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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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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이 은사도(隱士圖)를 그리고 화제를 쓴 그림이다. 그는 조선 중기에 도화서(圖畵署)화원을 거쳐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나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1647년 창경궁 저승전의 중수공사 때는 화원 6명과 화승(畵僧)66명을 데리고 책임화원으로 일했다. 인물 · 수석(水石)에 독창적인 화법을 구사하였는데, 굳세고 거친 필치와 흑백대비가 심한 묵법(墨法), 분방하게 가해진 준찰(皴擦), 날카롭게 각이 진 윤곽선 등이 특징이다. 그는 사람됨이 너그럽고 익살스런 농담을 잘 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여 한 번에 두어 말은 거뜬히 마셨다. 반드시 흠뻑 취해야만 붓을 휘둘렀는데, 필치가 마음대로 뻗을수록 그림 속 광경이 융화되어, 술이 뚝뚝 떨어지듯 취했을 때 신운(神韻)이 흘러넘쳤다. 대개 김명국의 마음에 든 작품은 술 취한 뒤에 그린 것이 많다고 한다. 그의 집으로 가서 그림을 청하는 사람은 반드시 큰 독에 술을 채워 가야하고, 사대부가 그를 자기 집으로 불러들일 때 또한 술을 많이 준비하여 그의 주량을 흡족 시킨 뒤에라야 비로소 그가 흔쾌히 붓을 들었다.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를 주광(酒狂)이라고 하였고, 그의 지인들은 그를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조선 후기의 미술평론가인 남태응은 그의 청죽화사(聽竹畵史)에서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라고 평하였다. 유작은 안견파(安堅派)의 화풍을 따른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절파 후기의 광태파(狂態派)에 속한다. 또 그는 선종화에도 뛰어났는데 대담하고 힘찬 감필(減筆)이 특징이다. 그의 화풍을 이어받은 대표적 화가로 조세걸(曺世傑)이 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제목처럼 속세를 떠난 은사(隱士)가 아니라 죽음을 향하여 무거운 걸음을 내딛는 화가 자신의 모습이다 만년의 작품인 은사도(隱士圖)에서는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재주가 다 나오지 않았고, 또 술에 취하면 취해서 제대로 그릴 수가 없었다는 그의 호방한 기운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김명국(金明國)이 은사도(隱士圖)를 그리고 화제를 씀
將無能作有, 畵貌豈傳言, 世上多騷客, 誰招已散魂.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데, 그림으로 모습을 그렸으면, 그만이지 무슨 말을 덧붙이랴.
세상엔 시인이 많고도 많다지만, 그 누가 흩어진 나의 영혼을 불러 주리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