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갑골문의 세계로 - 漢字의 발생과 형성(1)

2016. 1. 23. 18:27글씨쓰기



      


       드디어 갑골문의 세계로 - 漢字의 발생과 형성(1) | 서예 

            

도원장 2011.12.30 12:22


 

 

   기록이 비교적 충실했던 중국에서도 불과 일백년 전만 하더라도 주(周)나라 이전의 상고사는 신화로 존재해 왔습니다.

그 신화가 역사로 편입된 것이 갑골문의 발견으로 인해서 적어도 기원전 1600년,지금으로 부터 약3,700년 전 까지로 거슬러 올라 가게 되었습니다.

 

   갑골문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1899년,당시 북경의 국립도서관 관장격인 국자감 좨주 왕의영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금석학자이기도 했던 왕의영이 병에 걸려 한약재로 치료를 받던 중, 약재 중에 섞여 있던 용골이라는 뼈 조각에서 자신이 연구하던 금문과 비슷한 문자의 흔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왕의영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용골을 구입한 한약방으로 달려가 용골을 가져온 약재상을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고, 얼마 후 산동의 골동상 범유경으로 부터 12관의 용골, 즉 갑골을 구입할 수가 있었습니다.


   왕의영은 구입한 이 갑골에 새겨진 문자들이 금문 보다 훨씬 앞선 고대 상나라 시대의 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1900년에도 왕의영은 수천편의 갑골을 구입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 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왕의영이 수집한 갑골은 제자 유악이 입수했고, 그는 1903년, 왕의영으로 부터 전해 들은 갑골에 대한 이야기와 갑골편을 선별해서 <철운장귀>라는 갑골문에 관한 책을 펴내게 되어 갑골문이 최초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갑골 4당>이라는 라진옥, 왕국유, 동작빈, 곽말약에 의해 갑골문자에 대한 고증과 주석이 이루어지게 되어 중국의 고대 상나라 <수도였던 은허의 유적에 의해 은나라로도 불리움 / 기원전 1600년 ~기원 전 1046년>의 신화가 역사로 편입되어 중국 고대문명을 밝혀 주는 확실한 증거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갑골문은 지금까지 약 16만편이 발견되었으며, 중복된 글자를 제외하고 약 5천여자가 사용되었는데, 이 중에서 약 1천여자가 확실하게 해석되어 문맥을 파악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신영자 지음/ 갑골문의 비밀에서 간추림> 

 

< 은나라 전성기의 무정왕 갑골문> 작품 구상

 

이 작품은 아래 갑골문 체본을 근거로 주변에 갑골문자를 자의로 구성한 것입니다.

 

 

 

<갑골문 체본>

 

 

 

   앞으로 이 작업은 아래의 스케쥴에 따라 진행될 예정이며, <은 무정왕 갑골문>은 그 첫 단추를 꿰는 작업입니다.

 

한자(漢字)의 발생(發生)과 형성전(形成展) 기획

 

1. 원시의 골짜기 甲骨文의 세계

  1-1. 은 무정왕 갑골문

  1-2. 은 부호왕비 갑골문

  1-3. 은 말기의 갑골문

  1-4. 갑골문 작품

 

2. 그림에서 태동하기 시작하는 殷 金文 

  2-1. 양마천시부정

  2-2. 자복자요자룡

  2-3. 거부신거어거집어

  2-4. 제기차정부계

  2-5. 소신존 금문

  2-6. 소자 금문

  2-7. 중자 금문

  2-8. 극정 금문

 

3. 청동기에 새겨진, 철밥통 만큼 둔탁한 周金文

  3-1. 周 무왕 대풍돈

  3-2. 周 성왕 대보돈

  3-3. 백자부돈

  3-4. 세유 금문

  3-5. 주공돈

  3-6. 사송돈

  3-7. 대돈

  3-8. 국차첨

  3-9. 대우정

  3-10. 모공정

 

4. 大篆에서 小篆으로 가는 길목에 돌로 북을 만들어 石鼓文을 새기다.

   석고문

 

5. 어지러운 세상 만큼이나 다양한 춘추전국시대 문자들

  古文 金剛經

 

6, 소전으로 문자 통일

  秦 驛山刻石 탁본

 

8. 隸書의 꽃을 피우는 한나라 석비들

  8-1. 석문송 탁본

  8-2. 을영비 탁본

  8-3. 예기비  탁본

  8-4. 조전비 탁본

  8-5. 장천비 탁본

 

9. 위대한 書聖 王羲之의 출현과 行書, 草書 

  9-1. 행서- 난정서 탁본

  9-2. 초서- 17첩 탁본

  9-3. 초결가 탁본

 

10. 唐 諧書의 확립 

  10-1. 구성궁 예천명 탁본

  10-2. 안탑성교서 탁본

  10-3. 안근례비 탁본



- 다음 블로그 <무릉도원> 도원장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http://blog.daum.net/imrdowon/8468194 






        

       한자의 발생과 형성 총정리  | 서예  

                                         


도원장 2013.01.09 23:19
http://blog.daum.net/imrdowon/8468375               




       

   그 동안 33회에 걸쳐 서예술의 근원이 되는 한자에 대하여 그 발생경로를 살펴 보고, 어떻게 형성되면서 변화를 거듭하여 오늘날 문학, 회화와 더불어 문자예술이라는 특이한 분야로 발전해 왔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약 3,300여년 전의 은나라 무정왕과 부호왕비의 갑골문에서 출발하여, 같은 시대에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 왔던 은의 금문을 살펴 보면서, 흔히들 갑골문에서 한자가 발생되었다고 알고 있는 상식이 실제로는 갑골문이 아니라 은대의 금문으로 부터 한자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갑골문은 은의 멸망과 더불어 사라져 버리지만 금문은 주나라로 계승되어 800여년간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면서 우리가 대전이라는 전서체로, 초기의 한자로 알고 있는 산씨반, 모공정, 석고문 같은 전서체로 태어나게 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서적이나 문헌이 생겨나기 이전의 하도 오래 전 시대의 일이다 보니 남아있는 유물에 의존할 수 밖에 없고, 주로 청동기에 새겨져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 있다가 발굴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몇 점 되지 않는 단편적인 유물에서나마 학자들의 끈질긴 연구에 힘입어 이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됨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유물들이 근세 아편전쟁 이후 열강의 중국침략 과정에서 해외로 뿔뿔이 흩어져 버린 까닭에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체계화 시킨 문헌을 찾지 못하여 나름데로 인용 가능한 문헌들에 의해서 부족하나마 이 부분을 이렇게 밖에 완결지을 수 밖에 없었음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인터넷의 발달로, 이전에는 엄두도 내지 못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이만큼이라도 참고하여 정리할 수 있게 되었음을 참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본격적이고 종합적인 서체는 뭐니뭐니 해도 역산각석으로 부터 출발하는 소전체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가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산각석은 물론이고, 뒤따라 새겨지는 태산각석이나 낭아대 각석조차도 오랜 세월의 풍화와 잦은 전란의 와중에서 흔적없이 사라져 버려 하마트면 소전체의 원형을 구경조차도 할 수 없었을 것을, 다행히 송나라 시대 중각본 탁본에 의해서 완벽한 자료를 볼 수 있게  됨은 천우신조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뒤이어 전개되는 한나라 400여년의 역사에서는 공자라는 성인의 영향에 힘입어 예기비와 조전비를 비롯한 예서체의 훌륭한 석비들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전해져 내려오는 까닭에 오늘날 까지도 예서체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 문자도 다양해지면서 서체 또한 필연적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 되자 전서와 예서의 느린 서체로는 사회적 여건을 충족시키는데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필요는 발명을 가져온다는 철리에 따라 행서와 초서가 발생하면서 오늘날 까지 서성으로 존경받는 왕희지의 출현에 의해 행서와 초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됨을 봅니다.

 

또한 행초의 발전과는 별도로, 한 편에서는 예서체의 근본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행서와 초서의 혼란스러운 서체에서 정리정돈의 질서와 명확한 의사전달의 필요성에 의해서 해서가 발전을 거듭하여 당나라 시대에 이러러서는 초당 3대 서예가라고 불리우는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에 의해서 사실상 해서체의 완성을 보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연의 섭리는 한결같아서 달이 차면 이지러지듯, 모자라면 채우게 되듯, 화려와 풍요의 뒤에는 또다른 변혁이 요구되듯이 여태까지의 해서와 행서, 초서에서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왕희지의 서법에 반발이라도 하듯 안진경체라는 이질적인 해서체가 탄생하게 되었고, 이러한 변혁은 후세에 필연적으로 사고의 다양성을 제시해 주면서 여러가지 서체를 혼합하거나 융합하여 개성적인 새로운 서체를 개발하여 서예술을 발전시키게 됨을 보게 됩니다.

 

저의 작업은 어디까지나 <한자의 발생과 형성>이라는 제목이 말해 주듯, 서예 5체의 탄생배경과 각서체의 완성품 내지는 걸작품들을 가능한 한 정확한 탁본과 문헌, 서예자료에 의해서 규명해 봄으로써 서예를 하면서 가지게 되는 의문과 혼란에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적어도 서예 5체의 기본에 관한 한 확실한 바탕을 정리하여 제시해 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나아가 앞으로 대학에서 서예를 전공하는 학생들이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한 걸음 진보된 서예를 연마하여 우리나라의 서예가 현대화, 세계화, 대중화를 이루는데 선봉이 될 수 있도록, 그 디딤돌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는 마치 불교가 인도에서 일어났으나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서 꽃 피우듯이,

바둑이 중국과 일본을 거쳐 우리가 세계를 제패하듯이,


한류가 팝과 째즈와 사물놀이를 조화시켜 세계에 우리 문화를 선양하듯이,

서예 또한 젊은이들이 사명을 가지고 개척해 볼 충분한 가치가 있는 분야라는 확신을 심어 주어,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게 인터넷에 공개하여 게제하는 이유입니다.

 

이 자료를 정리할 수 있게 도움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 자료를 보아주신 분들과, 

앞으로 이 자료를 잘 활용하여 발전과 창조를 이루어 내실 분들께 무한한 존경과 고마움을 표합니다.

 

2013. 01. 09.

 

무릉도원 // 도원장 / 김 치환 올림.

연락전화 / 010-8950-4569

이메일 / mrdn@hanmail.net

경남 양산시 하북면 충렬로 1673.

 



총정리 목차

 

한자(漢字)의 발생(發生)과 형성전(形成展) 기획

 

1. 원시의 골짜기 甲骨文의 세계

  1-1. 은 무정왕 갑골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194

  1-2. 은 부호왕비 갑골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197

  1-3. 은 말기의 갑골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20

  1-4. 갑골문 작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12

 

2. 그림에서 태동하기 시작하는 殷 金文 

  2-1. 양마천시부정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21 

  2-2. 제기차정부계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24

  2-3. 삼첩자의 탄생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24

  2-4. 소신여희존 금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27

  2-5. 극정 금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30

  2-6. 금문 작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03

 

3. 청동기에 새겨진, 철밥통 만큼 둔탁한 周金文

  3-1. 무왕 대풍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36

  3-2. 성왕 대보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39

  3-3. 주공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42

  3-4. 사송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46

  3-5. 대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49 

  3-6. 대우정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55

  3-7. 국차첨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58

  3-8. 모공정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62

  3-9. 주 금문 작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67

  

4. 大篆에서 小篆으로 가는 길목에 돌로 북을 만들어 石鼓文을 새기다.

   석고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70

 

5. 어지러운 세상 만큼이나 다양한 춘추전국시대 문자들

  古文 金剛經 ; http://blog.daum.net/imrdowon/8468298

 

6, 소전으로 문자 통일

   6=1. 秦 驛山刻石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09

   6-2. 소전체로 쓴 반야심경 작품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30

 

8. 隸書의 꽃을 피우는 한나라 석비들

   8-1. 을영비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11

  8-2. 예기비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13

  8-3. 조전비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17

  8-4. 장천비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19

 

9. 위대한 書聖 王羲之의 출현과 行書, 草書 

  9-1. 행서- 난정서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22

  9-2. 초서- 17첩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24

  9-3. 초결가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28

 

10. 唐 諧書의 확립 

  10-1. 구성궁 예천명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34

  10-2. 안탑성교서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49

  10-3. 안근례비 탁본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70

    



- 다음 블로그 <무릉도원> 도원장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http://blog.daum.net/imrdowon/8468375    






甲骨文

                        甲骨文-图1



                        甲骨文-图2



                        甲骨文-图3



                        甲骨文-图4



                        甲骨文-图5



                        甲骨文-图6


                        华夏收藏网 鉴定估价







                        [jiǎ gǔ wén] 

                        甲骨文


                        (中国古代文字)

                        编辑 锁定

                        甲骨文是中国的一种古代文字,是汉字的早期形式,有时候也被认为是汉字的书体之一,也是现存中国王朝时期最古老的一种成熟文字。属于上古汉语(old chinese),而非上古或者原始的其他语系的语言。
                        甲骨文,又称“契文”、“甲骨卜辞”、殷墟文字或“龟甲兽骨文”。甲骨文记录和反映了商朝的政治和经济情况,主要指中国商朝后期(前14~前11世纪)王室用于占卜吉凶记事而在龟甲或兽骨上契刻的文字,内容一般是占卜所问之事或者是所得结果。殷商灭亡周朝兴起之后,甲骨文还使用了一段时期,是研究商周时期社会历史的重要资料。甲骨文其形体结构已有独立体趋向合体,而且出现了大量的形声字。它上承原始刻绘符号,下启青铜铭文,是汉字发展的关键形态,被称为“最早的汉字”。现代汉字即由甲骨文演变而来。在总共10余万片有字甲骨中,含有4千多不同的文字图形,其中已经识别的约有2500多字。
                        甲骨文,已具有对称、稳定的格局。有人认为,中国的书法是由甲骨文开始,因为甲骨文已备书法的三个要素,即用笔、结字、章法。[1] 
                        绝大部分甲骨文发现于中国安阳市殷墟。但甲骨文并非商代特有,早在商朝之前就已经存在。考古研究发现殷商甲骨文极有可能源自8500年前河南裴李岗文化遗址的贾湖契刻符号,并且有过渡文字——斗门镇花园村甲骨文。
                        从字体的数量和结构方式来看,甲骨文已经是发展到了有较严密系统的文字了。汉字的“六书”原则,在甲骨文中都有所体现。但是原始图画文字的痕迹还是比较明显。
                        中文名
                        甲骨文
                        外文名
                        Oracle Bone Inscriptions
                        又    名
                        又称契文甲骨卜辞、龟甲兽骨文
                        发现地
                        安阳市殷墟
                        性    质
                        目前考证的中国最早的汉字
                        最早发现者
                        王懿荣

                        记载内容编辑

                        主要有四项:
                        (一) 经过加工和刮磨的龟甲和兽骨,由专门负责的卜官保管。卜官在它们的边缘部位刻写上记述这些甲骨的来源和保管情况的记事文字,称"记事刻辞";
                        (二) 卜官在占卜时,用燃着的紫荆木柱烧灼钻凿巢槽,使骨质的正面裂出"卜"形状的裂纹,这种裂纹叫作"卜兆",是据以推断卜问事情吉凶的依据。在时代较早的甲骨卜兆下面,刻写出占卜进行顺序的数字,这种数字也叫"兆序";
                        (三) 甲骨文的主体部分是卜辞,即占卜活动结束后记录占卜活动进行情况与结果的刻辞。 大多刻写在甲骨的正面,也有部分刻写在反面的;
                        (四) 以天干(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和地支(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相配组成的六十个干支名称的干支表,可说是我国最早的日历。
                        另外,甲骨文中还有一些当时学习刻写卜辞的人练习刻写的作品,称为"习刻"或"习契"。[2] 
                        甲骨文的内容大部分是殷商王室占卜的记录。商朝的人大都迷信鬼神,大事小事都要卜问,有些占卜的内容关
                        于天气,有些是农作收成,也有问病痛、早生贵子的,而打猎、作战、祭祀等大事,更是需要卜问了!所以甲骨文的内容可以隐略了解商朝人的生活情形,也可以得知商朝历史发展的状况。
                        同时,甲骨文与古老建筑的造型非常的接近,可以说建筑记载也是甲骨文的一大起源。从甲骨文中许多有关建筑的字形上,可以了解中国远古时代建筑的结构形式及其发展脉络。
                        甲骨文“高”字。从它的字形上,可以推断在商代已有了一种建造在土台上的建筑了。其下部应该看作是土台中挖有一口地窖,这是私有制抬头和家庭出现后的一种建筑方式。其上部可以看成是一栋既有屋顶又有墙身的建筑。墙的出现在中国远古时代是个了不起的创造。用墙围合而得到的室内空间,比只用屋顶的要高大得多,这也正合了“高者,崇也”的字义。
                        甲骨文“宫”字。它可以看成在一个大屋顶下罩着两个(或两个以上)室内空间的房子。这是一种专供统治阶级使用的十分讲究的高大建筑物。

                        发展历程编辑

                        甲骨文因镌刻于龟甲与兽骨上而得名,为殷商流传之书迹;内容为记载盘庚迁殷纣王间二百七十年之卜辞,为最早之书迹。殷商有三大特色,即信史、饮酒及敬鬼神;也因为如此,这些决定渔捞、征伐、农业诸多事情的龟甲,才能在后世重见天日,成为研究中国文字重要的资料。
                        商代已有精良笔墨,书体因经契刻,风格瘦劲锋利,具有刀锋的趣味。受到文风盛衰之影响,其大至可分为五期,底下分别介绍。商代晚期自盘庚迁殷至商纣王共约273年,经历8世12王,这一时期的甲骨文也应有早晚先后之分。对商代甲骨的分期断代研究,有多种说法,如今主要采用的是董作宾依据世系、称谓、贞人等十项标准划分的五期说,即第一期:盘庚、小辛、小乙、武丁;第二期:祖庚、祖甲;第三期:廪辛、康丁;第四期:武乙、文丁;第五期:帝乙、帝辛。

                        一、雄伟期

                        盘庚武丁,约一百年,受到武丁之盛世影响,书法风格宏放雄伟,为甲骨书法之极致。大体而言,起笔多圆,收笔多尖,且曲直相错,富有变化,不论肥瘦,皆极雄劲。

                        二、谨饬期

                        祖庚祖甲,约四十年。两人皆可算是守成的贤君,这一时期的书法谨饬,大抵承袭前期之风,恪守成规,新创极少,但已不如前期雄劲豪放之气。

                        三、颓靡期

                        自廪辛至康丁,约十四年。此期可说是殷代文风凋敝之秋,虽然还有不少工整的书体,但篇段的错落参差,已不那么守规律,而有些幼稚、错乱,再加上错字数见不鲜。

                        四、劲峭期

                        武乙至文武丁,约十七年。文武丁锐意复古,力图恢复武丁时代之雄伟,书法风格转为劲峭有力,呈现中兴之气象。在较纤细的的笔画中,带有十分刚劲的风格。

                        五、严整期

                        帝乙帝辛,约八十九年。书法风格趋于严谨,与第二期略近;篇幅加长,谨严过之,无颓废之病,亦乏雄劲之姿。
                        甲骨上细瘦的笔迹,也受到刀刻的影响。占卜时常用“是”或“否”刻于龟甲中央纵线两侧,自此中线向左右书写,故两旁对称和谐,具有行款对称之美。且契刻后,大小字分别填上墨朱,或正反面分填朱墨,更深具艺术之意味,堪称书史奇迹。[1] 

                        产生背景编辑

                        王室贵族上自国家大事,下至私人生活,如祭祀、气候、收成、征伐、田猎、病患、生育、出门,等等,无不求神问卜,以得知吉凶祸福决定行止。于是,占卜成了国家政治生活中的一件大事,朝廷设置了专门的机构和卜官。有刻辞的甲骨,都作为国家档案保存起来,堆存在窖穴之中。因此甲骨上的卜辞成为研究商代历史的第一手材料,它反映了从公元前1300年到公元前1000年的社会生活的各个方面。
                        礼记·表记》载:“殷人尊神,率民以事神,先鬼而后礼。”已知,殷商时期,国王在处理大小事务之前,都要用甲骨进行占卜,祈问鬼神,事后将所问之事契刻于甲骨上。商亡之后,占卜在周代逐渐绝迹,其文字也逐渐不为人知。
                        商代统治者非常迷信,例如十天之内会不会有灾祸,天会不会下雨,农作物是不是有好收成,打仗能不能胜利,应该对哪些鬼神进行哪些祭祀,以至于生育、疾病、做梦等等事情都要进行占卜,以了解鬼神的意志和事情的吉凶。占卜所用的材料主要是乌龟的腹甲、背甲和牛的肩胛骨。通常先在准备用来占卜的甲骨的背面挖出或钻出一些小坑,这种小坑甲骨学家称之为“钻凿”。占卜的时候就在这些小坑上加热使甲骨表面产生裂痕。这种裂痕叫做“兆”。甲骨文里占卜的“卜”字,就像兆的样子。从事占卜的人就根据卜兆的各种形状来判断吉凶。[2] 

                        发掘地点编辑

                        绝大部分甲骨文发现于中国安阳市殷墟。殷墟是著名的殷商时代遗址,范围包括河南省安阳市西北小屯村、花园庄、侯家庄等地。这里曾经是殷商后期中央王朝都城的所在地,所以称为殷墟。这些甲骨基本上都是商王朝统治者的占卜纪录。
                        考古工作者又进行了多次调查、发掘,大体弄清了殷墟的范围和布局。位于河南省安阳市区西北郊的殷墟,它以小屯村为中心,东西约6公里,南北约5公里,总面积30平方公里左右。洹河南岸的小屯村一带是殷王居住的宫殿区,发掘出宫殿基址数十座,最大的一座面积5000平方米。洹河北部是殷王陵区,先后发掘出十几座大墓、一千多座小墓,以及大批祭祀坑。在宫殿附近发现了两座甲骨文档案库和铸铜、制玉、制骨、烧陶等手工业作坊遗址。殷墟发掘延续时间之长、规模之大、收获之丰,是中国考古史上罕见的。
                        为了纪念殷墟考古的伟大发现,1987年秋,安阳市在宫殿遗址区东北面修建了一座殷墟博物苑,复原和再现了3000年前殷王宫和一些建筑的风貌。
                        1976年春,在宫殿区附近,小屯村北偏西100米处,发掘出中国历史上第一个女将军妇好的墓。甲骨文记载,妇好是商王武丁的王后。有一年夏天,北方边境发生战争,双方相持不下,妇好自告奋勇,要求率兵前往,武丁犹豫不决,占卜后才决定派妇好起兵,结果大胜。此后,武丁让她担任统帅,从此,她东征西讨,打败了周围20多个方国(独立的小国)。有一片甲骨卜辞上说,妇好在征战羌姬时,统帅了1?3万人的庞大队伍,这是迄今已知商代对外用兵最多的一次。妇好墓是殷墟发掘的唯一保存完整的殷代王室墓葬,出土的很多器物上都刻有铭文,是唯一能与甲骨文、历史文献相印证,从而能确定墓主身份、年代的商代王室墓葬。
                        对殷墟70年的考古,特别要提出来的是对甲骨文的三次重要的考证与发现:
                        第一次是1936年6月12日,在小屯村北宫殿区发掘出一个甲骨坑,保存着带字甲骨17096片,记录着商王武丁时期的许多活动,看来这是武丁王室的甲骨文档案库,这批甲骨片的出土,对考证武丁时期的社会政治、文化、生活有极宝贵的价值。发掘时坑中还发现埋有一个身体蜷曲、侧卧的尸骨,其身躯大部分压在甲骨上,专家认为可能是档案库的看守人。
                        第二次,1973年在小屯村南地,又发掘出甲骨7150片,其中刻字甲骨5041片。与这批甲骨同时出土的还有陶器制品,这种甲骨与陶器共存的现象为甲骨文分期及殷墟文化分期提供了宝贵资料。
                        第三次是1991年秋,在花园庄东地发掘出一个仅2平方米的甲骨坑,但其叠压厚度却达0.8米,出土1583片甲骨,其中刻字甲骨有579片,记载内容丰富,而且问卜者都是武丁时期的王族成员和高级贵族。说明这个时期,占卜活动已不限于最高统治者国王,王室贵胄都可以利用占卜来预测吉凶了。
                        甲骨文的发现以及由此引发的殷墟发掘,对中国考古学具有划时代的意义。
                        在此之前的学者,只是在书斋中研究碑文和铜器铭文,从不去田野里考察和发掘。中国的田野考古,最早是1921年对河南渑池县仰韶村遗址的发掘,然后是 1927年开始在北京周口店猿人遗址的早期发掘。但当时对这两处的发掘,不是由中国学术部门独自承当的,而是由当时政府聘请外国学者主持,或由中外学术单位合作进行。真正由中国学术机关独立进行的田野考古,是从1928年中央研究院历史语言研究所考古组对殷墟的首次发掘开始的。它对中国田野考古学的产生和发展,都起到了奠基的作用。中国老一代的考古工作者,绝大部分是在殷墟考古工地上成长起来的,新中国成立以后新一代的考古工作者,又基本上是由他们培训出来的。因此称殷墟是中国田野考古学的诞生地,确属当之无愧。
                        2013年07月11日, 浙江平湖庄桥坟遗址考古发现,在出土的器物上发现刻画符号和部分原始文字,是迄今为止我国发现最早的原始文字。这些文字比甲骨文还要早。[3] 
                        殷墟甲骨刻辞的发现亦为研究商代历法提供了最可靠的第一手资料,数十年来在这方面已有较多的研究成果。1945年在四川石印出版的《殷历谱》是董作宾以12年时间利用甲骨文等资料撰写的研究殷代历法与周祭祀谱的巨著。在本书第一卷中提出商人采用干支纪日,一直连续至今日而未间断;商人之月为太阴月,有大小月之制(小月29日,大月30日),过14或16月后连置两大月;他认为当时采用阴阳合历之年,故有置闰月之法,19年而7闰,并依其新旧派之分的见解,指出旧派(如武丁)年终置闰(设13月),新派(如祖甲)则为年中置闰。在第三卷他还讨论了卜辞所见日、月食,企图证明当时已有古四分术与正月建丑之制。陈梦家《殷墟卜辞综述》进一步肯定了董氏的一些说法,同时作了修正,认为年终或年中置闰在一个时期(祖庚、祖甲)内曾并行。但陈氏批评董氏所提出的殷代历法为古四分术及正月建丑之说,认为“是完全错误的”。1981年出版的由天文史学家撰写的《中国天文学史》肯定了董、陈氏对阴阳合历与大小月的看法及董氏提出的干支纪日从殷代至今未间断的看法,并肯定了年终置闰,但否定了殷代有年中置闰的可能性。
                        殷代以太阴纪月,治甲骨文的学者如董作宾过去多认为是朔日为首。上举《中国天文学史》与1984年张培瑜等发表的论文均认为应是以新月出现为首。同样的看法,日本学者薮内清在1957年即已提出。但1990年冯时发表《殷历月首研究》一文仍认为殷人是以朔日为月首,因为相对疏阔的朔还是可以通过观测取得。由此可见对这个问题的争论今后还会继续下去。
                        有关商代地理的知识对于商代社会历史、文化的研究是至关重要的,但是殷墟甲骨文发现以前,文献中有关的记载寥寥可数,因此殷墟卜辞中出现的地名便格外引起学者的注意。开殷墟卜辞地理研究之先河者为王国维,他在1914(或1915)年撰写了一篇很短的文章《殷墟卜辞中所见地名考》,从当时已能见到的200余地名中选了8个距今安阳较近而又见载于文献的地名,考释了其地望。此时还谈不上地名间系联。真正为卜辞地理研究创立了一种行之有效而又科学的方法的学者是郭沫若。他在1933年出版的《卜辞通纂》(日本文求堂)中以商王田猎卜辞为研究对象(此种卜辞多附记当日占卜地名,即田猎驻地),通过同版几条卜辞干支之日差计算地点间的距离,而后又通过异版同名联系其他地名,从而结合文献记载建立起地理区域构架。此后,虽有不少学者继续开拓商代地理研究领域,但采用的方法皆本自于郭氏的干支系联法。至80年代末,治商代地理成绩突出的有董作宾、陈梦家、李学勤、岛邦男、松丸道雄与钟柏生。董氏的成绩在于将黄组卜辞的征人方卜辞中经过地点系统地收集起来,按干支系联,借以考释其地望,并绘出路线图。陈氏则较全面地讨论了商晚期诸种地理结构,如大邑商所在之王畿地区与沁阳田猎区,勾画了卜辞地名网,并在伐人方路线上修正了董氏之说。李氏的专著将沁阳田猎区作了更细致的区域分划,更正了郭沫若将“衣逐”之“衣”释为地名的错误,指出“衣”当读为“殷”,训“同”或“合”。松丸道雄的著作则从理论上讨论了田猎地之间距离的推定方法,这是他超出其他诸家之处。钟柏生的论文集将卜辞地名作了分类,分为田游地理、农业地理、部族方国地理等。他详细评析了以前诸家研究的成绩与方法、观点上存在的问题,在田猎地名研究上虽仍主要采用干支系联法,但对辞例的条件作了较严格的规定。
                        有关殷墟卜辞地理研究的最新成果是1994年出版的郑杰祥的《商代地理概论》,其特点首先是对地名作详细的文字考证,以求字识准确;其次是卜辞资料更为齐全,不仅利用了《甲骨文合集》,而且有《小屯南地甲骨》等新资料,是他书所未采用的;三是书中充分利用了最新的田野考古资料。
                        商代地理的研究虽然有较多成果,但由于卜辞资料本身的限制,对卜辞中出现的地名之地望的看法分歧仍比较大。其中最明显的如商王田猎卜辞中所反映出来的主要田猎区究竟在哪里,如今即有河南沁阳、山东泰山、河南濮阳(及新乡以东、山东以西)三个地区三种看法。[3] 

                        考古发掘编辑

                        从1899年甲骨文首次发现,据学者胡厚宣统计,共计出土甲骨154600多片,其中大陆收藏97600多片,台湾省收藏有30200多片,香港藏有89片,总计中国共收藏127900多片,此外,日本、加拿大、英、美等国家共收藏了26700多片。到目前为止这些甲骨上刻有的单字约 4500个,迄今已释读出的字约有2000个左右。
                        甲骨文发现后,金石学家、古董商人、外国人开始大量搜购。这些非科学的发掘,往往只取甲骨,而忽略甲骨埋藏的情况,使所出甲骨的价值大失。据统计,从1889年到1928年,私人挖掘出土的甲骨就达十万片以上。
                        从1928年秋到1937年夏,由于弄清了甲骨出土的地点,抗日战争爆发时,中央研究院历史语言研究所考古组,在著名考古学家董作宾、李济、梁思永等人先后主持下,在小屯村一带进行了长达10年的15次考古发掘,不仅先后发现了总计24900多片甲骨,而且发现了商代后期的宫殿、宗庙遗址和王陵区,出土了大量珍贵的铜器、玉器、陶器,从物质文化上提供了殷墟为商代王都的证据。殷墟成为世界闻名的古文化遗址,又一次震动了中外学术界。
                        甲骨文的发现引发了当地民间对甲骨的私掘热潮,各地古董商人、藏家学者纷至沓来,大量收买。据统计,到民国十七年(1928年),已有数万片甲骨流散各地。
                        同年,中央研究院历史语言研究所成立,很快提出殷墟发掘计划。8月,在考古学家董作宾领导之下,第一次对殷墟进行了科学发掘,直到民国二十六年(1937年)抗战爆发前夕,前后共进行十五次发掘,获得有字甲骨24918片。日军占领安阳期间,日本方面曾组织日本学者在当地发掘甲骨及其他文物,并将所得运往日本。
                        1949年,中华人民共和国成立后,中国科学院等部门继续开展甲骨发掘工作,共获得5300多片。此外,河南辉县偃师、洛阳、郑州二里岗及河北藁城等地的商代遗址也有有字甲骨出土。陕西岐山、山西洪洞、北京昌平等地还发现了周代的有字甲骨。
                        截至2012年,发现有大约15万片甲骨,


                        4500多个单字。这些甲骨文所记载的内容极为丰富,涉及到商代社会生活的诸多方面,不仅包括政治、军事、文化、社会习俗等内容,而且涉及天文、历法、医药等科学技术。从甲骨文已识别的约2500个单字来看,它已具备了“象形、会意、形声、指事、转注、假借”的造字方法,展现了中国文字的独特魅力。中国商代和西周早期(约公元前16~前10世纪)以龟甲、兽骨为载体的文献。是已知汉语文献的最早形态。刻在甲骨上的文字早先曾称为契文、 甲骨刻辞、卜辞、龟版文、殷墟文字等,现通称甲骨文。
                        2014年10月16日, 中国社会科学院学部委员、中国甲骨学及先秦史研究权威宋镇豪16日在《旅顺博物馆所藏甲骨》中国社会科学院等部门机构的专家从旅顺博物馆馆藏1800多片从未公布过的罕见甲骨中,发现了34个新字和新字形。专家认为,这一成果是自中国甲骨文发现110多年来的一次重大突破,不仅为中国殷商史研究提供了重要史料,而且对甲骨文和甲骨学发展将起到重要推动作用。[4] 
                        经过3年多的仔细考证、评核、汇总,发现的新字和新字形由两年前发现的6个增加到34个,涉及祭祀、方国的名字、地名、人名以及语气助词等。同时,还发现了一些新的词汇,比如“生今日”等,并证实了殷商时期就有割鼻子、割耳朵等刑罚。此次发现34个新字和新字形,对于甲骨文研究将起到深远影响和重大推动作用,给子孙后代留下一份极其珍贵的历史文化遗产。[4] 
                        截止到2014年10月已发现大约13万片甲骨,4000多个单字。从甲骨文已识别的约2000个单字来看,它已具备“象形、会意、形声、指事、转注、假借”的造字方法,展现了中国文字的独特魅力。

                        文字特点编辑

                        甲骨文是镌刻或写在龟甲和兽骨上的文字。出土在河南安阳小屯一带,因这里曾是商代后期商王盘庚至帝辛的都城,史称为“殷”。商灭国,遂成为了废墟,后人便以“殷墟”名之。因此,甲骨文也称“殷墟文字”。其内容绝大多数是王室占卜之辞,故又称“卜辞”,或“贞卜文字”。这种文字基本上都是由契刻而成,又称“契文”、或“殷契”等。
                        甲骨文距今已有三千余年,它不仅是研究我国文字源流的最早而有系统的资料,同时也是研究甲骨文书法重要的财富。从书法的角度审视,甲骨文已具备了书法的用笔、结字、章法三个基本要素。
                        从甲骨上的文字看,它们已具备了中国书法的用笔、结字、章法三要素。其用笔线条严整瘦劲,曲直粗细均备,笔画多方折,对后世篆刻的用笔用刀产生了影响。从结字上看,文字有变化,虽大小不一,但比较均衡对称,显示了稳定的格局。从章法上看,虽受骨片大小和形状的影响,仍表现了镌刻的技巧和书写的艺术特色。“甲骨书法”现今已在一些书法家和书法爱好者中流行,就证明了它的魅力。
                        从用笔上看,甲骨文因用刀契刻在坚硬的龟甲或兽骨上,所以,刻时多用直线,曲线也是由短的直线接刻而成。其笔画粗细也多是均匀;由于起刀和收刀直落直起,故多数线条呈现出中间稍粗两端略细的特征,显得瘦劲坚实,挺拔爽利,并富有立体感。
                        就结字而言,甲骨文外形多以长方形为主间或少数方形,具备了对称美或一字多形的变化美。另外,甲骨文在结字上还具有了方圆结合,开合辑让的结构形式,有的字还具有或多或少的象形图画的痕迹,具有文字最初发展阶段的稚拙和生动。
                        从章法上看,卜辞全篇行款清晰,文字大小错落有致。每行上下、左右、虽有疏密变化,但全篇能行气贯串、大小相依、左右相应、前后呼应的活泼局面。并且,字数多者,全篇安排紧凑,给人以茂密之感,字数少者又显得疏朗空灵,总之,都呈现出古朴而又烂漫的情趣。[1] 

                        研究历史编辑

                        甲骨文最早出土于何时,尚无定论。河南安阳殷墟一带,自北宋以来就不断发现商代铜器,当地在千百年前即有甲骨出土是完全有可能的。但直到清末,历代学者都没有注意到甲骨文的存在。
                        在清朝光绪年间,古董商、金石学家王懿荣,是当时最高学府国子监祭酒(相当于校长)。有一次他看见一味中药叫龙骨,看见上面刻着字,就觉得很奇怪,就翻看药渣,没想到上面居然有一种看似文字的图案。于是他把所有的龙骨都买了下来,发现每片龙骨上都有相似的图案。他把这些奇怪的图案画下来,经过长时间的研究他确信这是一种文字,而且比较完善,应该是殷商时期的。后来,人们找到了龙骨出土的地方——河南安阳小屯村,那里又出土了一大批龙骨。因为这些龙骨主要是龟类兽类的甲骨,是以人将它们命名为“甲骨文”,研究它的学科就叫做“甲骨学”。(此种说法如今存疑,详见百度王襄词条。)另当时药店疏"龙骨"有规定,带字的不要,所以王不可能在药中看到。范寿轩先将龙骨卖予王襄,王襄无力全部购买,余下的范带到北京卖与王懿荣
                        由于药铺老板拒收上面有刻画痕迹的龙骨,小屯村的农民就用小刀将上面的痕迹刮掉,以6文钱一斤的价格,将挖出的龙骨卖给药铺。于是许许多多的商代史料被磨成粉,当作药吃进肚里,这就是所谓的“人吞商史”。



                        学术界基本认同清末官员、金石学家王懿荣是甲骨文的最早发现者。而关于具体发现过程则有两说。
                        第一说源于刘鹗的记载。光绪二十五年(1899年),河南安阳出土龟版之后,被山东潍县古董商人范寿轩、范维卿等人收购,并运至北京售卖。时任国子监祭酒的王懿荣素来喜好收集古物,通晓金石文字,从古董商手中高价收购了这批甲骨。
                        另一说流传甚广,与中药“龙骨”密不可分。龙骨一般是指远古哺乳动物的骨骼化石,中医认为其可以入药,有治疗咳逆、泻痢、便血的作用。后来,甲骨代替龙骨,用于药用,河南安阳一带有人甚至世代以此为业。在这一过程中,甲骨文资料受到了不可估量的损失。光绪二十五年。王懿荣染疾服药,偶然在中药中的龙骨上发现了古文字。
                        王懿荣为清末翰林,进士出身,具有深厚的金石学造诣。他在得到甲骨之后,即认定其上文字是比籀文更加古老的殷商遗物,并开始重金收购有字甲骨,至光绪二十六年(1900年)春,共得到1508片。然而,王懿荣尚未对这种文字进行深入研究,即在同年七月八国联军攻占北京时自杀殉国。
                        王懿荣对甲骨的收购,逐渐引起学者重视,古董商人则故意隐瞒甲骨出土地,以垄断货源,从中渔利。王懿荣好友刘鹗等派人到河南多方打探,皆以为甲骨来自河南汤阴。后来罗振玉经过多方查询,终于确定甲骨出土于河南安阳洹河之滨的小屯村,这里与古文献记载的商朝后期的殷都所在地相吻合。
                        19世纪末到20世纪初,古代甲骨上的刻划的符号被确认为的商代文字是中国考古的三大发现(敦煌石窟、周口店猿人遗迹)之一。可是它的发现过程,既十分偶然又极富戏剧色彩。
                        清光绪25年(公元1899年)秋,北京清朝廷任国子监祭酒(相当于中央教育机构的最高长官)的王懿荣(1845—1900)得了疟疾。派人到宣武门外菜市口达仁堂买了一剂中药。王懿荣无意中看到其中的一味叫龙骨的中药上面刻划着一些符号。龙骨是古代脊椎动物的骨骼,在这种几十万年前的骨头上怎会有刻划的符号呢?这不禁引起他的好奇。对古代金石文字素有研究的王懿荣便仔细端详起来,觉得这不是一般的刻痕,很像古代文字,但其形状非籀(大篆)非篆(小篆)。为了找到更多的龙骨作深入研究,他派人赶到达仁堂,以每片二两银子的高价,把药店所有刻有符号的龙骨全部买下,后来又通过古董商范维卿等人进行搜购,累计共收集了1500多片。
                        首先对甲骨文作出确认的王懿荣还没来得及作深入研究并著书立说,八国联军便逼近北京城,他被任命为京师团练大臣。
                        1900年7月,侵略军兵临城下,慈禧太后带领皇室人员仓皇出逃,王懿荣彻底失望了。他对家人说:“吾义不可苟生!”随即写了一首绝命词毅然服毒坠井而死,年方56岁。
                        后来人们称这位最先发现甲骨文的人荣誉为“甲骨文之父”,在甲骨文发现90周年的1989年秋,在他的家乡山东烟台市福山区建成王懿荣纪念馆,以纪念他的功绩。
                        王懿荣殉难后,其子为还旧债而出售家中所藏古物,他所收藏的甲骨,于是在1902年大部分转归好友刘鹗(即《老残游记》作者刘铁云)。另外,刘鹗还从北京琉璃厂的古董商那里购得3000余片甲骨,从友人方若那里获赠300余片,又派儿子去河南购得1000余片,所藏甲骨增至5000多片,成为当时最著名的甲骨收藏大家。在好友罗振玉的建议和帮助下,刘鹗于1903年11月拓印《铁云藏龟》一书,将甲骨文资料第一次公开出版,此书从刘鹗所藏的甲骨中采用1058片,由罗振玉亲自选拓,其中伪刻5片,自重3片,倒置12片,甲骨反面有字而未录的有40片,骨臼有字而未录的有4片,虽然如此,仍瑕不掩瑜。不久,学者孙诒让根据《铁云藏龟》的资料,又写出了甲骨文研究的第一部专著《契文举例》。
                        甲骨文被发现之后,引起学术界的轰动。古董商人为了垄断财源,对于甲骨的来源秘而不宣,以后又谎称出自河南汤阴卫辉等地。直到1908年,学者罗振玉才首先访知甲骨出土于河南安阳的小屯村一带,于是他派遣自己的亲属去安阳求购,又亲自前往安阳进行实地考察。1910年罗振玉释读出了10位殷王的名谥,证明这些有字甲骨确为殷王室之遗物,并进一步推断安阳小屯村正是古文献所载的殷墟遗址。先后共搜集到近二万片甲骨,于1913年精选出2000多片编成《殷墟书契》(前编)出版,随后又编印了《殷墟书契菁华》(续编),为甲骨文的研究奠定了基础。
                        继罗振玉之后,许多著名的学者,如王国维、郭沫若、董作宾、唐兰、陈梦家、容庚、于省吾、胡厚宣等都进行了卓有成效的考释和研究,形成了一门专门的学问——甲骨学。罗振玉(号雪堂)、王国维(号观堂)、董作宾(号彦堂)、郭沫若(号鼎堂)并称为“甲骨四堂”,被誉为甲骨学研究的一代宗师,其中以罗振玉年龄最长,接触甲骨文也最早,而位列“四堂”之首。。
                        甲骨文是中国发现最早的文献纪录,如今甲骨学已成为一门蔚为壮观的世界性学科,从事研究的中外学者有500多人,发表的专著、论文达3000多种。它对历史学、文字学、考古学等方面都具有极其重要的意义。[3] 

                        书籍编辑

                        罗振玉1914年编《殷虚书契考释》和1916年编《殷虚书契待问编》,王襄1920年《簠室殷契类纂》(天津博物院),商承祚1923年《殷虚文字类编》(决定不移轩自刻本)、1927年出了删校本、 1971年中国台北艺文印书馆翻印本,日本高田忠周1925年《古籀篇》(古籀篇刊行会),孙海波1934年《甲骨文编》(哈佛燕京学社),曾毅公1939年《甲骨地名通检》(齐鲁大学国学研究所),金祥恒1959年《续甲骨文编》(中国台北艺文印书馆),中国科学院考古研究所编辑1965年《甲骨文编》、孙海波改订本(中华书局)、1979年香港中华书局版,李孝定1965年《甲骨文字集释》(中央研究院历史语言研究所),日本岛邦男1967年《殷墟卜辞综类》(汲古书院)1971出增订本),日本永田英正1968年《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藏甲骨文字索引》(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日本赤井清美1974年《书体字典》(东京堂)和1976年《书体小字典》(东京堂),日本小林博1977年《古代汉字汇编》(木耳社),高明1980年《古文字类编》(中华书局),徐中舒1981年主编《汉语古文字字形表》(四川人民出版社)和1989年《甲骨文字典》(四川辞书出版社),日本小林石寿1985年《展大甲骨文字精华》(木耳社),1987年《拓影展大甲骨文字字典》(木耳社)和1988年《五体篆书字典》(木耳社),加拿大许进雄1981~1988年《皇家安大略博物馆所藏甲骨文字索引》(一~九卷《中国文字》新四~十二期连载),日本高嶋谦一1985年《殷虚文字丙编通检》(中央研究院历史语言研究所),孟世凯1987年《甲骨学小词典》(上海辞书出版社),赵诚1988年《甲骨文简明词典·卜辞分类读本》(中华书局),日本师春妙石1988年《古典文字字典》(东方书店),姚孝遂1988年主编《殷墟甲骨刻辞摹释总集》(中华书局)和1989年《殷墟甲骨刻辞类纂》(中华书局),饶宗颐1989~1999年《甲骨文通检》(已出先公先王先妣贞人、地名、天文气象、职官人物、田猎与祭祀等五册,香港中文大学出版社),日本松丸道雄与高嶋谦一1993年合编《甲骨文字字释综览》(东京大学出版会),日本水上静夫1995年《甲骨金文字典》(雄山阁)、于省吾1996年主编《甲骨文诂林》(中华书局)等。[3] 

                        书法

                        甲骨文是目前所知中国最早的系统文字,也是比较成熟的文字。而上古文字的点横撇捺、疏密结构,用今天的眼光去看,确实初具用笔、结体、章法等书法要旨,孕育着书法艺术的美,很值得欣赏与品味。以甲骨文而言,郭沫若在1937年出版的《殷契粹编》的序言中,就对其书法体现非常赞赏:“卜辞契于龟骨,其契之精而字之美,每令吾辈数千载后人神往。文字作风且因人因世而异,大抵武丁之世,字多雄浑,帝乙之世,文咸秀丽。而行之疏密,字之结构,回环照应,井井有条……足知现存契文,实一代法书,而书之契之者,乃殷世之钟王颜柳也。”
                        钟王颜柳指的是古代的四位大书法家。殷代的“钟王颜柳”们,就是那些书刻卜辞的史官卜人。正是他们为后人留下了丰富的史料,也留下了一份份珍贵的上古书法作品。若就甲骨文书契形式作粗略的一瞥,会发现早期字体较大,像罗振玉编《殷虚书契菁华》所收录的许多武丁时期的卜辞,非常大气、醒目;而到商末帝乙、帝辛时代,字变得细小委琐;至于西周甲骨文则更是细若粟发。
                        甲骨文风格类型:一是劲健雄浑型、二是秀丽轻巧型、三是工整规矩型、四是疏朗清秀型、五是丰腴古拙型。总之尽管甲骨文是契刻出来的文字,但笔意充盈,百体杂陈,或骨格开张,有放逸之趣;或细密绢秀,具簪花之格,字里行间,多有书法之美。
                        所谓“甲骨文书法”,大抵有两层意思[5] 
                        一是指以商周甲骨文字体结构、书法特征为宗,加以工整地摹写而成的书法作品。这类作品可以按照需要集古字以组合为新句子。内容是新的,字却如同三千年前殷人的入笔文字一般饶富雅趣。但是甲骨文总共才二千多字,其中还有不少尚未释出的怪字(特别是人名、地名),真正派上用场的不是很多。因此一旦遇到甲骨文中没有的字,而所书写的对联、题词中又无法代替,就只好进行偏旁拆零,自己拼接了;再拼不出,就要到金文等其他古文字里去讨救兵。进行这项创作的首要人物是罗振玉。1921年他在研究之余,将甲骨文用毛笔书写成楹联,出版了《集殷墟文字楹帖》。继之有章钰、高德馨、王季烈等人,也仿效集字创作。一些古文字学前辈如董作宾商承祚唐兰于省吾等也擅长甲骨文书法,这是本真意义上的甲骨文书法作品。
                        另一层意思是指借鉴甲骨文特征加以自行创作的现代书法作品。他们将甲骨文视作一种灵感,仅仅是艺术创作中的一点启示,而并不在于追求“形似”。因此,他们并不严格按甲骨文的书法特征去写,可能是综合了甲骨文、金文、战国文字等多种古文字的特点而创作。这样的书法艺术与古文字学虽有关系,但不是亦步亦趋。
                        有的学者更认为,甲骨文的“书体”在甲骨断代和碎片的缀合中,“起了决定性的作用”①。书法形体取决于书写人的技术与手法。它的流行受习惯的崇尚而具有时间性。用书体来测量某一时期文化和艺术的风尚,可以大体上窥见一斑。并指出:
                        武丁时期的书法,气魄雄伟,峻敖瑰丽。即使中小字体也是工整秀丽,但无论大中小字体,无一处不表现出这一时期书法方面的熟练,深邃的造诣;祖庚祖甲时期,主要在严饬工整方面下工夫,与后世书家比拟,颇有欧阳率更的风趣;禀辛康丁时代,一部分沿袭了祖庚祖甲时工整的作风,但大多逐渐衰退,趋向潦草苟且;武乙时期的大字,粗疏古拙,劲削而带有暴戾的气氛;文丁武丁的作品,又是五花八门,百体杂陈,在书法上颇有百花齐放、百家争鸣的情景,有的骨骼开张,有放逸之趣,有的细小娟秀,有簪花之格。
                        可见,甲骨文的书法艺术是为学者们所公认的。
                        此外,甲骨文还具有自身的一些特点。
                        它一般是用刀直接刻字,有的刻好后还填以朱砂,也有个别不是刀刻而是用朱砂直接写成的。所以,甲骨文的刀法就体现了它的笔意。从刻划的线条犀利苍劲来看,刀法也很熟练。线条起止有度、转折恰当,且有粗有细,有长有短,说明有用单刀,也有用双刀的。字形结构一般呈瘦长形,有大小、长短、方圆之别;各种长短线条的排列疏密有序,各种横竖斜直线的组合也恰如其分,既保持了平衡对称的结构,又表现出丰富而有变化的笔意。同时,甲骨文还具备了象形、指事、会意、假借、转注、形声“六书”的汉字构造法则,既是成熟的文字,也是高水平的书法艺术。
                        甲骨文有完整的内容和形式。它一般包括叙辞(为贞卜日期和贞人名)、命辞(所问之事)、占辞(为商王亲自视兆占问吉凶)、验辞(刻记占卜结果)等项,故又称甲骨文为卜辞。刻辞的排列也很有规律,或由上而下,或由下而上;或从右至左,或从左至右,但一般是先横后竖。一片甲骨上少则数字,多则上百字。其章法布置毫无做作气,错落自然,浑然一体,变化无穷,一片天机。无论从哪方面看,都体现了殷代贞人高度的艺术技巧和艺术匠心,不愧为中国最早的书法艺术。
                        二十世纪八十年代以来,伴随著书法热的兴起,甲骨文书法得到了广大书法家的重视。但由于甲骨文书法创作毕竟不过百年的历史,还没有十分成熟的临习与创作方法可供借鉴。以怎样的笔法去研习这一古老的书体,成为今天从事甲骨文书法创作者亟需解决的一道课题。沙曼翁先生认为:“写甲骨把笔要轻,运笔要活,要学‘大米’的刷字。要中、侧锋互用,既要写出毛笔的韵味,又要有刀的感觉。”是极为精辟的见解。尽管甲骨文是由锲刻而成,但书写的痕迹依然存在,因此,我们在临习甲骨文时既要体现锲刻的感觉,更要表现书写的味道。起笔微逆入纸,提笔中锋运行,驻笔平出空收。在行笔时切忌出现楷书的顿挫之法,笔致要简率、质直和畅达。尤其是要做到搭笔即成的迅捷运笔方式,做到急缓适中。临习甲骨文尽管以中锋为主,但要间或辅之以侧锋,以增其韵。甲骨文的转折,一般应断而再起,且不可一笔带过,形成圆转之状,而失去了甲骨文方整峻拔的特质。
                        最后,尚需指出,临习甲骨文,除掌握上述笔法外,平时要多读甲骨文拓片,品味其线条、结字以及高古的气息。同时,坚持临写小篆金文,多读一些文字学著作,这对学习甲骨文很有帮助。[4] 

                        史料记载编辑

                        司马迁在《史记》中有一篇《殷本纪》,详细记载了商王朝的世系和历史。过去史学界许多人对这些记载将信将疑,因为没有当时的文字记载和留存的实物资料可作印证。
                        本世纪初,罗振玉在他搜集的甲骨中,发现了刻有商王朝先公、先王的名字,证实了这些甲骨的出土地小屯就是《史记》中所说的“洹水南,殷墟上”的殷墟所在地。
                        此后,学者王国维对甲骨卜辞中所见的商代诸先王、先公,对照《史记》记载作了详细的考证,证实了《史记》中《殷本纪》的可信性。殷墟是商朝第10代王盘庚于公元前1318年,把都城从奄(今山东曲阜附近)迁到殷(小屯村一带),从此历经至8代12王,在此建都达273年之久。这些研究成果,把中国有考据可信的历史提早了一千年。
                        从一片殷商甲骨上文字的发现和认定,由此发展到肯定了一个距今3000多年、长达600多年的朝代,这是多么了不起的发现!这样就把本世纪20年代一些学者认为中国的可信历史始于西周的“疑古”思潮,予以彻底的否定。[4] 

                        历史价值编辑




                        甲骨文的文字学价值
                        甲骨文在汉字漫长的发展历史上具有极其重要的地位,作为现代汉字的鼻祖是当之无愧的。我国汉字的萌芽,大约出现于新石器时代晚期陶片上的刻划符号。但这些刻划文字虽已具备了文字的雏形,但都是一些简单的符号和单字,无完整的体系和规律。真正具有一定的体系并有比较严密的规律的文字,最早的要算是甲骨文了。据研究,甲骨文中共有不重复的单字4500个左右,已识单字在1700个左右,而这些单字还不是当时使用的全部文字。甲骨文是研究古文字的宝贵资料。中国的文字萌芽较早,在新石器时代仰韶文化的陶器上,就发现了各种刻划符号,成为中国文字的雏形,经过二三千年的孕育、发展,到了商代,中国的文字达到基本成熟阶段。、甲骨文具有一定体系并有比较严密的规律,刻划精湛,内容丰富,对中国古文字研究有重要作用。过去,古文字研究的主要的依据是商周青铜器上的铭文,如东汉许慎的《说文解字》。甲骨文比《说文解字》要早1500年,而且它是来源于直接发掘出来的出土文物,可信程度更高,对研究汉字的起源和发展,纠正《说文解字》的疏失,解决青铜器铭文中悬而未决的问题,都有极大价值。[6] 
                        在甲骨文以前,从考古材料来看,我国境内已有很多尚未完全成熟的文字符号出现。从史书记载来看,《荀子》、《吕氏春秋》、《韩非子》、《世本》都记载有仓颉造字的传说。许慎的《说文》序把《系辞传》的说法和仓颉的传说结合起来,说:“及神家氏结绳 为治而统其事,庶业其繁,饰伪萌生。黄帝之史仓颉见鸟兽蹄航之迹,知分理之可相别异也,初造书契,百工以刈,万品以察。”黄帝的时代大约在公元前两千五六百年,甲骨文最早的不超过公元前1300年。30年代在山东章丘县城子崖发掘的龙山文化陶片中就发现了一些符号之后又在昌乐龙山文化发掘出中国最早的文字和陶寺遗址中发现的朱书文字。西安半坡彩陶上也有文字符号,它是由刻画的几何线条构成的,大多数比较简单,郭沫若称半坡彩陶上的符号有文字的性质。在山东大汶口文化陶器上也发现有符号,有的符号上还涂有色彩。这些符号都刻画在陶器表面极显著的位置。有的符号象是太阳或月亮从山上升起的样子。另外在青海马家窑文化、郑州商代早期文化及河北商代中期文化的陶器上都发现有符号。这些符号有的是同图纹合在一起,有的明显地区别于彩陶纹饰,这些符号虽是简单的、零星的、无一定律的,但都是中国文字的雏形,可以说中国文字的诞生至少有五六千年以上的历史。所以,准确来说甲骨文是我国最早的王朝时期文字。[3] 

                        收藏机构编辑

                        中国国家图书馆是中国乃至世界上收藏甲骨最多的单位,共藏有35651片。多系名家捐赠和从私人、市肆收购而来。其中以刘体智先生的庋藏数量最多,装在150个盒内,共28000余片。国家图书馆所藏甲骨还曾著录于罗振玉《殷墟书契》、胡厚宣《战后京津新获甲骨集》、郭沫若《殷契粹编》、郭若愚《殷契拾掇》中。
                        中国国家图书馆藏甲骨拓片也很丰富,除正在传拓中的《馆藏甲骨集拓》外,还有《善斋书契丛编甲骨拓本》十八册四函,共28000余张。在郭沫若主编的《甲骨文合集》中还收录有该馆所藏甲骨拓本十余种之多。

                        藏品鉴别编辑甲骨文藏品的后人作伪并不高明,鉴定时须注意如下几点:

                        第一,看卜骨之新旧。甲骨埋入地下三千余年,被有的学者称作“亚化石”,自然有一种古朴感。作伪者常用大版新鲜牛骨来刻字(因龟甲较难刻契,且易碎裂),故凡遇大版牛骨刻辞须谨慎。如英国驻安阳长老会牧师明义士(James Mellon Menzies)于1914年起开始搜集甲骨文,结果初次所购之大骨版,全系新鲜牛骨仿制,收藏不久,即腐烂发臭。(有的假货是在商超出土的甲骨上,重新再刻字,比如原来一块上,只有一个字,他再加刻上七八个,所以要注意真的甲骨不一定是甲骨文)
                        第二,若能目验实物,可看切口之新旧。即便是利用出土之甲骨新刻文字,因切口新,作伪者常用粘性泥土涂抹。将甲骨浸泡水中不久,即可用刷子刷去泥土,切口便一目了然。而真品则因土色深入刻痕内,一般是洗刷不掉的。(这种用水的做法会对文物有很大的伤害性,特别是那种保存不是很完好的甲骨文,和出土时已经有些腐朽的甲骨文。尽量请专家,如果不行,可以用放大镜,放大到一定程度可以清晰看出差异。)
                        第三,看内容是否符合卜辞的文例文法。因作伪者并不懂甲骨文的内容,多数是胡乱抄袭真片上的文字,东拼西凑,甚至倒写、刻错亦浑然不觉。因此,在鉴别时要注意看刻辞是否连成文句。一条完整的卜辞,由前辞(又叫叙辞,写占卜日期,以干支表示,同时又写占卜者名,通常是商王的史官)、问辞(又叫命辞,是要问的事)、占辞(商王看了卜兆以后所下的是非结论)、验辞(占卜后结果的应验情况)这样四部分组成,不过许多卜辞都不完整,一般只具有其中的几部分。
                        第四,看刻辞格式。在龟甲上的刻辞,分两种式样:刻在左右边缘部分的,由外向里读,确切地说,刻于左甲边的文字,从左向右读,刻于右甲边的,则从右向左读。另一种是龟腹甲的中缝两边文字,皆由里向外刻,即在中缝左侧的文字,由左向左读,在右侧的,由右向右读。在牛骨上的刻辞,一般刻在骨的边缘,是由外向里读。几条卜辞刻在一起,一般由下而上排列。
                        第五,看字体。商代甲骨文跨越了自盘庚到帝辛12位商王计270余年,卜辞年代明确可以判断的是武丁到帝乙8位商王。在这段时期内,文字写法有过变化。有学者根据这些变化和其他考古成果将殷墟卜辞分为五期,第一期为武丁时期,字体相对大一些,第五期较小,有些在写法笔划上也有不同,可以从甲骨学工具书(如高明《古文字类编》中华书局1980年版)上查对。
                        第六,看贞人(卜人)名字。贞人即当时替商王占卜之人,为史官。贞人生活于一定的时期,贞人名是断代的依据之一。早期与晚期的贞人不可能共主占卜之事,故不应在同片甲骨上出现。不少专著对此有研究,且列表对照,一目了然(如陈梦家《殷墟卜辞综述》)。
                        总的说,甲骨文辨伪较其他文物的鉴定要简单些,只是遇到利用出土的无字卜骨仿刻全部真片或一片甲骨上真伪参半须倍加小心。前人在这项工作的研究上已取得了可喜的成就。一般西人所著录的甲骨书中伪刻较多,如《库方二氏藏甲骨卜辞》、《柏根氏旧藏甲骨文字》、《金璋所藏甲骨卜辞》等,引用时要注意。如《金璋所藏甲骨卜辞》第668片左上部“癸丑王卜贞旬无祸王占曰吉”等 三条卜辞系真迹,而下半部字虽大而清晰,于文义却不通,系伪刻。作伪者有的本是刻字出身,便被古董商相中,专干伪刻卜辞勾当。如董作宾《甲骨学五十年》中提到的蓝宝光,便能仿刻完整的真片,其工细程度几可乱真。幸而此人不懂文例文法,否则在甲骨上大肆“创作”,会给今日的辨伪工作平添许多麻烦。
                        除商代卜辞外,1954年起又发现了大量西周甲骨,其中有字的不少,时距殷墟卜辞的发现已半个世纪,作伪之风无存,当然也就谈不上辨伪了。[7] 

                        殷墟之外的甲骨文编辑

                        殷墟甲骨文早已为人们所熟知,它被证实是世界上一种古老的文字,中国现在使用的汉字就是由它发展而来的。然而,还有几种更古老、更奇特的甲骨文却鲜为人知。[8] 

                        更早的甲骨文

                        河南贾湖遗址内发现世界上目前最早与文字起源有关的实物资料--甲骨契刻符号。香港中文大学的饶宗颐先生指出“贾湖刻符对汉字来源的关键性问题,提供了崭新的资料”,并被认为是“早于安阳殷墟的甲骨文卜辞4000多年,领先于素称世界最早的古埃及纸草文字。”是迄今为止人类所知最早的文字雏形。
                        另一种是比殷墟甲骨文还要早一千二百多年的甲骨文。这种甲骨文是陕西省考古工作者在西安市西郊斗门乡花园村原始社会遗址中发现的。这批甲骨文分别刻在一个骨竿、一颗兽牙和若干块兽骨上。从已经清理出的十多个单体字来看,这种甲骨文字体细小,笔划细若蚊足,刚劲有力,字形清晰,字体结构布局严谨,与殷墟甲骨文字体接近。据专家考证,这种甲骨文的出土遗址属龙山文化晚期,距今约四千五百年到五千年,比墟甲骨文要早1200年以上。[8] 

                        放大镜看的甲骨文

                        另一种是一批奇特的微刻甲骨文。这批甲骨文是在陕西岐山县古周原凤雏村发现的,共有293片甲骨。甲骨上的文字细小如芥籽,笔划细如秋毫,需借助5倍以上的放大镜才可辨认,但字迹清晰、笔划刚劲流畅。书法分直笔和圆笔两种,直笔方直劲健,圆笔圆润婉逸。其中有一片甲骨仅2.7平方厘米,像小硬币大小,刻字面积仅1.7平方厘米,上面却刻有30个甲骨文,其字细若发丝,个别的字径还不足毫米。这批甲骨文是西周时的作品,记载的多是西周灭商之后,周文王晚年到周康王初年的内容,但是,为什么要刻得这么小?是什么人用什么工具刻出来的?在古代尚没有放大显微技术的情况下,又是怎样辨认的?这些至今还是一个谜。如今,这批珍贵的微刻甲骨文收藏在陕西省岐山县文物管理所。[8] 

                        少数民族地区出土

                        还有一种甲骨文是刻在陶器上的。这是1978年和1979年,考古工作者在贵州威宁彝族、回族、苗族自治县中水汉墓群中出土的一批陶器和陶片上发现的。上面共有51个类似象形文字却变化更为丰富的刻画符号。专家考证,这是目前贵州出土的年代最为久远的文字,距今约二千多年。因它的影响和意义可与殷墟甲骨文相比,此字又与彝文的发展有密切关系,故被学者们称为“彝族甲骨文”。[8] 
                        “彝族甲骨文”发现之后,许多专家和学者对它进行研究,但都没能破译。贵州民族研究所的王正贤和贵州民族学院彝文研究室的王子尧经过多年的潜心研究,终于突破这一难关,成功破译了它。[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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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字演变


                        参考资料




                                               甲骨文(中国古代文字)_百度百科                  





                        商 祭祀狩猎涂朱牛骨


                        商 《祭祀狩猎涂朱牛骨刻辞》正面 河南安阳出土 高32.2cm,宽19.8cm 中国国家博物馆藏




                        祭祀狩猎涂朱牛骨刻辞正面(局部)





                        祭祀狩猎涂朱牛骨正面拓片(点击放大)




                        祭祀狩猎涂朱牛骨正面拓片局部(点击放大)




                        祭祀狩猎涂朱牛骨背面(点击放大)




                        祭祀狩猎涂朱牛骨背面拓片(点击放大)



                        商朝时期

                        河南省安阳市殷墟出土
                        长32.2厘米、宽19.8厘米

                        这是一块牛胛骨版记事刻辞。骨版正面刻辞4条,背面2条,共160余字,字内填朱。正面第一条记载商王武丁宾祭仲丁;第二条记狩猎时子□堕车;第三条记子□死;第四条是子寅用羌人十,举行宜祭。背面记载天象情况,这片刻辞保存完整,对研究商代社会历史和天文气象价值甚高。



                        本版图文由可嘉提供
                        选自《中国美术全集》









                        甲骨文底纹

                        甲骨文底纹





                        甲骨文与简体字对照表




                        甲骨文与简体字对照表




                        甲骨文与简体字对照表



                        甲骨文与简体字对照表




                        上一张 第五张图表

                        甲骨文与简体字对照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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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허

                        최근 수정 시각 : 2015-11-07 01:31:55


                        은허(殷墟)는 중국 하남성 안양시에 위치한 고대유적이다.

                        1. 발견2. 상황3. 관련 항목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름 은허
                        Yin Xu
                        국가중국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6년
                        등재기준

                        (ii), (iii), (iv), (vi)


                        1. 발견[편집]

                           은허의 발견은 1900년대 갑골문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된다. 1899년, 금석학자 왕의영은 용골이라 불리던 한약재를 우연히 살펴보다가 뭔가 글자같은 게 새겨졌다는 것을 발견하고 뭔가 새겨진 용골을 잔뜩 사들여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외국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에 절망한 왕의영이 자살하고 그가 모은 갑골문은 친구인 소설가 류악에게 넘겨졌다. 류악은 친구인 금석학자 나진영을 통해 갑골문이 하남성 북부의 소둔촌이라는 곳에서 발견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소둔촌을 살펴본 나진옥은 이곳이 전설 속의 나라로 불리던 상나라의 수도 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런 추측을 하게 되었고, 이후 왕국유가 이 일대를 조사한 결과 반경이 천도한 은허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중화민국 차원에서 중일전쟁 이전까지 열다섯 차례에 걸쳐서 발굴조사를 한 결과 다수의 갑골문과 청동기, 무덤등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1950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로 다시 조사가 재개되어 1986년까지 15만 개의 갑골문을 발굴하게 된다.


                        2. 상황[편집]

                           현재까지 조사된 은허의 유적지 규모는 가로 6KM, 세로 4KM의 24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방대한 영역으로 이곳에서 갑골문과 청동기, 건물 유적과 무덤 등이 발굴되어 학자들은 사실상 이 일대가 은허에서도 가장 중요한 중심구역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대체로 소둔촌 동부에 왕궁 등이 위치하고 있었고, 소둔촌 북쪽의 무관 마을 쪽에서는 13기의 거대한 무덤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한 무덤은 조성만 되었을 뿐 안에는 어떤 유물이나 유골도 출토되지 않아 학자들은 이 무덤이 은의 마지막 왕인 주왕의 무덤으로 조성되었다가 은이 멸망하고 주왕이 죽임을 당하면서 쓰이지 못했을 걸로 추측한다.


                           은의 제22대왕 무정의 왕비 부호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는데 6마리의 개와 16명의 순장된 유골들, 440여기의 청동기, 600여기의 옥세공품, 석기류, 골각기와 더불어 화폐로 쓰인 걸로 보이는 조개껍데기 4400여개가 출토되었다.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들에선 약 5000여자의 문자가 발견되었고 그중 1700여자가 해독된 상태다. 이 갑골문들은 한자의 유래가 되었을것으로 보인다.

                        은허 유적은 2006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3. 관련 항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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