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 화가의 분류

2016. 1. 23. 19:16美學 이야기



       한국화 화가의 분류


     [화가의 분류 1] 화원화가

 

   화원 화가란, 국가나 왕실에서 필요로 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용한 화가를 말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예조 산하에 이러한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도화서(초기에는 도화원)가 설치되어 직제상 종6품에서 종9품까지의 화가 5명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림 수요가 너무 많아 15명 내외를 시험을 통해 선발해서 화원으로 활동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뽑힌 직제 이외의 도화서 화원들은 정해진 급록 없이 수당만 받았기 때문에 화원의 생활이 넉넉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김득신 외, <화성능행도> 국립중앙박물관




   도화서 화원의 수는 영조 때 30명으로 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교수가 있어 그림을 배우려는 자를 대상으로 약 15명 정도의 그림 배우는 학생을 뽑아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화원 업무는 왕실의 초상화 제작을 비롯해 국가 행사의 기록화, 궁중 소장중인 옛 그림의 모사, 외교 사절을 수행한 기록화, 궁중 장식화, 장식용 밑그림, 지도, 세화 제작 등이었습니다. 

    감상용 그림은 이들 화원들 가운데 재능 있는 일부 화가들이 그렸다고 합니다. 따라서 조선시대 화원화가라고 해도 산수화와 같은 감상화를 전혀 남기지 않은 화가들도 많이 있지요.




 [화가의 분류 2] 자비대령 화원



             자비대령 화원


   자비대령 화원은 규장각에 소속된 일종의 "궁중화가"였습니다. 조선시대 도화서의 화원은 "궁중"이 아닌 "내각" 소속이었는데, 정조 시대인 1783년 처음으로 도화서 화원 중 일부를 선발해 규장각 소속으로 두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도화서 화원과 달리 국왕 직속인 규장각 소속이었기 때문에 궁중화원의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비(差備)란 임시로 차출한다는 뜻이며 대령은 임금의 명을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자비대령 화원은 어제(御製) 서적의 간행에 필요한 그림관련된 일과 국왕이 요구하는 그림 등을 제작했습니다.
정원은 10명으로 한번 선발되면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종신으로 일하게 됩니다.

1881년까지 약 100년간 제도가 시행되는 동안 103명만이 자비대령화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자비대령 화원이던 김득신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곽분양행락도> 부분




 [화가의 분류 3] 직업화가

 

          직업화가

    도화서에 소속되지 않으면서 생계를 위해 직업적으로 그림을 그려 생활한 화가를 가리킵니다.

화원 가운데도 매년 치러지는 화원 시험에 탈락할 경우 일시적으로 민간이 필요로 하는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한 화가들이 있게 마련이죠.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넓은 의미에서 화원 화가로 분류합니다. 
18세기 들면 도화서 재직 경력이 전혀 없이 그림만으로 생활하는 화가들이 등장하며 '직업화가'라고 하면 주로 이들을 가리켜 부르는 것입니다.

  이들이 등장한 데에는 그에 마땅한 배경이 있습니다. 이 무렵이 되면 그림이 문인 사대부 계층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일반 사회에서도 감상용 또는 장식용 그림 수요가 전에 없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18세기 이후에 활동한 대표적인 직업화가로 심사정, 최북, 이방운, 김양기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심사정 <서설홍청鼠囓紅菁> 종이에 채색 12.8 x 21.0cm 간송미술관




   이들 직업화가들은 특정한 장르에 특기를 보여 자신의 이름을 떨친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최북은 메추라기 그림을 잘 그려 최메추라기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이며 변상벽은 고양이, 남계우는 나비, 장한종은 어해도 등을 잘 그려 각각 이름이 났습니다.  





변상벽  <국정추묘菊庭秋猫> 종이에 채색 22.5 x 29.5cm  간송미술관





     [화가의 분류 4] 왕과 왕족 화가



 

   조선 시대에 그림을 잘 그렸던 왕이나 왕족이 많이 있습니다. 그림을 잘 그렸던 왕으로는 선조, 정조, 현종 등이 유명합니다.
정조가 수묵으로 그린 파초국화는 각각 보물 제743호, 제 744호 지정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 외에 선조가 그린 대나무 그림현종산수화 그림 등이 전합니다.





정조 <파초도芭蕉圖> <국화도菊花圖>  보물743호, 744호





   고려 시대에는 공민왕도 그림을 잘 그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이 같은 왕들의 재능과는 별도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잡예(雜藝)로 보는 인식이 있어 왕이 그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관료들이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의 왕족은 성종 이후 정치 참여가 제도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왕족들이 문화 방면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들 가운데 그림에 소질을 발휘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조선중기 대나무를 잘 그린 이정(李霆)세종의 5대손이며, 조선중기의 산수화 화가인 이경윤(李慶胤)성종의 5대손입니다. 인조의 셋째아들산수화를 잘 그린 이요는 심양에 불모로 잡혀있으며 중국인 화가와 사귀어 귀국하면서 그를 함께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이정 <묵죽도> 국립중앙박물관






     [화가의 분류 5] 문인화가


 

   문인화가는 문인이면서 특히 그림에 재주를 보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중국에서도 애초에 그림 그리는 일은 전문가 집단이 행하는 특수한 기능으로, 문인, 사대부와는 무관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생각이 바뀐 것은 문인관료사회가 정착하며 문인화론이 싹튼 송(宋)대 부터입니다.

문인화론의 주장은, 그림에 담긴 생명력이 그림 그리는 사람이 지닌 교양, 학문에 좌우되는데 문인은 그런 점에서 직업화가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깔고 있습니다. 특히 명(明)대 들어 동기창남북이종론(南北二宗論)을 통해 문인화 우위론을 주장한 뒤로부터 그림은 문인이 갖춰야할 교양의 하나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문인화론이 조선에 소개, 확산된 것은 17세기 후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무렵이 되면 시와 글씨 외에 그림도 문인들의 교양 중 하나로 손꼽히면서 그림을 잘 그리는 문인은 ‘시서화 삼절(三絶)’ 높이 칭송되었습니다.    





심사정(沈師正,1707~1769), <방심석전산수도(倣沈石田山水圖)>,

 종이에 담채, 1758년, 국립중앙박물관





   그렇지만 그림을 천기(賤技), 즉 천한 기예로 보는 생각이 뿌리 깊게 남아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활동한 문인화가 관아재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은 그림 재주로 어진 모사의 감독에 임명됐으나, 이는 사대부가 할 일이 아니라며 이를 거절해 왕의 노여움을 산 적도 있습니다. 그는 또 자신의 그린 화첩 표지에 ‘남에게 보이지 말라. 이를 지키지 않으면 내 자손이 아니다’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조영석, <이 잡는 노승>, 종이에 담채, 23.9 ×17.0㎝, 개인





    [화가의 분류 6] 여류화가


 

   딱히 분류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여자들의 대외활동에 제약이 많았던 조선 시대에도 드물지만 그림을 잘 그린 여류화가가 알려져 있습니다.





신사임당(1504-1551) <초충도>





   대표적인 여류화가로 율곡 이이의 모친인 사임당 신씨 꼽을 수 있겠습니다.
오세창『근역서화징』을 보면 그림을 잘 그린 여류화가로 사임당 신씨 이외에 강희안의 딸 강씨,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 강희맹의 10대 후손의 부인인 김씨 등 문인집안의 여인들이 있고, 진홍(眞紅), 소미(小眉), 죽향(竹香) 등 기생출신 화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허난설헌(1563-1589)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






죽향(19세기 전반) <화조화훼초충도花鳥花卉草蟲圖>






    [화가의 분류 7] 승려화가


 

   승려 가운데 절에 필요한 불화나 장식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은 많이 있는데 대개 불화사(佛畵師) 또는 금어(金魚)라고 합니다.
   금어라는 말은 불화에 적힌 화기(畵記)에서 종종 확인할 수 있는데,이들에 대한 존칭으로 파악됩니다.
조선시대에도 많은 불화가 그려져 현재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용흥사 아미타후불탱(龍興寺 阿彌陀後佛幀)

1684년? 삼베에 채색  343.0×292.0cm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불화 이외에 일반 감상용 그림을 그린 승려출신의 화가로 그 이름이 전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조선 초에 활동하며 일본에 그림을 남긴 문청(文淸)을 승려출신 화가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문청文淸 <유마거사도維摩居士圖>

1457 종이에수묵 92.4x34.3cm 나라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 






한국미술정보개발원 >>  EDUCATION  >>  회화이야기

중에서 발췌 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