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위엄 백자 쌍용준 7 - 17세기의 양상 (2)

2015. 12. 20. 22:14도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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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왕의 위엄 백자 쌍용준 7 - 17세기의 양상 (2)

 

 

 

  「오례의」관련 예지(禮誌)에 실린 두 가지 용준 도면과 일치하는 형태의 용준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17세기 전기에 제작된 철화용준 가운데는 앞서 두 가지 형태와 다른 계통의 용준도 제작되고 있었다. 목이 짧고 안으로 경사져 있으며 입술 끝부분은 밖으로 동그랗게 돌출되어 있고 어깨는 넓게 팽창되어 있으며 몸통의 선이 굽까지 이어지는 육중하고 풍만한 형태로 당당한 모습이다.

   이러한 준 가운데 가장 제작 솜씨가 뛰어난 작품으로 철화로 매죽문을 그린 국립중앙박물관소장의 <백자 철화매죽문준> (그림1-1)과 <백자 청화쌍용준> (그림 1-2)을 들 수 있다. 이 두 준은 각각 석간주와 청화로 그렸지만 전체 구도나 농담을 구사한 정밀한 표현방법 등에서 뛰어난 화원의 필치라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구나 표면을 일정하게 마무리하고 풍만한 팽창감을 적절하게 조정하면서 지나치지 않게 다듬은 균형 있는 조형 감각은 임진왜란 등 전란으로 훼손되었던 조선전기의 청화백자의 정통성을 회복했다는 표현이 가능할 정도이다.

 

 

  
그림 1-1 <백자 철화매죽문 준 >17세기전기 높이 40.0㎝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1-2 <백자 청화쌍용 준> 17세기전기 높이 42.8㎝ 국립중앙박물관 

 

 


   석간주, 즉 철화로 운룡을 그린 이런 형태의 용준 가운데 대표적 작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 철화용준 ①> (그림 2-1)과 이보다 규모가 작은 경희대학교박물관 소장의 <백자 철화용준 ②> (그림2-2)을 꼽을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준 ①>은 철화 용준 가운데 드물게 표면이 일정하게 정리되는 등 제작 솜씨에 뛰어난 기량을 보인다. 특히 용 그림도 훈련받은 화원이 청화로 그린 용 그림과 같이, 가는 선과 농담을 구사하며 그렸고 전체 구성도 안정된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그림 2-1 <백자 철화용준 ①>

17세기전기 높이 42.3㎝ 국립중앙박물관 


 

 

   장난기 있는 얼굴 표정과 부분적인 단순화에도 불구하고 앞서 예지(禮誌)에 실린 도면을 기준으로 한 용준의 위엄과 다른 진중한 표정이 보인다. 조금 벌린 잎과 큰 돼지 코, 앞으로 빗은 머리 갈기, 등지느러미 안의 가시, 네 가닥 발가락의 모습 등에서 전과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더욱이 뭉글뭉글하게 단순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구름 덩어리는 광주 선동리 분원 출토품과 대체로 유사해 이러한 용 그림이 1640~1649년 사이에운영됐던 선동리 분원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림 2-2 <백자 철화용준 ②>

17세기전기 높이 35.3㎝ 경희대학교박물관


 

 

   경희대박물관의 <용준②>는 높이 35.3㎝로 크기는 작지만 전체적인 조형은 <용준①>과 큰 차이 없다. 크기가 작은 만큼 발가락이 세 개이지만 구성은 대체로 유사하다. 큰 코와 머리 갈기, 왕방울 만큼 커진 눈동자 등 부분적인 표현은 다르지만 목 밑에 그린 당초문 띠와 장식화된 연판문, 굽 외면에 세줄 선으로 그린 둥근 파도 띠, 뭉글뭉글한 곡선적인 구름 덩어리는 같은 계통으로 구분하는 근거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보는 장난기 있는 얼굴로 그린 용 그림은 앞서 본 예지(禮誌) 계통의 준 형태에서는 쉽게 눈에 띠지 않는다. 그런데 1996년 크리스티 옥션에 출품된 <백자철화용준 ③>(그림3-1)의 경우는 준의 형태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용 그림이 거의 유사해 두 작품이 동일한 시공간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그림 3-2 참조)

 

 


  
그림 3-1 <백자 철화용준 ③> 17세기전기 높이 43.0㎝ 크리스티(1996년)

그림 3-2 <백자철화용준①>의 세부 그림 

 

 

   그런데 이렇게 특별한 형태의 철화 용준들은 17세기후반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새로운 용준은 형태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생긴다. 준의 형태는 직구에 목이 짧고 어깨와 몸통이 둥글게 이어지면서 굽에 이르는 모습으로 앞서 본 팽창하며 당당한 모습의 용준 형태와는 큰 차이가 난다. 용의 표현도 위엄있어 걸출하다기 보다 소위 격조와 품위가 떨어진 평범한 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 철화용준 ②>(그림 4-1)은 전에 없는 새로운 형태로 엄숙거나 약간 장난기어린 용의 얼굴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표현됐으며 몸의 동작과 비늘, 지느러미, 발가락 등은 단순화되었다. 뭉글뭉글한 구름도 단순한 곡선으로 바뀌는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그림 4-1 <백자 철화용준 ④> 17세기후기 높이 35.7㎝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4-2 <백자 철화용항 ⑤> 17세기후기 높이 32.6㎝  해강도자미술관 

 

 

   또 이러한 용 그림은 소위 달항아리로 부르는 둥근 항아리에도 그려진다. 해강도자미술관  소장의 <백자 철화용항 ⑤> (그림 4-2)은 항아리 형태는 약간 납작하지만 종속 문양이 없이 전면에 <철화 용준 ④>에서 보는 것과 같은 유사한 형태의 용 그림이 그려져 있어 동일한 시공간에서 제작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준(樽)둥근 항(缸)에, 위에서 살펴본 몇 가지 특징적인 용 그림을 그린 철화백자를 제작한 곳은 광주의 유사리 분원(1661-1664)신대리 분원(1665-1676)으로 추정된다. 특히 신대리 분원 출토품에는 용의 얼굴과 뿔의 모습, 비늘을 표현하는 방식, 발가락, 둥근 선으로 그린 구름과 큰 여의주까지 대체로 유사해 제작시기 등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를 보면 17세기 후반에 광주 분원에서 만든 소략한 표현의 철화 용준이 주변 지역으로 확대되었던 것으로 추정케 한다. 당시 백자 제작과 소비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과정에서 철화 용준의 확산도 어느 정도 가능했던 것 같다. 

 

 

 


그림 5-1 <백자철화용항> 가평군 하판리 출토 경기도자박물관



그림 5-2 <백자철화용문 자료> 광주시 신대리출토 경기도자박물관


 

 

   경기도자박물관이 발굴 조사한 경기도 가평의 하판리 가마터에서는 신대리 분원 철화 용항아리를 연상시키는 유물이 다수 발굴되었다(그림 5-1). 이 지역은『승정원일기』를 보면 1688년과 1696년에 분원에 백토를 공급한 곳으로 등재돼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특별한 점은 신대리의 경우 형태가 또렷하지 않은 용의 발가락 부분을 구름 뒤로 가려 보이지 않게 구성한 반면, 하판리의 용은 발과 발가락을 처음부터 그리지 않고 몸통만 나타내어 중앙관요와 지방민요의 생산품 간에 분명한 차등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1)(그림 5-2)

 

   지금까지 살펴본 철화 용준에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높이 60㎝에 이르는 대형 용준이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비교적 완성도가 높은 철화 용준은 17세기 전기에 주로 제작되었고 후기부터 제작 전반이 왜소해지고 그림도 소략해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중앙 관요인 분원에서 17세기 후기부터 중형의 청화용준 제작이 확대되면서 나타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2)

앞서 지적했듯이 백자의 그림과 문양은 도화서 소속의 화원과 분원 소속의 화공이 역할을 분담하면서 그려 넣었다. 앞서 화원 파견의 첫째 목적이 회청으로 그린 청화 용준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몇몇 기록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런데 철화 용준의 경우, 도화서에서 정통 화법을 훈련받은 화원의 솜씨로 보기 어려운 반면, 동일한 수준의 백준에 철화로 그려 넣은 매죽(梅竹) 그림은 분명한 화원의 솜씨로 보인다. 말하자면 동일한 시공간에서 동일한 백준 위에 화원은 매죽도를 그리고 화공은 운룡도를 그렸다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상황은 영조 30년(1754)에 왕이 하교한 내용 통해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영조는 옛날에 백자 그림은 석간주로 그렸는데 이제는 회청으로 하니 사치라고 규정하고 화룡준(畵龍樽) 외에는 금지할 것을 명한 바 있다. 이 말은 화원의 첫째 임무는 회청을 써서 왕실에서 요구하는 화룡준을 만드는 것이고 또한 그 당시 용준을 제외한 화기(畵器)는 석간주로 그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화원이 회청으로 그린 화룡준은 가례의 진연의식에 쓸 대형 쌍룡준으로 추측되며 석간주로 그린 화기는 백준에 그린 <백자철화매죽문준> (그림 1-1 참조)에서 보는 매죽도와 같은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석간주로 그린 용준은 화공의 몫이 되며 미숙하지만 정통 화법을 벗어난 과감한 표현들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한다.

화공이 40㎝ 내외의 백준에 자기 나름의 숙달된 방식으로 철화 용을 그리는 동일한 공간에서 화원은 60㎝에 가까운 거대한 백준 위에 정통화법으로 예서에 규정된 오조의 쌍용준을 청화로 그렸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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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경기도자박물관, 『조선철화백자展』(경기도자박물관, 2008), pp. 20-22 참조.
2)장기훈, 앞에 논문 참조.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5.12.19 0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