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욕망 사이 - <책가도>

2015. 12. 21. 04:52美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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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향과 욕망 사이 - <책가도>

 

 

 


<책가도(冊架圖)>, 장한종,

18c말~19c초, 종이에 채색, 8폭병풍, 195.0×361.0cm, 경기도박물관

 

 

   다음은 1791년 어느 날, 정조임금과 신하들의 가상 대화입니다.

 

정조 : (어좌 뒤의 서가를 가리키며) 경들도 보입니까?
대신1 : 보입니다, 전하. 저희도 지금 그것이 신기하여 보고 있었습니다.
정조 : (웃으며) 진짜 책이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요? 이것은 그림일 뿐입니다.
       화공에게 책가를 그려오라 명하였지요.
대신2 : 어찌 책 그림을 어좌 뒤에 두시었습니까?
정조 : 옛날, 정자(程子)가 말씀하시길,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다하더라도 서실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 하였습니다. 나 또한 이 말의 의미를 이 그림으로 인해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평소 서책으로 즐거워하였지만 혹 일이 분주하여 책을 외고 읽을
       여유가 없을 때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마음으로
       즐긴다면 하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경들도 평소에 책을 가까이 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허허허...

 

   몇몇 기록을 근거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도서관에 가서 책들 사이에 앉아 뿌듯함이나 편안함을 느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가도가 조선에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정조 때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보니 세종의 방에 책가도 를 배치했던데, 좀더 세밀한 고증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책장 그림인 ‘책가도’는 책과 경물들을 그린 ‘책거리’의 일종입니다. 책가도의 책장 내부에는 책 뿐만 아니라 갖가지 귀한 장식품들 즉, 도자기나 공예품들을 넣어서 그리는 것이 보통인데, 이의 연원에는 중국 청대의 미니어쳐 장식장인 '다보격'이 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청대의 장식품인 다보격.

 대나무로 만들어진 통을 펼치면 내부에 작은 장식품들이 보이도록 되어 있다.

 

 

 


傳 낭세녕, <다보각경 多寶閣景>

18c, 지본담채, 123.4x237.6cm 플로리다 제임스 모리세이 소장
밀라노 출신의 카스틸리오네, 낭세녕(1688~1766)은 청에서 궁중화가로 활동하였다.

 

 

    좀더 올라가면 명대말(明代末)의 고상한 취미활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서재나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시문, 서화와 진귀한 붓과 벼루, 오래된 도자기, 분재 등을 감상하던 유행이 있었는데, 청대에 이르면서는 <기명절지도>라는 그림의 유행을 가져오고, 이것이 다시 조선에 전해져 진귀하고 고상한 물건과 상류층 문화에 대한 동경심이 집약된 책가도가 유행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중국 청대에도 책거리 그림 볼 수 있으나, 이러한 욕망이 이쪽에서 더 컸던 탓인지 오히려 책과 골동, 진귀한 물건을 그린 책거리는 오히려 조선에서 더 많이 그려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조선 후기에 종현이라는 궁중화원이 책거리를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는데, 아쉽게도 이종현의 책거리는 전해진 것이 없습니다. 김홍도나 신한평도 마찬가지.

현재 남아있는 작품으로 볼 때 책가도의 스타는 단연 이종현의 손자 이형록(1808~?)입니다. 19세기의 인물이니 시대가 많이 내려오긴 하지만, 그가 그린 책가도의 우아함, 세련된 분위기, 그림자와 명암 등 서양화법의 구사 등은 보는 사람을 감탄케 하지요. 외국에서도 인기가 높습니다.

 

 

 


이형록, <책가도>, 종이에 채색, 8폭 병풍,

140.2×468.0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오늘 스크랩하는 명작은 이형록보다 좀더 시대가 올라가는 장한종(張漢宗, 1768-1815이후)의 책가도입니다. 역시 궁중화원이었던 장한종의 책가도는 최근에서야 알려지면서 새로이 연구에 박차가 가해지고 있습니다.

 

 

 

 

 

 

   이 장한종책가도 ‘쌍희(囍)’자 문양을 새긴 휘장을 걷어낸 듯이 보이도록 한 독특한 구성입니다. 이러한 휘장을 넣는 것은 궁중 책거리의 화려한 특징이었으나 뒤에는 민화 책거리에서도 종종 보여지게 됩니다.

 

   4단 혹은 5단의 책꽂이 안에 책, 도자, 문방구, 과일, 꽃 등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소재들은 각각 의미가 부여된 것이라고 하네요. 책은 나쁜 것을 쫓는 벽사나 고위 관리에의 등용 등을 의미하며, 두루마리는 행운과 배움을, 벼루 등의 문방사우는 선비정신을, 고동기나 중국도자기는 문방청완의 취미를, 악기는 기쁘고 즐거운 일 등등... 꽃도 의미가 다양하여 살구꽃의 경우 과거 급제를 , 매화는 지조와 절개를, 국화는 은거처사의 절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장한종은 원래 물고기와 게, 조개 등을 그린 어해도(魚蟹圖)로 유명한 인물이므로, 자신의 장기인 새우 두 마리와 연꽃을 화면 중심에 배치하여 그렸습니다. 화면 하단 우측에 두껍닫이 문 하나를 살짝 열어 그 안에 책이 가득 있음을 보여주는 것도 장한종 특유의 익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왼쪽 첫 번째 폭 인장함 안에 있는 도장에도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적어 넣는 센스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장한종인'이라고 써 있는 인장을 슬며시 집어 넣었다.

 

 

 

   청나라의 귀한 물건들을 현실의 방에 채우는 대신 평면의 그림으로나마 위안삼았던 것을 보니, 자신의 거실을 멋진 물건으로 채우고 읽지도 않는 외국 책들을 장식으로 꽂아놓는 요즘 사람들의 취향도 조상님들의 책가도 취향과 일맥상통하나 싶기도 합니다.

책가도가 경물에 대한 취미와 욕망만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겠지요. 적어도 정조임금 만큼은 책가도를 그런 용도로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편집 스마트K
업데이트
2015.12.21 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