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21. 19:27ㆍ글씨쓰기
인물로 본 중국 서예사 남송 정상길
1)종요(151~230) 위나라, 정치가, 해서 예서에 뛰어남, 송(宋)대의 서예가들에게까지 큰영향을 미친 인물 서법사상 그는 해서로 발전해가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함으로써 왕희지(王羲之)와 더불어 '종왕'으로 병칭되었다. 왕희지는 일찍이 그와 장지(張芝)를 배웠다. 남조와 당대에는 그와 장지·왕희지·왕헌지(王獻之) 4명이 함께 서예계의 최고 본보기로 추앙받았다. 진(晉)의 무제(武帝)는 서학박사를 설치하고 종요를 종법으로 삼을 것을 명했다. 서진·남북조 시대에도 모두 그를 배웠는데 북조에는 더욱 두드러졌다. 장쭤에서는 왕희지 부자가 나왔으나 여전히 종요를 서가의 거장으로 기렸다. 당·송대 이후에 해서·행서(行書)를 쓰면서 고고하고 중후한 멋을 추구했던 안진경(顔眞卿)·주희(朱憙)·송극(宋克)·예원로(倪元璐)·황도주(黃道周)·팔대산인·석도(石濤)·유용(劉墉) 등 저명한 서예가들은 누구나 그에게서 정수를 흡수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2)장지(?~ 192 ?) 전한시대, 또는 후한시대 인물로 추정(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음) 장지의 생애가 불확실하지만 192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해서 70~5세를 살았을 것으로 예상하여 122~117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면 종요보다 선배이고 종요가 41세 때 장지는 사망을 하였으므로 비슷한 시대의 사람으로 추정
자는 백영(伯英). 간쑤 성[甘肅省] 둔황[敦煌] 주취안[酒泉] 사람이다.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서예를 익히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장초(章草)에 가장 뛰어났으며, 장초를 서법예술사상 최고봉으로 끌어올려 독립적으로 감상할 가치가 있는 예술로 발전시켰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위탄(韋誕)은 그를 '초성'(草聖)이라고 떠받들었으며, 왕희지(王羲之)도 그와 종요(鍾繇)에게 극찬을 보낸 바 있다. 그의 작품은 극소수만이 세상에 전한다. 당대의 장회관(張懷瓘)은 그가 금초의 창시자라고 말했다
자는 공명(孔明)이며, 별호는 와룡(臥龍) 또는 복룡(伏龍). 후한 말 군웅인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하는 제업을 이루었다. *(삼국시대의 인물로 시대를 구분하는데 도움이 될 듯하여 첨부하였음(육조 이전의 인물)
중국(中国)의 여류(女流) 서예가(書藝家)이자 왕희지(王羲之)의 스승 "위부인(偉夫人)." 272년 서진 세조 무제 안세 사마 염 즉위 8년째 태시 8년 출생~349년 동진 효종 목제 팽자 사마 비 즉위 5년째 영화 5년 78세에 사망.
"중국(中国) 동진(東晉)의 여류 화가이자 서예가다 이름은 삭(鑠)이고 자(字)는 무의(茂猗) 위전(衛展)의 누이동생이며 여음태수(汝陰太守) 이구(李矩)의 부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위항이라는 인물인데, 이 사람은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했다. 위부인도 그러한 가풍에 따라 글씨를 배웠는데, 남편인 이구가 적군을 막다가 낙마해서 졸지에 미망인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 부터는 글씨쓰는 것에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종요의 필적을 본받아 자신의 글씨를 완성하였는데, 제자로는 그 유명한 왕희지를 두었다. 왕희지의 글씨는 이쁘고 아장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는 그녀의 영향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쓴 글로. "필진도(筆陣圖)"가 있고. 왕희지의 "제위부인 필진도후(題偉夫人筆陣圖後)"를 첨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4)왕희지(307~365) 동진시대 인물, 저장성 출생, 조상은 산동성 왕희지는 위부인에게 필법을 배움. 한대에 싹이 튼 해(楷)·행(行)·초(草)의 실용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까지 승화시켰다. 수대(隋代)를 거쳐 당대(唐代)에 이르러서는 서예에 뛰어났던 황제 태종이 왕희지를 존중하여 그의 글씨를 널리 수집했기 때문에 왕희지의 서법이 크게 성행했다. 왕희지의 몇몇 필체와 서명은 그의 생존 당시에조차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며, 시대가 지나면서 중국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품격높은 예술인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행서로 씌어진 왕희지의 비문은 독특한 서체인 행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오늘날 그의 진적(眞跡)은 전해지지 않으나 〈난정서 蘭亭序〉·〈십칠첩 十七帖〉·〈집왕성교서 集王聖敎序〉 등의 탁본이 전하며, 이중 가장 이름 높은 서첩은 〈난정서〉로, 여기에는 353년 계제사(禊祭祀 : 3월 삼짇날, 물가에 가서 흐르는 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제사)가 열리는 기간에 42명의 문사들이 모여 시를 짓고 술을 즐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행서로 씌어진 왕희지의 비문은 독특한 서체인 행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위의 〈난정서〉는 후대 특히 고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명대(1368~1644)에 그림의 주제로 많이 채택되었다. 그의 후손 가운데 가장 이름을 떨친 서예가는 그의 막내아들인 왕헌지(王獻之)이다. 위부인과는 35세 차이로 왕희지 43세때 위부인은 사망하고 난정서는 왕희지 49때 쓴 것이다.
5)왕헌지 344년 ~ 386년)는 중국 진나라의 서예가이다. 역시 중국 진나라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아들이다. 별칭은 왕자경(王子敬), 왕대령(王大令)이다. 중국 저장 성 사오싱 출생이며 원적지는 중국 산둥 성 린이이다.
6)구양순(557~641) (구양순, 우세남, 遂良은 홍문관 학사 역임)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이다. 수 양제 때에는 태상박사를 지냈고, 당 태종 때에 태자솔경령이란 벼슬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구양 솔경'이라고 불렀다. 그의 뛰어난 필체는 멀리 고구려에까지 알려졌다. 처음에는 왕희지 체와 비슷했지만 뒤에 독자적인 서체를 세워 해서의 규범이 되었다. 우세남·저수량과 더불어 당나라 초기의 3대 서예가로 손꼽힌다. 작품으로 <구성궁예천명> 등이 남아 있다.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이다. 저장성 사람으로 당 태종의 서예를 지도하였다. 또한 당 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모으고 있었으므로 그 수집 사업의 관리를 맡았다. 그는 글씨에 뛰어나 구양순·우세남과 함께 당 서도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 후 벼슬이 상서시랑에까지 이르렀으나, 황제의 잘못을 상소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 쫓겨났다. 그는 해서·행서·초서를 잘 썼는데, 특히 해서에 뛰어났다.
8)우세남(558~638) 당나라 중국 당나라 초기의 서예가이다. 저장 성 사람으로 벼슬은 비서감에까지 이르렀다. 글씨는 왕희지의 필법을 배웠으며, 특히 해서에 능하여 해서의 아름다운 모양을 완성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구양수, 저수량과 더불어 당나라 초 기의 3대가로 일컬어진다. 그의 작품으로는 《공자 묘당비》, 《여남 공주 묘비》, 《적시첩》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북당서초》가 있다.
9)장욱(?~? ) 당 현종시대 인물로 알려짐(안진경 스승) 자는 백고. 오군 사람이다. 관직은 금오장사를 지냈다. 서법에 정통했으며, 초서로 가장 이름을 떨쳤다. 자유분방한 기세와 독특한 형상,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새로운 풍격을 갖추었다. 안진경(顔眞卿)이 일찍이 그에게 필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한 적이 있다. 광초로 명성을 얻고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회소가 그의 초서법을 계승·발전시켰다. 당시에 그의 서법은 이백(李白)의 시가, 배민의 검무와 함께 '3절'로 불렸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그가 종종 크게 취한 뒤 고함을 지르며 미친 듯이 돌아다닌 뒤 붓을 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장미치광이'[張顚]라고 불렀다고 한다. 장욱은 시도 잘 지었는데, 특히 칠언절구에 뛰어나 하지장(賀知章)·장약허·포융과 함께 '오중4사'로 불렸다. 해서로는 비각 〈낭관석기 郎官石記〉가 있으며, 현재 전하는 〈초서고시사첩 草書古詩四帖〉은 그의 친필이다.
10)회소(725~785) 당, 승려 중국 당대(唐代)의 승려이자 서예가로 속세의 성은 전씨(錢氏), 자는 장진(藏眞), 영주영능(永州零隊, 湖南省)사람. 어려서 불도로 입문하여 종형제인 오동으로부터 왕희지(王羲之)의 『악계첩(惡溪帖)』, 왕헌지(王獻之)의 『소로첩(騷勞帖)』을 얻어 고차각(古釵脚)의 서법을 익혔다. 만년 안진경(顔眞卿)을 만나 옥루흔(屋淚痕)의 법을 듣고 스스로 하운(夏雲)의 기봉(奇峰)을 보고 벽탁(壁拆)의 법을 터득하였다. 그 서필(書筆)은 장욱(張旭)의 광초(狂草)의 흐름을 따랐고 술에 취하면 사찰의 벽이든, 마을의 담벽이든, 옷자락, 그릇, 접시 등 닥치고 잡히는대로 써 갈겼다 한다. 작품에 『자서첩(自敍帖)』, 『초서 천자문』, 『성모첩(聖母帖)』, 『장진율공첩(藏眞律公帖)』등이 있다.
11)안진경(709~785) 당 (안진경과 회소는 동시대 인물) 조정대신을 하면서 당대 서예가로 이름을 떨침 안진경 書는 저수량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一說과 직접 스승이었던 장욱(생졸불명, 현종시대 사람으로 초서 달인 해서도 훌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說도 있음
안사의 난과 이희열의 난 때 큰 공을 세웠으나 난 중에 순국했다. 공훈과 예술적인 재능으로 인해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종이와 붓이 없었으므로 담벽에다 황토로 연습하여 서예를 익혔으며, 해서에 뛰어났다. 벼슬길에 나간 후에는 장욱에게 배워 서예에 더욱 진전이 있었다. 그의 해서는 장엄하고도 웅장하며 기세가 툭 트여서 마치 단정한 선비를 보는 것 같다. 평론가들은 <중흥송마애>, <원차산비>, <송광평비>, <안씨가묘비> 등과 같은 만년의 작품을 높이 친다. <제백부고>, <쟁좌위>, <채명원> 등의 첩에 나타난 그의 서체는 힘차면서도 급작스럽게 꺽이는 등 변화무쌍하며 전서체와 주문을 겸비했다. 후대의 유공권, 양응식, 미불, 채경, 조병문, 전풍, 하소기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2)소동파(1036~1101) 송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8대가에 속한다. 소동파는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로 황주로 유형되었는데, 이 때 농사 짓던 땅을 동쪽 언덕이라는 뜻의 '동파'로 이름짓고 스스로 호를 삼았다. 주제로 해왔던 데 비해서 이 두 사람은 평안하고 고요한 심정을 주로 읊었고, 동파는 이에서 벗어나 훨씬 적극적·자각적인 관점을 취했다. 동파는 작가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와야만 훌륭한 문장이 된다는 청년기의 생각을 평생토록 일관했다.
11)황정견(1045~1105) 중국의 화가·서예가. 자는 노직, 호는 산곡도인·부옹. 소동파(蘇東坡)의 문하에서 배웠고 그의 문인화파에 속했다. 이 두 사람은 화풍이 비슷한 이유 외에도 정치적으로 불우했으므로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소동파·미불·채양과 함께 송4대가로 불린다. 황정견은 소동파보다 학구적이고 내향적인 사람이었고, 창작기법면에서 더 신비적인 면을 보인다. 당의 승려 회소의 맥을 잇는 자유분방한 초서체로 유명하다. 14)미불(1051~1107) 송 (소동파, 황정견, 미불은 동시대 인물) 중국의 주요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1103년 철학박사, 1104년 서화학박사가 되었다. 광범위한 글, 즉 시와 미학의 역사에 대한 논문, 화론 등을 썼다. 어머니가 영종의 유모였기 때문에 궁정에서 왕족과 자유롭게 어울리면서 자란 미불은 학문적인 논의를 재빨리 이해함으로써 예민한 지성을 보여주었고, 독창적인 시에 소질을 보였다. 그림과 서예에 뛰어난 능력을 나타냈다. 마지막으로 장쑤 성 화이양의 군사령관이 되었다. 이 자리에 있을 때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5)조맹부(1254~1322) 원 (송나라 사람이었으나 원이 송을 멸망시키고 원을 세움, 조맹부가 원에 출사하여 송나라(원) 사람들의 비난을 받음. 당대의 명필이었으나 변질자로 낙인되어 빛을 못본게 아닌가 생각)
호는 자앙(子昻). 이민족이 지배하는 원(元 : 1206~1368)의 조정에 출사한 것 때문에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문인화 초기의 대가로 존경을 받아왔다. 문인화파는 자연의 현실감있는 묘사보다 개인적인 표현을 추구했던 화파이다. 그는 송(宋 : 960~1279)나라의 종실(宗室) 출신이었으나 1286년 새로 들어선 몽골족의 조정에 출사했다. 그의 그림들은 송나라와 그 화원의 붕괴 후 옛 거장들의 주제와 양식에서 끌어낸 다양성과 관심으로 그려진 그림들 가운데 초기 작품 예에 속한다. 그는 일반적으로 당(唐 : 618~907)나라의 대가 한간(韓幹)의 양식으로 말을 그렸던 화가로 기억되는데, 그밖에 다른 동물들, 산수화·대나무 등도 그렸다.
송설체는 조맹부(趙孟頫 : 1254~1322)의 글씨체. 한자 그의 호를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조체(趙體)라고도 한다.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개성을 중시하던 송대의 서풍과는 달리 조맹부는 전통, 즉 진당(晉唐) 이전으로의 복고를 주장하여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바탕으로 필법이 굳세고 결구가 정밀하면서도 유려한 서체를 완성했다. 해서·행서는 물론 당시에는 잘 쓰이지 않던 초서·전서·예서까지도 연구했다. 송설체는 중국에서 한림원체(翰林院體)라 하여 판본에도 널리 사용되었고 청나라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는 고려말 원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충선왕이 베이징[北京]에 세운 만권당(萬卷堂)을 통해 조맹부와 직접 교류가 있었으므로 고려에 그의 서적이 유입되었고, 많은 문인들이 베이징을 왕래하며 그의 서법을 배우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송설체 대가들 고려말엽 이암(李嵓 : 1297~1364)·이제현(李齊賢 : 1287~1367) 등이 유명한데, 특히 이암은 조맹부 필법의 진수를 체득하여 귀국한 뒤 처음으로 송설체를 전한 인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안평대군 이용(李瑢 : 1418~53)을 위시하여 집현전을 중심으로 그와 교유하던 문사들과 최흥효(崔興孝)·성임 등이 송설체를 사용했다. 그후 조선 중기까지 200여 년 동안 해서·행서에서는 거의 송설체가 지배할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16)동기창(1555~1636) 명 문인, 화가, 서예가, 정치가이다. 명나라 강소 화정(華亭) 사람으로 자는 현재(玄宰), 호는 사백(思白)과 향광거사(香光居士)이다. 장쑤 성에서 태어났으며, 1589년에 진사가 된 후 벼슬이 남경예부상서 까지 올랐다. 그러나 정치가로서보다 문인, 화가, 서예가로 더 이름이 나 있다. 복왕(福王) 때에 문민(文敏)이라는 추시를 내렸다. 젊었을 때부터 시서화의 창작 및 감식에 뛰어났으며 명대 최고의 문인화가 및 화론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서예는 왕희지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행서, 초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중국 그림의 2대 유파 중 하나인 남종화를 대성함으로써 당시의 그림 경향을 남종화 일색으로 만들기도 했다.
17)등석여(완백)(1742~1802) 등석여(鄧石如)는 1742년 건륭(乾隆) 8년, 안휘성(安徽省) 회녕(懷寧)의 집현관(集賢關)에서 출생, 초명(初名)은 염(琰), 자는 석여(石如)였는데 1796년 가경(嘉慶) 원년에 즉위한 청나라 인종(仁宗)의 이름이 전염(芮琰)이어서 ‘염’자를 피해 ‘석여’라 이름지었다. 자는 완백(頑白), 호는 완백산인(完白山人)이며 흔히 호를 취해서 완백(完白)이라 부른다. 완백은 63세 때 이승을 하직하기까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글씨와 전각을 팔아서 전각과 서예에 전념하였다. 영국(寧國, 절강성에 가까운 안휘의 동쪽 끝)에서 구강(九江, 양자강을 거슬러 강서성으로 들어간 곳)으로 전전하면서 글씨를 팔면서 여행을 하던 중 20대의 어느 날 환산산맥을 넘어 수주(壽州)에 이른 완백은 그곳 수춘서원(壽春書院)의 강의 책임자였던 양문산(梁聞山)을 만나게 된다. 수춘서원 원생을 위해 새긴 전각과, 부채에 써준 소전(小篆)이 양문산의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이 자그마한 우연이 등완백의 일생을 크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다.
18)오창석(1844-1927) 원명:준(俊), 준경(俊卿), 자:창석(昌碩), 호:부려(缶盧),고철(苦鐡) 등 중국 절강성 안길(安吉) 사람 서, 화, 전각에서 근현대 서예계,중국화계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그의 서예는 <석고문>의 영양을 많이 받았으며 독특하게 草法(초서의 법)으로 전서를 썼다 그의 글은 힘있고 자연스러우며 古拙한 기세를 나타내고 있다
*역대 명필로 이름을 떨친 18명(왕헌지 포함)연대표~
참고 육조(六朝)라함은 중국의 장수성 지금의 남경(금릉-> 건업(건강)(오나라 손권이 개명)에 육왕조가 도읍을 세웠는데 삼국시대의 오(吳)와 동진, 송(宋), 제(齊), 양(梁), 진(陳). 즉 남경에 도읍을 둔 육왕조를 육조라고 한다. 지금의 육조체는 이 시대에 발전했던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이후 북조 시대때 발전했던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동오(222~280) ~ 진(557~~589) 이 시대가 남조(육조)와 북조386~581(북위,동위,북제,서위,북주) 인데 약 360여년(종요~구양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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