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 「남전연우도 제화시」 - 이조묵 <취산담소> / 시와 그림

2015. 12. 14. 01:38美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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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유 「남전연우도 제화시」 - 이조묵 <취산담소>

       

   19세기 들어 시의도 유행 후반기에 들면 유명 시가 아닌 보다 유식하고 전문적인 시가 등장하는 현상이 생겨난다. 이른바 유명 화가들이 그림 속에 적어 놓은 제화시(題畵詩)가 당송의 유명 시구를 대신해 적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다분히 시의도 유행의 조락(凋落) 현상과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송의 유명 시만으로는 시선과 관심을 끄는데 어느 정도 한계를 보인 것이다. 그래서 참신하고 새로운 시각화를 모색하기 보다는 간편한 방법을 택해 생소하면서 전문성이 있어 보이는 시구를 찾는 쪽으로 나간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유명화가의 제화시라 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시 대신보다 전문적인 시가 등장하는 것은 그 무렵의 사회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과거 응시자들이 넘쳐나면서 과거 시험은 물론 문인들 사이에 주고받는 시 자체도 어려고 복잡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다분히 문학성과 회화성의 결합이라는 시의도 본래 취지에서 보자면 회화성을 저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시의도의 그림은 이후 점점 밋밋하게 되면서 상투적인 모습을 띄게 되고 시는 출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어려워지게 됐다.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초입쯤에 그려진 그림이 바로 이 이조묵(李祖默 1792-1840)<취산담소(翠山談笑)>라 할 수 있다. 우선 그림을 보면 담채로 우람한 산세를 그렸다. 녹청에 군청을 엷게 풀어 파랗고 푸른 산을 그렸으며 먼 산과 바위는 군청 그대로를 살렸다. 아래쪽 흙 언덕에 고사 두 사람이 마주앉아 담소를 나누며 한 사람은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그려 넣었다. 

이렇게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고서 그 중 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은 당시 그림 그리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던  개자원화전』「양인간운식(兩人看雲式)」「양인대좌식(兩人對坐式)」을 참고로 그린 것이다. 그림은 크게 솜씨를 부린 것은 아니지만 담백하고 맑은 기분이 있어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그런 연유로 전형적인 문인화풍이라 말할 수 있다. 

 

 

 

  
『개자원화전』 「양인간운식(兩人看雲式)」과 「양인대좌식(兩人對坐式)」


 

   이를 그린 이조묵은 소론 집안의 이조판서 자제로 태어났다. 그러나 부친이 당쟁 때문에 탄핵을 받아 유배와 복권을 반복하는 것을 보고 벼슬길을 포기하고 서화와 시문으로 생애를 보냈다. 주변에 쟁쟁한 문인들과 사귀었는데 그중에는 화가 윤제홍(1764-1840), 정조의 부마 홍현주(1793-1865), 추사 김정희(1786-1856) 등이 있다. 또 중국 문인들과도 교류해 추사가 스승으로 모신 옹방강과 그의 아들 옹수곤과도 서신을 주고 받았다. 

그는 당대의 大컬렉터로 유명해 나중에 오세창이 그의 서화골동을 가리켜 ‘조선에서 으뜸’이라고 칭했을 정도이다. 이 그림에 그가 쓴 시구는 제화시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데 전체 내용은 ‘山路元無雨 空翠濕人衣. 畵家三昧 工詩能解畵(산로원무우, 공취습인의, 화가삼매, 공시능해화)’이다. 

 


이조묵 <취산담소> 지본담채 17.5x22cm 개인 


 

이 구절 중 앞의 두 구는 시이고 뒤는 이조묵이 자신의 생각을 더한 것이다. 시의도에서 이처럼 시+
 

 

味摩詰之詩, 詩中有畫. 觀摩詰之畫, 畫中有詩.

詩曰藍谿白石出, 玉川紅葉稀.

山路元無雨, 空翠濕人衣.

此摩詰之詩, 或曰非也. 好事者以補摩詰之遺.

 

마힐(왕유)의 시를 음미해보면 시 속에 그림이 있으며 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

시에 이르기를 ‘남전에는 흰 돌이 비쭉, 옥천에는 붉은 잎이 드문드문,

산길에 본래 비 없었지만, 푸른 숲 기운이 옷깃을 적시네’라고 했다.

혹자는 말하기를 (왕유의 시가) 아니고 호사가가 왕유의 뜻을 보충한 것이라고 한다.     


   이를 보면 동파가 본 왕유 그림에 이 시가 적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왕유제화시인 것이다. 물론 동파는 이는 나중에 호사가가 지어 넣은 것일 수도 있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이조묵은 적어도 이 내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수집가인 이상 동파전집 한 질쯤은 가졌다고 해도 이상할 일이 전혀 없다. 또한 그가 살았던 19세기 전반기 한양에는 동파 숭배자인 옹방강의 영향으로 인해 추사 주변의 문인들 사이에 동파 붐이 크게 일고 있었다. 

   시 전체를 머릿속에 넣고 보면 이조묵의 그림은 문인 그림답게 기교를 부리지는 않았지만 시속 내용이 그려주는 이미지, 즉 ‘푸른 숲 기운’을 살리려 애쓴 것을 알 수 있다. ‘좋은 시가 능히 그림을 풀어낸다’고 한 말 역시 동파의 구절, 즉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말을 전제로 적어 넣은 것이 자명하다.(y) 

 

 

 

 

글/사진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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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3 1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