領經筵)ㆍ세자부(世子傅)의 소임을 다 해면해 주기를 빌었더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태의(太醫)를 명하여 병을 간호하게 하였다.
○ 대신과 재상들이 입대(入對)하였다. 김공 좌명(金公佐明)이 포구(浦口) 파는 일과 조창(漕倉) 설치하는 일의 이해(利害)에 대하여 갖추 진달하되, 선생의 의논에 따라서 우선 조금 시험해 보려 하고, 동춘이 그 조금 시험해 보려는 의견으로 힘껏 진달하였더니, 좌상 허적이 ‘분명히 그것이 불가함을 안다.’ 하고, 서필원(徐必遠)이 또 옆에서 돕고 심지어는,
“삼남(三南)의 복물(卜物)이 다 세선(稅船)을 통해서 오는데, 일체 싣는 것을 금지하면 서울이 장차 빈궁함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제신(諸臣)들도 또 다 어렵게 여겼다. 상이, 해마다 인명이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을 민망히 여겨 선생의 의논을 따르려 하였으나, 허적 등의 의논이 매우 강력하여 마침내 행하지 못하였다.
○ 7일(경오) 차자를 올려, 공물(貢物)을 재량하여 감하는 것 및 안흥(安興)에 조창을 설치하는 일을 논하고, 다시 해직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때 이서(吏胥)가 사부(士夫) 중에 미련하고 이익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공물을 재량하여 강하는 의논을 크게 미워하여, 원망과 비방이 하늘에 사무치고, 허적이 또 반드시 조창 설치하는 의논을 저지하려고 몰래 형조 판서 서필원을 사주(使嗾)하여, 상소하여 자기를 배척하게 하되, ‘이 일이 국가에 해로움이 있음을 알면서도 직언(直言)으로 간하여 말리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불충으로 삼았다. 선생은, 시사(時事)가 끝내 사공(事功)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차자를 올려,
“조창을 설치하는 일은 곤수(閫帥 병사(兵使)나 수사(水使)를 말한다)나 수령이 사사 복물(卜物)을 권문(權門)에 보내는 데에 편리하지 못하고, 공물을 감하는 것은 이서(吏胥)들과 권귀(權貴)한 사부(士夫) 중에 이익을 탐하는 사람에게 해가 있습니다.”
라고 극력 진달하고, 또 서필원이 대신을 지척하여 불충하다고 하는 것도 ‘조정에서 체통이 서지 않고 사의(私意)가 함부로 꿰져 흐름으로 말미암아 대소(大小)가 서로 받드는 의리가 없고 총행(寵倖)이 마구 자행하는 거조가 있어서 점차 변하여 이처럼 극도에 이르게 되었다.’ 하고, 이어서 해직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위유(慰諭)하며 허락하지 않고 또 서필원을 추고(推考)하도록 하였다.
○ 10일(계유) 차자를 올려, 휴가를 받아 분황(焚黃)하게 해주기를 청하였더니 윤허하지 않았다. 11일(갑술)에 다시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국사가 이미 일을 해 나갈 수가 없고 원망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상이 비록 위유(慰諭)하고 만류하여 은례(恩禮)가 갖추 이르렀으나, 선생의 돌아갈 뜻은 더욱 확고하였다. 드디어 차자를 올려 휴가를 청하는 것으로써 말을 삼았다.
○ 12일(을해)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유지(諭旨)를 전하였다.
선생이 이미 돌아갈 계획을 결정하자, 옥당(玉堂)이 입대(入對)하기를 청하였다. 응교(應敎) 남이성(南二星)이 나아가 아뢰기를,
“듣건대, 판부사(判府事) 송모(宋某)가 지금 내려가려 한다 합니다. 상께서 애당초 지성으로 초치하시고서, 이제 갑자기 내려가게 한다면 ‘어제 등용된 신하가 오늘 도망하여도 모른다.’는 것에 가깝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엇 때문에 결의하고 돌아가려 하는가?”
하매, 남공(南公)이 아뢰기를,
“반드시 근일 설시(設施)의 건의에 막고 흔드는 자가 많이 있으므로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고서 가 버린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논의와 시비가 있는 것이나, 임금이 만약 굳게 정하여 단연코 반드시 행할 뜻을 보인다면 일이 곧 성취함이 있을 것입니다. 성상이 모(某)에 대해 예모(禮貌)로 우대함이 지극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만약 굳게 정하는 뜻이 없으면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근일 분운(紛紜)한 의논은 그 근본을 미루어 보면 다만 상의 마음에 있을 뿐입니다. 옛날 제갈량(諸葛亮)이 일을 해쳤다 하여 요립(廖立)을 폐하였고, 부견(苻堅)은 왕맹(王猛)을 임용하기 위하여 번세(樊世)를 죽였습니다. 부견은 이적(夷狄)의 임금이었으나, 군신(君臣)의 계합(契合)은 진실로 아름다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분운(紛紜)한 의논에 끌려서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는 하루 이틀에 행할 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개월을 지난 것은 그 말을 쓰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다. 다 내가 불민한 소치이다. 만약 뜻을 결정하고 내려간다면 일이 불행할 뿐만 아니라 내가 매우 섭섭하다.”
하매, 남공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이처럼 간절하시니, 신등이 다시 아뢸 것이 없습니다만, 대개 일을 하는 데에 위에서 결정하는 마음이 있으면 뜬 의논이 나올 길이 없을 것입니다. 성상께서 명령을 엄하게 하는 의사가 없는 듯합니다. 송모(宋某)가 건의한 일은 조창을 설치하는 것 및 공안(貢案)을 재량하여 감하는 두 가지 큰일입니다. 조창을 설치하는 일은, 신이 전일에 이미 아뢰었거니와, 공안을 재량하여 감하는 일은 곧 3백 년의 폐단을 혁파하는 일인데, 서필원이 ‘도성 백성이 세전(世傳)하는 업을 잃어버린다.’ 하니, 이와 같은 잗단 말을 어찌 감히 천청(天聽)에 아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애초에는 이의(異議)가 없지 않았으나, 내 생각으로는, 근거 없는 의논이 도리어 헛말이 되고 나면 저절로 정해질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접때 그의 차자 끄트머리의 말을 보고, 그것이 반드시 행할 만한 일임을 알았고 근거 없는 의논은 염려할 것이 없다고 여겼다.”
하매, 남공이 아뢰기를,
“서필원도 오히려 이런 말을 한다면, 무식한 사부(士夫)들이 화응(和應)하여 허풍을 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당사자의 불안은 형세로 보아 반드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 판부사가 현재 성중(城中)에 있는가? 승지는 내 뜻으로 가서 이르는 것이 좋다.”
하고, 이어서 하교(下敎)하기를,
“경이 올라온 뒤로 경의 힘을 입어 거의 시행하고 조처하는 바가 있게 되었는데, 이제 내려간다 하니 내 마음에 서운하여 마음을 잡을 수 없다. 이튿날 아침에 들어오면 내가 면유(面諭)하겠다.”
하였다.
○ 13일(병자) 양심합(養心閤)에 입시(入侍)하였다.
상이 선생에게 이르기를,
“경이 시골로 내려갈 계획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내 뜻을 면유(面諭)하려고 들어오게 하였다.”
하매,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에게 절박한 사정이 있습니다. 신의 장성한 손녀가 병으로 갑자기 죽어서 매장(埋葬)해야 하며, 또 죽은 아버지가 추증(追贈)하는 은전(恩典)을 입게 되었으므로 분황례(焚黃禮)를 반드시 속히 행하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분황례는 자제로 하여금 대행하게 하고, 손녀를 매장하는 일은 꼭 친히 보아서 슬픈 회포만 더할 것이 없다. 또 경이 건백(建白)하여 시행 조처하는 일은 아직도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경의 떠나가는 길을 우선 늦추어서 상의해야 하고, 또 날이 따뜻하거든 떠나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다.”
하매, 선생이 아뢰기를,
“신이 매양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뜻으로써 진달하였으나, 근일에 조정에서 별로 크게 절약하고 줄이는 일이 없고, 솔잎[松葉]을 진배(進排 물건을 진상하는 것)하는 등의 일도 곧 낭비로서, 감할 만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일은 혁파하기에 무엇이 어렵겠는가. 솔잎ㆍ도판(桃板)도지(桃枝)춘번(春幡)인승(人勝)세화(歲畫)는 모두 혁파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선생이 또 모든 궁가(宮家)를 뜯어 옮기는 일로써 곡진하게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께서 안접(安接)하게 한곳을 이제 만약 갑자기 뜯어 옮긴다면 비록 그들의 마음에는 편안하더라도 유독 내 마음에는 편안하겠는가. 이는 억지로 따를 수 없다. 제택(第宅)의 제도에 이르러서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실린 것으로써 말하면, 대군(大君)의 집은 60칸에 불과하다. 이른바 60칸이란 곧 그 정침(正寢)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요, 행랑(行廊)까지 아울러 계산한 것은 아니다. 이제 만약 행랑과 정침을 나누지 않고 다만 60칸으로 한정을 한다면 그 형세가 용접할 수 없을 듯하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이제 바야흐로 《경국대전》을 이정(釐正)하는 일이 있는데, 궁가(宮家)에 대해서만은 이정하지 못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의 말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불안함이 앞서 말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장래에 공주(公主)를 위해 집을 세워야 할 일이 있으니, 이때에 경들이 내 뜻을 알 것이다.”
하였다.
○ 14일(정축) 차자를 남겨 두고 동쪽으로 나와서 영릉(寧陵 효종의 능) 및 건원릉(健元陵 태조의 능) 등 여러 능을 전알(展謁)하였더니, 상이 승지를 연달아 보내어 머무르기를 권면하였다.
선생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제 서울을 떠나가면 다시 올 날이 없다.’ 여겨서, 드디어 영릉(寧陵)을 배사(拜辭)하고 그 길을 돌아서 건원릉(健元陵) 등 여러 능을 두루 전알(展謁)하고 도로 시골길을 향해 떠나려 하였다. 상이 차자를 보고 놀라고 탄식하여 승지를 보내어 비답을 내리기를,
“경의 차자를 보니 나도 모르게 놀랍고 부끄럽다. 어제 면대하여 이를 적에 말이 서툴러서 내 소회를 통창(通暢)하게 말하지 못하였으나, 경의 답한 바도 마음에 결정한 말이 없었으므로 내 생각으로는 ‘경의 지극한 정이 간절하나 내 말을 근거 없다고 여기지 않아서, 혹 일기가 따뜻할 때에 다시 청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여겼더니, 이제 길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미친 듯, 취한 듯하여 비로소 평일에 경에게 신임을 얻지 못한 것이 한탄된다. 경이 만약 내 성례(誠禮)가 부족하다 하여 거취(去就)를 결정한 것이라면 내가 부끄러워하고 자책(自責)하기에 여가가 없는데 어떻게 말하겠는가. 만약 사정으로 말한 것이라면 어찌 조용히 하직하여 돌아가지 않고서 국민의 기대하는 마음을 무너뜨리는가. 할 말은 많고 글은 짧아서 소회를 다하지 못하니, 경은 나의 뜻을 알아서 면대하여 거취를 결정한다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내가 바라는 바이니 경은 모름지기 체득하기 바란다.”
하였다.
이때 정원ㆍ옥당이 입대를 청하였다. 도승지 장선징(張善澂)이 아뢰기를,
“송모(宋某)가 어제 면유(面諭)하신 뒤에 차자를 남겨 두고 떠나간 것은 극히 서운합니다.”
하고, 승지 이익(李翊)이 아뢰기를,
“송모(宋某)가 접때 좌상(左相)과 국사를 담당하겠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속히 떠나갈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갑자기 내려가는 것은 혹 건백한 일이 행해지지 않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하는 사이에 혹 맞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은, 대개 조용히 상의하려 하였다.”
하였다. 응교(應敎) 남이성이 아뢰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에는 출처(出處)를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숭(姚崇)이 처음에 열 가지 일로 현종(玄宗)에게 행하기를 청한 뒤에 나아갔으므로 현종 초년에는 정치 교화가 청명(淸明)하였습니다. 상께서 송모(宋某)를 대우하는 성의가 지극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송모가 아뢴 일은 시행을 보지 못한 것이 많으니, 이것이 송모가 가게 된 까닭입니다. 아래에서는 소를 올려 천청(天聽)을 공동(恐動 위험한 말로 사람의 마음을 두렵게 하는 일)하는 사람이 있고 위에서는 결정하는 의사가 없으시니, 옛사람의 진퇴(進退)와 같이 하려 하는 사람이 어찌 머물 수 있겠습니까.”
하고, 교리(校理) 이규령(李奎齡)이 아뢰기를,
“유자(儒者)는 그 말이 행해지지 않으면, 허례(虛禮)로 머물 수 없습니다.”
하고, 수찬 김만중(金萬重)이 아뢰기를,
“공주의 제택의 일도 내려가게 되는 단서가 됩니다. 법이 위에서 행해지지 않으면 아래에서 행해질 수 있겠습니까. 또 상교(上敎)에 ‘마땅히 후일 공주의 제택을 지을 때에 보아야 할 것이다.’ 하셨으니, 이는 장래의 일로써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또 우승지 이익(李翊)에게 명하여 전교를 듣고 선생에게 하유(下諭)하도록 하였는데, 이르기를,
“어제 말한 것은, 반드시 갈 줄은 몰랐고, 말 중에 혹 마치지 못한 것은 후일 다시 의논하려 하였는데, 이제 내려간다는 말을 들으니, 서운하기가 한이 없다. 국사가 가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마음도 서운하게 여기니, 다시 들어와서 국사를 함께 의논하는 것이 바라는 바다.”
하였다.
○ 15일(무인)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유지(諭旨)를 전하고 태의(太醫)를 보내어 병을 간호하였다.
이때 지평 김세정(金世鼎)이 서필원(徐必遠)을 논핵(論劾)하기를,
“서필원은 본디 학식이 없는데 거칠고 패악한 소견만 믿어서, 겉으로는 곧음을 가탁하고 속으로는 간사한 계책을 내부려서, 전부터 의논이 윤리(倫理)를 패상(敗傷)하여 청의(淸議)에 죄를 얻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한두 가지 상의 확정하여 변통하는 일로 인하여, 이익을 잃어버린 간사한 백성과 무식한 사부(士夫)가 체결 선동하여 뜬말이 날로 불어나서 유현(儒賢 송시열)을 모함하면서도 감히 먼저 발론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서필원은 이때 감히 사론(邪論)으로 앞장서서 주장하고, 심지어는 ‘불충(不忠)’ 2자로써 대신과 중신(重臣)에게 뒤집어 씌웠는데 그 지의(指意)는 건백(建白)한 유현(儒賢)을 동요시켜 조정에 편히 있지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의 벼슬을 빼앗고서 내치소서.”
하였다. 선생이 승지의 회계(回啓)에 덧붙여 아뢰기를,
“서필원은 신과 서로 안 지 매우 오래되었으니 어찌 신을 내쫓으려는 뜻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리석어서 일을 알지 못하고 남에게 오도(誤導)되어 남에게 의심당함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또,
“나서 봐야 도움은 없고 논의만 낼 뿐이니, 뉘우치고 두려움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 이때 태학생(太學生) 윤성교(尹誠敎) 등과 사학 유생(四學儒生) 신희징(申喜澄) 등이 상소하여,
“상께서는 더욱 성례(誠禮)를 돈독히 하여 만류하소서.”
하니, 상이 다 아름답게 받아들였다.
○ 16일(기묘) 만의(萬義)에 이르러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상이, 선생이 끝내 다시 들어오지 않을 것을 알고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호송하게 하였다. 선생이 다시 상소하여 ‘하직하지 않고 지레 돌아간 죄’를 인책하고 이어서 본직 및 겸임한 직을 체직해 주기를 청하였더니, 상이,
“경이 서울을 떠난 지 10년 만에야 다시 돌아와서 함께 국사를 하매 내가 매우 기뻤는데, 이렇게 창황히 떠나니, 국사가 낭패이므로 내가 매우 부끄럽고 한탄되어 이를 바를 모르겠다.”
하고 비답하였다.
○ 왕세자(王世子)가 궁관(宮官)을 보내어 존문(存問)하였다.
○ 20일(계미) 집에 돌아왔다.

3월 초하루는 갑오(甲午) 성묘종향 명호위차의(聖廟從享名號位次議)를 바쳤다.
○ 15일(무신) 신오(新塢)에 이르러 질부(姪婦)의 장사를 치렀다.
○ 19일(임자)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소명(召命)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상이 온궁(溫宮 온천 행행시 왕의 임시 거소)에 임어하여 소명을 내렸으나, 선생은,
“묵은 병이 터지고 또 집에 꺼리는 병이 있어서 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사양하였다.

4월 초하루는 계해(癸亥) 3일(을축) 상이 승지를 보내어 소명을 내렸다.
상이 하교하기를,
“판부사(判府事)가 집에 꺼리는 병이 있다 하여 사양하나 날짜가 이미 오래되었고, 산 넘고 물 건너는 길이어서 또한 여러 날 걸릴 것이니, 내가 사모하는 회포는 갈수록 더욱 간절하다. 모름지기 나의 애타게 바라는 마음을 체득하여 선뜻 마음을 고쳐 올라와서 내 마음을 위로할 일로 다시 승지를 보내어 이르라.”
하였다. 이때 선생이 마침 종기가 나서 또 나아가지 못하였다.
○ 10일(임신) 상소하여 대죄(待罪)하였다.
이때 영부사(領府事) 이경석(李景奭)이 서울에 있으면서 차자를 올려,
“장전(帳殿 왕이 왕궁을 떠나 임시로 머무르는 곳을 말한다)이 가까이 계시는데도 입조(入朝)하는 사람이 없으니, 분의에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니, 선생을 지적한 것이었다. 선생이 드디어 상소하여, 소명을 따르지 않아서 대신의 논척(論斥)을 받은 것으로써 스스로 열거하였더니, 상이 비답하기를,
“경에게 질병이 있음을 알았는데, 경이 고향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근심과 기쁨이 엇갈렸더니, 이제 소의 사연을 보니, 마음이 매우 놀랍고 의혹스럽다. 범연(汎然)한 문자는 깊이 혐의할 것이 아니니 어찌 사양하랴. 모름지기 애타게 바라는 마음을 체득하여 나와 상면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개 이경석(李景奭)은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지은 사람으로 지취와 논의가 하는 일마다 선생과는 서로 엇나갔으나, 다만 향원(鄕原)의 행실로 유속(流俗)의 추존(推尊)하는 바가 되었다. 선생은 일찍이 말하기를,
“그가 당시에 부득이 한 데에 몰리기는 하였으나, 어찌 짐작하여 적의하게 하는 방도가 없었겠는가. 그런데 마음이 아첨하고 기쁘게 하는 데에만 오로지 하였을 뿐 조금도 원통함을 참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말하는 의사가 없었으니, 진실로 터럭만큼이라도 사람의 성품이 있다면 어찌 차마 이렇게 하랴.”
하였다. 지난해에 이경석이 궤장(几杖)을 하사 받고서 선생에게 그 일을 기록하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주자(朱子)가 손적(孫覿)의 일을 기록할 적에 ‘수(壽)하고 강녕(康寧)하였다.’는 말을 인용하여 풍자(諷刺)하였더니, 이경석이 매우 유감으로 여겼다. 선생이 조정을 떠나게 되자, 자기와 친한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어 시원하다고 하고, 심지어 ‘마고(麻姑)의 손톱으로 등을 긁는 것 같다.’는 말이 있었다. 이때 와서 차자를 올려 또 ‘의리를 어기고 조강(朝綱)을 문란하였다.’는 말이 있었다. 선생이 생각하기를,
“그 사람의 한 바가 매우 더럽고 잘못되었는데도 당시 사람들이 망녕되이 서로 존숭하여 세도(世道)가 날로 아래로 떨어지게 하였으니, 부득불 일을 따라서 밝게 말하여 한줄기의 맥을 붙들어야 한다.”
하고, 드디어 다시 손적의 일을 인용해서 지척하여 말하였으니, 선생의 의사는 이 의리를 성조(聖朝)에 밝혀 대방(大防)을 보존하는 데 하나의 도움 되게 하고자 하였으므로 작은 혐의는 미쳐 돌아보지 않은 것이라 한다.
○ 11일(계유) 숙부모(叔父母)의 천장(遷葬)에 참례하였다.
숙부(叔父) 습정공(習靜公 송방조(宋邦祚))을 처음에는 영동(永同)에 장사 지냈는데, 이때 와서 청주(淸州) 마암리(馬巖里)에 천장(遷葬)하였다. 선생이 글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고서 영결(永訣)하였다.
○ 25일(정해) 무주(茂朱) 적상산(赤裳山)을 유람하였다.
금산(錦山) 성곡서원(星谷書院)에 들러 배알(拜謁)하고 이어서 중씨(仲氏)의 임지인 진산(珍山) 군아(郡衙)에 갔다.

5월 초하루는 계사(癸巳) 소제(蘇堤)로 돌아왔다.
이날 고조고(高祖考)의 기사(忌祀)를 진산 군아에서 참례하고 곧 떠나서 돌아왔다.
○ 14일(병오) 수옹공(睡翁公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의 사당에 분황례(焚黃禮)를 거행하였다.
의정(議政)으로 추은(推恩)되었으므로 진산의 관차(官次)에서 분황례를 거행하였다.
○ 25일(정사) 세자의 입학(入學)과 관례(冠禮)의 일로 하문(下問)하는 명이 있었으나, 병으로 헌의(獻議)하지 못하였다.
○ 26일(무오) 종가(宗家)에서 분황례를 행하였다.
조고(祖考) 판서공(判書公 이름은 송응기(宋應期))에게는 찬성(贊成)을 증직(贈職)하고, 증조고(曾祖考) 참판공(參判公)에게는 판서(判書)를 증직하였다.

6월 초하루는 임술(壬戌) 상이 의원을 보내어 병을 간호하였다.

8월 초하루는 신유(辛酉) 글을 가지고 윤선거(尹宣擧)를 조곡(弔哭)하였다.
그 제문(祭文)에,
“뭇 물결이 부딪쳐도 지주(砥柱)처럼 기울어지지 않았고, 천지가 어두울 때 한 별이 밝았는데, 이뿐만이 아니라 세로(世路)에도 그러했도다.”
하고, 또,
“일찍 교상(膠庠)에 노닐었는데 사우(士友)들이 마음을 기울여 사모하였고 의논을 주창하여 정의를 부식함에 겨룰 이가 없었도다. 중간에 큰 어려움을 만나서는 구차히 보전하려 하지 않았으나, 문산(文山)이 창졸간에 뇌자(腦子)를 먹고도 죽지 않았으며, 또한 아버지 뜻 따르느라 자신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네. 이 뒤부터 시골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도다.”
하고, 또,
명성이 드러나매 왕의 소명(召命) 이르렀는데, 벼슬 이름 자처 않고 진사(進士)라 불렀도다. 겸손으로 한 듯하나 뜻하는 바 있었으니, 하의(荷衣)와 혜대(蕙帶)로써 물들지 않고 깨끗하였도다. 양대 조정 거치면서 종시 한 절조였고, 미련한 자 분별이 있고 나약한 자 뜻 세움 있게 되니 시원한 청풍(淸風)이었네.”
하고, 또,
“논의할 때에는 응답만 하는 것 부끄럽게 여겨, 느린 말 빠른 말로 마음에 있는 생각 다하였는데, 엇갈리고 같아진 것 그 얼마인지 모르겠도다.”
하였다. 선생이 윤선거와 종유(從遊)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슬퍼함이 얕지 않았으나, 뇌문(誄文)에서 찬양하는 것이 오직 초년의 소 하나호란(胡亂) 뒤에 스스로 폐기(廢棄)한 것으로써 대체의 취지로 삼았으니, 그것이 《삼학사전(三學士傳)》 발문(跋文)에서 수록(收錄)하여 칭송한 것과 같은 의사였다. 그리고 ‘엇갈리고 같아졌다.’ 한 것은 곧 또한 동학사(東鶴寺)에서 밤에 이야기한 등의 일을 가리킨 듯하다. 그러나 학문의 진취에 대하여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그 은미한 뜻을 알 수 있다.
○ 9일(기사)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소명을 내렸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상이 춘궁(春宮 왕세자의 별칭)의 입학(入學)이 머지않다 하여 특명으로 선생 및 동춘(同春)을 불렀으나 선생은 병으로 사양하였다.
○ 15일(을해) 세자의 입학(入學)에 관한 의절(儀節)을 하문하는 명이 있었으나 병으로 헌의(獻議)하지 못하였다.
○ 16일(병자) 병으로 소명(召命)에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써 상소하여 스스로 진술하고,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의 소임을 체직(遞職)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26일(병술) 신덕왕후(神德王后)의 개제주(改題主) 예절에 대해 하순(下詢)하는 명이 있었으나 병으로 헌의하지 못하였다.
뒤에 또 개제주(改題主)를 권안(權安 임시로 모시는 것)하는 처소에 대해 하순하였으나 또한 헌의하지 못하였다.

10월 초하루는 신유(辛酉) 7일(정묘) 화양동(華陽洞)에 들어갔다.
○ 19일(기묘) 종질(宗姪)의 부음(訃音)을 듣고 연풍(延豐)에 나아갔다.
종질(宗姪) 찰방(察訪) 기륭(基隆)이 연풍 온정에서 객사(客死)하였다. 선생이 밤에 그의 부음을 듣고 늦새벽에 서둘러 상차(喪次)에 이르러 습(襲)과 염(斂)을 주선하여 치르고 마암(馬巖)의 본가에 반구(返柩)한 다음 화양으로 돌아왔다.

12월 초하루는 경신(庚申) 27일(병술) 소제(蘇堤)로 돌아왔다.


 

[주D-001]하반(賀班) : 조하(朝賀)의 반열을 말한다. 조선조 때에는, 정월 초하루, 즉 설날에 왕세자와 백관이 조하(朝賀)하게 되었다. 《大典會通 禮典 朝儀》
[주D-002]부(傅)와 빈객(賓客) :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벼슬로 부(傅)는 정1품, 빈객(賓客)은 정2품인데, 모두 타관(他官)이 겸임하였다. 《大典會通 吏典 京官職 世子侍講院》
[주D-003]옥질(玉質) : 구슬같이 아름다운 자질이란 말로 여기서는 세자를 가리킨다.
[주D-004]정릉(貞陵) :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
[주D-005]《심경(心經)》 : 서명으로 송(宋) 나라 진덕수(眞德秀)가 지었다. 성현(聖賢)이 마음[心]을 논한 격언(格言)을 모으고, 또 제유(諸儒)의 의논 중에 정요(精要)로운 것을 모아 주를 달았다.
[주D-006]허배(虛拜) : 신위(神位)에 절하는 일.
[주D-007]제릉(齊陵) : 조선 태조의 비(妃)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능.
[주D-008]소도(昭悼)와 공순(恭順) : 소도는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의 시호, 공순은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의 시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소생이다. 제1차 왕자란(王子亂) 때 모두 살해되었다.
[주D-009]경계(經界) : 토지의 경계.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어진 정치는 반드시 경계를 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니, 경계가 바르지 아니하면 정전(井田)이 고르지 아니하며, 곡록(穀祿)이 고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주D-010]국전(國典) : 국가의 법전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말한다.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 양전(量田)에 “무릇 토지를 6등으로 나누고, 20년마다 다시 측량하여 문서를 만들어서 본조(本曹)ㆍ본도(本道)ㆍ본읍(本邑)에 비치한다.” 하였다.
[주D-011]보오법(保伍法) : 다섯 집이 보(保)가 되어 서로 비위(非違)를 적발하게 하는 법. 진(秦) 상앙(商鞅)이 시행한 법이다. 백성으로 하여금 10집ㆍ9집으로 조직하여 서로 규찰(糾察)하고 감찰하게 하되, 한 집에 죄가 있으면 9집이 합동으로 고발하고, 규찰하여 고발하지 않으면 10집이 연좌된다. 《史記 卷68 商君傳》
[주D-012]주공(周公)의 제도 : 주공(周公)이 지은 《주례(周禮)》의 제도를 말한다. 《주례(周禮)》 지관(地官) 사도려사(司徒旅師)에 “5집을 비(比)로 삼고, 10집을 연(聯)으로 삼고, 5인을 오(伍)로 삼고 10인을 연(聯)으로 삼아 …… 서로 보증하고 서로 받아들이며, 형벌이나 경상(慶賞)에 모두 연대책임을 지며 …… 서로 상장(喪葬)을 도와준다.” 하였으며, 또 《주례》 비장(比長)에 “5집이 서로 신탁(信托)하고 화친(和親)한다.” 하였다.
[주D-013]오위법(五衛法) : 오위(五衛)는 중위(中衛)인 의흥위(義興衛), 좌위(左衛)인 용양위(龍驤衛), 우위(右衛)인 호분위(虎賁衛), 전위(前衛)인 충좌위(忠佐衛), 후위(後衛)인 충무위(忠武衛). 오위진법(五衛陣法)에 대해서는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軍政篇) 오위(五衛) 오위진법에 보인다.
[주D-014]향약(鄕約)의 법 :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취지로 한 향촌(鄕村)의 자치 규약. 본시 송(宋) 나라의 여씨 향약(呂氏鄕約)을 본뜬 것으로,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의 네 강목(綱目)을 주 정신으로 한다. 조선 중종 14년에 실시되었다가 곧 파하였다. 이후 지방에 따라 여러 향약이 있어 왔다.
[주D-015]아내를 …… 옛날 예법 : 《예기(禮記)》 전례(典禮)에 “아내를 얻되 동성(同姓)을 얻지 않는다. 그러므로 첩을 얻을 때 그 성을 모르면 점을 친다.” 하였는데, 그 주에 “동성을 얻는 것은 금수(禽獸)에 가깝기 때문이며, 점을 치는 것은 그 길흉(吉凶)을 점친다.” 하였다. 《소학(小學)》 명륜(明倫)에서도 이 말을 인용하였다.
[주D-016]기해(氣海) : 배꼽 아래 한 치쯤 되는 곳. 하단전(下丹田).
[주D-017]조복양(趙復陽)은 …… 하였으나 : 조복양은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 본관은 풍양(豊陽). 전에 출제되었던 시제(試題)를 다시 과거의 시제로 출제한 것을 말한다. 그는 그 일 때문에 대제학의 직에서 파직되었다.
[주D-018]춘번(春幡) : 입춘(立春) 날에 사대부(士大夫) 집에 세우는 채색 깃발.
[주D-019]물건으로써 …… 것 : 《서경(書經)》 주서(周書) 여오(旅獒)에 “사람으로써 희롱하면 그 덕(德)을 잃고 기물(器物)로써 희롱하면 그 뜻을 잃는다.” 하였다.
[주D-020]조정암(趙靜菴)이 …… 일 : 정암(靜菴)은 조광조(趙光祖)의 호. 조광조가 젊을 때에 인가에 들어갔더니, 어떤 여자 하나가 기껍게 가까이하였는데, 조광조가 날이 어두워지자 종에게 짐을 지워 다른 집으로 옮긴 일을 말한다. 《靜菴集 附錄 卷1 事實》
[주D-021]부중(府中) : 의정부(議政府)를 말한다.
[주D-022]송(宋) 나라가 남도(南渡) : 송(宋) 휘종(徽宗)ㆍ흠종(欽宗)이 금인(金人)에게 잡혀가자, 고종(高宗)이 양자강(揚子江)을 건너 변량(汴梁)에서 임안(臨安)으로 천도(遷都)한 것을 말한다. 남송(南宋)이라고도 한다.
[주D-023]대승기탕(大承氣湯) : 승기탕(承氣湯) 중에도 가장 힘이 강한 약. 승기탕은 이증(裏症)에 똥ㆍ오줌을 누게 하고, 헛소리ㆍ조열(潮熱)ㆍ목마름 등을 없애는 탕약(湯藥).
[주D-024]사군자탕(四君子湯) : 인삼(人蔘)ㆍ백출(白朮)ㆍ백봉령(白茯苓)ㆍ감초(甘草)의 네 가지를 각각 한 돈쭝씩 조합하여 원기와 소화를 돕는 데에 쓰는 탕약.
[주D-025]가미(價米) : 공미(貢米)에 준한 대가(代價).
[주D-026]공목(貢木) : 논밭의 결세(結稅)로 바치던 무명.
[주D-027]작목(作木) : 전결(田結)을 받아들일 때 쌀ㆍ콩 대신에 무명으로 환산하여 받는 일.
[주D-028]주인(主人) : 경저리(京邸吏)를 말한다. 이서(吏胥) 또는 서민으로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지방 관청의 사무를 연락하고 대행하여 보는 사람. 경주인(京主人).
[주D-029]정초군(精抄軍) : 인조 때에 기병(騎兵) 중에서 날래고 용맹한 자 2초(哨)를 선발하여 정초청(精抄廳)을 설치하였다. 뒤에 현종 9년(1668)에 기병(騎兵) 8번호(番戶) 1만 9391명을 정초(精抄) 8번 40초(抄)로 바꾸었다.
[주D-030]정초군의 …… 주고 : 삼보(三保)는 자보(資保) 1정(丁)과 보(保) 1정(丁), 어영군ㆍ금위군의 군사로 상번(上番)하는 자를 정군(正軍)으로 삼고 각기 자보(資保) 2정(丁)을 주어 자장(資裝)을 마련하게 하고, 또 보(保) 2정을 두어, 관에서 쌀 각각 12두씩 바치게 하여 해당 영(營)에 저축해 두었다가 상번하는 군사의 급료에 제공하게 되었다. 《大典會通 兵典 番上, 給保》 《萬機要覽 軍政篇 禁衛營 設置建革》
[주D-031]정자(程子) …… 말 : 정자(程子)는 송(宋)의 학자 이천(伊川) 정이(程頤), 왕 형공(王荆公)은 왕안석(王安石)으로 형국공(荆國公)에 봉해졌다. ‘사람으로써 짐승을 대신하지 않는다.’는 말은 가마는 사람이 메고 수레는 말이 끌기 때문이다. 주자(朱子)의 말을 송시열이 차자에서 인용하였다. 《宋子大全 卷13 疏箚 辭乘轎箚》
[주D-032]조중봉(趙重峯)이 …… 일 : 조중봉(趙重峯)은 조헌(趙憲). 중봉은 그의 호다. 왜란(倭亂)이 있을 것을 알고 아내에게 무거운 물건을 머리에 이고 걸어다니는 것을 연습하게 하였다. 《宋子大全 卷13 疏箚 辭乘轎箚》
[주D-033]태조(太祖)의 사친(四親) : 조선 태조의 고조인 목조(穆祖), 증조인 익조(翼祖), 조부인 도조(度祖) 아버지인 환조(桓祖).
[주D-034]기묘(己卯) 연간 : 중종(中宗) 14년(1519)을 말하는데, 그때 조광조(趙光祖)ㆍ김정(金淨) 등 명현(名賢)들이 정치에 참여하여 이상정치(理想政治)를 주장하였다.
[주D-035]추치(騶直) : 관원이 녹봉 이외에 추종(騶從)의 급료조(給料條)로 받는 금곡(金穀)이나 포백(布帛).
[주D-036]구채(丘債) : 관원이 녹봉 이외에 사사로 부리는 하인의 급료(給料)로 받는 금곡(金穀)이나 포백(布帛). 구가목(驅價木)ㆍ구가전(驅價錢).
[주D-037]옛말에 …… 말을 한다 :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14年에 “……사(士)는 말을 전달하고, 서인(庶人)은 임금의 과실을 비방한다.[士傳言 庶人謗]” 하였는데, 그 주에 “사(士)는 지위가 낮아서 바로 아뢰지 못하고 임금의 과실을 들으면 대부(大夫)에게 전해서 임금을 간하고, 서인은 정사에 관여하지 않으므로, 임금의 과실을 들으면 비방한다.” 하였다.
[주D-038]위사(衛士) : 대궐이나 능ㆍ관아ㆍ군영(軍營)을 지키던 장교.
[주D-039]황조(皇朝)의 예 : 송시열의 차자(箚子)에서는 “……변경하여 시행하고자 하는 것은 황조(皇朝) 광록시(光祿寺)의 제도 그것인데, 선정신(先正臣) 성혼(成渾)이 선묘조(宣廟朝)에 시행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하였다. 《宋子大全 卷13 疏箚 論安興倉及貢物事仍乞遞箚》 황조(皇朝) 즉 명(明) 나라 광록시(光祿寺)의 예에 따라 시행하자는 뜻인 듯하다. 광록시(光祿寺)는 제향(祭享)ㆍ연향(宴享)ㆍ주례(酒醴)ㆍ선수(膳羞)의 일을 맡아보았다. 《明史 卷74 職官志 光祿寺》
[주D-040]신진(新進)을 …… 폐단 : 신진 즉 관아에 새로 출사(出仕)하는 관원에게 음식 등을 요구하는 폐단.
[주D-041]면신(免身) : 관아에 새로 출사(出仕)하는 관원이 허참례(許參禮)를 닦은 뒤 다시 구관원(舊官員)을 청하여 음식을 차려 대접하는 일. 이로부터 동석(同席)을 허락하였다. 허참(許參)ㆍ면신례(免身禮).
[주D-042]송(宋) 나라가 …… 강론하였으니 : 송(宋) 말엽, 공종(恭宗)ㆍ단종(端宗) 및 위왕(衛王)이 원(元)의 공격을 받아 바닷가로 파월(播越)했는데, 배를 탈 때가 많았다. 그때 재상이었던 육수부(陸秀夫)는 유리(流離)하며 경황이 없는 중에도 날마다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써서 강론하도록 전하였다. 《宋史 卷451 忠義列傳 陸秀夫》 《宋史紀事本末 卷108 二王之立端宗》
[주D-043]한정(漢鼎) : 한실(漢室) 즉 한(漢) 나라를 말한다. 조조(曹操)는 제위(帝位)를 마음으로는 차지하고 싶으면서도 명분과 의리를 두려워하여 찬탈하지는 않았는데, 뒤에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찬탈하였다.
[주D-044]병자년(丙子年) 난리 : 조선 인조(仁祖) 14년(1636) 12월 청 나라가 침입한 난리.
[주D-045]궁가(宮家) : 대군(大君)ㆍ왕자군(王子君)ㆍ공주(公主)ㆍ옹주(翁主)의 궁전(宮田). 궁(宮)ㆍ궁방(宮房).
[주D-046]절수(折受) : 봉록(俸祿)으로 토지 또는 결세(結稅)를 떼어 받는 일.
[주D-047]익평위(益平尉) : 효종의 첫째 딸 숙안공주(淑安公主)의 남편 홍득기(洪得箕)
[주D-048]동평위(東平尉) : 효종의 넷째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의 남편 정재륜(鄭載崙)
[주D-049]인평위(寅平尉) : 효종의 셋째 딸 숙휘공주(淑徽公主)의 남편 정제현(鄭齊賢).
[주D-050]어제 …… 모른다 : 맹자(孟子)가 제 선왕(齊宣王)에게 친근한 신하가 없음을 말한 것으로 사람을 쓰고, 버리고, 죽이는 일을 삼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孟子 梁惠王下》
[주D-051]제갈량(諸葛亮)이 …… 폐하였고 : 촉한(蜀漢) 후주(後主) 때의 장수 교위(長水校尉) 요립(廖立)이 자신의 재명(才名)을 제갈량(諸葛亮) 다음이라 여기는데, 지위는 이엄(李嚴)의 아래에 있으며 또 경(卿)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데 불만을 품고, 선제(先帝) 즉 유비(劉備)를 비방하고, 군신(群臣)들을 품평하여 헐뜯으며, 군진(軍陣)이 보잘것없다는 등 국정을 비난하고 원망하매 제갈량이 후주(後主)에게 표문(表文)을 올려, 폐하여 서민(庶民)으로 삼아 문산군(汶山郡)에 귀양 보냈다. 《三國志 卷40 蜀書10 廖立傳》
[주D-052]부견(苻堅)은 …… 죽였습니다 : 부견(苻堅)은 진(晉) 나라 때 5호(胡) 16국(國) 중 전진(前秦)의 임금으로 저족(氐族)이다. 저(氐)는 서남이(西南夷)로, 저족(氐族)의 호걸인 번세(樊世)가 부견이 신임하는 한족(漢族) 대신인 왕맹(王猛)을 시기하여 모욕하고 위협하자, 부견은 번세를 죽였다. 《晉書 卷113 苻堅上》
[주D-053]도판(桃板) : 즉 도부(桃符)로 옛날 설날에 복숭아나무 판자 두 개를 문 양쪽에 달아 두고 그 위에 신도(神荼)ㆍ울루(鬱壘) 두 신(神)의 이름을 써서 사(邪)를 막았다. 뒤에는 춘련(春聯)의 별칭으로 쓰였다.
[주D-054]도지(桃枝) : 복숭아나무 가지. 귀신이 겁낸다 하여 이것으로 귀신을 막고 내쫓았다.
[주D-055]춘번(春幡) : 입춘날 사대부(士大夫)의 집에 세우는 채색 깃발.
[주D-056]인승(人勝) : 인일(人日) 즉 정월 7일에 사용하는 인형으로 된 수식물(首飾物), 조선조에서는 동(銅)으로 작은 원경(圓鏡)처럼 만들되 자루에 선인(仙人)을 새겨 각신(閣臣)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공조에서 또는 동으로 원구(圓毬)처럼 만들고 그 위에 인형을 새겨 전궁(殿宮)에 바쳤다. 《荆楚歲時記》 《東國歲時記 正月 人日》 《洌陽歲時記》
[주D-057]세화(歲畫) : 새해를 축복하는 뜻으로 도화서(圖畫署)에서 그려 궐내에 바치던 그림. 주로 성수선녀(星壽仙女)나 직일금장(直日金將)의 상(象)을 그려 궐내에 헌상하면 궁전(宮殿) 문이나 벽에 붙였는데, 재난을 막고 불상(不祥)을 쫓으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혹 관아에 나누어 주기도 하고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東國歲時記 正月 元日》 《洌陽歲時記》
[주D-058]요숭(姚崇)이 …… 나아갔으므로 : 요숭은 당(唐) 나라 현종(玄宗)ㆍ중종(中宗) 때의 명상(名相). 당 현종(唐玄宗)이 요숭에게 보상(輔相)해 주기를 청하자, 요숭은 먼저 10가지 일로써 현종의 뜻을 다짐한 뒤에 받아들였다. 10가지 일은 즉, 정치는 인서(仁恕)를 앞세울 것. 변공(邊功)을 다행으로 여기지 말 것. 법은 근시(近侍)로부터 시행할 것. 환관(宦官)이 정사에 간여하지 말 것. 조부(租賦) 외의 공헌(貢獻)을 일체 금절할 것. 척속(戚屬)을 대성(臺省)에 임명하지 말 것. 대신을 예로 대접할 것. 신하들이 기휘(忌諱)를 범해 가며 직언할 수 있게 할 것. 도관(道觀)과 불사(佛寺)의 영조(營造)를 금절할 것. 한(漢)의 난망(亂亡)을 감계(監戒)로 삼아 만대의 법이 될 것 등이었다. 《唐書 卷124 姚崇列傳》
[주D-059]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 : 삼전도는 광주(廣州) 한강 연안에 있는 나루.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 태종(淸太宗)이 인조(仁祖)의 항복을 받고, 그 지점인 삼전도에 자기의 공적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비에 쓴 글. 비문(碑文)은 이경석(李景奭)이 지었다.
[주D-060]향원(鄕原) : 고을 사람으로부터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칭송을 받으나 실제의 행동은 그렇지 못한 사람. 《論語 陽貨》
[주D-061]궤장(几杖) : 늙어서 관직을 물러나는 대신(大臣)ㆍ중신(重臣)에게 임금이 하사하던 안석과 지팡이를 이른다.
[주D-062]주자(朱子)가 …… 말 : 송 흠종(宋欽宗)이 정강난(靖康難) 때 금(金)에 잡혀 있었는데, 금인(金人)이 어떤 글을 얻으려 하였다. 흠종이 부득이 종신(從臣) 손적(孫覿)에게 짓게 하되 속으로는 손적이 그 글을 짓지 않고 해결하기를 바랐다. 손적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즉석에서 유창하게 지어서 금인(金人)에게 아첨하였다. 그 뒤에 손적이 매양 사람들에게 “천명을 따르는 자는 보존한다.”는 말을 하므로 어떤 사람이 희롱삼아서 “당신이 오랑캐 진영(금(金))에 있을 적에 천명을 따른 것이 매우 심하였으니, 수(壽)하고 강녕하는 것이 당연하오.” 하였더니, 손적이 부끄러워서 응답하지 못하였다 한다. 《朱子大全 卷71 雜著 記孫覿事》
[주D-063]교상(膠庠) : 교상은 주대(周代)의 학교 이름인데, 조선조의 성균관(成均館)을 가리킨다. 윤선거(尹宣擧)가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遊學)하였다.
[주D-064]의논을 …… 부식함에 : 인조 14년(1636)에 후금(後金)의 사신이 입국(入國)하였을 때 유생(儒生)의 소두(疏頭)가 되어 사신을 죽이고 명(明)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고 상소하였다.
[주D-065]큰 어려움을 …… 못하였네 :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윤선거가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江華)에 피난하여 성문을 지키다가 강화가 함락되자, 죽지 않은 것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있는 아버지 윤황(尹煌)에게 가려 하였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문산(文山)은 송(宋) 말엽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의 호로 그는 원군(元軍)의 공격을 받아 도망치다가 왕유청(王惟淸)에게 사로잡히자, 뇌자(腦子 독약)를 먹었으나 죽지 않았다. 윤선거가 죽지 않은 것을 충신 문천상이 죽지 않은 일로 비유한 것이다.
[주D-066]명성이 …… 불렀도다 : 효종 때 자의(咨議)ㆍ지평(持平)ㆍ장령(掌令)ㆍ사업(司業) 등의 벼슬로 불렀으나 강화에서 죽지 않은 것을 자책하여 나아가지 않았으며, 관함(官啣)을 쓰지 않고 진사(進士)로 자처하였다.
[주D-067]하의(荷衣)와 혜대(蕙帶) : 하의는 연잎으로 만든 옷이고, 혜대는 혜초(蕙草)로 만든 띠로 다 신선이 입는 옷이다.
[주D-068]양대 조정 : 효종(孝宗)과 현종(顯宗)을 말한다.
[주D-069]초년의 소 하나 : 윤선거가 병자년 즉 인조 14년(1636) 청(淸) 나라 사신이 왔을 때 소두(疏頭)가 되어 유생(儒生)을 이끌고 사신을 죽이자고 상소한 일을 말한다.
[주D-070]호란(胡亂) …… 것 : 윤선거가 강화에서 죽지 않은 것을 자책하여, 소명(召命)이 내려졌으나 끝내 나가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한 일을 말한다.
[주D-071]《삼학사전(三學士傳)》 발문(跋文) :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것으로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의 전(傳)을 쓰고, 다음에 호란(胡亂) 때에 절의(節義)가 있었던 사람을 부재(附載)하였는데, 윤선거에 대해서도 “몸을 깨끗이 하여 더럽히지 않고 그 뜻을 지켰다.” 하고 칭찬하였다. 《宋子大全 卷123 傳 三學士傳》
[주D-072]동학사(東鶴寺)에서 …… 이야기 : 동학사에서 송시열(宋時烈)ㆍ이유태(李惟泰)ㆍ윤선거(尹宣擧) 세 사람이 모여서 윤휴(尹鑴)의 인물에 대해 논한 일을 말한다. 연보(年譜) 제5권 을사년(乙巳年) 9월 9일 임진일 조(壬辰日條)에 자세히 나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정섭 이재수 (공역) ┃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