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동해(東海) 인식(認識)에 관한 연구

2015. 12. 24. 15:06우리 역사 바로알기

 

조선시대의 동해(東海) 인식(認識)에 관한 연구 역사/지리 / 논문/기고문

2015.01.11. 20:00

 http://blog.naver.com/joseon_500/220236856581

전용뷰어 보기

첨부파일 (1)

 

조선시대의 동해(東海) 인식(認識) 관한 연구

 

                                         이상태(李相국사편찬위원회 연구편찬실장(國史編纂委員會硏究編纂室長)



. 서언

우리 주변의 자연물인 , , 바다 등에는 아무런 명칭도 없었지만 이러한 자연물에 명칭이 주어진 것은 자연물과 더불어 생활해 사람들이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그들의 문화의식에 적합한 명칭을 자연물에 붙이게 된데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 , 바다의 명칭은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가치관의 표현이며 문화의 유산물(遺産物) 것이다.

동해라는 명칭은 우리나라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바다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예전에는 대개 오행사상에 입각하여 동서남북의 방향과 중앙을 포함하는 5부의 공간개념에 따라 동부, 서부 등으로 방향과 공간을 합쳐 불렀기 때문에 바다의 명칭도 동쪽 바다를 동해, 서쪽 바다를 서해 등으로 자연스럽게 불렀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문헌상에 동해의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 본기 시조 동명왕 기사에서 비롯된다. 기사를 소개하면,


   북부여국 재상 아란불 왕께 아뢰기를 '어느날 하늘에서 천자가 내려와 명하기를 이곳은 장차 나의 자손들이 나라를 세울 곳이니 너희는 이곳을 피하여 동해(東海)가의 가섭원이라는 곳으로 옮겨라. 그곳은 토지가 비옥하며 5곡이 자라기에 적합하며 왕도를 삼을 만한 곳이다.'라고 지시한 말을 전하였다. 아란불이 왕께 권하여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고 고쳤다.

 

위기사의 천자가 말한 장차 나의 자손은 고구려의 동명성왕 지칭한다.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의하면 북부여가 동해변(東海邊) 가섭원으로 옮겨 동부여를 건국한 시기는 중국 한나라 연호인 신작(神爵) 3년에 일어난 일이며 서기로는 B.C. 59년에 해당된다. 삼국의 건국시기를 살펴보면 신라가 B.C. 57년에 고구려가 B.C. 37년에 백제가 B.C. 18년에 건국된다. 그런데 동해라는 명칭은 삼국이 건국되기 이전인 B.C. 59년부터 사용되어온 우리 민족의 유구한 명칭인 것이다.

이와 같이 유구한 역사를 갖은 동해를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시대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 조선시대 이전의 동해 인식

1)삼국시대의 동해인식

    삼국시대의 동해에 대한 인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하여 알아볼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15, 삼국유사에는 14회에 걸쳐서 동해에 관한 기사가 수록되어있다. 사료를 통하여 삼국인들의 동해 인식을 살펴보면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동해가 호국신앙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으며, 둘째는 동해에서 일어난 자연재이 대해서 자세하게 적고 있다.


 

1. 동해와 호국 사상

   신라는 건국 초부터 동해를 통하여 왜국(倭國) 공격을 종종 받았기 때문에 동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왜국의 공격상황을 살펴보면 B.C. 50(박혁거세 8)부터 신라 국경을 침범해 왔으며 A.D. 14(남해 차차웅 11)에는 왜선 100여척의 대군이 쳐들어와 동해 해변가의 민간인들을 약탈해 갔으므로 경주에 있는 중앙군을 파견하여 이들을 막아냈다. A.D. 59(탈해왕 3)에는 왜군의 침입을 막으려고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었는데도 불구하고 10년이 지난 A.D. 73(탈해왕 17) 다시 왜군들이 쳐들어 왔다. 왕은 각간 우오(羽烏) 파견하여 그들을 막도록 하였으나 우오가 전사하는 불행한 사태까지 발생한다. 이와 같이 건국초기부터 왜국이 자주 침범해와 신라에서는 커다란 걱정거리였다.

 

   왜국에 대하여 적극적인 대응을 분은 문무왕이다. 그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하였기 때문에 육지를 통한 외적의 침입은 걱정이 없었지만 동해를 통해서 쳐들어오는 왜적에 대해서는 걱정이 많았다. 문무왕은 평소에도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하기를 "짐은 죽은 후에 호국대룡(護國大龍) 되어 국가를 수호하고 싶다." 하였다. 신하들은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구의 바위에 묻었고 이를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뒤를 이은 신무왕은 부왕을 위해 감은사를 건립하고 부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었다. 이러한 호국정신이 나타난 것이 만파식적(萬波息笛) 기록이다.


 

신무왕 3년에 동해 바다에 작은 섬이 떠다니고 그곳에 대나무가 있는데 대나무를 취하여 피리를 만들었다.

 

   이 피리는 문무왕이 동해의 호국용이 되고 김유신이 33천의 천자가 되어 신라를 옹위하는 증거로 보내준 것이다.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가뭄에는 비가 오며, 장마에는 비가 그치게 되고 바람과 파도마저 잔잔해지기 때문에 피리 이름을 만파식적이라고 불렀으며 국보로 삼고 경주의 천존고(天尊庫) 보관하였다.

뒤에도 742년에는 효성왕(孝成王) 785년에는 선덕왕(宣德王) 등이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유골을 동해에 뿌리도록 하였다. 신라왕들은 죽어서도 동해를 지키겠다는 호국사상이 철저했음을 있다.


 2. 자연재이와 동해

   삼국시대에는 현재와 같이 과학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의 돌연변이 현상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하늘에서 국왕에게 통치를 잘하라는 계시로 받아들였다. 사례를 살펴보면 256(점해니사금 10) 동해에 고기 마리 나타났는데 길이가 30척이고 높이가 12척이나 되는 고기였으며 416(실성니사금 15)에도 동해변에서 고기를 잡았는데 뿔이 있었고 크기는 수레에 가득 정도였다. 요즈음 정세로 보면 기록에 나타나는 고기는 고래가 아니었을가 추측된다. 639(선덕여왕 8)에는 동해의 물이 붉어지고 수온이 올라갔으며 고기들이 죽어 해수면에 뜨는 일이 있었으며 699(효소왕 8)에는 역시 동해의 물이 혈색으로 변하였고 동왕 9월에는 동해의 물이 서로 싸우는데 소리가 경주에서도 들릴 정도였으며 병기고에 있는 북과 괭가리 등이 스스로 울리는 일도 일어났다.

915(신덕왕 4)에도 참포수(경북 영일군 흥해읍) 동해수가 서로 싸우는데 파도의 높이가 200자가 넘었으며 3일만에 그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해에서 고기가 나타났다거나 파도가 일어나는 자연 재해 현상에 대해서 신라인들은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2) 고려시대의 동해 인식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중심이 송악으로 옮겼기 때문에 동해보다는 서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고려시대 동해에 대한 인식은 첫째 동해는 국가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었고 둘째 삼국시대처럼 동해상에서 일어나는 자연재이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으며, 셋째 제사 대상으로 동해를 인식하고 있었다.


1. 동해가 국가를 대표하는 명칭으로 사용된 경우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것은 918년이었지만 936 후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18년간은 신라, 후백제 등과 함께 후삼국을 형성하여 서로간의 세력 다툼을 전개할 때이다. 특히 후백제와 고려는 팽팽한 경쟁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도 후량, 후당 등과 외교관계를 맺고 후백제를 견제하였다.

이러한 경쟁 관계 속에서 928(고려 태조 11)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에게 답서를 보낸다. 답서에서


…만약 족하(足下) 공손히 예지를 받들어 흉칙한 생각을 거둔다면 오직 상국(上國) 어진 은혜에 부응할 뿐만이 아니라 또한 동해(東海) 끊어진 왕통을 이어 나가게 하는 것이다. 만약에 허물을 능히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사료에서 족하란 후백제의 견훤을 지칭한 것이며 공손히 예지를 받든다는 것은 오월의 왕을 가리키는 것인데 오월은 당시 고려, 후백제와 동시에 국교를 맺고 있었으며 후백제와 고려에 대해서 피차 침략하지 말고 친선관계를 유지해 달라고 권고하는 국서를 고려에 보내왔던 것이다. 상국은 오월을 지칭한다. "동해의 끊어진 왕통을 이어 나가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고구려의 왕통을 이은 것이 고려였기 때문에 왕건이 고구려의 왕통을 다시 이어 나가겠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쓰여진 "동해"라는 명칭은 삼한(三韓)·해동(海東)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쓰여진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1197(신종 즉위년) 원나라에 보낸 국서에도 나타난다.

 

   병자에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 조통(趙通) () 보내니 전왕이 ()에는 이르기를 '학이 언덕에서 우니 오히려 들을 만한 메아리가 있고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기우니 어찌 함빡 비치는 사사로운 은혜가 없으리오. 감히 간절한 정성을 다하여 우러러 고명하 살핌을 바라나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제가 외람되이 미력한 몸으로 부질없이 변방의 봉작을 이어 받아 동해(東海) 기슭에 모범이 되었나이다.


사료에서 전왕은 명종을 가리키며 "동해(東海) 기슭에 모범이 되었나이다."라는 귀절의 동해는 고려를 가리키는 별칭이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동해(東海) 고려를 대신하는 국가의 별칭으로 인식되었다.

 

2. 자연재이(自然災異) 동해(東海)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자연재이 현상은 국왕의 통치 철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고려인들은 하늘에는 오행의 운행질서가 있고 땅에는 , , , , 토의 오재(五材) 있어 쓰임이 다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길흉사로 나타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연재이를 닦으면 ()하게 되고 닦지 아니하면 () 된다고 하였다. 특히, 공자(孔子)께서 춘추를 지으시면서 재이(災異) 반드시 기록하였으므로 하늘과 사람이 감응하는 이치를 쉽게 말할 없으므로 자연재이 현상을 반드시 기록한다고 하였다. 동해에 관계된 기록은 1124(인종 20) 동해(東海)가운데 있는 돌이 진퇴하면서 서로 부딪쳤다는 기록과 1176(명종 6) 동해물이 황색으로 흐려지기를 3일이나 하더니 변하여 혈색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1213(강종 2) 3월에도 동해물이 붉어져서 핏빛과 같았다고 하였다. 동해물의 적조 현상은 신라 때에도 나타났었고 오늘날에도 종종 있는 자연 현상인 것이다.

 

3. 제사와 동해

   고려시대에는 해악독신의 산천에 제사 지내는 제도가 확립되었는데 동해, 서해, 남해에 신사(神祠) 있었다.

고려사 지리지 의하면 동해신사(東海神祠) 교주도 익령현(翼嶺縣) 있었다. 익령현은 세종실록 지리지 양양도호부의 연혁사항을 참고하면 오늘날의 양양 해당된다. 조선시대 간행된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에도 양양도호부에 동해신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 세조때 양성지 건의한 상소문에 의하면 동해, 남해, 서해 신사가 모두 개성을 중심으로 정하여졌기 때문에 한양을 중심으로 방위가 맞지 않으니 이들 신사를 모두 옮겨야한다고 건의하고 있다. 그의 건의에 의하면 동해신사는 강릉으로, 서해신사는 인천으로, 남해신사는 순천 등지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양성지의 상소문을 참고로 하면 고려 시대에도 동해와 남해 리고 서해의 신사가 있었음을 있다.



. 조선시대의 동해 인식

   조선시대의 동해의 인식은 고려시대와 비슷하게 동해신사와 자연재이(自然災異) 관한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울릉도 수토사(搜討事) 문제로 동해가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울릉도의 소유권 문제로 왜국과 교섭이 있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동해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는 가뭄과 그의 극복 방법으로 "동해(東海) 효부(孝婦)"가 거론되었으며 특히 동해가 찬양의 대상이거나 치욕을 씻어주는 신성한 곳으로 거론되었다.

 

1. 제사와 동해신사

   조선시대에는 고려 시대의 제사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기 때문에 시대와 차이가 없었다. 1414(태종 14) 산천에 제사 지내는 규정을 새로 정비하였는데 강원도의 동해, 풍해도의 서해, 전라도의 남해를 국가의 사처(中祀處) 지정하였다. 1437(세종19)에는 예조에서 악·해·독·산천의 단묘와 신패를 정하였는데 강원도. 양양부의 동해 사묘의 위판은 동해지신(東海之神)이라고 썼다. 세종실록 오례지(五禮志) 변사(辨祀) 항에 보면 나라에서 관장하는 중사처(中祀處)로서 다른 악신(岳神)·독신(瀆神) 함께 바다의 제사처가 소개되어 있는데 위치를 살펴보면 남해 신사는 전라도 나주에, 서해 신사는 황해도 풍천에, 동해 신사는 강원도 양주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항에도 동해신사 도호부의 동쪽에 있는데 춘추로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되었다.

   한편 세조 때에는 국가의 위신을 드높이고자 원구단을 건립하고 천자와 마찬가지로 하늘에 제사 지냈는데 동쪽의 10() 북악단·북진단·동악단·동진단·태세단·제왕단·산천단·신기단·사독단 함께 동해단(東海壇) 설치하여 제사하였다.

 

2. 가뭄과 동해

   조선은 농본국가(農本國家)이기 때문에 자연재해인 가뭄에 매우 민감하여 그에 대비한 대책을 여러 가지로 마련하였다.

방법 중의 하나는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사람이 없게 하는 것으로 나라에 가뭄이 계속되면 감옥에 있는 죄수를 특별히 방면하거나 재판을 신속히 처리하는 것이었.

   이때마다 등장하는 고사가 "동해(東海) 효부(孝婦)" 기사이다. 고사는 중국 한나라 동해현에 효부가 살았는데 일찍이 과부가 되었고 자식이 없었으며 시어머니만 있었는데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너무나 고마워 여러 자기를 남겨두고 시집가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며느리는 이러한 요구를 거절하고 시어머니를 정성을 다하여 모셨다. 참다못한 시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에게 "늙은이가 젊은 사람에게 짐만 된다" 한탄하며 스스로 목을 메어 자살하였다. 시어머니의 딸이 사실을 알고 관가에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독살하였다고 고발하였다. 며느리는 이를 적극적으로 변명하지 않고 거짓으로 자백하였다. 사건을 담당한 형리(刑吏) 여러 가지로 추궁하였지만 며느리의 대답은 여전하였으므로 이를 상부에 보고하였고 태수는 마침내 며느리를 사형시켰다. 후로 마을에는 3 동안 가뭄이 계속되었다. 후임 태수가 부임하여 사실을 알고 효부 집에 소를 잡아 제사를 드렸더니 하늘에서 비가 왔다는 고사이다.

위에 고사는 가뭄이 들기만 하면 "동해에 사는 효부가 원통하게 죽으니 3 가뭄이 들었다" 인용되는 고사로 태종 때부터 조선 후기 정조 때까지 인용되었다. 물론 이때 인용된 "동해" 오늘날의 동해와는 다른 중국 한나라 때의 동해군을 지칭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의 동해처럼 이용되었다.

 

3.동해와 자연재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처럼 동해의 자연재이 현상도 여러 나타났다. 1415(태종15)에는 영일에서 길주까지 동해의 물이 범람하였다. 동해 바닷물의 높이가 5, 또는 13척이나 되어, 육지로서 어떤 곳은 5,6, 어떤 곳은 백여 척이나 덮었는데, 바닷물의 진퇴가 조수(潮水) 같았다. 삼척과 연곡 등지에서는 바닷물이 줄고 넘치기를 5,6차례나 하였는데, 넘칠 때에는 5,60척이나 되고, 때에는 40여척이나 되었다.

    1565(명종20)에는 음양(陰陽) 절도를 잃어 항상 춥다가 동해 바다가 봄에 얼음이 어는 이변이 일어났으며, 1605(선조38)에는 동해의 물이 붉어지고 압록강 물이 자주빛으로 바뀌었다. 1647(인조25)에는 동해의 물이 역류하였으며, 1655(효종6)에는 명종 때처럼 또다시 동해(東海) 얼음이 어는 재변이 일어났다. 1702(숙종28)에는 동해의 수세(水勢) 바뀌어 어족(魚族) 모두 서해(西海) 옮겨가는 이변이 일어났다. 1737(영조13)에는 동해(東海) 또다시 적조(赤潮) 현상이 일어나 조정을 긴장시켰다.

한편 서해와 달리 동해에 조수(潮水) 없는 점을 규명하려는 시도가 여러 있었다

1450(세종32)에는 정인지가 중국 사신에게 동해에 조수가 없음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질문하였으나 중국 사신도 이유를 없다고 대답하였다.

1476(성종7)에는 경연석상에서 동해에 밀물이 없는 이치를 궁구(窮究)하였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인조도 경연석상에서 조석수(潮汐水) 대한 설명을 들을 있겠는가.라고 질문하자 정경세(鄭經世) 대답하기를,선유(先儒) 논한 바를 정확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이는 땅이 숨을 쉬어서라고 하는데, 동해는 조석이 없으니 이치를 궁구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영조 때에도 경연석상에서 남태제(南泰齊) 말하기를," 동해(東海) 어찌하여 조석(조석(潮汐)) 없습니까? 라고 질문하였으나 명확한 해답을 내릴 없었다.

 

4. 울릉도 수토사(搜討事) 동해

   울릉도는 신라 지증왕때 이사부가 점령하여 통치하였으나 섬에 사는 주민들이 왜구를 인도하는 길잡이가 가능성이 있으므로 울릉도에 사는 주민들을 모두 몰아내어 섬을 비워 두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울릉도에도 주민이 살게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태조때와 덕종때에 도주(島主)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인종때에는 이양실(李陽實), 의종때에는 김유립(金柔立)등을 파견하여 주민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시켰으나 바위가 많아 거주할 없다고 보고되었다. 최우도 울릉도에 주민들을 이주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풍파로 많은 인명을 잃고 계획을 중단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466(태종 16) 삼척 만호였던 김인우(金麟雨) 무릉도(武陵島)(=울릉도) 안무사를 삼아 병선 2척을 파견하여 섬에 거주하면서 군역을 피해간 주민들을 데려오도록 하였다. 김인우는 5개월이 지나서 1417(태종 17) 돌아왔는데 우산도(于山島)에는 15가구에 남여(男女) 모두 86명이 살고 있다고 보고하고 그곳의 특산물인 대죽(大竹) 수우피(水牛皮)(=물개가죽)등을 바쳤다. 1438(세종 20)에는 남호(南顥) 파견하여 울릉도 주민 70여인을 데려오고 섬을 비워 두었다.

1490(성종 20) 박원종(朴元宗) 삼봉도(三峯島) 보내 조사시켰으나 주민이 살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울릉도 무릉도, 우산도, 삼봉도 등으로 불리었음을 있다. 잠잠하던 울릉도 문제가 일본과 우리 나라의 외교 문제로 비화된 것은 1693( 19) 울산에 사는 안용복(安龍福) 울릉도 부근에서 고기를 잡다가 왜인들에게 일본으로 붙잡혀 갔다가 대마도를 통하여 송환되면서 왜인들이 보낸 외교 문서에서 울릉도를 자기네 나라의 죽도(竹島)라고 주장한데서 비롯된다. 조정에서는 울릉도와 죽도(竹島) 일도이명(一島二名)임을 증명하면서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없고 울릉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확실히 하였다. 조정에서는 왜인들이 울릉도를 자기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오랫동안 울릉도를 비워두었기 때문이므로 3년마다 1회씩 지방관을 파견하여 울릉도 정세를 살펴 관리하도록 하였다. 1699(숙종 25)에는 강원도 월송만호 전회일(田會一), 1702(숙종 28)에는 삼척영장 이준명(李浚明) 울릉도를 조사하였다. 그러나 년이 지나자 울릉도 수토사는 뱃길이 멀고 파도가 험하며,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지방관들이 적당한 핑계를 대고 수토를 기피하려 하였다. 1717(숙종 43) 강원감사 이만견(李晩堅) 울릉도 수토는 섬을 확인하는데 불과한데 민폐가 심하니 중지하자고 건의하여 일시 중지되기도 하였으나 숙종때처럼 왜인들의 범경사(犯境事) 재발할 있으므로 고종때까지 3년마다 1회씩 계속 수토(搜討)하여 울릉도를 우리의 영토로 지켜왔다.

 

5. 동해와 찬양시(讚揚詩)

   조선시대 동해 인식 다른 시대와 가장 차이는 동해를 찬양의 대상으로 삼은 점이다.

세종 지은 "헌남산(獻南山) ()" 중에는 "동해는 물결이 잔잔하고...공손히 남산수(南山壽) 드리니, 양궁께서는 만년까지 계시어 백성의 부모가 되소서..."라고 하였으며 "지덕(至德) ()"에서는 "더러운 묵은 인심 깨끗이 씻사오니, 동해의 바닷물이 영원히 맑으리니, 천명에 순종하고 인심에 호응하여, 우리의 민생이 은혜받아 살리로다.라고 동해를 찬양하고 있다.

    세조 때에는 총수(寵綏) ()에서 의기(義旗) 돌이키니 순종하여 도움이 많았도다. 이미 더러운 () 깨끗이 씻으니 동해의 바닷물이 길이 맑도다. 하였으며, 성종 때에는 형조 정랑 유양춘이 희우부를 올리면서 보추가(報秋歌) 이르기를 "서로들 동해의 물만큼이나 받기를 축원하고 남산(南山)처럼 무궁하도록 장수(長壽) 빌어, 송덕(頌德)하고 축수하니 소리가 세상에 진동하였다." 동해의 물만큼 축복 받기를 소원하고 있다.

1488(성종19)에는 일본국에서 대장경을 보내준 은혜에 감사하며 "동해의 물을 퍼내고 남산(南山) 대나무를 검게 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감사의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삼가 천만 감축하는 바입니다" 감사 편지를 보내왔는데, 동해의 물을 퍼내도 감사의 정을 다할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정조와 순조 때에는 왕의 효성이 지극함을 동해물에 비기고 있다. 특히 순조의 공덕 높이어 "북두성 술잔을 기울여 동해 바다 물을 잔질하여 우리 성상 내외의 무한히 오래 것을 축하할 것이니, 어찌 정성과 사랑을 다할 있겠습니까? 하였다.

1868(고종5)에는 대왕 대비의 환갑을 축하하는 교서를 반포하였는데"새해 첫머리에 아름다운 복을 받고 만물이 빛나는 때에 훌륭한 술잔을 올렸다. 화려한 전문을 올리니 기쁨은 참으로 동해(東海) 같이 깊었고 장수(長壽) 남산(南山)처럼 오래 것을 빌었다." 하였다.

 

 

    위와 같이 동해는 찬양의 대상이었으며 축복의 근원으로 여겼다 우리나라 애국가에 등장하는 "동해와 남산"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의 심령을 울리는 축복과 찬양의 대상이었음을 있다.

한편 동해는 참을 없는 치욕을 깨끗이 씻어 주는 신성한 곳으로 여겼다. 광해군 인목대비 폐비 문제로 시비가 있었을 김효성은 "동해에 몸을 던져 죽겠다." 강력하게 폐비 문제를 반대하였으며, 선세휘는 폐비를 반대한 이항복의 처벌을 주장하며 그의 죄는 "동해의 물결을 대더라도 씻어낼 없을 것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

1629(인조7)에는 우참찬 김상헌이 청나라의 오랑캐 중남을 의자에 앉힌 것에 대해 반대하여 올린 차자(箚子)에서 "중남이 이미 전하의 앞자리에 앉아 손님의 예로 대접받은 이상 이제 동해 바다의 물을 퍼서도 부끄러움을 씻기에는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위와 같이 동해는 치욕을 씻어 주는 신성한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

   우리 주변의 자연물인 , , 바다 등에는 뚜렷한 명칭이 없었으나 자연물과 더불어 생활해 인류의 문화 인식에 의해서 적당한 명칭이 붙여지게 된다.

동해라는 명칭은 우리 나라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바다에 대한 관심이 많았을 것이고 동쪽에 있는 바다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해라고 불렀을 것이. 우리 나라 역사 문헌상에 동해의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 기사에서 비롯된다. 고구려가 건국한 졸본지역에는 북부여가 있었는데 이곳에는 고구려가 건국할 곳이니 북부여 보고 동해변의 가섭원으로 옮기라는 기록 속에서 "동해(東海)" 명칭을 발견할 있는데 이때가 중국 한나라 신작(神爵) 3(B.C. 59)이다. 시기는 삼국이 건국하기 이전으로 동해 명칭은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사용해 유구한 명칭임을 있다. 이러한 동해의 명칭은 호국 사상과 깊은 관련을 갖고 문무왕을 동해구에 장사지내게 되며 동해 신사를 짓고 국가의 무사 태평을 빌기도 하였다.

   한편 동해라는 명칭은 삼한, 해동처럼 우리 나라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에게 보낸 답서에서 "동해의 끓어진 왕통을 이어 나가게 하는 것이다." 라고 밝힌 경우와 고려 신종(神宗) 원나라에 보낸 국서에서도 "제가 외람되이 미력한 몸으로 부질없이 변방의 봉작을 이어 받아 동해의 기슭에 모범이 되었나이다." 라고 경우처럼 동해가 고려를 가리키는 별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동해가 제사처로 인식되었고, 후기에는 동해에 있는 울릉도 영유권 문제로 왜국이 가끔 시비를 걸어와 3년에 한번씩 울릉도를 수토(搜討)하면서 울릉도를 지켜왔기 때문에 동해가 관심의 대상이었다. 특히 동해를 찬양하여 "신성한 " "성스러운 "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마음의 고향으로 여겨 후에 애국가의 첫머리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표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