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결혼제도의 변천 / 주광수 님

2013. 6. 27. 12:12잡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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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한국인의 성과 사랑, 이규태저, 1985
한국인의 성풍속 답사여행, 황가성 지음, 1996
한권으로 읽는 삼국왕조실록, 임병주 지음, 1998
역사스페샬, 정종목, 2000
조선의 관혼상제, 김종혁 지음, 2002
Naver.com
   
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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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년간 서인회에서 역사, 특히 우리 고대사의 토론을 주관하
여온 나의 목적은 우리의 상고사, 특히 단군조선의 역사를 신화
가 아닌 실제 역사로 함께 인식할수 있는 계기를 갖음으로서 우
리 상고사와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되찾아 미래에 대한 희
망을 갖고 닥아오는 세계화시대에 함께 대비하고자함이었다. 그
러나 나의 역사관의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능력의 한계 때
문인지 아직도 많은 동문들이 단군을 단지 신화로 받아들이는 현
실에 부닥치고는 나는 공연히 재미도 없는 역사를 논하였는가 하
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서인회에 직접 참여하거
나 여기서 나의 글(단지 편집한 글이지만)을 읽는 동문들에게 미
안한 생각도 하게된다. 하여 이번에는 조금이나마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性풍속과 婚姻의 역사'를 제목으로 선택하였다.
                 
혼인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는 것을 말한다. 婚姻의 婚
은 장가 든다는 뜻이고, 姻은 시집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혼인
이란 결국 장가들고 시집간다는 뜻이다. 혼인이 후세에 결혼이라
하게 된 것은 남자 위주의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집트를 공동통치하기 위하여 클레오파트라는 BC 51년 남동생과
혼인하였다. 일본의 헌법에서는 3촌 이내의 친족혼은 금하고 있
다. 즉 일본에서는 아직도 4촌간의 결혼이 간혹 있으며 법률적으
로도 전혀 문제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외국의 결혼풍속을 비도
덕시 하며 야만의 행태로 간주하기도 한다. 한편 우리는 현재 동
성동본의 결혼 허용과 어머니의 성을 이을 수 있도록 하여달라는
등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여성계의 요구가 사회적인 논란을 거
쳐 그 실행이 가시화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성
풍속과 혼인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서 여러분들을 우리의 고대사로
의 관심을 유발시키고자 한다.  
            
원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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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무리시기, 원인(原人)들의 혼인은 난혼이었다. 원시적인 한
무리 안의 모든 남자는 모든 여자의 남편이었으며 또 모든 여자
는 모든 남자의 처였다. 물론 난혼상태에서도 개별적인 배우자의
일시적인 결합은 있었으나 공고하지 못하였고 언제나 일시적이었
다. '검은모루유적'을 남긴 사람들도 난혼단계에 있었다.
              
'검은모루동굴유적'은 평양시 상원군에 있는 구석기시대 전기인
60만~40만년 전의 석회암 동굴유적이다. 1966∼70년에 발굴된 것
으로 우리나라의 유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1 백만년 전
으로 추정하는 학설도 있다. 석기와 짐승의 뼈 화석이 발견되었
다. 석기들은 가장 원시적인 방법인 '직접떼기'와 '내리쳐깨기'
로 만들어진 것이다. 동물 뼈로는 곰, 멧돼지, 승냥이 뿐만아니
라 하이에나, 코끼리, 원숭이, 큰 쌍코뿔이 등도 있다. 그 당시
한반도 기후는 아열대이었던 것이다. 50만년전이라면 북경원인
(北京原人) 과 같은 시기의 이른바 호모에렉투스라는 직립원인이
었다.
                 
인류의 진화단계는 원인(猿人)·원인(原人)·구인(舊人)·신인
(新人), 현생인류(現生人類)로 구분된다.
             
석기시대는 다음과 같이 그 시대가 구본된다.
구석기시대 전기, 약 240만 년 전-150만 년 전
구석기시대 중기, 약 150만 년 전-4 만 년 전
구석기시대 후기, 약 4만 년전
중석기시대, 약 4만 년 전- 1만 년 전
신석기시대, 약 1만 년 전부터
 
'역포사람', '덕천사람'들 즉 구인(舊人)단계에 이르러서는 무질
서한 난혼이 많이 제한되었다. 세대가 서로 다른 성원들 사이의
혼인이 금지되었다.
       
'역포사람'은 평양시 역포구역 대현동동굴 유적에서 출토된 사람
으로 그가 살았던 시대는 후기구석기시대이며, 체질적으로는 슬
기사람(호모사피엔스)에 해당한다.
      
'덕천사람'은 평안남도 덕천 승리산 유적에서 출토된 후기 구석
기시대 사람들이다. 슬기사람(호모사피엔스)과 슬기슬기사람(호
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슬기사람을 '덕천사
람', 슬기슬기사람을 '승리산사람'이라 부른다. 네안데르탈인도
호모사피엔스 즉 슬기사람으로 10만년 전쯤에서 부터 살았다.
'슬기슬기 사람'은 현생 인류의 조상으로 약 4만 년 전(후기구석
기시대)부터 살았다. 크로마뇽인도 이들에 해당된다. 이들은 이
전의 다른 종과는 달리 정교한 석기, 골각기를 만들어 내고 벽화
등 예술작품을 제작하는 등 문화를 발전시켜 후기 구석기 문화를
창조하였다.
      
서로 다른 씨족에 속한 남성과 여성들이 정상적으로 혼인관계를
맺는 족외혼은 구석기시대 말기로부터 시작되는 모계씨족사회에
상응하는 신인단계에 이르러 대우혼 가족의 출현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근친결혼은 이시기부터 없어지고 가족과 혼인관계에
서 새로운 발전이 이루어졌다. 신인단계는 연대 상으로 5-1만 년
전 사이이다.
        
대우혼제에서는 남녀가 혼인을 맺되 자녀들은 자기 어머니 씨족
에 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자는 자기 어머니가 속한 씨족에서
생활하거나 여자의 씨족켠에 가서 임시로 살았으므로 부부결합은
공고하지 못했다. 대우혼은 모계적인 가정이었으며 아버지는 늘
손님이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의 가족은 한 쌍의 부부와 그
자식들로만 이루어는 일부일처제의 작은 소가족으로 발전하게 되
였다. 기원전 6000년대였다.
     
부계씨족사회에 들어오면서 가부장적 대가족에서 점차 새로운 단
혼적 가족 즉 소가족이 출현하게 되었다. 기원전 4000년대였다.
가부장적풍습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혼인할 때 남자가 여자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 있는 곳으로 오는 풍습으
로 바뀌어졌다. 부부간의 결합은 더욱 공고하여졌고 아이들이 어
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상속권도 부계로 넘어가
되었다.
    
북한의 마르크스의 역사관에 따르면 고조선, 부여, 진국 등 계급
사회인 노예소유자사회에서는 일부일처제는 명색뿐이고 실제로는
일부다처제이고 여자에 대한 남자의 절대적 지배였으며 가족 성
원들 사이에 대립과 충돌을 낳게 하였다. 착취사회에서는 가부장
적 일부일처제 가족이 출현하여 남자측이 여자측에 복종과 순종
을 강요하는 성격이 첨부되었다.
       
고대주민들이 진행한 혼례는 전시기의 혼례와 구별되었다. 전시
기와는 달리 남편측이 일정한 대가를 여자편에 지불하고 자기
가족성원들의 동의 밑에 다른 가족성원인 여자를 아내로 데려왔
다. 여자는 자기 가족에서 이탈하여 남편 가족으로 들어가서 시
집살이를 하게 되었다.
       
고대 주민들의 혼인풍습에서 주목되는 것은 동성불혼 즉 성을 같
이하는 사람과 혼인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동성이란 동성동본
은 아니였다. 한자음의 성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주로 삼국시기
이후의 일이였던 만큼, 고대의 동성의 성이 삼국시기 이후에 쓰
이던 김, 박, 리, 정과 간은 성과는 다른 것이였다. 동성이란 같
은 혈통을 의미하는 것이며 근친간에는 혼인을 맺지 않는 것이
하나의 풍습으로 되여 있었다.  
      
삼국 및 발해, 후기 신라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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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기 결혼 당사자들 사이의 교제와 결합은 비교적 자유스러
웠다. 처녀총각이 서로 의사가 통하면 결혼할 수 있었다. 본인들
의 의사가 존중되고 여성들의 가정적 및 사회적 지위가 일정하게
높았다. 이조시기에는 남녀가 7살만 되면 한 자리에 같이 앉지
못하며 여자는 문밖으로 함부로 나다닐 수 없고 더우기 혼사문제
의 결정권이 없었다. 삼국시기의 남녀의 결합은 이러한 후세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삼국시기에는 계급신분적 차이나 남존여비의
일반적인 봉건도덕의 영향만 받았을 뿐 까다로원 유교사상과 도
덕의 구속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남녀간의 교제와 결합이 신분적 차이를 초월하여 비교적 자
유로웠다는 사실은 아버지인 왕의 만류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주
가 자기의 뜻대로 미천하고 빈한한 온달을 찾아가 함께 살았다는
고구려의 전설과 백제의 평민청년 서동이 신라의 왕녀 선화공주
와 만나 결혼하였다는 서동전설 등에 반영되어 있다.
          
물론 봉건시기 부모의 의사와 어긋나게 당사자들끼리 혼인을 맺
고 결합하는 것은 비교적 드물었고 봉건도덕에 어긋나는 일로 비
난을 받았다. 중세시기에는 봉건사회제도의 본질로부터 남존여비
사상과 봉건도덕이 강조되였고 혼담은 철저히 중매가 들고 다니
게 되여 있었다. 중매 없이 혼인을 맺는다는 것은 비도덕, 비윤
리적인 것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 중매 없이 결혼한
데 대한 비난과 규탄의 정도는 유교도덕이 관습법으로 지켜지고
있던 이조시기에 비하면 훨씬 가벼웠다.
       
발해, 후기신라시기에도 결혼 상대자들의 교제와 결합이 비교적
자유스러웠던 것, 동성불혼풍습, 경제적 타산이나 물질적 보상을
일차적으로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 복잡한 격식을 따르지 않고
간소하게 혼례를 치른 것 등이 근로인민들의 기본풍습이었다.
         
신라 왕실과 귀족 사회는 생모(生母), 친딸, 동복(同腹) 자매(姉
妹)를 제외한 모든 친족의 여인들과 자유롭게 근친혼이 허용되는
일부 다처제였다. 이는 흉노, 몽고, 선비, 돌궐, 여진등 알타이
족에 속하는 아시아 대륙의 기마 유목 민족들의 일반적인 혼인풍
습이었다.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 지소 태후(只召太后)는 그녀
의 딸인 숙명 궁주(淑明宮主)로 하여금 그 이복 오라비 진흥왕을
모시게하였다. 신라 왕실의 대표적인 근친혼이다.
         
당시에는 근친혼이 일반적 관행으로 진흥왕(재위 540-576)의 부
모도 삼촌과 질녀의 관계였다. 지증왕(재위 500-514)에게는 두
아들, 법흥왕(재위 514-540)과 입종갈문왕이 있었다. 진흥왕의
아버지는 입종갈문왕이고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이다. 즉 진흥왕
의 아버지는 자기 질녀와 결혼한 것이다. 갈문왕은 왕과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붙는 명예호칭이다.
          
신라 왕실과 귀족 사회에는 또하나 색다른 혼인 풍습이 있었으니
바로 다부제다. 지소 태후는 입종공(立宗公)의 부인이 되어 진흥
왕을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사가의 남편인 태종공(苔宗公)과의
사이에서 숙명 궁주를 낳고 있다. 이와 같이 신라의 왕실에서는
공공연하게 사가(私家)의 지아비를 따로 둘 수 있었으며 마음에
드는 유부남(有婦男)고 스스럼없이 통정하고 그 자식까지 낳을
수 있었다. 이는 한족(韓族)들의 모권사회(母權社會)의 풍습이다.
       
삼국유사 권제二 處容郞 望海寺 條에 다음과 같은 향가, 처용가
(處容歌)가 실려있다. 처용가를 다시 살펴봄으로서 서론을 대신
한다.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힐隱吾下於叱古 (* 힐:月+兮)
二힐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처용가는 이렇게 한자로 쓰여져 있다. 그러나 한문이 아니다.
한문으로 읽으면 해독이 되지 않는다. 이두인 것이다. 1943년,
양주동은 처용가를 다음과 같이 해독하였다.
       
새발 발기 다래
밤드리 노니다가
드러사 자리보곤
가라리 네히어라     
둘흔 내해엇고     
둘은 뉘해언고
본대 내해다마란
아사날 엇디 하릿고    
      
현대어풀이는 다음과 같다.
    
서울 밝은 달밤에
밤 깊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내 아내) 것이지마는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은(내 아내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이 노래는 신라 제 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875-886) 때, 왕정
을 보좌하던 처용이 밤늦도록 놀다가 집에 들어오니 그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통정하는 생생한 현장을 목격하고도 분노는 커녕 불
평 한 마디 없이 춤을 추며 물러나면서 부른 노래다. 뒷날 처용
은 신라 고유의 벽사(벽邪)신앙과 얽혀서 역신(疫神)을 퇴치하는
문신(文神) 신앙으로 변신한다. 벽사(벽邪)는 사귀(邪鬼)를 물리
치고 영귀(靈鬼)를 받아들이는 의미이며 역신은 잡귀, 문신은 수
문신(守門神)을 뜻한다.
     
처용의 아내의 행위는 유교적 시각에서 보면 간통이지만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신라의 귀족 사회 여인들이 누려왔고 허용되던 사
랑의 자유 행위 즉 free sex였다.
   
우리 역사에는 3명의 여왕이 등장하는데 선덕여왕(재위 632-647),
진덕여왕(647-654), 진성여왕(887-897) 모두 신라의 여왕이다.
고구려, 백제는 물론 고려나 조선에도 여왕은 없었다.
     
선덕여왕은 황횽사의 목탑과 분황사(芬皇寺), 향기로운 황제의
사찰 즉 여왕의 사찰을 세웠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는 진평왕
(재위 579-632)의 세 딸 중에 맏딸이다. 진평왕이 53년간을 통치
하였으니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쉰살이 넘었던 것으로 추
정된다. 그녀의 남편은 음갈문왕(飮葛文王)으로 선덕여왕의 삼촌
이였다.
     
신라에서는 사위가 왕이 된 일도 종종 발견된다. 탈해, 홀해, 미
추, 내물(356-402), 실성(402-417), 눌지(417-479), 지증왕(500-
514), 진흥왕(540-576) 8명의 사위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 여성은 아들과 차별없이 균분상속을 받았으며 재산을 처분
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아들 딸 차별없는 균분상속의 전통은 고
려시대를 거쳐 조선초기까지도 이어졌으나 여성의 지위는 점차
약화되었다.
        
이규태는 '한국인의 성과 사랑'에서 眞聖女王(재위 887-897)을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애인으로 다음과 같이 재평가하였다. 신
라의 진성여왕은 악군으로 교과서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사직
이 기울기 시작한 것이 여왕 때부터이며, 국내에 반란이 일기 시
작한 것도 여왕 때부터 본격화되었다. 진성여왕 3 년에는 상주의
애노의 난, 5 년, 8 년, 9 년에 궁예의 침입, 6 년에는 후백제
견훤의 침입등이 있었다. 여왕은 집권하는 동안 이 난국을 바로
잡기 위하여 최치원의 시사십조 등을 받아들여 그로 하여금 집권
시켜 난국을 진정시켜보려 하였으나 허사였다. 진성여왕은 정치
를 감당할 만한 역량이 없었다. 그러나 여왕은 사랑을 위하여 모
든 것을 희생한 위대한 애인이였다.
     
신라 헌강왕이 세자를 못 두고 왕 위에 오른 지 한 해도 못 되어
죽자 조정에서는 그의 누이동생이 天資明銳하고 骨以丈夫하며,
선덕여왕, 진덕여왕을 봉립한 전례를 본따 왕에 추대하니 그녀가
진성여왕이다.
    
신라의 여왕은 국법에 따라 결혼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
러나 진성여왕은 이 비인간적인 국법에 대담한 저항을 하였다.
여왕은 그녀의 유모인 복호부인의 남편 위홍과 사랑에 빠졌다.
이 각간 벼슬의 위홍이 사는 사향리에 수시로 드나들었고, 또
수시로 이 연인을 왕궁에 불러들이기도 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서는 이같은 여왕의 정사를 추악한 행위로
묘사하고 있으나, 위홍이 죽은 후 여왕의 행적으로 보아 그 정사
는 육욕적인 것이라기보다 순수한 정신적 사랑임을 알게 된다.
   
여왕 2 년에 위홍이 죽자 여왕은 그를 혜성대왕으로 추일하고 해
인사에 이 위홍의 願堂까지 지었다. 이는 약간 정신적 변태행위
일 수도 있으나 정신적 사랑의 크기를 입증해 주는 것이 된다.
여왕의 맘은 임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고 없는 이 연인의 환상
에 었었던 것이다. 언제라도 여왕은 왕위를 물려줄 사람만 있으
면 헌신처럼 왕관을 박차고 이 연인의 영혼 겉으로 갈 것을 모색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왕 9 년에 전왕인 헌강왕에게 서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왕
은 그 서자를 데려다 세자를 삼고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곤 지
체없이 해인사에 있는 연인의 원당에 찾아가 원당을 지키다 그
곳에서 죽어 해인사 입구 가야산 동구에 있는 황산에 묻혔다. 여
왕은 비록 정치사에서는 오명을 남겼지만 애정사에서는 승화된
사랑으로 멋을 남겼다.
    
고려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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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기 민간에서의 혼인은 전시기와 별로 차이가 없었으나 지
배계급의 경우는 점차 까다롭고 복잡하게 격식을 갖추어 진행되
었다. 양반귀족들 속에서는 혼인에 따라 의복이나 돈, 귀중품 등
을 예물로 보내여 결혼하는 일이 많았다.
       
고려시기 혼인 상대자의 선택에서는 계급사회의 조건에서 이러저
러한 구속과 차별이 있었다. 다른 봉건시기와 마찬가지로 고려시
기에도 같은 계급신분적 처지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혼인이
성립될 수 있었다.
     
고려시기 혼인풍습에서 특이한 것은 처가살이혼 즉 결혼한 후 남
자가 거처를 상당한 기간 처가에 정하고 생활한 것이다. 재산 상
속에서도 직계자손이 없는 경우 사위가 물려받았던 것이며 외손
자가 대를 잇고 제사를 맡아하는 것도 허용되었다. 이조시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는 것이였다.
     
결혼한 부부가 거쳐를 어데에 정하였는가 하는 것은 해당 사회제
도의 성격에 많이 의존된다. 모계씨족사회에서는 여자의 사회경
제적 역활과 그의 지위가 높은 것으로 하여 남자가 여자켠으로
찾아가는 것이 이 사회에 상응하는 부부거처형식이였다. 부계제
사회에서는 여자가 남자집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 이 사회에 상
응한 거처형식이다. 그런데 고려시기 부계가 지배하고 사회경제
생활에서 남자의 역활이 결정적인 것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달리 남자가 여자집에서 상당히 오래동안 살아야 하는 처가살이
혼이 적지않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관습은 고구려와 신라에도 있
었다. 이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면서도 모계사회 풍
습이 과도적 형태로 존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풍습은 이
조 초에 이르러 남자본위의 유교성리학에 따라 15세기 이후 완전
히 살아졌다.
       
고려시기에는 예서라는 특수한 혼인형태가 있었다. 예서풍습은
어린 남자를 집에 맞아서 자란후에 혼인하는 풍습으로 12세기 이
전부터 있었다. 데릴사위는 혼인함에 있어서 남자켠에서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 속에서 다 자란 장
정 노력을 여자집에 끌어들이기 위해 생긴 것이였다면 예서풍습
은 혼인시 이러한 부담이나 생활상 애로를 해결하기 위한 데서
생긴 것이 아니라 주로 자식이 없는 통치배들의 가정에서 가계계
승, 재산 상속과 자기 가문의 세력확장을 위하여 사위를 미리 얻
어두는 것이였다. 예서풍습은 이조초기에도 있었으며 부모가 나
이가 많은 경우 경제적 고려와 관계없이 진행된 경우도 있었다.
    
과부들이 재가하는 문제가 시비의 대상으로 되기 시작한 것은 고
려시기부터이다. 고려 중엽 이후 유교도덕이 점차 널리 보급되면
서 재가는 정조를 잃는 행실로 비난받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性에 대한 개념은 고려시대에도 대체로 자유로왔으
며 왕족과 봉건통치자들 속에서는 가까운 친척들 사이에도 혼인
이 맺어졌다. 남녀가 한 냇물에서 목욕하는 게 예사였고, 결혼에
있어 가볍게 붙고 쉽게 떨어진다고들 하였다.
      
광종(재위 949-975)은 배다른 누이동생과 결혼하였고, 경종(재위
975-981)비는 왕이 죽은 후 왕의 숙부와 통하여 아이를 낳았으며,
성종(재위 981-995) 왕비 유씨는 같은 왕족에게 시집갔다가 개가
한 여인이고,  인종(재위 1122-1146)은 자기 이모와 결혼하였다.
충선왕(재위 1308-1313)비 허씨는 7 남매를 거느린 과부였다.
      
그러나  동성혼은 사회적 비난을 받고 여러차례에 걸쳐 법적으로
금지하는 조치까지 취해졌으나 좀처럼 금지되지 못했다. 저들의
정치적 권력을 넓히고 경제적 부를 더 많이 늘이며 그러한 특권
을 다른 문벌에나 가문에 넘겨주지 않으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근세조선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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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조선시기에는 주자학에 기초한 주자가례가 관혼상제에서의
도덕과 예의를 규정하는 본보기가 되었다. 정부는 그 준수를 강
요하고 위반행위는 제재를 가하였으며 그 규범을 준수하려고 노
력한 것은 주로 봉건관료들이였다. 민간에서도 유교가례의 영향
을 받아 점차 번잡하고 허례허식적이고 낭비적인 의례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free sex 풍조는 일부이기는 하나 조선조 초에도
여파를 남겼다. 세종 9 년의 감동(甘同) 음풍사건은 그 규모로
보아 당대의 성관념을 적절히 대변해 주고 있다. 검한성 유귀수
의 딸이요, 평택 현감 최중기의 처인 감동은 병치료하러 친정에
간다고 서울에 와 남편이 있는 몸으로 정섭(영의정)의 첩이 되더
니 이어 38 명의 사대부와 간통을 하였다. 그 중에는 재상급인
황치신(판충추부사), 남궁계(의주 목사), 이효량(상양군), 박종
지(첨절사) 등이 끼여 있으며, 특히 이효량은 감동의 남편 최중
기의 매부인데도 간음하였고, 정효문은 감동을 첩으로 삼은 정섭
의 조카인데도 간통을 하였다.
      
여성의 성적인 방종에 비교적 대범하였던 조선 초기의 풍조는 유
교문화의 토착화와 더불어 제재를 받기 시작했다. 그 첫 케이스
로 전관찰사 이귀산의 처 유씨가 연하의 친척인 조서로와의 간통
사건을 처벌하는 데 있어 시장바닥에 자녀의 표찰을 붙여 사흘동
안 세워둔 후에 칼로 베어 죽이는 참형을 가했다. 그러나 혹형으
로도 전통의 관성을 짓누를 수는 없었다. 그 후로로 소위 여인들
의 섹스스켄달은 계속되었다.
     
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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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의 성풍속과 혼인의 특성은 세계화, AIDS, 동성애, 미혼모,
free sex, 근친상간, 성폭력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미혼모의
증가와 여성 주도의 free sex는 모계사회로의 회귀를 뜻한다.
AIDS는 현대적 시각에서의 난혼의 결과라 말할 수 있다. 근친상
간, 성폭력 등도 과거로의 회귀다. 역사는 반복한다. 과학과 문명
은 발전하여 왔으나 우리는 아직도 원시문화로의 회귀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면서.......
       
2.
우리는 오늘날 사고, 신념, 종교관, 도덕관, 가치관이 다양한 세
계에서 살고 있다. 과거 역사 시대에서도 마찬가지 였으나 당시
에는 그들 서로간의 접촉의 기회가 적었다. 그러나 현재 사회는
메디아, 메스콤, 인터넷 등의 발달과 발전으로 세계 모든 사람들
이 같은 시각에 같은 공간에서 접촉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세상
에서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은 영혼과 마음의 여유를 갖
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바라보
고 그들을 포용하는 것이다. 역사는 그 시대로 돌아가서 그들을
바라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풍속을 이
해하여야 한다. 그 길만이 참 나를 아는 길이다.
  
3.
1대 단군인 왕검(檀君 王儉)이 존재하였던 시대인 B.C.2333은 인
류의 역사상 별로 오래되지 않은 역사다.
  
- 끝 -

p.s. 서인회 모임에서 토론을 할 수 있도록 사전에 글을 올려달라는

요청에 따라 서인회 역사토론이 있는 달의 월초에 원고를 미리

올리기로 한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많은 반론과 토론을 준비하기 바란다.

 

 

 

                                                                     다음카페 <주광수의 우리 역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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