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21. 03:03ㆍ글씨쓰기
고산 황기로 선생과 매학정
입으로 씹은 칡넝쿨 붓 삼아 현판 글씨를 쓴 초서의 명필, 중국 북송의 임포는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여기며 살았기에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말을 들었다. 조선의 서예가 가운데 구미 출신의 고산 황기로도 초서의 최고경지에 올라 초성(草聖)으로 알려지면서 중국에서 ‘제2의 왕희지’로 칭송받았다. 황기로는 평생을 매화와 학을 가까이 한 인물로 구미시 고아읍 예강리 낙동강이 보이는 고산 기슭에 매학정을 지어 머물렀으며, 구미의 상징인 금오산의 바위에도 대형 초서작품인 ‘금오동학(金烏洞壑)’을 남겼다. 450년 전 고산이 살았던 삶의 흔적을 찾아 역사여행을 떠나보자.
매화는 추위를 이겨내면서 가장 먼저 꽃을 피워낸다고 하여 화형(花兄)이라 부른다. 또한 어렵고 힘든 시기를 이겨나가는 가난한 선비라는 뜻에서 한사(寒士)라고도 한다. 이처럼 매화에는 성리학의 이념과 군자의 이미지가 들어 있기 때문에 옛 부터 선비들이 처소 가까이에 심어두고 즐겨 완상하였다.
선비들이 좋아하는 꽃이 매화라면, 선비들이 집에서 키우고 싶은 새는 학이었다. 크고 흰 깃털을 저으며 우아한 자태로 정원을 거니는 학은 신선다운 품위가 있어 세속적이지 않고, 은일하게 살려는 선비들에게 고상한 운치를 제공하는 으뜸가는 새였다.
이렇게 매화와 학을 돌보면서 유유자적하게 사는 게 선비들의 꿈이었다. 그런 꿈을 실제 현실로 옮긴 사람이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년 중종 16∼1567년 명종 22)였고, 그의 롤 모델이 된 사람은 중국 북송의 임포(林逋, 967∼1028)였다. 매화와 학을 좋아했던 임포에 관한 이야기는 송나라 때 완열(阮閱)이 편집한 시화집 ‘시화총귀(詩話總龜)’에 나온다.
임포는 절강성 항주 서호(西湖) 출신의 선비였다. 그는 젊은 시절 천하를 주유하면서 40세가 되도록 전국의 산수를 두루 돌아보았으나 자신의 고향인 서호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호 북쪽의 고산에 초당을 짓고 동자 하나만 데리고 살았다. 고산에 은거하는 20년 동안 시내에 출입하지 않았다. 이렇게 세속의 영리를 멀리하고 은둔생활을 하였지만 그의 문장과 서예는 당대에 꽤 알려져 그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자주 찾아왔다.
정선, <고산방학 孤山放鶴>, 비단에 연한 색, 22.8×27.8cm. 간송미술관
그의 시는 그윽한 정취가 있고 고상했다. 어느 날 시중드는 동자가 임포에게 물었다. “선생님, 왜 시를 그렇게 많이 지으시면서 책으로 묶지 않나요?”그가 대답하길 “후세에 쓸데없는 이름이 날까봐 짓기만 하고 발표는 안한단다” 그는 이렇게 초야에 묻혀 세속적인 출세와 명성을 얻는 것에 벽을 쌓고 오직 시(詩), 서(書), 화(畵)를 즐기면서 살았다.
평생 동안 독신으로 지낸 그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초당 주위에 수많은 매화나무를 심어 놓고 학을 기르며 살았다. 일기가 좋은날이면 서호에 나가 조각배를 띄우고 자연이 주는 경이로운 정취에 빠지곤 했다. 그가 배를 타고 있을 때 손님이 찾아오면 심부름하는 동자는 학을 풀어 하늘에 날렸다. 학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면 초당으로 돌아가 손님을 접대했다. 이 얼마나 운치있는 연락방법인가.
동산의 작은 매화(山園小梅) 2수(二首)
-임포(林逋)
꽃이란 꽃 다 떨어진 뒤 홀로 곱고 아름다워(衆芳搖落獨暄姸)
작은 동산 향한 운치 가득가득 차지하네(占盡風情向小園)
성긴 그림자는 맑고 얕은 물 위에 비스듬히 드리우고(疎影橫斜水淸淺)
그윽한 향기 떠도는데 달은 이미 어스름(暗香浮動月黃昏)
겨울새는 앉으려고 먼저 주위 둘러보고(霜禽欲下先偸眼)
어지러이 나는 나비 외로운 혼을 아는 듯 해(粉蝶如知合斷魂)
다행히 나는 시를 읊어 서로 친할 수 있으니(幸有微吟可相狎)
악기가 없어도 항아리 술 함께 할 수 있으리(不須檀板共金尊)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임포를 두고, 매화 아내에 학 아들을 가지고 있다면서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렀고, 고산처사(孤山處士)라고도 불렀다. 그 뒤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풍류를 즐기며 초야에서 조용하게 살아가는 선비를 가리켜 매처학자, 혹은 처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후대에 이러한 임포의 은둔적인 삶을 존경하고 기린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수많은 그림과 시에 인용됐고, 처사(處士)의 대표였다. 우리가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사람을 처사라고 부르는 것도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인종황제가 임포의 사후에 ‘화정(和靖) 선생’이란 시호를 내려 그의 삶을 기렸다. 조선에서도 초성(草聖)으로 필명을 날렸던 고산 황기로가 임포의 삶을 동경해 구미 고아읍 산자락을 고산(孤山)이라 이름 짓고 자신의 호를 고산으로 자호하였으며, 그 기슭에 매처학자를 줄인 매학정(梅鶴亭)이란 건물을 지은 것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임포와 같은 은자의 삶을 지향했는지 알 수 있다.
구 미시 고아읍 강정4길 낙동강변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매학정(梅鶴亭, 경상북도 기념물 제16호)은 조선시대 명필 황기로(黃耆老)가 1533년 건립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본래 황기로 조부 황필의 휴양지인 곳을 주변에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매학정이라 이름 지었다.
황기로의 호는 고산(孤山), 혹은 매학정(梅鶴亭)이다. 그는 구미 고아읍 망장에서 경주부윤을 지낸 황필의 손자, 진사를 지낸 황계옥의 아들로 1521년에 태어났다. 14세에 진사시에 합격할 정도로 수재였으나 벼슬은 별좌에 그쳤다. 그것은 1519년 기묘사화의 주동인물이었던 조광조의 사사(賜死)를 주청한 아버지의 허물 때문에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처사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만년에 낙동강 보천탄(寶泉灘) 위 조부의 건물터에 다시 정자를 지어 매학정이라 편액하고 매화와 학을 기르며 지냈다. 아들 없이 딸 하나만 있었던 고산은 율곡 이이의 아우인 옥산(玉山) 이우(李瑀)를 사위로 삼았다. 이우도 예술에 재주를 가지고 있어 고산과 함께 시서(詩書)와 금(琴)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보냈다. 고산이 46세(1567)로 세상을 하직하자 사위인 이우가 매학정을 이어받았다.

황기로(1525~1575)의 초서(草書) ‘이군옥시', 지본묵서, 보물 제1625-1호
오죽헌 시립박물관 소장 작품
보물로 지정된 ‘황기로 초서 이군옥시’는 가로 62.6㎝, 세로 120㎝ 규모의 지본묵서로
신사임당의 막내 아들 옥산 이우(1542∼1609)의 16대손인 이창용(49) G20기획조정단장이
지난 2008년 9월 강릉시에 기증한 566점의 유물 가운데 하나다.
16세기를 대표하는 초서 명필가 고산 황기로가 당나라 이군옥의 오언율시를 쓴 것으로
황기로의 필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산은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처사로 은거하면서 매처학자를 실현한 사람으로 일찍부터 서예에 전념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노력상은 일화로 전해온다. 고아읍 대망리에 금수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일찍이 고산이 그곳에서 글씨 연습을 많이 하여 먹물이 개울로 흘러들어 검게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런 노력으로 고산은 조선조 서예사에서 김구(金絿) · 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초서의 1인자로 평가받았으며 후대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 특히, 초서를 잘 써서 ‘초성(草聖)’으로 널리 알려졌다.
고산이 김안국(金安國)과 같이 명나라에 갔을 때 명나라 선비들이 그의 서예실력을 알아보고 ‘해동장옹(海東張翁)’이라 칭송했다. 즉 조선의 장욱(張旭)이란 뜻인데, 장욱은 당나라 때 미친 듯이 휘호하는 광초(狂草)의 최고봉으로서 초성(草聖)이란 칭호를 받은 사람이다. 명나라 사람들은 고산을 ‘왕희지 이후의 일인자’라 하면서 그의 글씨를 서로 받으려고 했다. 국내에서도 그의 작품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아 가는 곳마다 고산의 글씨를 얻으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어느 날 영주의 사계(砂溪) 장여화(張汝華)가 전계초당(箭溪草堂)을 짓고 편액을 써줄 것을 고산에게 요청하자, “내가 흥이 날 때 휘호할 것이니 기다리라”고 말했다. 며칠 뒤 산사를 거닐다 갑자기 “내가 지금 흥이 났으니 종이와 붓을 준비하라”고 통보하고, 자신은 산에서 칡넝쿨 줄기를 치아로 씹어 갈근필(葛根筆)을 만들어 전계초당 넉 자를 썼다. 전(箭) 자는 대나무 새순과 같고, 계(溪) 자는 시냇물처럼 유연하였으며, 초(草) 자는 풀싹이 돋는 모양이었고, 당(堂) 자는 집모양과 같았다. 이 글씨를 보고 고산 자신도 ‘내 평생의 득의작’이라 평하면서 만족했다고 한다.
↑ 그림.고산 황기로 ‘敬次’ 지본묵서 26×110cm 개인소장.
‘경차’(공경히 시를 짓다)는 매학정에 은거하고 있는 황고산에게 어떤 스님이 찾아와 보여준 시축을
거듭 반복하여 읽다 감흥이 일어 즉석에서 지은 칠언절구다.
금오산 바윗돌에 새겨진 고산의 글씨‘금오동학’,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金烏山) 관리사무소 인근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등산로를 따라 500m 정도 산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바위에 ‘금오동학(金烏洞壑)’이라는 큼직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금오동학이란 ‘금오산의 깊고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의미로 조선 중기의 명필로 특히 초서(草書)를 잘 써서 초성(草聖)이라 불리운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75)의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글자의 크기는 세로 80~110cm, 가로 70~80cm 정도다.
금오산 삭도 승차장에서 500m 정도 등산로를 오르다 보면 오른쪽 바위벽에 ‘금오동학(金烏洞壑)’이라는 네 글자가 행초서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활달하고 웅장한 필치로 휘호한 고산의 필력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거대한 자연석에 글자를 새긴 것을 마애각석(磨崖刻石)이라고 한다. 금오동학이란 금오산의 깊고 그윽한 골짜기를 뜻함이니,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절경을 의미한다. 실측해보니 글자가 새겨진 바위의 크기는 높이 3m, 너비 7m50cm 이고, 각 글자의 크기는(세로×가로), 金 107cm×71cm, 烏 105cm ×69cm , 洞 93cm×67cm , 壑 83cm×78cm이다. 획의 폭은 10cm ~20cm , 깊이는 1cm 남짓으로 그리 깊은 편이 아니기에 많이 손상되어 있다. 구미시에서는 보존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고산 황기로는 매처학자를 자처하며 붓 한 자루로 초성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42세 때 사돈인 율곡 이이가 그의 삶을 목격하고 ‘빈 뜰에 매화송이 피어오르고 깊은 못에서는 학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10여리 떨어진 곳에서 텃밭을 일구는 신선’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450년 전 고산이 머물렀던 구미 곳곳에는 지금도 매화가 피고, 그가 남긴 글씨는 생생히 남아있다. 이제 그의 흔적을 찾아 새롭게 조명하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이다.
blog.daum.net/lee7997/2167 이택용의 e야기 - 晩.. 에서 본문 발췌 ......
'글씨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물로 본 중국 서예사 (0) | 2016.01.21 |
---|---|
보물급 광흥사 <월인석보> 최초 공개 (0) | 2016.01.21 |
서예사 - 비각예서(碑刻隸書)| (0) | 2016.01.20 |
서예사 - 北碑 (0) | 2016.01.20 |
서예사 - 왕희지 (0) | 2016.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