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평생 소원인 중국을 가다

2016. 1. 3. 22:56美學 이야기

 

 

    

쿡! 조선시대 미술 컬렉터    등록일 | 2009.12.10

.

과시적 컬렉션 문화를 꾸짖다 - 연암 박지원

 

 

연암, 평생 소원인 중국을 가다
 
‘상투 튼 기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18세기 후반 실학자 연암의 <
열하일기(熱河日記: 보리출판사>를 읽었다. 책장을 덮었을 때, 이 조선의 선비에게서 기자를 떠올렸다. 연암은 43세 되던 1780년(정조 4년), 종형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이 청나라 고종의 70세를 축하하는 사절로 북경을 갈 때 따라갔다.  

그곳에서 당시 약 2개월 동안 보고 들었던 경험을 기록한 기행문이 <열하일기>다. 책은 여행의 여정 구석구석을 기막힌 문장으로 전해준다. 다큐멘터리 작가가 카메라를 들이대듯 생생하다. 열하일기 국역본은 3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그런데도 읽는 내내 지루하다는 생각이 한 번도 들지 않았다. 그 현장감 있는 묘사에 마치 그 시절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했다.    


↑ 박지원의 <열하일기>  표지

 

 


   평생 소원이던 중국 출장을 간 기자 박지원. 그는 튀어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규정을 어기고, 밤에 몰래 숙소를 빠져나가 중국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기록 정신은 어떤가. 중국 말을 못해 필담을 나눠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 불편함에도 이 부지런하고 꼼꼼한 실학자는 보고 들은 것을 대강 흘리는 법이 없었다. 우연히 만난 중국인이 내놓은 음식 종류까지도, 그것이 10가지가 넘어도 일일이 거명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차려 들인 음식은 떡 두 쟁반, 삶은 거위 한 쟁반, 닭찜 세 마리, 돼지찜 한 마리, 신출 과일 두 쟁반, 양배알국 한 자배기, 임안 술 세 병, 계주 술 두 병, 잉어찜 한 마리, 백반 두 마리, 나물 두 쟁반에 값이 열두 냥이라고 한다.”  
 
밥상 하나에 대한 묘사가 이렇게 구체적이니, 다른 것에는 오죽했겠는가. 동영상 카메라를 비춘듯한 리얼리티는 요즘 기자들처럼 취재수첩에 꼼꼼히 기록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필묵을 지참하고, 거추장스런 도포 소맷자락을 걷어붙이고, 종이 위에 세필로 빠르게 적어 내려가는 민활한 선비의 모습이 상상이 됐다. 이것이야말로 기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이국적이거나 새로운 것, 조선과는 다른 것들을 찾아 한순간도 쉬지 않고 예리한 더듬이를 내밀었다.   


살아있는 듯한 서양화…  내 속을 꿰뚫듯

그렇지. 연암이 그곳을 무심히 지나칠리 없었다. 북경의 천주당. 서양에서 전해내려 온 첨단 문화의 상징이다. 조선 사신들이 묵는 옥하관에서 멀지 않아, 중국을 방문하는 사신들에게는 필수코스이기도 했다. 서양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건립했다는 성당에는 벽과 천장에 성화가 그려져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의 서양 그림을 대했을 때 받은 감동을 그는 아주 정확하게, 그러면서도 신선하게 표현했다.

“천장에 그려진 구름과 인물이 살아있는 듯 너무나 생생해 마치 ‘내 가슴속을 꿰뚫고 들여다보는 것’ 같았고 ‘내가 숨긴 데를 꿰뚫어 맞힐까 봐’ 부끄러워하였다."
  
조선시대 인물화는 세밀했으나 평면적이었다. 이와 달리 서양화는 3차원적인 입체감이 특징이다. 실물을 캔버스 위에 그대로 재현하려고 원근법과 음영법이라는 기술을 구사하는 덕분이다. 그림 속 인물이 입체적인 특성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는 것을 당대 최고의 문장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숨긴 데를 맞힐까 봐 부끄러웠다.’ 서양화 기법의 종교적 그림을 봤을 때의 충격과 감동을 전하는데 이보다 더 멋진 문장이 있을까. 
 
그림을 가까이 가서 본 연암은 또 한 번 놀라고 만다. 
 
‘가까이 가서 보매 성근 먹이 허술하고 거칠게 묻어 다만 그 귀, 눈, 코, 입의 짬과 터럭과 살결 사이를 희미하게 갈라 놓았을 뿐이었다.’
 
유화를 가까이서 본 사람이라면 연암의 이런 표현에 고개가 주억 그려질 것이다. 

성화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은 장면이 포함되었던 것 같다. ‘그림에는 한 여자가 무릎에 대여섯 살 된 어린애를 앉혀두었다. 천장을 바라다본즉 수 없는 어린애들이 오색구름 속에서 뛰노는데, 허공에 주룽주룽 매달려 살결은 만지면 따뜻할 듯하고, 팔목이며 종아리는 살이 포동포동 쪘다.’라고 연암은 적고 있다. 
  
‘살결은 만지면 따뜻할 듯 하고.’ 나는 이 대목에서 또 무릎을 쳤다. 그림에서 체온을 느끼는 감수성, 그리고 그것을 미사여구가 아닌 따뜻하다는 아주 단순한 형용사 하나로 해결해버리는 대문장가의 명쾌함에 감탄할 뿐이었다. 


미술애호가 연암 박지원

   조선 후기 최고 문장가 연암, 그가 미술애호가라는 사실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열하일기>의 북경 천주당 성화 감상기만 보더라도 연암의 관심 영역은 미술에도 뻗쳐 있었고, 깊이 또한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당대 화단의 흐름을 꿰뚫고 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여행 중 만난 청나라 사람이 불쑥 조선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모은 화첩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각각의 그림을 그린 화가와 제목을 가르쳐달라고 청했다. 

이십 점이 넘었지만, 연암은 단박에 가르쳐주었다. 목록은 열하일기 열상화보(洌上畵譜)에 나온다. 김식의 한림와우도, 이경윤의 석상분향도, 이정의 녹죽도와 묵죽도, 이징의 노안도, 김명국의 노선결기도, 윤두서의 연강효천도, 임지사자도, 겸재의 산수도, 사시도, 대은암도, 조영석의 부장임수도, 심사정의 금상산도, 초충화조도, 이인상의 검선도, 강세황의 난죽도. 


↑ 이징의 <연사춘종도(烟寺春鍾圖)>

 


   18세기를 풍미했던 문인 화가의 계보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화랑도 없었다. 그림 감상이라는 것은 미술을 애호하는 선비들이 몇몇 모여 소장하는 그림을 함께 보는 식이었다. 웬만큼 그림을 즐겨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줄줄 꿰지 못하였을 것이다. 

 


↑ 박지원의 <묵죽도>

 

 


   그가 남긴 여러 제발(題跋)도 연암의 서화 완상 취미를 입증한다. 연암이 남긴 제발은 모두 7편. 제발은 그림에 써넣는 짤막한 시 형식의 글이다. 작가가 자신이 그림을 그린 배경, 동기 등을 보충하기 위해 직접 쓰기도 하지만 감상자가 감상과 품평의 성격을 띤 글을 적기도 한다.
  
연암이 제발을 남긴 그림은 제이당화, 천산엽기도발, 청명사하도발, 관재소장 청명상하도발, 일수재소장 청명상하도발, 담헌 소장 청명상하도발., 제우인국화시축 등 7편이다. 이 가운데 제발 4편을 청명상하도에 할애했다.

 

 

 






↑ 장택단의 <청명상하도> 부분

 

 


   청명상하도. 북송 때 장택단이라는 사람이 그린 이 그림은 송대 격물치지에 따라 사실주의 극치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청명절날, 송대 변경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서민들의 일상을 파노라마처럼 꼼꼼하게 그렸다. 

강가에서 화물을 싣고 내리는 큰 배, 나그네에게 술과 음식을 파는 주점이 나타난다. 마을 밖에 있던 집은 초가집이었으나 마을로 오면서 기와집으로 바뀌는 등 도시화를 실감하게 하는 아주 긴 두루마리 그림이다. 

   명대 구영은 또 이 그림을 당시 풍경에 맞게 패러디해서 그렸다. 청명상하도는 마치 <윌리를 찾아라>라는 숨은 그림 찾기 그림책을 보듯, 볼 때마다 새로운 광경을 발견하게 하는 즐거움이 있다.  조선 후기, 경제의 성장과 함께 도시 문화가 발달하면서 중국에서 건너온 청명상하도는 조선의 도시 멋쟁이들을 사로잡았었다. 
 
연암 역시 이 그림을 보면서 이런 즐거움을 누렸음을 고백한다. ‘관재소장 청명상하도발’에서 그는 “이 그림은 상고당 김씨(김광수)가 소장했던 것이다. 그는 구십주(仇十洲, 구영을 말함)의 진품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이 죽고 난 뒤 같이 묻겠다고 맹세했다. 뒷날 김씨가 병이 들자 다시 관재 서씨(서상수) 차지가 되었다. 응당 묘품에 속하니, 비록 세심한 사람이 열 번이나 꼼꼼하게 감상하더라도 번번이 그림을 펼칠 때마다 새로 빠트린 것을 찾아내곤 한다. 그래서 절대로 오래 보지 못하게 하니, 눈을 버릴까 염려해서였다.”

청명상하도는 지금, 13억 중국인으로부터 사랑받는 ‘국민 서화’가 됐다. 무엇보다 이 그림은 사회주의 이념과도 들어맞아 정권 차원에서 높이 평가한다. 수년 전 청명상하도가 상해박물관에서 공개됐을 때 각지에서 몰려든 관람객들 때문에, 이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4∼5시간 줄을 서 있어야 했을 정도였다. 우리에겐 이렇게 국민적 사랑을 받는 대표 서화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내친김에 연암의 미술애호가론에 대해 알아보자. 연암이 말한 바로는 서화애호가에는 수장가와 감상가의 두 부류가 있다. 연암은 후자에 속했다. “감상할 줄은 모르고 단지 수장만 하는 자는 부유하지만, 그 귀만 믿는 자이고, 감상은 잘하되 수장을 못 하는 자는 가난하지만, 그 안목을 저버리지 않는 자이다.”
 
그는 또 당시 조선 사회에 수장가는 있으나 그 깊이가 깊지 못하다면서 부박한 컬렉션 문화를 개탄하기까지 했다. 당대 최고의 컬렉터 김광수도 연암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김씨는 감상에 뛰어났다. 고동과 서화에 아주 잘된 작품을 만나면 문득 가산을 기울이고, 농토와 집을 팔아서 그것을 계속 샀다. 그래서 나라 안의 보배로운 물건들은 다 김씨에게도 돌아갔으나 집은 나날이 더욱 가난해졌다. 늙어서 말하기를 나는 이미 눈이 어두워졌다. 평생 눈으로 보았던 것이 이제 입에 이바지할 수 있다. 그러나 판 가격은 십 분의 이, 삼을 넘지 못했고, 이가 이미 빠져서 이른바 입에 이바지하는 것이 모두 즙과 가루일 뿐이었다. 애석한 일이다. 애석한 일이다.”
 
사실 김광수뿐 아니라 이조묵의 경우처럼 그림에 미쳐 가산이 기울 정도로 그림을 사서 모은 수장가들이 있었다. 연암은 그런 사람들이 ‘한심하다’는 반응이다. 참으로 실학자다운 평가다. 그래서 그는 깊이를 갖추지 못한 과시적 컬렉션 문화에 대해 따끔하게 꼬집었다.  

“우리나라에 비록 간혹 수장가가 있기는 하나 책은 곧 건양의 방각본이고, 서화는 곧 금창의 가짜일 뿐이다. 밤 껍데기 빛의 술독에 곰팡이가 피었다고 갈아 버리려 하고, 장경의 종이가 더럽다고 씻어내려 한다. 질 나쁜 엉터리 물건을 만나서는 그 값을 비싸게 하면서도 보배는 버려서 수장을 못 하니 그 또한 슬퍼할 만한 따름이다.”  
 
그렇다면 컬렉터로서는 어떤 태도가 바람직할까. 연암은 ‘담헌소장 청명상하도발’에서 자신 견해를 피력했다.  
 
“글씨는 어찌 반드시 종요, 왕희지, 안진경, 유공권의 글씨라야 하며, 그림은 하필 고개지, 육탐미, 염립본, 오도현의 그림이라야 하며, 정이는 하필 선덕 오금의 정이라야만 할 것인가. 그 진품을 구하기 때문에 온갖 가짜가 나와서 진품에 가까울수록 더욱 가짜다. 융복사와 옥하교에서 손수 그린 서화를 파는 자들이 있으니 잘되었나 못되었나 대략 판단해서 사면 된다. 정이는 비록 건륭 연간에 만들어진 것이라도 모양이 반듯하면서 예스럽고 특이하며 돈후한 것을 산다면 아마도 북경 시장에서 웃음거리는 되지 않을 것이다.” 
 
저렴한 판화 하나라도 보고 즐길 줄 아는 것, 그것이 연암이 생각하는 진정한 미술 사랑이다.   

 

bookdb.co.kr/bdb/Column.do... 북DB >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