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위엄 백자 쌍용준 8 - 18세기의 모습 (1)

2015. 12. 21. 23:12도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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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왕의 위엄 백자 쌍용준 8 - 18세기의 모습 (1)

 

       광해군 10년 이후부터 제작된 후기의 쌍용준

   푸른 청화로 쌍용을 그려 넣은 대형 용준은 현재 십 수점이 확인된다. 만약 광해군10년(1618)에 사옹원이 지적했듯이 ‘(15-16세기에 제작했던 용준이) 왜란을 치르면서 모두 없어졌다’는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대형 용준은 모두 광해군 10년 이후에 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당시 현감을 지낸 박우남이 소유하고 있던 용준 한 쌍이 왕실로 바쳐졌고 그것을 사옹원이 관리했다고 했는데 바로 그 용준이 현재 남아 전하는 십 수점 안에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남아 전하는 용준 모두는 『세종실록』「오례의」와『국조오례의 서례』에 나오는 도면을 기준으로 해 박우남이 바쳤던 것과 같은 15-16세기에 만든 용준의 양식을 본받아 새로 만들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17세기초기, 즉 왜란 직후에 사옹원 분원에서는 이런 대형 용준을 제작할 수 있는 제반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지 확인할 필요성이 생긴다. 무엇보다 첫째 조건은 높이 60㎝ 정도 크기의 용준을 만들 수 있는 능력 여부이다. 그러나 이는 그리 어렵지 않았던 문제인 것 같다. 당시 왕실에서 필요한 대형 용준은 만들어진 백준 위에 물감으로 용을 그린 소위 가화(假畵)로 임시 변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준 자체를 만드는 일은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 조건인 용을 그릴 도화서 화원도 왕실에서 동원할 수 있어 그림도 제작 가능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대형 용준 제작의 필요한 당시까지 수입에 의존해 온 회청 안료의 확보 여부였다.

그렇지만 이 문제 역시 난처한 실정이 논의된 바로 다음해인 광해군11년(1619)에 바로 회청 수입이 이루어졌다. 회청을 확보한 후 무엇보다 먼저 왕실의 대형 용준을 제작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십 수점의 대형 용준 가운데 바로 그 때 제작한 용준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같은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림 1 <백자 청화용준 ①>

16-17세기 높이 34.5㎝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조선전기의 용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백자 청화 용준 ①> (그림 1)이다. 이 <용준 ①>은 34.5㎝ 정도에 불과한 중간 크기로 발가락도 네 개인 사조(四爪)의 용 한 마리가 십자형 뭉게구름이 있는 공간에 그려진 있는 것이다. 

앞발에서 나온 서기(瑞氣)는 어깨부분까지만 미치고 있고 머리 뒤쪽으로 높이 오르지 못해 오조룡에 비해 한 단계 위계가 낮은 용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갈래로 갈라진 머리 갈기와 둥글며 울퉁불퉁한 큰 머리통을 농담 표법으로 나타낸 점 등은 조선후기의 용에서는 볼 수 없는 특기할만한 요소들이다. 

특히 꽉 다문 입과 앞으로 나온 크고 네모난 앞니, 여의두형으로 크게 세운 돼지 코, 배 비늘 안에 그린 사선, 등지느러미 안에 작은 가시, 수레바퀴 형상의 발가락과 주먹 등은  17-18세기 청화용준의 모습과 분명히 구분되는 요소들이다.(그림 2-1 참조) 아마 이러한 요소들이 <용준 ①>을 조선전기 16세기로 간주케 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그림 2-1 <백자 청화용준 ①>의 좌우 전환한 사진

 


 


그림 2-2 <백자 철화용준 ②> 17세기 전기 41.5㎝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2-3 <백자 철화용준 ③>

17세기 후기 32.6㎝ 동원선생기증품(국립중앙박물관)

 

 

 

 


그림 2-4 <백자 철화용항 ④>

17세기 후기 32.0㎝ 해강도자미술관


 

 

   또 이 <용준 ①>이 16세기에 제작된 것임을 분명히 말해 주는 근거로서 17세기 전기부터 유행했던 철화 용의 모습에서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철화 용준인 국립중앙박물관의 <백자 철화용준 ②> (그림 2-2)과 동원선생 기증품인 <백자 철화용준 ③> (그림 2-3), 해강도자미술관의 <백자 철화용항 ④> (그림2-4)의 얼굴 표정은 둥글고 큰 머리통, 꽉 다문 입, 넓고 큰 네모꼴 앞니, 큰 여의두형 돼지 코 등의 특징적 모습인 모습을 보이는 데 이들은 <용준 ①>의 얼굴(그림 1-2)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성을 인정한다면 17세기에 만든 발가락이 3-4개인 철화용준의 모델이 <청화용준 ①>일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의 청화 및 철화 용준과 크기는 물론 얼굴 형태부터 분명히 다른 또 다른 계통의 청화용준 네 점이 2000년대 들어 갑자기 학계에 소개되면서 조선중기 용준과 관련해 새로운 관점의 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이 용준들은 모두 그 크기가 60㎝ 가까운 대형이다. 또 항아리 목 밑에 여의두문 띠를 두르고 바닥쪽에는 검형(劒形)의 연판문 띠와 여의두 등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양식의 장식 띠로 구획돼 있다. 그리고 몸통의 중앙에서 위쪽으로 커다랗고 늘씬한 용 두 마리를 그려 넣은 소위 쌍용준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새로운 쌍용준은 얼굴 전체의 윤곽이 직사각형이며 입을 조금 벌린 상태로 서기를 높게 드리우고 큰 여의두형 돼지 코와 두 개의 앞니가 네모지거나 네 개로 가지런하고, 머리 갈기는 단정하게 앞으로 빗어 올렸고, 얼굴 전면에 작은 쌀 점을 찍은 모습을 하고 있다. 
앞서 <청화용준 ①> 계통이 무섭고 위협적인 인상이라면 이들 새로운 쌍용준은 위풍당당하고 준수한 모습으로 위엄 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차이가 나고 있다.

 

 


그림 3-1 <백자 청화쌍용준 ⑤>

조선중기 17세기 57.7㎝ 2011년 크리스티 경매

 



그림 3-2 <백자 청화쌍용준 ⑥>

조선중기 17세기 세브르국립도자박물관


 

    네 점의 쌍용준 가운데 가장 먼저 알려진 작품은 프랑스 세브르국립도자박물관의 <백자 청화 쌍용준 ⑥> (그림 3-2)이다. 그러나 최근 2011년, 2012년의 국내외 경매를 통해 같은 계통의 쌍용준 3 점이 추가 공개되면서 지금까지 존재가 미미했던 세브르 국립도자박물관소장의 쌍용준이 새로운 관심의 축으로 대두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쌍용준 4점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작품은 2011년 경매 출품된 <백자 청화쌍용준 ⑤> (그림 3-1)이다. 이 쌍용준의 용의 얼굴에는 쌀알과 같은 작은 점을 입체감이 나도록 질서 있게 찍고, 커다란 여의두형 돼지 코와 사각형의 큰 앞니 두개, 가지런히 빗어 앞으로 올린 두 줄기 머리 갈기, 전방에 여의주를 주시하는 힘있는 눈동자, 배 비늘 안에 사선과 같은 특징적인 요소들은 앞서 16세기로 추정한 <청화용준 ①>과 부분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특히 사선으로 채워 넣은 배 비늘과 사각형의 큰 앞니 두 개는 <청화용준 ①>은 물론 17세기 철화용준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로서 16-17세기의 보편적 경향을 따른 예라고 볼 수 있다. 

네 점 쌍용준들은 몸통이 늘씬하고 쭉 뻗은 자세이며 ‘十’자형 뭉게구름도 다소 가늘어진 모습이지만 대체로 유사해 보이며 여의주(如意珠)의 크기가 대폭 작아지고 단순화되었지만 기본 형식은 비슷해 보인다.

 


그림 4-1 <백자 청화쌍용준 ⑦>

조선중기 17세기 60.7㎝ 2012년 크리스티경매



   2012년 경매에 출품된 <백자 청화쌍용준 ⑦> (그림 4-1)은 높이가 60.5㎝나 돼 크기면에서  현존하는 최대의 작품이다. 더욱 특이한 점은 이 쌍용준에 그려진 용과 거의 같은 모습의 용 모습이 둥근 연적과 소형의 오조 용준에서도 보여 이 쌍용준의 용 그림이 이처럼 축소되면서 변하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먼저 높이 35.5㎝인 삼성미술관리움 소장의 <백자 청화용준 ⑧> (보물1034호, 그림 4-2)는 몸통 중앙 세 곳에 마름형태의 창을 마련하고 안에 각각 삼조용을 그려 넣은 준수한 형태가 돋보이는 작은 용준이다. 


그림 4-2 <백자 청화용준 ⑧>

조선중기 17세기 35.5㎝ 삼성리움미술관 보물1034호

 



그림 4-3 <백자 청화용문 연적⑨>

조선중기 17세기 높이 9.9㎝ 서울 개인소장


   선이 간결하고 절도있어 숙련된 화원의 필치로 보이며 청화를 조심스럽게 썼다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필치는 앞서 살펴본 <청화용준 ⑦>의 솜씨와 유사하다. 준의 형태는 짧고 단정한 입, 절제된 몸통의 팽창감, 저부 밑으로 조금 벌려 안정감을 갖는데 앞서 대형의 <청화용준 ⑦>에서 보는 것과 같은 구조와 비례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거의 비슷한 용 그림으로 보아 동일한 화원이 그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용 그림이 <백자 청화용문 연적 ⑨>(그림 4-3)에도 나타나 있어 분원에 파견된 도화서 화원이 왕실에서 요구한 쌍용준을 시작으로 마치 세트처럼 같은 그림을 여러 기형에 그렸을 가능성을 짐작케 한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5.12.20 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