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으로 본 고구려의 건국과 용어문제

2015. 12. 24. 17:34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구려의 건국과 용어문제 역사상식

2014.05.23.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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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자료는 2014년5월13일(화) 13시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개최한 제1회 상고사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자료를 동북아역사재단으로 부터 얻어 게재하는 것입니다. 이 주장에 대해 저의 의견은 유보입니다.

 

언어학으로 본 고구려의 건국과 용어문제

 

                                                                              최 기 호 (울란바타르대학교 석좌교수, 전 총장)

 

 

1. 머리말

 

 

    13세기에 칭기스칸은 세계에서 가장 광활한 영토와 강대한 몽골제국을 건설했고,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를 활발히 교류시켰다. 그 당시 몽골제국은 고려를 독립국가로 인정하는 특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려사에는 쿠빌라이칸의 어록이 있는데 몽골과 고려를 친족으로 보고 있다.나는 고려를 일가로 보고 있다. 고려에 어려움이 있다면 짐이 어찌 구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몽골과 고려는 친족의 나라, 형제의 나라로서 가장 넓은 몽골제국이 세계를 경영할 때 서로 협력하였다.

고려 여인 기황후는 몽골제국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토곤테무르의 황후이며 북원 소종황제 아유르시리다르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런데 몽골과 한국은 오랜 옛날부터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가 있었다. 몽골과 고려는 고대로부터 더욱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어서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동명성왕 추모왕(주몽)홀본(졸본) 부여동몽골 헨티아이막 부이르노르 할힌골에서 개국하였다. 추모왕은 나라 이름을 홀본 부여에서 고구려라고 개명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여러 역사서의 문헌 기록도 그 증거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필자는 1991년부터 23년간 몽골 전역을 학술조사하였다. 특히 동몽골 할힌골 부이르노르 유적지7회에 걸쳐 학술답사 하였고 거기서 조사한 증거들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2.광개토대왕비의 사료적 가치

  

    고구려 제19광개토대왕은 고구려를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확장하였고, 강대한 고구려를 건설한 큰 업적을 세웠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은 지금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세워져 있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제20장수왕이 서기414년에 아버지인 제19광개토대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대하고 광대한 고구려의 영토를 지배하던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서거한지 2년 만에 그 업적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비석을 거국적으로 세운 것이다.

이는 고구려가 거국적으로 세운 비석이고 당대의 최고 문장가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문장이며 광개토대왕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고증하여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는 높이가 6.39m의 거대한 통 돌을 다듬어 세웠으며 당대의 최고 문장가가 비문을 예서체로 약 1,775자를 각인한 명문의 역사 자료이다.

그러나 이 비석은 고려 시대나 조선 후기까지 존재를 몰랐다. 그러다가 청나라만주에 대한 봉금제도(封禁制度)가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1908년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 광개토대왕의 비문이 수록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할 사료는 광개토대왕비역사적 기록이다.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그래서 광개토대왕비호태왕비라고도 한다. 광개토대왕비김부식이나 일연도 직접 보지를 못했다. 이 비에 관한 기술은용비어천가 등 조선 초기 문헌에는 조금 언급되어 있지만, 조선후기까지 비문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광개토대왕비의 존재는 청나라가 만주에 대한 봉금제도(封禁制度)가 해제되면서 188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재발견되었다.


   이 비의 기록은 삼국사기1145년에 편찬된 것보다 700년 이상 이른 시기에 장수왕이 당시 고구려의 역사를 잘 다듬고 고증하여 비석에 새겨놓은 고구려의 참 역사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비문의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이 다르다면 당연히 이 비문의 기록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본다.

 

 

1) 추모왕과 고구려 국호

  

   광개토대왕 비석의 네 면에는 약 1,775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첫머리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추모왕(鄒牟王)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동명성왕 추모왕(鄒牟王)’의 이름이 역사적 자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이라고 생각한다.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비석을 세웠는데 거기에 시조 추모왕(始祖 鄒牟王)’이라고 정확히 기록하였다.

동명성왕의 원래 이름은 추모(鄒牟)’이었다. ‘추모이외에 다른 기록으로 주몽(朱蒙)을 비롯하여 추몽(鄒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도모(都牟), 상해(象解), 등 여러 이름의 기록이 나타나 있다.


   5세기 초(414) 광개토대왕비추모왕12세기 중엽(1145)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주몽이라고 기술하였다. 13세기 말(1281) 일연삼국유사에도 주몽(朱蒙)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김부식이나 일연이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을 보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사실 광개토대왕비의 존재를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김부식이나 일연은 중국 사서를 보고 주몽(朱蒙)’이라고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사서 논형(論衡)위서(魏書)에는 주몽(朱蒙)이라고 기록하였다. 동명성왕의 이름을 이렇게 추모(鄒牟)를 비롯하여 주몽(朱蒙), 추몽(鄒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도모(都牟), 상해(象解)’ 등 여러 가지 한자로 표기한 이유는 추모(鄒牟)’를 다른 한자로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사서 논형위서에서 부여어로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고 한다(夫餘謂善射曰朱蒙,)고 하였다. 삼국사기삼국유사부여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고 기록하였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도 지금 만주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릴무얼(卓琳莽阿)이라 하니 주몽은 곧 주릴무얼이다.’라고 하였다. 몽골 알랑고아 신화 고구려의 추모왕 신화는 그 내용과 구성이 같으며 햇빛 임신신화 형태도 같다. 알랑고아는 몽골 민족의 조상여인으로 여기서 고아곱다는 뜻이 있다.


   알랑고아의 아버지는 코릴라르타이 메르겐이다. 몽골어 메르겐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의 단어로서 부여어 주몽을 선사자(善射者)라고 하는 어휘와 일치한다. 몽골어 메르겐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의 단어로서 부여어 주몽을 선사자(善射者)’라고하는 단어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런데 주몽(朱蒙), 추모(鄒牟), 추몽(鄒蒙), 중모(仲牟)라는 이름에서 거의 발음이 유사하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몽골어로 촐몽(Цолмон)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것은 , 동명성, 금성이라는 단어인데 추모(鄒牟)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촐몽을 한자로 전사하는 과정에서 추모(鄒牟), 주몽(朱蒙), 추몽(鄒蒙), 중모(仲牟)라는 이름이 나타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추모왕의 시호가 동명성왕으로 되어 있는 것도 몽골어로 촐몽(Цолмон)’ 즉 샛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사가들은 고구려를 비롯하여 주변의 이민족을 모두 낮춰서 불렀고 한자도 좋지 않은 글자로 썼다. 몽골은 몽매하다는 뜻으로 蒙古라고 썼고 구려구리라고 썼다.

추모왕을 天帝이 아니라, 고의로 추모왕을 낮춰서 해의 아들(日子)로 기록한 것으로 해석된다. 고구려 국호를 기술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논형에서는 고구리(高句麗)를 극히 낮춰서 하구리(下句麗)로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 하구리(下句麗)로 기록한 곳은 삼국지(三國志)를 비롯하여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양서(梁書)등 여러 곳이 있다.

고구려(高句麗)’라는 글자를 읽을 때 [고구려]라고 발음하고 있으나 실은 [고구리]발음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는 한자사전에서 있는 것처럼 ()’자는 나라이름일 경우에는 []로 발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호 고구려(高句麗)’[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로 읽어야 한다.


   한편 자치통감에도 광개토대왕, 장수왕 연간 이후에는 고구려를 모두 고려로 기록하고 있다. 또 중국 사서 위서, 북사, 구당서, 당서(唐書) 등에는 아예 고리(高麗)로만 표기하고 있다.

 

 

2) 추모왕이 흘승골에서 홀본부여를 개국


   ‘추모왕이 순행 남하하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추모왕은 부여의 왕자 대소가 죽이려 하자 어머니 유화 부인이 도망가서 후일을 도모하라고 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에 이르렀다는 것이다.(巡幸南下, 路由夫餘 奄利大水) 여기에 나오는 엄리대수(奄利大水 삼국사기에는 엄사수(淹㴲水)로 기록되어 있다. 그 아래의 소주(小註)일명 개사수(蓋斯水)니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엄수(淹水)라고 기술하였다.


   그런데 중국양서에는 엄리대수엄체수(淹滯水)로 나타난다. 수서(隋書)에는 엄수(淹水)라 하였다. 엄리대수(奄利大水) 엄사수(淹㴲水), 개사수(蓋斯水), 엄수(淹水), 엄체수(淹滯水) 대수(大水) 등의 기록이 있다.

이제 광개토대왕비에 최초로 기술한 엄리대수(奄利大水)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엄리(奄利)-’는 강 이름을 나타내는 고유명사의 어근이고 ‘-대수(大水)’는 보통명사로 큰 강물이라는 말로 풀이 된다. 이렇게 분석해 보면 엄체수(淹滯水), 엄사수(淹㴲水), 엄수(淹水) 등 모든 어휘에서 공통된 ()-’이나 엄리(奄利)-’는 강 이름을 표현하는 고유명사이다. 그리고 -대수(大水)-() 등은 강물을 나타내는 일반 명사이다.


   그러면 ()-’이나 엄리(奄利)-’는 어느 강일까? 엄리대수(奄利大水)아무르(Амур)이다. 강이름 [엄리(奄利)-]의 음운구조와 [아무르(Амур)]의 음운구조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아무(Аму)-]와 대응 되며, [-()][-(-р)]와 대응되는 구조이다.

그러니까 [아무르(Амур)]를 한자로 전사한 것이 [엄리(奄利)-]이기 때문에 광개토대왕비의 엄리대수(奄利大水)는 지금의 아무르(Амур)이 된다.


   김부식이나 이규보엄리대수(奄利大水)’ 위치를 지칭하는 것도 압록강의 동북쪽에 있는 아무르강과 일치하고 있다. 이병도 선생은 개사수가 압록강의 동북쪽에 있다는 설은 주몽의 본국(本國)을 동부여(東夫餘)로 잘못 안 데서 나온 것이므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 북부여(北夫餘)의 위치가 지금의 농안(農安) 부근이었으므로, 여기의 대수(大水)는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을 일컫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고 하였다.(國譯 三國史記, 217쪽 주) 그러나 이병도 선생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엄리대수(奄利大水)는 추모왕의 피난 동선이나 추모왕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에서 개국하는 것으로 보아 엄리대수는 지금의 아무르(Амур)이다.

 

 

3) 비류곡에서홀본(졸본)부여를 개국


   『광개토대왕비에는 추모왕이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에서 도읍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엄리대수를 건넌 후에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하였다.(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즉 추모왕이 북부여 대소의 핍박을 피하여 도망가서 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을 묘사한 기록인데, 남하한 동선을 보면 엄리대수를 건넌 후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에서 도읍한 것이다.


 위서(魏書)에는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이 아니고 보술수(普述水)와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도 표현하고 있다. 유형별로 정리하면 광개토대왕비에 비류곡(沸流谷)비류수(沸流水), 보술수(普述水)가 있고, 모둔곡(毛屯谷)이라는 특이한 형태가 있다.

그리고 모둔곡(毛屯谷)이라는 특이한 형태는 무엇일까? 몽골어나 여진(女眞)어로 [모드]나무인데, 모둔곡(毛屯谷)나무가 많은 골짜기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 동몽골 부이르노르 할힌골에는 메넹긴탈(끝없는 평원)이 끝나는 지점에 높은 산이 있다. 이 산을 비칙올이라고 한다. 비류곡(沸流谷) 비류수(沸流水), 보술수(普述水)에서 비류-(沸流-)’의 어근과 보술-(普述-)’의 이형태가 나타난다. 여기서 보술수(普述水)는 비류수(沸流水)를 다른 한자로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비류수할힌골부이르호수그 호수로 흐르는 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대왕비나오는 홀본(忽本) 졸본(卒本), 졸본천(卒本川)이 있고 흘승골성(紇升骨城), 흘두골성(紇斗骨城)이라는 표기도 있다. 홀본(忽本)에서 홀()()을 뜻하는 고구려어이다.

부여어에서 성()구루(溝漊)’ ‘()이라 하였다. 이는 읍(), (), () 등을 나타내는 고을과 통하는 말이다. ‘구루(溝漊)’는 몽골어의 후레와 대응하는 말이다. 후레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의 옛 이름이다.

부여어의 ‘-은 고구려어로 이어져서 買忽(水原), 召忽(仁川), 奈兮忽(安城), 沙伏忽(陽城), 馬忽(提川)등의 지명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구루, , , 등이 통하는 말이다. 그래서 홀본(忽本)은 도성(都城)을 말하는 것인데 김부식삼국사기에서 졸본(卒本)지역에 있는 강이라고 생각하여 졸본천(卒本川)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비류수(沸流水) 상류에 위치한 소국인 비류국(沸流國)송양왕(松讓王)이 고구려에 항복한 뒤에 다물후라고 칭하였다.. 7월 다물후 송양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다.(秋七月 納多勿侯松讓之女爲妃)(삼국사기권 제13, 5장 고구려 유리왕)

지금의 할힝골(흘승골) 상류에는 송양의 다물국이 있었다. 지금의 동몽골 할힝골의 상류 에루군네 지역이다. 추모왕은 할힝골에 홀본부여를 건국하고 처음으로 다물국을 흡수하였다. 추모왕은 다물국의 병합하고 송양을 다물후(多勿候)라고 칭하였다.

부여어에는 다물(多勿)이라는 말이 있었다. 부여어로 다물(多勿)’옛 땅을 되찾는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부여에서 옛 땅을 되찾는다고 하면 옛 조선의 땅을 되찾는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옛 조선의 강역을 밝혀 주는 하나의 단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흘승골은 지금 동몽골 도르너드 아이막(Дорнод аймаг) 할힌골(Халхын гол)을 중국 한자로 전사한 것이다. 고구려는 서기 3(유리왕 22)에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겼다

필자가 1992년부터 7 차례 답사해온 할힝골 부이르노르다리강가 일대에는 고려(고구려)성터를 비롯하여 석인상이 많이 남아있다. 석인상을 몽골어로 훈 촐로(Хүн чулуу) 라고 하는데 다리강가에는 30여기가 남아 있다.

할인골에는 추모왕 훈 촐로라고 부르는 석인상이 2기가 있다. 하나는 부이르 호수하인골 강 사이에 펼쳐진 삼각주 지역에 있다. 다른 하나는 필자가 1992년에 할힌골을 답사하여 확인한 석인상이다. 13세기 경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리석 석인상인데 고구려성터 부근에 있었는데 1999년에 울란바아타르의 몽골국립역사박물관 2층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그 곳에는 한국 시골 주거지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비름나물을 비롯하여 초원에서는 보기 어려운 풀들이 자라고 있다. 할인골에는 옛날에 농사를 지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 할힝골에는 지금도 하상어워가 있고, 조개무지가 골짜기에 세 곳이 있어서 한국인 선조들이 이곳 비이르호수에서 조개를 잡아 먹으며 살았다는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몽골 여인과 고구려 여인이 몽골 초원에서 만나서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하였다는 전승 설화가 채취된 곳도 이곳 할힌골 지역이다. 이런 증거는 추모왕이 동몽골 할힌골에서 홀본 부여를 개국하고 고구려로 이름을 세력을 확장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과 몽골이 깊이 있는 학술조사를 통하여 학제 간의 깊이 있는 연구해야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2. 고구려의 건국 연대

 

   고구려는 언제 건국 하였을까? 지금까지 중요한 학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동명성왕조기원전 37에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기록하였다. 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 이가 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신채호 선생은 당나라 사람 가충언(賈忠言)이 당 고종에게 고구려가 900년이 되었다.고 고한 것이 있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이 추모왕의 17세손이라고 하였는데 삼국사기에는 13세손이라고 하였으니 당연히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서 지리지에는 현도군은 무제(武帝) 원봉4(BC 107)에 세웠는데, 세 개의 현이 있으니...'라는 기록은 기원전 107무렵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했음을 언급하고 있다.후한서 고구려전에는 한 문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속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신채호 선생은 신라의 사가(史家)들이 고구려 건국 연대를 신라보다 뒤에 두기 위해 그 건국 연대를 삭감했다고 주장했다.

일제시대 식민사학자들도 김부식이 고구려 건국 연대를 조작했다고 비판했다는 점이다. 신채호는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끌어내렸다고 비판한 반면 그들은 끌어올렸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학계가 통설로 주장하는 근거는 김부식의 삼국사기기록이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1145)에 왕의 명령으로 김부식 등이 국내외 여러 자료들을 모아, 이를 참고로 하여 편찬한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의 역사서이다.


  『삼국사기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최산보(崔山甫) 등이 편찬한 책이다.

삼국사기는 편찬자들이 마음대로 기술한 것이 아니다. 참조한 국내 문헌으로는고기,삼한고기,신라고사,구삼국사,고승전,화랑세기,계림잡전, 제왕연대력등을 참고로 하여 편찬하였다.

그리고 중국 사서로는삼국지(三國志),후한서(後漢書),진서(晉書),위서(魏書),송서(宋書),남북사(南北史),신당서(新唐書),구당서(舊唐書),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문헌을 참조하여 재구성한 것이 삼국사기이다. 따라서 당시 중국의 사서의 영향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1174(고려 명종4) 고려 사신이 삼국사기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옥해(玉海)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이 이미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이 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2차 판각은 13세기 후기로 추정되며, 성암본(誠庵本)으로 알려진 이 책은 잔존본(殘存本)이기는 하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완질로 현존하는 삼국사기1512년 조선 중종 7에 간행된 4차 간행 판본이다. 원본으로부터 2차 간행, 3차 간행, 4차 간행을 하는 동안 시대가 많이 지났고, 다시 간행할 때마다 첨삭되고, 미화되었고, 와전되고, 착오를 일으켜서 역사적 사실에서 멀어진 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불완전한 삼국사기에 근거하여 고구려는 시조 동명성왕이 졸본에서 B.C. 37년에 건국했다. 졸본의 위치는 중국 요령성 환인의 오녀산성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학계에서는 졸본부여중국 요녕성 환인 지역에 있는 오녀산성이라고 흔히 보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오녀산성이 있는 오녀산은 해발 804m의 높은 산이다. 이런 높고 척박한 산꼭대기에 도읍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한편 북한 학자 손영종고구려사의 제 문제에서는 고구려의 건국년도는 통설의 B.C. 37년이 아니고 B.C. 277이라고 보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광개토대왕이 추모왕의 17세손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12세손으로 되어 있어서 결국 5세대의 왕들이 계보에서 빠진 셈이다.

그리고 추모왕의 건국설화에는 추모왕이 갑신년(甲申年)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 초엽의 갑신년은 B.C. 277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존속기간은 900여년이 훨씬 넘는다는 것이다.


   손영종 교수는 중국과 국내의 문헌들을 참조하여 아래와 같은 고구려 초기 왕의 계보를 작성하였다.

 

1대 시조 추모왕(B.C. 277~259; 주몽 또는 동명왕)

2대 유류왕 (B.C. 259~236)

3대 여률왕(B.C. 236~223)

4대 대주류왕(B.C. 223~138)

5대 애루왕(B.C. 138~93)

6대 중애왕(B.C. 93~19)

7대 유리명왕(B.C. 19~A.D.18;황조가를 부른 유리왕)

 

   그러니까 추모왕과 유리명왕[유리왕] 사이에 다섯 왕이 들어간 간 것이다.

한편 중국의 사서 한서지리지신당서 동이열전, 고구려조 등에는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기 200여 년 전부터 이미 고구려가 있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한서지리지, 28에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립할 당시에 한사군의 하나인 현토군 안에 고구려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보장왕 본기에도 당나라 고종가언충의 대화 내용에서도 이런 사실이 확인된다. 당나라 고종이 백제를 멸망시킨 때로부터 8년이 지난 서기 668년에 신하인 가언충이 고종을 격려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고구려의 비기(秘記)에서는 ‘900년이 안되어 80대장이 멸망시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씨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가진 이래로 오늘날 900년이며 (우리나라 장수)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서기 668년 현재의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가 900년 역사의 나라 라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서기 668년으로부터 900년을 소급하면, B.C. 233년이 된다. 기록상으로는 늦어도 B.C. 233년이 된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주몽의 12세손이 아니라 17세손이라는 비의 기록과 멸망 당시의 고구려가 건국 900주년이 되었다는 당나라 고종과 가언충의 대화 그리고 고조선 멸망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한서의 기록 등으로 보아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B.C. 277년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본기 시조 동명성왕조'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고 나라 이름으로 말미암아 고를 성으로 삼았습니다. 이때 주몽의 나이 스물 두 살이었으니 한나라 효원제 건소 2년이요 신라시조 박혁거세 21년인 갑신년이었다'라고 기록하였다. 건소 2년은 기원전 37년이므로 이 때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삼으면 신라 문무왕 8년인 서기 668년 멸망한 고구려는 705년간 존속한 것이다.

 

 

3.‘고조선은 없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고도 말한다. 그러기에 어느 나라든지 모두 자기 나라에 유리하도록 역사를 기록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중국은 주위의 이민족의 역사를 매우 심하게 왜곡하고 있다. 가령 13세기의 몽골의 칭기스칸을 중국인이라고 중국 역사책에 기술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동북공정도 역사 왜곡의 하나이다.

그런데 우리는 불행하게도 우리의 실제 역사적인 진실인데도 우리가 왜곡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른바 식민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심하게 왜곡하고 있다. 시간적으로 5000년 역사를 축소하고 만주 대평원과 러시아 몽골까지의 넓은 강역한반도로 대폭 축소 왜곡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 용어에서도 잘못 쓰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우리 역사책을 비롯하여 상고사 기록에 수없이 나오는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즉 한국역사에 고조선은 없었다.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한 문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속하게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내용의 진위는 차치하고 조선이라는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지으면서 우리는 고조선이라고 할테니 후손들은 나라를 조선이라고 이름 지으라는 얘기가 되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러니까 우리 역사에 조선이라는 나라는 있었지만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그러기에 고조선이라는 나리는 조선이나 옛 조선혹은 단군조선등으로 표기해야 옳다. 다음과 같은 역사 용어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1) 고조선(古朝鮮)-- 조선/ ‘옛 조선’/ ‘단군조선

2) 주몽(朱蒙)--추모(鄒牟)

3) 일자(日子)--천제(天帝)의 아들()

4) 졸본부여(卒本夫餘)--홀본부여(忽本夫餘)

5) 하구리(下句麗)--고구리(高句麗)/고구려(高句麗)

 

 

4. 맺음말

 

1)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원래 이름은 주몽(朱蒙)’이 아니고 추모(鄒牟)이다. 광개토대왕비시조 추모왕(始祖鄒牟王)’이라고 기록하였기에 이제는 추모(鄒牟)’라고 기술하고, 불러야 옳다.

2) 추모왕의 이름이 추모(鄒牟), 추몽(鄒蒙), ‘주몽(朱蒙) 중모(仲牟)라는 여러 이름은광개토대왕비에 있는 추모(鄒牟)’왕을 여러 문헌에 한자로 전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이름 추모는 몽골어 촐몽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몽골어 촐몽동명성, 샛별, 금성을 뜻하는데 추모(鄒牟)’와 음운구조나 의미가 같기 때문에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추모왕의 시호가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4) 5세기 초의 광개토대왕비에는 추모왕을 천제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6세기 중반의 중국 사서인 위서(魏書)에는 해의 아들(日子)이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중국 사가들이 고의로 천제의 아들 추모왕을 낮춰서 해의 아들로 기술한 것이다.

5) ‘고구려(高句麗)’라는 국호는 [고구리]로 발음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원래 추모왕이 졸본부여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구리(句麗)[고리/구리]’라고 하였다. 코리(호리) 부리야트와 구리(句麗)[고리/구리]의 관련성도 연구할 과제라고 본다.

6) 몽골랑고아 신화 고구려의 추모왕 신화는 그 내용과 구성이 같으며 햇빛 임신신화 형태도 같다. 알랑고아는 몽골 민족의 조상여인으로 여기서 고아곱다는 뜻이 있다. 알랑고아의 아버지는 코릴라르타이 메르겐이다. 몽골어 메르겐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의 단어로서 부여어 주몽을 선사자(善射者)라고 하는 어휘와 일치한다.

7)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엄리대수(奄利大水)는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피난하는 동선이나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에서 개국하는 것으로 보아 엄리대수는 지금의 아무르(Амур)이라고 본다. 김부식삼국사기이규보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추정하는 엄리대수(奄利大水)의 위치로 보아도 아무르강과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엄리(奄利)-]의 음운구조와 [아무르(Амур)]음운구조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아무르(Амур)]를 한자로 전사한 것이 [엄리(奄利)-]

이다. 대수(大水-)는 큰 강물을 이르는 말이다.

8) 광개토대왕비에는 추모왕이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에서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하였다고 하였다.(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위서(魏書)에서는 홀본(忽本)’대신에 흘승골(紇升骨)이라고 기록하였다. 주서(周書)에는 흘두골성(紇斗骨城)이라고 기록하였다. 추모왕은 흘승골에 이르러 홀본부여를 개국한다.

9) 추모왕은 BC 37년에는 비류수(沸流水) 위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였다. 서기 3(유리왕 22)에는 도읍을 홀본성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겼다

10) ‘흘승골(紇升骨)은 지금 동몽골 도르너드아이막할힌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비류수(沸流水)보술수(普述水)할힌골부이르호수할힌골()지칭하는 한자 전사이다.

11) 부여어 다물(多勿)의 위치로 보아 옛 조선의 강역은 지금의 동몽골 광대한 지역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