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순학 「溪興」- 서직수 <산수도>

2015. 12. 15. 19:21美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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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순학 「溪興」- 서직수 <산수도>

        

앞 여울로 흘러 내려가는 줄도 모르네

 

 

   조선시대에 그림에는 그리는 사람의 개성이 드러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물론 전무 하지는 않다. 거칠고 얌전한 화풍을 통해 어느 정도 사람됨됨이가 추측되기도 한다. 그런 반면 그림을 받아든 사람의 성격은 전혀 짐작할 길이 없다. 누구에게 그려주었는지를 밝힌 관서(款書)가 있기는 해도 받아든 사람이 그때의 감흥, 느낌 등을 글로 적어 남긴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받아든 그림에 다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의 직설적으로 속내를 털어놓은 이색적인 그림이 있다. 김홍도와 그의 후배 화원화가 이명기가 합작해 그린 <서직수 초상>이다. 서직수(徐直修, 1735-1811)는 노론 대표집안인 달성서씨 집안 출신으로 큰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그림과 골동을 좋아하며 화가들과도 자주 어울렸던 문화인이다. 그는 수원으로 이장된 현륭원의 원령이 된 적이 있는데 이 무렵 수원 용주사에는 김홍도가 불화(佛畵)를 제작하고 있어 두 사람의 관계가 추측되는 인물이다.

 

 


김홍도, 이명기 <서직수 초상>

1796년 견본채색 148.8x72.0cm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은 조선시대 초상화로서는 이색적으로 평복을 입은 선비가 서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림 오른쪽 위에는 서직수 자신이 직접 쓴 화제가 적혀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李命基畵面 金弘道畵體 兩人名於畵者 而不能畵一片靈臺. 惜乎 何不修道於林下 浪費心力於 名山雜記, 槪論其平生不俗也貴, 丙辰夏日 十友軒六十二翁自評 
이명기화면 김홍도화체 양인명어화자 이불능화일편영대. 석호 하불수도어임하 낭비심력어명산잡기, 개론기평생불속야귀, 병진하일 십우헌육십이옹자평 

이명기(1756-1813이후)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을 그렸다. 두 사람은 그림을 이름이 났으나 한 조각의 정신도 그리지 못하였다. 아깝도다. 어찌하여 임하에서 도를 닦지 않고 명산 잡기에 심력을 낭비하였는가. 대개 논하자면 그 평생은 속되지 않았음은 귀하다 하겠다. 병일 하일, 십우헌 62살 늙은이가 자평하다. 

   그런데 ‘명산잡기’ 부분에는 원래 글을 먹으로 북북 지운 흔적이 보인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흔히 서양 영화에 나오듯이 방안에 걸어놓고 감상하기 위해 그린 것이 아니다. 사당에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용도로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여기에 성질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오금이 저릴 수밖에 없는데 아무튼 서직수는 단원을 비롯한 그 주변 사람들과는 매우 가까웠다. 그래서 이런 화(?)를 여과 없이 터트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단원 주변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자료는 또 있다.  초상화 제작 前인지 後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십우헌도(十友軒圖)>가 그것이다. 그는 당시 문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서화감상과 골동 수집 이외에 자신이 놓아하는 검, 술, 화초 등을 열거해 열 가지를 뽑고 이를 자신의 친구라고 하며 당호를 ‘십우헌(十友軒)’ 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를 단원의 절친 이인문을 시켜 그리게 한 것인데 이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그림에는 바위를 등진 계곡가에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이 중 한 사람만 실제 인물, 즉 주문자인 서직수이고 나머지 네 사람은 역사 속의 인물이다. 그가 좋아한 십우에는 동기창의 글씨, 심주의 그림, 두보의 시 그리고 철형대사의 여행을 좋아하는 취미와 수경도인의 혜안 등이 손꼽히는데 그림 속 4명은 이들을 의인화해서 그린 것이다. 그런데 누구 누구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그외 검, 책, 술병, 문방구 등은 있는 그대로 그렸다. 

 


이인문 <십우도>

1783년 지본담채 126x56cm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에는 단원의 스승 강세황(1713-1791)이 평(評)을 적을 글도 있다. 그 내용은 ‘십우도는 세속을 초탈한 솜씨로 그려야한다. 이 그림은 깨끗하면서도 담백하고 인물과 나무와 돌이 모두 옛 뜻을 갖췄으니 실로 십우(十友)라는 제목과 나란히 칭할 만하다(寫十友圖, 須得出塵之筆, 此幅瀟灑澹蕩, 人物林石, 俱有古意. 眞與十友之題相稱)’이다. 
평의 내용과 별도로 이 자체만으로도 서직수는 독특한 취미, 취향 이외에 당시 화가들과도 매우 가까웠으며 특히 표암 그룹과 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이런 환경이었던 때문인지 어느 날 그가 붓을 들어 그린 그림이 한 점이 현재 전하고 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산수도>는 당시에 유행하던 중국 전래의 화보 속에 보이는 그림을 조합해놓은 듯한 느낌이다. 우선 큰 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물가에 낚시대를 드리운 고깃배 하나가 정박해 있다. 근경에서 원경으로 넘어가는 중경(中景) 부분은 조금 애매해 빈말이라도 탁월한 솜씨라고는 말할 수 없는 그림이다. 그러나 필치를 자세히 뜯어보면 당시 유행하던 여러 화풍을 익히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화면 속에 겸재와 남종화 화풍이 나란히 보인다는 점이다. 


서직수 <산수도>

지본수묵 51x30.5cm 서울대 박물관    

 


   원산의 묘사방식을 보면 산 전체를 담묵으로 칠해 놓고 그 위에 뾰쪽한 점을 찍어 산등성이의 나무를 그렸는데 이는 겸재의 금강산 그림 등에 자주 보이는 표현법이다. 그리고 산 아래 몇 채의 집이 보이고 소나무 숲이 곁들여져 있는데 먹선을 옆으로 그어 가지를 펼친 소나무를 그리는 것 역시 겸재풍이다. 반면 강가에 메어있는 화보풍의 고깃배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가지를 늘어트린 버드나무와 회나무 가지 표현은 다분히 남종화풍이다. 

그런데 이 그림 위쪽으로 십우헌(十友軒)이란 관서와 함께 시구절 하나가 적혀있다. ‘流下前灘也不知(예하전탄야부지)’로 ‘앞 여울로 흘러드는 것도 알지 못하는구나‘ 정도이다. 시는 만당 시인 두순학(杜筍鶴, 846-904)「계흥(溪興)」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두순학에 대해 잠시 살펴보면 그는 강남 제1풍류재자(風流才子)로 유명했으며 ‘南朝四百八十寺 多少樓臺煙雨中(남조사백팔십사 다소누대연우중)’ 구절로 이름난 「강남춘(江南春)」을 읊은 두목(杜牧)의 막내아들이다. 

   그는 46살에 진사에 급제해 벼슬에 나가 당시 신라에서 와 있던 최치원과 교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최치원이 신라로 떠날 때 전별시를 지어준 것이 당시집에 전한다. 그는 당이 무너질 무렵 후량(後粱)의 신하가 돼 후량을 세운 주전충의 비호를 받았다. 그러나 재주를 믿고 천성이 교만했던지 주위 관리들로부터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살해 직전에 병사했다. 그가 지은 이 시는 그의 이런 행적과는 전혀 별개로 한가하기 그지없다. 

山雨溪風卷釣絲   산우계풍권조사
瓦甌篷底獨斟時   와구봉저독짐시  
醉來睡著無人喚   취래수저무인환
流下前灘也不知   류하전탄야불지

강산에 비바람 부니 낚시줄 거두고 
배안에 들어가 막사발 술잔을 기울이네    
술 취해 잠들어도 깨우는 사람 없으니 
앞 여울로 흘러가는 줄도 모르네 

와구는 질그릇으로 만든 사발이다. 봉은 거적을 덮은 작은 배이고 짐은 술을 따른다는 말이다. 비바람 불어 낚시줄을 거두고 배안에 앉아 사발에 술을 따라 마시다 보니 잠이 들어버려 배가 살랑살랑 앞 여울로 흘러가는 것도 모른다고 하는 세상사를 잊고 사는 무욕과 여유을 뜻한다. 시의 정경 속에 선비의 욕심없는 생활이 투영돼 있어 이 시는 명시가 됐다.  

   이렇게 시를 읽고 보면 그림은 표현 자체가 서투면은 있지만 시의 내용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거적을 덮은 배와 뱃전에 드리운 낚시대가 그렇다. 그런데 비바람이 세게 불어 생업을 거둘 판인데 그림 속 풍경은 이를 그리내지 못했다. 여기 화가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김홍도 <어부오수도> 지본담채 29x42cm 개인 


 

   그것은 어쨋거나 상관없다. 그런데 이 ‘유하전탄야부지’ 시구가 김홍도 그림에도 등장한다. <어부오수>라는 작은 편화(片畵)로 그림에는 작은 낚시배에 낚시대를 거두고 팔베개를 하고 잠이 든 어부가 한 사람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아무 배경 없이 물 흐르는 모습만 보이는데 앞 여울이 가까워졌는지 뱃전부터 앞쪽의 물살이 한결 급해진 것이 여실하게 표현돼있다. 대가의 솜씨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두 사람이 사이가 아니라 그림 <산수도>와 <어부오수>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떤 인과 관계가 있었는지는 당연히,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5.12.14 2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