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료, 흑거란 / 중앙아시아 역사

2013. 7. 5. 14:25우리 역사 바로알기

 

 

서구 역사에서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흑거란(Kara-Khitan)’이라 하고, 서료라는 말도 쓰지 않고, 기원지를 만주라고 주장하지 않는데 반하여, 중국역사가는 만주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주’라는 지명은 근세 조선 초기 여진 추장 이만주에서 유래된 것으로 1600년대 후반부터 만주라고 불렀습니다. 그전 사료에는 만주라는 이름이 없는데, 거란왕국에 만주라는 지명이 나올리가 없습니다.
근세조선 초에 신강성 카자흐스탄 동북에 ‘건주위’를 설치하여 몽고, 여진 등을 관할했습니다. 이 건주위가 만주가 되는 것입니다.
서양에서 10세기경에 중국을 Khitan(Khita)이라고 불렀습니다.
Khitai는 스키타이와 같은 글자로서, 거란족의 뿌리는 스키타이(Scythia 사카)족으로 돌궐족과는 구별이 됩니다. 그리고 박트리아(대하)의 월지족과 뿌리가 같습니다.
이리티쉬강은 Kara-Irtysh(Black Irtysh)라고 하며, 이리티쉬강에 黑자가 붙으므로 흑룡강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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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키탄한국 즉 흑거란한국은 1124년부터 1218년사이에 아래의 지도와 같이 분명히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즈스탄과 아무다르여 강 주변이 그 강역이었다.
아래에 최두환님이 인용한 자료와 설명을 보겠습니다.

고려사』세가22 고종1을 보자.
(2) 1219년(기묘6) 가을 7월에 북계 흥화도(興化道)의 모든 백성들을 검열했다. … 이 때에 간첩의 입에서 '몽고 사람들이 가을철에 다시 온다.'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8월 임진일에 동북면 병마사가 보고하기를, '몽고와 동진국(東眞國)이 군사를 보내어 진명성(鎭溟城) 밖에 주둔시키면서 공납을 독촉한다.'고 하였다.
9월 신축일에 몽고 사절 1명과 동진국 사람 9명이 우리나라에 왔다.

이『고려사』의 내용으로 보면 같은 해 1219년인데, 일단 몽고 군사와 동진국(함경도 지역) 사람들이 고려에 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몽고 징기스칸의 전투와 무슨 상관일까?
이 때는 몽고의 징기스칸과 그 일당들이 서역지방 정벌에 나섰던 시기(1218∼1224)이다.
그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에 전쟁으로 나섰는데, 나머지 몇몇 몽고 군사들이 고려에 와서 공물을 요구했을까? 군사적 위협은 없었을까? 그 간첩의 말이 이미 위협을 받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변방의 수비를 강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몽고군들의 군사적 이동이 고려와 무슨 관계가 있으까?

(3) 1218년(무인5) 8월 계미일에 글안(키타이)군이 양주(楊州)를 침략하고, 기사일에 서해도 방수군(防戍軍)이 곡주(谷州)에서 글안군과 교전하여 적 300명 남짓의 머리를 베었다.
12월 1일(기해)에 몽고 원수들이 합진(哈眞)과 찰라(札剌)가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동진(東眞) 포선만노(蒲鮮萬奴)가 보낸 왕안자면의 군사 2만 명과 합세하여 글안 적을 치겠다고 선언하고, 화주(和州)•맹주(猛州)•순주(順州)•덕주(德州) 네 성을 쳐서 깨뜨린 다음 곧장 강동성(江東城)으로 향하였다.
1220년(경신7) 3월 병오일에 글안군이 평로진(平虜鎭)에 침입하였다.

이 자료는 징기스칸이 서역을 공격한 1219년의 1년전과 1년후의『고려사』고종 때의 기록이다. 그런데 바로 그 1년전에 글안군이 쳐들어와서 전투를 했고, 1년 후에도 글안군이 쳐들어 왔다. ------인용 끝.

서료의 걸안이 망하는 시점인 1218년 8월 거란은 고려의 양주(楊州)를 침략하고, 같은 해 12월 몽고는 거란을 치겠다고 화주 맹주 순주 덕주를 치고 강동성으로 향합니다. 이로 볼 때 고려의 양주는 서료가 있던 아무다르여 강(우즈베키스탄) 주변에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이 당시(1218∼1224)에 징기스칸은 서역 정벌을 나서고 인더스강을 침략할 때입니다.

Kara-Khitan Khanate 흑-거란 한국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Kara-Khitan_Khanate
[ ]은 인용 해석 및 역자 의견. 확대사진을 보려면 위 사이트에서 확인.

Map of Asia and Europe circa 1200 C.E.(사진)
서기 1200년경 유럽과 아시아 지도 [이 지도 역시 날조사관의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The Kara-Khitan Khanate, or Western Liao (Mongolian Хар Хятад; Kara Kitad; traditional Chinese: 西遼; simplified Chinese: 西辽; pinyin: Xī Liáo, 1124[1]-1218) was a Khitan empire in Central Asia. The dynasty was founded by Yelü Dashi, who led the remnants of the Liao Dynasty to Central Asia after fleeing from the Jurchen conquest of their homeland in Manchuria. The empire was usurped by the Naimans under Kuchlug in 1211; traditional Chinese, Persian and Arab sources consider the usurption to be the end of the empire.[2] The empire was destroyed by the Mongol Empire in 1218.
흑-거란한국(1124-1218년) 또는 서료(西遼) 또는 카라 키타드(몽고어)는 중앙아시아의 거란제국이다. 왕국은 야율달실이 창건하였으며, 여진족(쥬르천,영어)이 만주에 있는 그들의 고향을 정복하자 료왕조의 잔존세력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왔다. 이 왕국은 1211년 쿠츨루그(징기스칸에게 멸망당함)의 지도아래 나이만(몽고족)족에 의해 전복되었다; 중국,페르시아 아랍의 사료에서 보면 이 전복으로 왕국은 멸망한 것이다. 이 왕국은 1218년 몽고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다.

[나이만족: 나이만 돌궐족 또는 나이만 몽골족. 1177년까지 흑-거란에 종속되었다. 거란족과 마찬가지로, 많은 수는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이었다. 현재 40만의 카자크인이 나이만족이다. 기원지는 동부 카자흐스탄이다. ]

1. Names

Liao funerary mask, an ancestor of the Kara-Khitans, 10-12th century CE.(사진)
요왕조의 장례용 가면, 흑-거란의 조상, 10-12세기.

Kara Khitan (Hala Qidan) was the name used by the Khitans to refer to themselves. The phrase is often translated as the Black Khitans, but its original meaning is unclear today.[3] Since no direct records from the empire survive today, the only surviving historical records about the empire come from outside sources. Since the empire took on trappings of a Chinese state, Chinese historians generally refer to the empire as the Western Liao Dynasty, emphasizing its continuation from the Liao Dynasty in Manchuria. The Jurchens referred to the empire as Dashi or Dashi Linya (after its founder), to reduce any claims the empire may have had to the old territories of the Liao Dynasty. Muslim historians initially referred to the state simply as Khitay or Khitai. It was only after the Mongol conquest that the state began to be referred to in the Muslim world as the Kara-Khitai or Qara-Khitai.[4]
1.        이름:
카라-키탄(할라 키단)은 거란족이 자신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이 어구는 종종 흑-거란으로 번역되었으나 원래의 의미는 오늘날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왕국의 직접적인 사료가 오늘날 없기 때문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료는 밖에서 온 것이다. 왕국은 중국을 점령했기 때문에 중국 역사가는 일반적으로 이 왕국을 서료왕조라고 하는데, 만주의 요왕조에서 지속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진족은 이 왕국을 달실達實) 또는 달실린야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이 왕국이 료왕조의 옛 영토를 주장할까봐여서 였다. 무슬림 역사가들이 처음으로 이 나라를 단순히 키타이라고 서술했다. 이 나라가 무슬림 세계에 카라-키타이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몽고 정복 후였다.  

2. Administration
The Khitans ruled from their capital at Balasagun (in today's Kyrgyzstan). They directly controlled the central region of the empire. The rest of their empire consisted of highly-autonomous vassalized states, primarily Khwarezm, the Karluks, the Gaochang Uyghurs, the Qangli and the Western, Eastern and Fergana Kara-Khanids. The late-arriving Naimans also became vassals, before usurping the empire under Kuchlug.
2.        통치:
거란왕국은 키르기즈스탄의 발라사군에 수도를 두고 통치했다. 제국의 중심지역을 직접통치했다. 제국의 나머지는 자치권이 높은 속국으로, 주로 콰레즘(화레즘) 왕국, 카룩 왕국, 고창(高昌) 위그르 왕국, 강리와 카리-카니드 왕국의 서부 동부 페르가나 등으로 구성되었다. 나중에 도착한 나이만족은 쿠츨룩에 의한 제국전복 전에는 역시 복속되었다.

[발라사군: 한자로 팔랄사곤(八剌沙衮), 키르기즈스탄의 고대 소그드왕조의 도시, 추이(Chui)강 계곡으로 비쉬켁(Bishikek)과 이식쿨호 사이에 있다. Tokmak남서쪽에 있다
10세기부터 1218년 몽고의 정벌까지 흑-거란왕국의 수도였다. 몽고는 고발릭(예쁜 도시)라고 불렀다.
Kara-Khanids 왕국: 카라-한니드는 카리한니드가 창건한 돌궐왕국이다. 흑한(黑汗), 도화석(桃花石)이라 한다. 즉 검은 왕이라는 뜻. 영역은 트란스옥시아나, 기간은 999년-1211년. 수도는 카쉬가르, 발라사군, Uzgen 그리고 다시 카쉬가르. 여기서 카쉬가르는 신강성 객십(喀什).
Karluks: 갈라록(葛邏祿,葛逻禄) 왕국: The Karluks were a prominent nomadic Turkic tribe residing in the regions of Kara-Irtysh (Black Irtysh) and Tarbagatai west of the Altay Mountains in Central Asia. – 갈라록은 검은 이리티쉬 강 지역과 알타이산맥의 타바가타이산 서부에 사는 주로 돌궐유목민이었다. 갈라록은 차가타이 언어이다.
이리티쉬강: 이리티쉬강과 Ob강 유역은 분지를 형성하고 있으며, 16세기 전까지 칼믹족(오이라트,와랄)과 중국인 몽고인이 살던 곳이며, 그후 러시아인들이 도착하고,  19세가 되어서야 러시아에 완전병합되었다. 이리티쉬강에 黑자가 붙으므로 흑룡강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The Khitan rulers adopted many administrative elements from the Liao Dynasty, including the use of Confucian administration and imperial trappings. The empire also adopted the title of Gurkhan (universal Khan).[5] The Khitans used the Chinese calendar, maintained Chinese imperial and administrative titles, gave its emperors reign names, used Chinese-styled coins, and sent imperial seals to its vassals.[6] Although most of its administrative titles were derived from Chinese, the empire also adopted local administrative titles, such as tayangyu (Turkic) and vizier.
거란통치자는 료왕조로부터 많은 통치수단을 채택했으며, 유교식 통치와 황제 예복의 사용이 포함된다.
왕국은 또한 구르한(가한) 칭호를 채택했다. 거란족은 중국 달력을 사용했고, 중국의 황실과 관료의 칭호를 유지했으며, 황제에게 왕대명(王代名)을 부여했으며, 중국 양식의 주화를 발행했고, 황제의 봉서(封書)를 속국에 보냈다. 관료명칭이 대부분 중국에서 왔지만, 황제는 또한 타이양유(tayangyu ,돌궐어)와 위제르(vizier, 페르시아어, 제후의 왕 또는 술탄)와 같은 현지의 관료 칭호를 채택했다

The Khitans maintained their old customs, even in Central Asia. They remained nomads, adhered to their traditional dress and maintained the religious practices followed by the Liao Dynasty Khitans. The ruling elite tried to maintain the traditional marriages between the Yelü royal clan and the Xiao consort clan, and were highly reluctant to allow their princesses to marry outsiders. The Kara-Khitai Khitans followed a mix of Buddhism and traditional Khitan religion, which included fire worship and tribal customs, such as the tradition of sacrificing a gray ox with a white horse. In an innovation unique to the Kara-Khitai, the Khitans paid their soldiers a salary.
거란은 중앙아시아에서도 옛 관습을 유지했다. 그들은 유목민으로 남아있었으며, 전통복장을 고수하고 료왕조의 거란족들이 행한 종교적 수행을 유지했다. 통치 상류층은 야율 왕가와 씨야오 배우자 씨족과의 전통적인 결혼을 유지하려 했으며 그들의 공주들이 외부인과 결혼하는 것을 매우 꺼렸다. 흑-거란 제국의 거란족들은 불교와 전통적인 거란 종교가 혼합된 것을 믿었으며, 그 종교는 불을 숭배하는 것과 회색 황소와 흰 말을 제물로 바치는 전통적인 부족의 관습이 포함된다. 흑-거란 제국의 독특한 제도는 군인에게 봉급을 지급하는 것이다.

The empire ruled over a diverse population that was quite different from its rulers. The majority of the population was sedentary, although the population suddenly became more nomadic during the end of the empire, due to the influx of Naimans. The majority of their subjects were Muslims, although a significant minority practiced Buddhism and Nestorianism. Although Chinese and Khitan were the primary languages of administration, the empire also administered in Persian and Uyghur.[7]
제국은 통치자와는 매우 다른 다양한 백성을 통치했다. 인구의 대다수는 정착하였는데, 그러나 나이만족의 유입으로 제국의 말기에 갑자기 더 많은 수가 유목민이 되었다. 비록 중요한 자리의 소수가 불교도와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도 였지만, 백성의 대다수는 무슬림이었다. 비록 관청의 주 언어는 중국어와 거란어였지만, 제국은 또한 페르시아어와 위그르어로 다스려졌다.
[위그르어: 사용지역은 중국 신강성, 카자흐스탄, 파키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지크스탄이다. 돌궐의 구두어이다. ]

3. History

Asia in 1200 AD, showing the Kara Khitay and neighbors.(사진)

The Kara-Khitai empire was established by Yelü Dashi, who led 100,000 Khitans into Central Asia from Manchuria by way of Mongolia. Yelü conquered Balasagun from the Kara-Khanid Khanate in 1134, which marks the start of the empire in Central Asia. The Khitan forces were soon joined by 10,000 Khitans, who had been subjects of the Kara-Khanid Khanate. The Khitans then conquered Kashgar, Khotan, and Besh Baliq. The Khitans defeated the Western Kara-Khanid Khanate at Khujand in 1137, eventually leading to their control over the Fergana Valley. They won the Battle of Qatwan against the Western Kara-Khanids in September 9, 1141, which allowed the Khitans to control Transoxania and forced Khwarezm to become their vassals.
3.        역사:
흑-거란제국은 야율달실이 창건했고, 만주로부터 몽고를 거쳐서 중앙아시아로 거란족을 이끌고 왔다. 야율은 1134년 카라(흑)-카니드 한국의 발라사군을 정복했으며, 그 도시는 중앙아시아에서 제국이 시작된 곳이다. 거란의 군대는 곧 카라-카니드 한국의 백성이었던 1만명의 거란족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 다음 거란왕국은 카쉬가르(신강성 객십), 코탄(호탄,우전), 베쉬발리크를 정복했다. 거란은 1137년 쿠잔드에서 카라-카니드 한국의 서부를 점령했으며, 결국 통치권이 페르가나 계곡까지 이르렀다. 거란은 1141년 9월9일 서부 카라-카니드왕국과 캇완에서의 전쟁에 이겼으며, 이로 인하여 거란왕국은 트란스옥시아나 영역을 통치하고 콰레즘왕국을 그들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Khujand(쿠잔드,후잔드): 타지크스탄의 두번째 도시로, 시르다르여 강 페르가나(대완) 계곡의 입구에 있다. ]

Yelü soon died in 1143, and was followed by his wife, Xiao Tabuyan, as regent for their son. Their son, Yelü Yiliu, died in 1163 and was succeeded by his sister, Yelü Pusuwan. She sent her husband, Xiao Duolubu, on many military campaigns. She then fell in love with his younger brother, Xiao Fuguzhi. They were executed in 1177 by her father-in-law, Xiao Wolila, who then placed Yelü Zhilugu on the throne in 1178. The empire was weakened by rebellions and internal wars among its vassals, especially during the latter parts of its history. In 1208, the Naimans fled from their homeland and were welcomed into the empire of the Kara-Khitai. In 1211, the Naiman prince, Kuchlug, captured Yelü Zhilugu while the latter was hunting, ending Khitan rule in the Kara-Khitai empire. The Mongols captured and killed Kuchlug in 1218. The Mongols fully conquered the former territories of the Kara-Khitai in 1220.
야율은 1143년 곧 사망했고, 그의 아내 씨야오 탑불연이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이 되었다. 그들의 아들 야율 이렬는 1163년 사망했고, 그의 여동생 야율 보속완이 계승하였다. 그녀는 남편 씨야오 두올루부를 여러 군사 진영에 보냈다. 그녀는 곧 그의 남동생 씨야오 푸구지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1177년 그녀의 시아버지 씨야오 월릴라에 의해 처형되었으며, 그는 1178년 야율 직로고를 왕위에 앉혔다. 제국은 특히 역사의 후반에 속국들 사이에서의 반란과 내전으로 쇠약해졌다. 1208년 나이만족은 고향을 떠나 흑-거란 제국으로 받아들여졌다. 1211년 나이만 왕자 쿠츨룩은 야율 직로고가 사냥하는 동안 그를 생포하였으며, 그래서 흑-거란 제국에서 거란의 통치는 끝나게 된 것이다. 몽고는 1218년 쿠츨룩을 붙잡아 처형했다. 몽고는 1220년 흑-거란 제국의 옛 영역을 완전히 정복했다.


4. Sovereigns of Kara-Khitan Khanate
  흑-거란 왕국의 통치자 표는 파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