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도연명 "음주" - 정선 <동리채국>

2015. 12. 14. 00:43美學 이야기

 

 

 

 

 

       [고전] 도연명 「음주」- 정선 <동리채국>| ◈한시산책

 

松亭 | 조회 80 |추천 0 | 2013.10.08. 00:10

 

 

 

타이틀

 

 

 

도연명 「음주」- 정선 <동리채국>

 

울타리 밑에서 국화꽃을 따면서

 

 

    심사정이 이병연의 시로 시의도를 그리고 정선 역시 이병연과 시와 그림을 주고받았다면 이병연과 정선에게 나란히 스승이자 대시인이었던 김창흡(金昌翕, 호는 삼연(三淵), 1653-1722)의 시는 어땠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직까지 겸재가 스승 김창흡의 시를 가지고 그린 시의도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겸재의 그림 속에 겸재가 스승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그렸을 것이란 심증이 물씬 풍기는 그림은 있다.
김창흡은 조선후기 시사에서 형 김창협(金昌協, 농암(農巖), 1651-1708)과 함께 시단에 쇄신 운동을 전개한 시의 혁신아였다. 그는 중국의 대가들이나 흉내 내는 상투적인 시를 거절했다. 그러면서 ‘동방의 시는 전체가 거칠고 엉성하다(東方詩全體草率)’라고 이와 같은 시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렇게 된 사정을 보면 그보다 앞선 17세기는 임진, 병자의 두 난의 겪은 뒤 온 나라가 국가 재조(再造)에 열중하던 때였다. 당연히 사회 분위기는 경직돼 있었고 한편으로는 건설적이었다. 당연히 문학에도 이같은 분위기가 반영됐다. 가짜로라도 왜군을 쳐부순다는 『임진록』과 같은 글들이 나와 유행했고 시에서도 비장한 느낌이나 격정을 강조하는 낭만적인 풍조가 강했다. 따라서 개인의 감정에 충실하거나 서정적인 감상으로 흐를 여지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18세기에 들어 나라가 안정되고 경제 회복을 넘어 발전 양상을 보이면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또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생겨났다. 여기에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토해내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시’ 지으라는 명나라 말기의 새로운 시 이론이 전해오면서 변화의 열망이 현실이 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김창흡은 이와 같은 문학적 변화의 최선봉에 서서 실천적 방향을 제시하며 새로운 시 운동을 리드했다. 그는 소위 최고, 최상이라는 것만 모범으로 삼게 된다면 결코 자기 시를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천기론(天機論)을 주장했다.

천기는 하늘의 기라는 말로 우주 운행이나 자연의 자연답게 만드는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삼연은 시를 지을 때 이 천기가 나타나야 한다고 했다. 즉 외부 반응으로 생긴 마음속의 진실한 감동이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한 감동이야 말로 진짜 시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감동의 진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아름답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 마음속의 흥(興)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삼연의 행적을 보면 18세기의 알피니스트처럼 보일 정도로 전국의 명산을 두루 안다닌 곳이 없었다. 특히 설악산 영시암에 암자를 짓고 오래 동안 기거했다. 이는 모두 천기가 발로(發露)되는 시를 짓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제자 정선이 한국 최고의 절경인 금강산을 대상으로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것은 바로 이 천기설과 무관하지는 않다.
그런 삼연이 제자들에게 천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강의하면서 거론했던 사례가 바로 도연명의 시의 한 구절인 ‘동리채국하 유연견남산(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이었다. 동쪽 담장 아래서 국화꽃을 따며 무심한 상태로 눈앞의 남산을 바라본다는 것은 가슴 속에는 삿된 생각(私意) 없이 눈앞에 있는 사물을 그대로 대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이때 홀연히 외부 사물과 나 사이에 천기가 흐른다(忽然相得物我之間天機流動)라고 설명했다. 훗날 진경산수의 대가로 성장하는 젊은 날의 정선이 천기설은 물론 그 가르침 속에 인용된 이 시를 오래도록 가슴에 새겼을 것은 쉽게 상상이 가는 대목이다.

   이 구절은 말할 것도 없이 동진(東晋) 시대의 자연파시인 도연명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것이다. 원래 이 시는 술을 좋아했던 그가 술을 대할 때마다 읊었던 「음주(飮酒)」 20수 한 세트 중 다섯 번째 시의 일부이다.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다.

 

飮酒二十首 其五 음주 이십수 기오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결려재인경 이무거마훤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문군가능이 심원지자편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동리채국하 유연견남산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산기일석다 비조상여환
此中有眞意 欲辯已忘言    차중유진의 욕변이망언

변두리에 오두막 짓고 사니 수레와 말 시끄러운 소리 들리지 않네
어찌 이럴 수 있는냐 묻지만 마음이 멀어지니 사는 곳도 구석지다오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꽃 따다가 하릴 없이 남산을 바라보니
저녁놀에 산기운 아름답고 나는 새들 짝지어 돌아오네
이 속에 자연의 참뜻이 있나니 그 말을 해주려다가도 할 말을 잊고 마네

심원지자편이란 마음이 욕심에서 멀어지니 사는 곳은 아무래도 좋아 자연히 사람들 없는 곳에 살게 됐다는 뜻이다. 도연명이 자연파 시인을 넘어 이상적인 문인의 대표로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문인 관료가 정식으로 사회의 주류가 된 송나라 때에 들어서부터다.

 

   문인이란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모든 사물에 회의나 의문부를 찍어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이다. 이들은 송나라 들어 귀족을 대신해 사회 주도의 엘리트층이 되자마자 곧 그것을 속박이라고 여기고 산하에 은거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도연명의 전기를 보면 집이 가난해 일찍이 관직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격적으로 그는 관리가 몸에 맞지 않았다. 20대 후반부터 관리 생활을 시작했으나 들어가서는 1년도 못 채우고 나오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41살 되는 해에는 팽택이란 작은 현의 수령 자리에 얻어 걸렸는데에도 80일 만에 그만두면서 「귀거래사」를 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천성이 자연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억지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비록 굶주림이나 추위가 절박하기는 해도 천성에 어긋나는 것은 더 괴로운 일이라고 했다. 귀향과 산수간(山水間)을 동경하는 문인 관료에게 그는 자연히 대쪽 같은 결심의 모범이 되었다.

더욱이 이 음주시 제5수에 보이는 ‘이렇게 사는 데 참뜻이 있다’라고 내용은 은거를 꿈꾸는 문인 관료들의 가슴을 찌르고 탄복시킨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삼연은 그런 명구를 대상으로 천기론의 시범을 보인 것이다. 그러니 문하의 화가 정선에게 깊이 새겨지지 않았을 리 없었을 것이다. 실제 정선이 이 시구를 가지고 그린 그림이 있다. 나란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2점의 부채 그림으로 하나는 ‘동리채국하’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연견남산’그렸다. ‘동리채국하’ 부채그림에는 그냥 동리채국이라고만 적었다. 엄격히는 ‘동리채국하’라고 해야 시의도 자격이 부여되겠지만 도연명의 이 구절은 훨씬 이전부터 동리채국으로 코드화돼 있었다.

 

 



정선 <동리채국> 부채

지본담채 22.7x59.7cm 국립중앙박물관

 


정선 <유연견남산>부채

지본담채 22.8x62.7cm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동리채국>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속 도연명은 두건 차림으로 국화를 바라보는 모습이고 ‘유연견남산’은 집밖의 약간 높은 언덕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산은 옅은 채색을 바른 위에 다시 먹에 섞은 짙은 색으로 점을 찍어 무성한 숲으로 쌓인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 아래는 빈 공간으로 두어 논밭이 한없이 뻗어가다가 산자락하고 연결되는 듯이 표현했다. 소나무와 회나무는 줄기 가운데는 그대로 두고 윤곽선 쪽에 비늘과 여러 번 먹선 을 그어 강하고 우람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는 겸재 근경 소나무의 특징이기도 하다.

   국화가 스승의 주장, 훈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달리 보이는 그림이 또 있다. 1741년에 그린 <독서여가(讀書餘暇)>이다. 이 그림은 그가 친구 사천과 시와 그림, 그림과 시를 서로 주고 받은 것으로 꾸민《경교명승첩》 (상권)의 첫 번째에 들어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 속 주인공에 대해 겸재 연구의 대가 최완수 선생은 ‘화가 자신의 자화상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그가 독서 끝에 툇마루에 나와 바라보는 마당의 화분 속 꽃이 아무래도 국화꽃 같아 보인다.

 

 



정선 <독서여가>

1741년 견본채색 28x33.0cm 간송미술관

 


   무엇이든 도를 넘어 유명해지면 전설이 되듯이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도 위대한 시구를 넘어 이상적 문인의 상징이 되면서 고사인물화의 소재로 격(格)이 바뀌었다. 김홍도가 그린 <동리채국>은 8폭으로 된 고사인물도 병풍 속에 들어있는 한 폭이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