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윤혜영의 문화산책] (12) 가을여행을 떠나다 - 통영

2016. 1. 22. 01:52美學 이야기



       [수필가 윤혜영의 문화산책] (12) 가을여행을 떠나다 - 통영 

       

              2015/09/28 10:36 등록   (2015/09/28 10:57 수정)





(뉴스투데이=윤혜영 선임기자) 많은 사람들은 어느 시기에 특정한 무엇에 중독된다. 잠시 중독되기도 하고 평생을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워커홀릭, 러브홀릭, 게임홀릭, 커피홀릭, 알콜홀릭.....

홀릭(Holic) 중독자, 국어로 홀리다 - "무엇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
젊은 시절의 나는 항상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었다. 책이나 알콜, 여행, 사랑. 그것들에 깊이 매료되어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게 시간을 보냈더니 어느새 중년이 되었다. 중독은 시간도 못 느낄 만큼 정신을 몰입시키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

이제는 많은 것에 대해 흥미가 시들었다. 하긴 나이가 40에 이르면 겪을 것은 이미 겪었고, 열정의 시간도 지났기에 사람이 어느정도 차분해져야 정상이다.
요즘은 관조(觀照)하는 걸 즐긴다. 모든 것이 때가 있다. 계절이 때를 맞춰 스스로 변화하듯 인간도 세월에 삭으며 천천히 익어가다 늙음에 이른다. 자연의 규칙이자 질서이다.

그래도 가끔씩 식어버린 열정에 불이 붙을 때가 있다. 여행이다. 아직도 여행이라는 말이 떠오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친구가 통영으로 바람쐬러 가자고 한다. 통영은 내고향이자 자주 가는 여행지이다.



 



통영으로 향하는 길, 터널속으로 차가 아스라히 빠져 들어간다.
한때 통영에 사는 사내와 열애를 한적이 있었다. 다 지난 일이지만.

대학생 시절이었다. 고속터미널에서 잡지 한권과 신문을 사들고 통영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차창밖으로 스치는 풍경들을 보며 연인이 기다리는 곳으로 달려가는 일만큼 행복한 여로(旅路)가 있을까!

우리들은 뜨겁게 사랑했지만 인연으로 맺어지지는 못했다. 사랑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뼈아픈 시련으로 겪어야 했다. 그 남자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 사람도 가끔씩 내 생각을 할까?

청춘과 함께 지나가버린 시절인연이다.



 
 







   중앙활어시장을 지나쳐 남망산 공원에 오른다.
십분 정도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라가면 통영항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하지 않은 눈에 익은 풍경들이다.



 











  친구는 삶이 괴롭고 일이 도통 풀리지 않을 때는 재래시장에 가서 한바퀴 휙 돌고 오라고 충고한다.
치열한 삶의 현장. 목청 터지는 호객행위, 펄펄 뛰는 활어들, 싱싱한 채소들. 시끌벅적한 그것들을 보고, 뜨거운 국밥을 땀 뻘뻘 흘리며 먹고 오면 뭔가 정리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파는 사람들, 사는 사람들이 얽혀 난리통이다. 시장이나 삶이나 마찬가지다.
먹고살기 위한 이전투구, 악에 받친 생존경쟁.



 


   뚱보할매식당에 들러 간식을 먹는다. 맨밥을 김에 싸서 무김치와 오징어를 곁들여 먹는 식이다.
내가 어렸을 적엔 쭈꾸미를 썼다. 충무김밥은 원래 쫄깃한 쭈구미와 먹어야 제 맛이다. 쭈꾸미가 점점 귀해지면서 갑오징어로 바뀌었는데 이제는 갑오징어가 잘 잡히지 않고 몸값이 뛰어 오징어로 대체했다.



 



   충무식당에 들러 조금 이른 저녁을 먹는다. 내가 좋아하는 곳이다. 통영에 가면 꼭 들린다.
충무김밥 거리의 세광한의원 뒤쪽으로 돌아가면 '충무식당'이 있다.

찜을 시키면 냉면그릇에 박나물, 가지나물, 미나리, 콩나물, 톳, 무나물을 정갈하게 담아 내온다. 밥을 비벼 매운찜과 함께 먹으라는 것이다. 제때 담는 생김치도 맛있고, 통영 향토 반찬들도 입맛을 돋운다.
아구찜은 한접시 이만원. 가격도 착하다.



 




   푸르스름한 어스름이 깔린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누군가 다리 난간위 에 반쯤 남은 술한병을 올려놓았다. '천년약속' 술 이름치고는 다소 거창하다.

백년도 못사는 사람의 인생에 천년의 약속이라니! 십년도 안되어 약속은 삭아 문드러질 것이다. 인간은 자기애가 강한 종족이다. 자신보다 귀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이용가치가 없어졌다 싶으면 사랑도 약속도 쓰레기처럼 폐기될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기에 '영원'을 그토록 염원하는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염세주의에 빠져 삶을 증오하기도 했고, 관계의 철학에 깊이 몰두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나를 변화시켰다. 이제는 철없이 살기로 했다. 어차피 한세상. 되도록이면 걱정없이 인생을 즐기며 신나게 사는 것이다.

맑은 정신과 육체로 "오늘"을 즐길수 있음에 감사하는 날이다.


<글 : 수필가 윤혜영 geo0511@hanmail.net  >


계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남 통영 출생

계간 '문학나무(발행인 황충상 소설가)' 겨울호를 통해 신인문학상 중 수필 부문 수상자로 등단.
주요 저서로 '우리는 거제도로 갔다'. '화가들이 만난 앙코르와트' 외 항공사와 증권사, 신문사 및 문화예술지 등 다수에 문화칼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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