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백자(朝鮮白磁)에 나타난 문양(紋樣) 연구/석사학위 논문/2004

2016. 1. 29. 22:31도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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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靑華白磁鐵砂辰砂菊花文甁)


조선백자(朝鮮白磁)에 나타난 문양(紋樣) 연구
연구자 : 남 학 호






목 차


Ⅰ. 서론(序論)

Ⅱ. 조선백자(朝鮮白磁)의 일반적 고찰(考察)

1. 백자의 개념(槪念)
2. 조선백자의 생성배경(生成背景)과 발달과정(發達過程)
1) 조선백자의 생성배경
2) 조선백자의 발달과정
(1) 전기(조선시대 백자의 완성기, 1392∼1600년)
(2) 중기(철화백자의 시대, 1600년∼1751년)
(3) 후기(분원리 시대, 1752년∼1900년)
Ⅲ. 조선백자의 문양

1. 백자의 종류
1) 순백자(純白磁)
(1) 소문백자(素紋白磁)
(2) 양각백자(陽刻白磁)
(3) 음각백자(陰刻白磁)
(4) 투각백자(透刻白磁)
(5) 상형백자(象形白磁)
2) 청화백자(靑華白磁)
3) 철화백자(鐵畵白磁)
4) 진사백자(辰砂白磁)
2. 자기문양(磁器紋樣)
1) 조선회화(朝鮮繪畵)의 특성(特性)
2) 회화(繪畵)와 도자문양(陶磁紋樣)과의 관계(關係)
(1) 사군자문(四君子紋)
① 대나무(竹)
② 매화(梅花)
③ 난초(蘭草)
④ 국화(菊花)
(2) 화조·영모문(花鳥翎毛紋) 및 기타문양(其他紋樣)
(3) 산수문(山水紋)
(4) 운룡문(雲龍紋)
(5) 길상문(吉祥紋)

Ⅳ. 결론(結論)


참고문헌
Abstract
참고그림




그림목차


그림 1. 이성계(李成桂) 발원 사리구(舍利具)
그림 2.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작, (한·일 통상조약기념연회도)
그림 3. 청화백자철화삼산뇌문산뢰(靑華白磁鐵畵三山雷文山 )
그림 4. 백자호(白磁壺)
그림 5. 백자양각매국문병(白磁陽刻梅菊文甁)
그림 6. 백자투각용문필통(白磁透刻龍文筆筒)
그림 7. 청화백자진사채잉어모양연적(靑華白磁辰砂彩鯉形硯滴)
그림 8. 백자철화승문병(白磁鐵畵繩文甁)
그림 9. 안견(安堅)작,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그림 10. 양팽손(梁彭孫)작, 산수도(山水圖)
그림 11. 신사임당(申師任堂)작, 초충도(草蟲圖)화첩
그림 12. 이수문작, 묵죽도(墨竹圖
그림 13. 양송당(養松堂) 김시(金 )작,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
그림 14. 겸재(謙齋) 정선(鄭敾)작, 금강전도(金剛全圖)
그림 15. 김수철(金秀哲)작,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
그림 16. 청화백자송죽인물문호(靑華白磁松竹人物文壺)
그림 17. 이재관(李在寬)작, 송하처사도(松下處士圖)
그림 18. 청화백자매죽문호(靑華白磁梅竹文壺)
그림 19. 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靑華白磁弘治銘松竹文壺)
그림 20. 청화백자매죽문호(靑華白磁梅竹文壺)
그림 21. 안견(安堅)작, 만춘도(晩春圖) 그림 22. 안견(安堅)작, 초동도(初冬圖)
그림 23. 탄은(灘隱) 이정(李霆)작, 묵죽도(墨竹圖)
그림 24. 철화백자매죽문호(鐵畵白磁梅竹紋壺)
그림 25. 백자철화죽문호(白磁鐵畵竹紋壺)
그림 26. 백자철화매죽문시명호(白磁鐵畵梅竹文詩銘壺)
그림 27. 청화백자매죽문각병(靑華白磁梅竹文角甁)
그림 28. 청화백자죽문각병(靑華白磁竹文角甁)
그림 29. 유덕장(柳德章)작, 통죽(筒竹)
그림 30. 철화백자매죽문호(鐵畵白磁梅竹紋壺)
그림 31. 어몽룡(魚夢龍)작, 월매도(月梅圖)
그림 32. 오달제(吳達濟)작, 묵매도(墨梅圖)
그림 33. 백자청화매죽문호(白磁靑畵梅竹文壺)
그림 34. 백자청화매죽문호(白磁靑畵梅竹文壺)
그림 35. 청화백자난초문지통(靑華白磁蘭草文紙筒)
그림 36. 청화백자난국문수반(靑華白磁蘭菊文水盤)
그림 37. 백자철화추초문소호(白磁鐵畵秋草文小壺)
그림 38. 겸재(謙齋) 정선(鄭敾)작, 초충도(草蟲圖)
그림 39.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靑華白磁鐵砂辰砂菊花文甁)
그림 40. 청화백자국난초문병(靑華白磁菊蘭草文甁)
그림 41. 정조대왕(재위, 1776∼1800)작, 국화도(菊花圖)
그림 42. 청화백자매조죽문호(靑華白磁梅鳥竹文壺)
그림 43. 청화백자매죽문병(靑靑花白磁梅竹文甁)
그림 44.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작, 매조서정(梅鳥抒情)
그림 45. 조속(趙速)작,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
그림 46. 백자청화매조죽문호(白磁靑畵梅鳥竹文壺)
그림 47. 백자청화매조죽문호(白磁靑畵梅鳥竹文壺)
그림 48. 청화백자분재문호(靑華白磁盆栽文壺)
그림 49. 백자상감모란당초문편병(白磁象嵌牡丹唐草文扁甁)
그림 50. 청화백자모란문호(靑華白磁牡丹文壺)
그림 51. 황집중(黃執中)작, 묵포도도(墨葡萄圖)
그림 52. 백자철화포도문호(白磁鐵畵葡萄文壺)
그림 53. 백자진사연화문호(白磁辰砂蓮花文壺)
그림 54. 이상좌(李上左)작,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
그림 55. 백자청화송하초옥문병(白磁靑華松下草屋文甁)
그림 56. ①권돈인(權敦仁)작, 세한도(歲寒圖)
②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작, 세한도(歲寒圖)
그림 57. 청화백자철채난초청랑자문병(靑華白磁鐵彩蘭草靑娘子文甁)
그림 58. 민화(民畵) 진주 호랑이
그림 59. 동화백자까치호랑이문항아리
그림 60. 청화백자잉어문(靑華白磁鯉魚文)접시
그림 61. 청화백자구문호(靑華白磁龜文壺)
그림 62. ①∼⑧전(傳) 안견(安堅)작,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그림 63. 작자미상(作者未詳), 산시청람도(山市晴嵐圖)
그림 64. 청화백자산수화조문대호(靑華白磁山水花鳥紋大壺)
그림 65. 청화백자산수문화병(靑華白磁山水文花甁)
그림 66. 이정(李楨)작, 산수도(山水圖)
그림 67. 민화(民畵) 동정추월도(洞庭秋月圖)
그림 68. 청화백자산수화조문대호(靑華白磁山水畵鳥文大壺)
그림 69. 백자청화산수문사각병(白磁靑畵山水文四角甁)
그림 70. 청화백자산수문각병(靑畵白磁山水文角甁)
그림 71. 백자청화산수무늬편병(白磁靑畵山水文扁甁)
그림 72. 청화백자산수문화병(靑華白磁山水文花甁)
그림 73. 백자청화산수문호(白磁靑畵山水文壺)
그림 74. 백자청화산수문사각연적(白磁靑畵山水文四角硯滴)
그림 75. 백자청화산모양필가(白磁靑畵山水文筆架)
그림 76. 청화백자산수문이부편병(靑華白磁山水文耳附扁甁)
그림 77. 청자청화산수문사각병(白磁靑畵山水文四角甁)
그림 78. 청화백자산수운룡문팔각연적(靑華白磁山水雲龍文八角硯滴)
그림 79. ①∼②민화(民畵)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그림 80. ①∼②민화(民畵)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
그림 81. 석경(石敬)작, 운룡도(雲龍圖)
그림 81. 청화백자운룡문병(靑華白磁雲龍文甁)
그림 82. 민화(民畵) 운룡도(雲龍圖)
그림 83. 백자철화운룡문호(白磁鐵畵雲龍文壺)
그림 84. 백자철회운룡문호(白磁鐵繪雲龍文壺)
그림 85. 백자철화운용문호(白磁鐵畵雲龍文壺)
그림 86. 백자철화운룡문호(白磁鐵畵雲龍文壺)
그림 87. 청화백자운룡문호(靑華白磁雲龍文壺)
그림 88. 청화백자운룡문호(靑華白磁雲龍文壺)
그림 89. 청화백자운룡문호(靑華白磁雲龍文壺)
그림 90. 청화백자운룡문호(靑華白磁雲龍文壺)
그림 91. 청화백자운용문호(靑華白磁雲龍文壺)
그림 92. 청화백자운룡문호(靑華白磁雲龍文壺)
그림 93. 청화백자운룡문호(靑華白磁雲龍文壺)
그림 94. 백자철화운용문호(白磁鐵畵雲龍文壺)
그림 95. 민화(民畵) 십장생도(十長生圖)
그림 96. 청화백자십장생문호(靑華白磁十長生文壺)
그림 97. 백자청화장생문동채호(白磁靑畵長生文銅彩壺)
그림 98. 백자청화장생문(白磁靑畵長生文)접시
그림 99. 청화백자(靑華白磁) '수(壽)'자 문각병(文角甁)
그림 100. 청화백자진사채복숭아연적(靑華白磁辰沙彩桃形硯適)



朝鮮白磁에 나타난 紋樣 연구


(요약)
   조선백자(朝鮮白磁)에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지향했던 절제와 품격, 그리고 자유분방함이 살아 숨쉬고 있다.
초기(初期)는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의 성리학적 의식세계를 반영하듯 흰색 그 자체의 힘을 극대화시킨 시기로 백자의 형태나 문양, 색감에 있어서 가장 선비적이고 고도로 절제된 자태를 보인다. 이는 시대 변화에 따라 지배층의 통치이념이 반영되어 청자로부터 백자로의 전이를 실물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또한 조선 성리학의 정착은 이 시기의 백자가 중국의 틀에서 벗어나 조선의 백자로 완성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발생 취지가 어떠하든 간에 조선의 생활기명(生活器皿)으로 정착하면서 선비들의 정신과 사상에 가장 잘 부합되는 자기(磁器)로 여겨져 엄정하고 균형 있는 기형에다 문양장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그들의 미감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었다.
문양(紋樣)은 회화적(繪畵的)이고 문인화적(文人畵的)인 소재로부터 토속적(土俗的)이며 민화적(民話的)인 소재들로까지 매우 다양하게 선택되었고,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함께 발전하면서 각기 특유의 멋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백자의 문양은 회화의 변천에 따라 시대적인 특징을 보이며, 18세기에 들어서 특히 청화백자가 새로운 경지를 전개했다. 기면(器面)에 여백을 광활하게 두고 동체 하부에 지평선 같은 청화선을 그은 다음, 그 위에 매화, 난초, 국화, 석죽(石竹) 등의 사군자문 종류를 매우 간결한 필치로 그린 소위 `추초문(秋草紋)` 형식이 성행하는데 이는, 마치 문인들이 여기로 그린 수묵의 사군자와 같은 분위기의 서정미와 고아한 문기(文氣)를 짙게 보이는 독특한 도화(陶畵)의 세계보인다.
또, 이 시기에는 소상팔경도(蕭湘八景圖)를 중심으로 한 산수(山水), 화조(花鳥), 사군자(四君子), 십장생(十長生), 운룡(雲龍), 등의 문양이 성행하는데 상당수는 당시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들이 그림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는 수준 높은 회화성을 띠고 있다.

   백자의 사용층이 일반으로 보편 확대되고 각종 의식(儀式)이 변화되면서 전에 없이 다양한 기형(器形)이 제작되는데, 각종 제기(祭器)와 문방구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실용성과 장식성이 강화되어 `생활(生活)의 미(美)` 를 추구한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선비와 화가는 꽃과 새를 그리며 자연을 관찰하고 존중하며 상상력을 펼쳤다. 늙은 매화나무 가지에 올라앉은 까치 한 마리. 야무지게 다문 부리를 꼿꼿이 쳐들고 앉아 있는 새들은 고고하고 의젓한 선비의 상징인 것이다.
당시의 그들은 대개 사회적 신분으로 보아 지도자의 입장에 있는 유가(儒家)들이어서 그들은 높은 지위로 나아갈 수도 있는 출신성분을 지녔지만 이른바 지자요수(智者樂水) 할 수 있는 지(智)·인(仁)의 경지에서 자연을 애호하였으며, 그와 같은 경지를 시와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전문화가의 손을 거쳐 도자그림(陶磁畵)에 적극적으로 반영되기도 하였다. 특히, 문양의 주제 선택에 있어서는 수요층이나 감상자의 요구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었으므로 비록 직업 화가의 작품이라 해도 화의(畵意)는 당대 선비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의취(意趣)에 기초했다.
다수(多數)의 사람들은 한국의 미술과 조형의식을 알기 위하여 우리의 도자기에 초점을 맞춘다. 그 이유는 우리의 도자기가 한국인과 같이 살아온 삶의 구현체(具現體)이고 아울러, 자기(磁器)는 한국인의 일상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필수품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양반·중인·양민 등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 철학이 반영된 도자미술(陶磁美術)에 예술적 감흥이 어떻게 조형적으로 표현됐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Ⅰ. 서론(序論)


   고려(高麗)가 귀족취미에 맞는 화려한 도자기와 종교적인 분위기로 그윽한 비색의 청자를 발전시켰다면, 유교사회를 이룩한 조선조는 청렴(淸廉)·결백(潔白)·절개(節槪)를 상징하는 순백의 백자를 발전시켰다. 아울러, 14세기 후반 문익점에 의한 목화의 전례로 15세기 이후 사대부를 비롯한 일반인들이 흰옷을 즐겨 입게 되었고, 검소(儉素), 소박(素朴)함 등을 추구하게 되면서 백색은 조선을 상징하는 색(色)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백자가 가지고있는 청순함과 결백함이 문인사대부들의 취향과 맞았고 문양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좋은 백자를 얼마나 원했는가는 당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사대부들이 분원에서 최상품을 만들 때나 쓰는 갑발번조(匣鉢燔造)로 백자를 구워오게 하고 다 만들어 가져가면 빛깔이 틀렸다, 형태가 나쁘다며, 다시 만들어오게 하여 도공의 피해가 크다고 기록한 것에서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조선전기의 도자문화는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하는 중간단계라고 볼 수 있는 분청으로 변모되면서 청자와는 다른 문양체계를 갖춘 추상적인 표현이 분청사기 문양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궁중용 자기도 중기까지는 분청과 백자가 같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이 시기의 청화백자는 화원이 직접 시문하여 수준높은 문양의 세계를 보인다.

   조선의 르네상스였던 영·정조시대가 꽃피운 진경시대는 한마디로 `참된 문화 부흥기` 로 우리의 문화를 개성 넘치게 승화시켰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박력 넘치는 시원한 붓질이 진한 수묵으로 조선의 풍경을 그려낸 것처럼 백자에 있어서도 자연을 사랑했던 옛 선비들의 미학적 사상이 화원화가(畵員畵家)를 통해서 또는, 순박하고도 서민적인 민화의 모습으로 백자에 남게 되었다.
후기의 회화는 명(明)·청대(淸代) 회화를 나름대로 소화하면서 뚜렷한 민족적 자아의식을 발현했던 시기였다. 조선중기에 유행하던 절파화풍(浙派畵風)이 쇠퇴하고 문인화(文人畵), 남종화(南宗畵)가 본격적으로 유행(流行)하기 시작한다. 생활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소재(素材)들이 선택되어 회화는 보다 서민들과 가까워졌고, 당시 이러한 화풍(畵風) 속에서 조선백자에 나타난 산수(山水), 운룡(雲龍), 사군자(四君子), 화조영모(花鳥翎毛), 길상(吉祥) 문양은 다양한 수요자들의 기호와 요구에 맞추어 그들의 정서에 알맞게 시문되어 문양에 있어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본 연구(硏究)는 조선백자에 나타난 여러 문양의 표현양식과 내용을 분석하여 일반 회화와의 관계성을 밝혀내고 나아가 미적(美的) 특성을 연구하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이 분야에 관한 논문들을 살펴보면, 방병선순백으로 빚어낸 조선의 마음, 백자』에서는 "조선은 어떤 나라인지, 조선 사람은 누구였는지, 백자는 어떤 연유에서 제작하게 되었고, 조선의 백자는 누가·왜·어떻게·어디서 만들고 사용했는지, 중국과 일본의 백자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또 이러한 것들이 유기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에 대한 분석이 시도되었다.
   최희숙『조선백자(朝鮮白磁)에 나타난 사군자문양(四君子紋樣)에 대한 연구』에서는 "백자에 나타난 사군자문양의 상징적의미(象徵的意味)와 조형성(造形性)에 대한 연관성." 을 찾아 조선인의 미감과 정서에 맞는 새로운 양식으로의 창출 가능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강경숙『한국 도자사의 연구』는 조선초기 백자의 문양과 조선 초·중기 회화와의 관계를 규명하였고, 이은주『조선 백자에 나타난 회화성(繪 性)』으로부터는 "식물문(植物紋)을 중심으로 문양의 회화적(繪畵的) 표현양식과 형식." 으로부터 화원과 화청장(畵靑匠)의 미의식을 더듬어봄으로써 문양(紋樣)과 회화(繪畵)와의 유사관계를 분석하고 있다.
이 밖에도 선행연구 자료로써 단행본(單行本) 및 보고서(報告書), 논문(論文) 등을 참고하여 본 논문에서는 우리 백자에 나타난 `미(美)의 세계(世界)` 가운데 문양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고자 하였다.


   본문 Ⅱ장에서는 백자의 개념을 밝히고 조선백자의 생성배경과 발달과정 및 특징을 개관하여 조선백자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考察)을 하고,
본문 Ⅲ장에서는 조선백자에 나타난 문양의 내용과 백자의 종류에 대해 알아보면서 시문기법 및 특징을 파악하고자 한다. 아울러 문양이 갖는 상징적 의미와 조형성을 살피고자 했다. 민화를 포함한 일반회화를 도자문양(陶磁紋樣)과 비교하여 당시 화단의 경향(傾向)이나 화풍, 화법상(畵法上)의 공통점 등 관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연구를 위하여 국회도서관(國會圖書館) 참고문헌을 검토하고,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호암미술관(湖巖美術館), 이대박물관(梨大博物館), 호림박물관 등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실물연구를 병행하여 객관·타당성 있는 분석을 하고자 나름의 노력을 하였다.
아울러, 본 논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될 참고도판은 연구목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선정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Ⅱ. 조선백자(朝鮮白磁)의 일반적 고찰(考察)


1. 백자의 개념(槪念)

   조선백자에는 중국 자기의 기술과 양식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조선의 특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자긍심과 여유로움이 있다. 그 속에 나타난 아름다움은 바로 조선 사람들이 추구한 아름다움이었다.
개국이래 지배층들은 불교보다는 성리학을 주도 이념으로 삼았고, 예술작품에서는 완벽을 드러내지 않는 절제와 품격을 중요하게 여겼다. 아무런 장식이나 꾸밈없이 덤덤한 색상과 기형(器形)만으로 아름다움을 표출해 낸 조선백자는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아 숨쉬는 생명체로 이어져 우리 문화에 대한 멋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백자는 14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여러 가지 기법으로 제작, 발달되었다. 제작 시기는 고려의 영향을 받은 부드러운 질감의 연질백자(軟質白磁)의 경우 15세기 동안에만 제작된 반면, 중국의 원(元)·명(明)나라의 흐름을 이어 받은 경고성을 띠는 경질백자(硬質白磁)는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번조(燔造:구워서 만들어 냄)되었다.
백자(白磁)란 석영과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하는 `질` 로 그릇의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여러가지 시문장식을 한 후 장석질의 잿물을 입혀 1300∼1350℃ 에서 번조하여 자화(磁化)된 치밀질의 순백의 반투명질(半透明質) 자기를 말한다.
백자의 색깔은 그릇에 입혀진 유약의 색(色)으로 좌우되며 백자의 개념을 규정짓자면 몇 가지 조건으로 구분이 된다.

첫째, 태토는 백색이고 유약은 무색 투명하여야 하며 태토와 유약이 서로 밀착된 상태로 시각적으로 보아 순백이다.
둘째, 태토와 유약이 일체가 된 상태에서 서로 박락(剝落:발라 놓은 칠 따위가 벗겨짐)되거나 유약에 빙열(氷裂)이 없어야 하며, 표면을 금속성의 칼로 긁어 보아 흠이 나지 않아야 하며 반투명질이다.
셋째, 가마내의 온도가 1300∼1350℃ 사이에서 번조되어 자화(磁化)되어야 한다.

    본래 자기(磁器)라는 명칭은 중국의 하남성 자주요(磁州窯)에 도자기 생산품이 많았으므로 자주요의 그릇에서 나온 것으로 원칙적으로는 자기(瓷器)라고 쓴다. `자(磁)` 자는 지남석이라는 글자로 쇠를 잡아당긴다는 뜻이고 `자(瓷)` 자는 중국에서 `견치(堅緻)한 도기(陶器)` 라는 뜻으로 치밀질의 백자를 의미한다.
조선조(朝鮮朝)에 앞서 고려시대(高麗時代) 말기(末期)에 제작된 경질 백자로서 주목되는 것은 「이성계(李成桂)의 발원문」그림1〉이 있는 홍무 20년명(洪武二十年銘) 백자와 그 일괄품이다. 이 백자 대발(大鉢)들은 강원도 금강산 월출봉에서 출토되었는데 번조 상태가 좋지 않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1년 전인 1391년 건국의 의지(意志)를 담은 글이 백자 대발의 표면 또는 내면에 새겨져 있다. 입자가 곱고 밀도가 강한 경질 백자로서 파르스름한 유가 입혀져 있어 조선시대의 견고하고 치밀한 경질 백자와 연결된다.

   우리나라 사서(史書)에는 자(瓷)를 오지그릇, 즉 도기, 옹기, 질그릇이라고 표기하고 있어 광의의 흙을 구어서 만든 그릇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조 이후에 특별히 치밀질 자기를 나타내는 뜻으로 `자(磁)` 를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자는 치밀질의 우수한 순백의 자기(磁器)라는 것을 조선 전기부터 분명히 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질이 우수한 백자는 자기(磁器)라고 하였으며, 질이 우수한 백자나 질이 낮은 백자 또는 도기질(陶器質)에 가까운 것도 모두 총칭해 사기(沙器)라고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자기를 만드는 곳을 자기소(磁器所)와 사기소(沙器所)로, 자기를 만드는 사람을 자기장(磁氣匠), 사기장(沙器匠)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자기와 사기를 혼용해서 부르다가 근세에 가까이 올수록 자기는 불순물과 철분이 거의 없는 백토로 만든 백자를 지칭하게 되었다. 1950년대까지 백자를 사기라고 불렀고 도기는 오지·옹기로 완전히 구분하게 되었으며 토기는 질그릇(瓦器)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瓷器·磁器)에 대한 명칭은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자기(磁器)와 자기(瓷器)가 함께 통용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미 질이 우수한 백자를 자기(磁器)라고 하였으므로 본 논문에서도 자기(磁器)로 사용한다.

2. 조선백자의 생성배경(生成背景)과 발달과정(發達過程)

1)조선백자의 생성배경

   14세기 후반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전환되는 시기로 새로운 지배세력이 대두하게 된다. 대부분 지방 향리 출신인 이들은 학문적인 교양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의 실무에도 능한 사대부로서 과거(科擧)를 통하여 사회적인 진출을 하였고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생활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지도층이 된 사대부들은 왜구(倭寇),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물리쳐 급성장한 신흥 무인세력과 주축이 되어 새로운 조선왕조를 탄생시켰다.
왜구를 피해 전국에 흩어졌던 도공들은 새로운 지도층인 신진사대부에 부응하여 가마를 열게되고, 이들 사대부들의 수요에 맞추어 도자기를 번조하게 되었다. 검소하며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생활을 추구하였던 이들은 도자기에서도 실생활에서 널리 쓰일 수 있는 튼튼하고 실용적인 그릇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수요는 실용적인 도자기를 제작하는 기반이 되었고 조선시대 도자기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백자가 유행한 것은 지배층인 양반사대부들의 백색 선호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는 몇 가지 예(例)가 있다. 

  『용재총화( 齋叢話)』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왕조 초기부터 세종대까지 백자만 어기(御器)로 쓰이다가 세종 10년(1428) 왕실에 중국의 청화백자가 유입된 이후 세조대에 이르러서는 청화백자도 어기의 반열에 들었다고 한다. 세종 11년에서 12년에 명사신을 통해 유입된 자기는 80여 점이다. 이때 들여온 자기는 커다란 항아리인 주해(酒海)를 비롯해 다병(茶甁)과 찻잔인 다종(茶鐘), 대반(大盤)과 소반, 식기인 탁기(卓器) 등 종류도 다양했으며, 주로 청화백자였다. 이러한 상황은 훗날 조선이 백자를 어기로 선택하고, 중국으로부터 청화(靑畵)안료를 수입하여 청화백자를 생산하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둘째는 18세기의 실학자인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에 “우리나라는 백자를 선호하였는데 임금님 대전에서도 백자를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청렴하고 결백함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다.”라는 글귀가 나온다.
셋째로는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1861-1919)이 1883년에 그렸다는 「한·일통상조약 기념연회도」〈도판2〉에서 연회 테이블에 놓인 그릇들을 보면 당시 조선 궁중에서 백자를 주로 사용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백자가 조선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널리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 15세기 이후 사회적으로 성리학이 점차 국가 교학(敎學)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사림파가 형성되었고, 이들 문인사대부의 유교적 취향이 반영되었던 결과이다. 또한, 유교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서는 이미 원대 후반기인 14세기 초부터 강서의 경덕진요(景德鎭窯)에서 백자를 생산하면서 세계적인 도자 흐름은 청자에서 백자로 바뀌는 추세였고, 이는 중국을 따르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 금(金)·은(銀) 등의 상납을 과도하게 요구했고, 이를 부담스러워했던 조선왕실에서는 조선에서 금·은의 생산이 저조함을 알리기 위한 방편으로 그들이 사용하는 용기를 포함한 금·은 제작품을 금하게 했다. 이에 금·은 용기를 대체할 기명으로 백자를 정하게 되는데 이 역시 국가에서 백자를 권장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흰옷이 보편화되면서 흰색이 갖는 청순함과 결백함이 사대부들의 취향에 잘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에 의해 조선은 백자를 받아들이게 되고 백자를 대중화해 나갔다.


   당시 왕실에서 도자기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하였던 곳은 대궐 내의 식사와 잔치를 담당하는 사옹원(司饔院)이라는 관청이었다. 따라서 많은 수요를 필요로 했던 사옹원이 자기의 제작을 책임지는 관청으로 선정되었으나, 본래의 업무 때문에 자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분원(分院)` 을 만들어 따로 관리하게 되었다.
사옹원의 사기제조장으로써 `분원(分院)` 의 명칭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3년(1625) 8월 3일의 기록으로 당시의 분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계획이 있었고, 그 이전부터도 분원이 수목이 무성한 곳을 따라 이동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오늘날 분원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가마터가 경기도 광주(廣州)의 한강(漢江)주변에 남아 있다. 그리고 분원을 설치할 장소는 서울에서 가깝고 어느 지방보다 백토의 산출이 많아서 광주에 분원이 설치된 이유가 된 것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한강의 수로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과 동시에 광주는 산자수명하고 땔감이 풍부하였다. 그래서 이곳은 국가가 소용(所用)으로 하는 자기를 제조하여 공급했던 곳이며 19세기 말 민영화될 때까지 관장제수공업(官匠制手工業)의 성격을 지닌 관영사기제조장(官營沙器製造場)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일성록(日省錄)』등에는 물론이려니와 개인의 문집 등에도 광주백자에 대한 언급이 많다.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에 의하면 1425년 당시 광주의 백자 제품이 가장 우수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곧 관영사기제조(官營沙器製造)의 성격을 보이고 있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광주에 1425년경의 백자요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당시는 분청사기요에서 백자가 함께 번조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15세기 후반과 같은 백자 생산의 본격적인 관영체제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는 얘기다. 또, 『경국대전(經國大典)』은 1485년에 모두 완성되지만 공전(工典)은 1469년에 완성되므로 적어도 1470년대 이후에는 광주에서 관요(官窯)가 운영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으로는 성종 12년(1481)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매년 사옹원 관리가 화원을 거느리고 어용 그릇의 제조를 감독한다." 라는 문구가 있다. 그러므로 사옹원 관리의 제조 감독은 1481년 이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며 화원을 거느리고 감조한다고 하니 이들 화원은 도화서 소속의 전문화가로서 틀림없이 백자의 무늬를 그렸을 것으로 본다.

   문양(紋樣)에 있어 중기의 특색은 광주의 중앙관요(中央官窯)에서는 국풍화(國風化)된 청화백자를 생산하여 난초를 필두로 패랭이꽃·국화 등을 간결, 청초하게 주문양으로 하여 나타나며, 이보다 늦게 대나무·운룡·세필산수(細筆山水) 등이 주문양과 같이 등장한다. 전기 후반에 중앙관요에서 사실풍의 강한 필치로 그려졌던 철화문은 17세기 전반에서부터 말엽까지 반추상화된 초화문과 운룡문으로 변하여 지방가마에서 오히려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18세기 이후 조선시대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다시 안정을 찾은 시기이다. 이 시기는 자의식(自意識)을 바탕으로 한 실학사상이 사회와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이 부농(富農), 서민지주(庶民地主), 상업자본가(商業資本家) 등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종래의 신분제가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양상은 18∼19세기에 이르면서 새로운 양반의 출현과 상인층의 부(富)의 축적을 가져 왔으며, 도자기에 있어 왕실 전용시대를 지나 상하(上下)를 막론하고 도자기 향유층이 확대되면서 조선말까지 백자는 활발히 제작되었다.


2) 조선백자의 발달과정

    조선백자 발달사(發達史)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백색(白色)에로의 발전이며, 백색의 세련이며, 백색으로 향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백자의 전개 과정을 전기·중기·후기의 세 시기(時期)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전기(1392∼1649년)를 조선 건국부터 인조(仁祖,1595∼1649) 연간까지로 한다면, 중기(1650∼1751년)는 효종(孝宗,1619∼1659) 원년부터 광주 분원이 경기도 광주 남종면 분원리로 이전하기 직전까지로 나눈다. 후기(1752∼1910년)는 사옹원(司饔院) 분원이 분원리로 이전하면서부터 조선 왕조가 끝나는 해로 친다면 이를 `분원리 시대` 라고 한다.
본 연구는 필자가 소개한 시대 구분을 토대로 하되 분청사기와 상감백자의 유행과 소멸, 임진왜란으로 인한 자기제작 상황의 변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제작된 청화(靑華)백자와 철화백자(鐵畵白磁)의 양식 변천사에 대해서도 언급할 것이다.

(1) 전기(조선시대 백자의 완성기,1392∼1649년)
   초기의 백자는 기형이 유연하며 양감을 지닌 것으로 높은 품격을 보여주는데 성현(成俔)『용재총화』"세종조의 어기(御器)는 백자만을 사용했다." 라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 초기의 백자는 극히 적은 양으로 만들어져 어기로만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진사대부들의 성리학적 의식세계를 반영하듯 엄정하고 균형 있는 기형을 중요한 특징으로 한다. 문양장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흰색 그 자체의 절제된 힘을 극대화시킨 이 시기이다. 다만, 1392년은 조선왕조가 건국된 해이지만 백자 생산에서는 아직 뚜렷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도자사(陶磁史) 변천에서는 구획의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417년에 관물도용(官物盜用)의 폐단을 막기 위해 공물에 상납하는 관청의 이름을 새기게 하였는데, 백자에는 그러한 예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1420년경까지는 백자의 생산이 거의 없었던가 아니면 극히 적은 양(量)만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홍무24년명백자본(洪武二十四年銘白瓷本 )` 같은 조선백자의 특징을 분명히 지닌 백자가 만들어졌지만 이 한 점의 예를 가지고는 조선 초기의 백자의 양상을 밝힐 수가 없고 또 단정지을 수도 없다. 따라서 1392년∼1420년경까지는 `조선백자의 여명기` 라고 할 수 있겠다.
분원은 어기번조(御器燔造)라는 주요한 임무를 담당한 관요로, 중국 명나라 초기에 경덕진(景德鎭)에 설치된 관요인 어기창(御器廠)의 제도를 본떠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분원은 설치 직후부터 조선시대 요업의 중추적인 기관으로 작용하여 전국적인 백자요업의 확산과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같은 분원의 설치에 따른 백자요업의 확산은 분청사기의 급속한 퇴조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16세기 이전에 이미 조선의 많은 지방에서는 요업이 백자 위주로 전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백자는 대부분이 경질 백자이며 기종은 대접, 발, 합, 둥근 접시, 전접시, 마상배, 잔, 병, 주전자 그리고 둥근 항아리와 긴 항아리류 등으로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그릇의 형태를 거의 망라한다. 이 가운데서 전접시는 고려시대 청자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중국 도자의 기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이 시기 도자사에 있어 괄목한 만한 성과는 청화백자의 발생이라 할 것이다. 문종 1년(1451)에 편찬된 『세종실록』 오례의(五禮儀)를 보면 의기(儀器)의 대부분이 중국의 것과 유사한데, 그 중 「산뢰(山 )」의 기형과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청화백자철화삼산뇌문산뢰(靑華白磁鐵畵三山雷文山 )」〈그림3〉를 비교하면 이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종(재위,1450∼1452) 연간에도 명의 청화백자가 유입되었음을 『문종실록』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백자는 발생 취지가 어떠하든 간에 조선의 생활기명(生活器皿)으로 정착하면서 선비들의 정신과 사상에 가장 잘 부합되는 자기로 여겨져 그들의 미감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기의 백자는 형태나 문양, 색감에 있어서 가장 선비적이고 고도로 절제된 자태를 보인다. 이는 지배층의 통치이념이 변화됨에 따라 반영되는 실물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또한 조선 성리학의 정착은 이 시기의 백자가 중국의 틀에서 벗어나 조선의 백자로 완성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2) 중기(철화백자의 시대,1650년∼1751년)
   이 시기에는 철화백자(鐵畵白磁)가 양적으로 주종을 이루는데 상감백자나 분청사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청화백자는 매우 희귀해지다가 170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증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백자는 쇠퇴의 길을 걸었으나, 17세 말에 이르러 요업(窯業)이 안정되면서, 달항아리로 대표되는 한국의 독창적인 도자미(陶磁美)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이 시기를 철화백자 시대라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 철화백자의 제작이 눈에 띄게 활발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 철화백자의 생산은 눈에 띄게 늘어나고 무늬에서도 한국적인 익살스러움과 간략함이 가미된 추상화된 사군자가 나타나는 등의 현상을 보인다. 초기인 16세기에는 매죽·초화·용무늬 등이 채택되다가, 중기인 17세기 후반부터는 포도무늬가 세련미를 더하는 가운데 초화무늬 및 용무늬가 추상적으로 변모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전대의 양식에서 벗어나 유태가 맑고 투명해지며 태토는 백색이 되는 청화백자의 생산이 다시 활발해지며 청화백자 무늬는 패랭이꽃이나 난초 같은 매우 한국적인 정취를 풍기는 무늬가 시문된다.

   임진왜란은 조선왕조의 존립자체를 위태롭게 한 사건으로 조선의 역사는 여기서 큰 분기점을 이룬다. 막심한 폐해를 입은 조선왕조는 전후복구(戰後復舊)에 애쓰지만 설상가상으로 청(淸)에 의해 호란(胡亂)까지 당하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선의 요업은 물론, 분원조차 정상적인 조업을 못하여 왕실의 제례(祭禮)에 사용되는 청화자기가 없어 백자에 가화(假畵)를 썼다고 한다. 하지만 요업 복구는 비교적 신속하여 17세기 중엽 선동리 가마 경우 활발한 생산활동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 시기 지방 가마들은 전기(前期)에 이어 역시 분원의 번조 방법을 배워 전국적으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이는 관요에 근무하는 사기장들이 일정기간의 의무를 마치고 돌아감으로써 그들에 의해 제조기법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철사안료로 간단한 초화문(草花紋)을 그린 철화백자가 양산되는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17세기 후반에 실학이 대두되고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이루어지면서 절제미만을 강조하던 미의식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유교를 기본바탕으로 하여 서민적 문화가 어우러진 조선 특유의 문화를 형성한다. 따라서 이 시기의 백자는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가장 조선적(朝鮮的)인 도자미(陶磁美)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는데, 오늘날에도 이점은 한국의 독특한 도자미학(陶磁美學)으로 평가된다. 이 시기 백자문화의 특징은 백자질의 변화, 새로운 기형의 창출, 철화백자의 성행, 간결한 청화문의 유행 등으로 대표된다.

   18세기에 들면 청화백자가 새로운 경지를 이룬다. 기면(器面)에 여백을 광활하게 두고 동체 하부에 지평선 같은 청화선을 그은 다음, 그 위에 매화, 난초, 대나무, 석죽 등의 사군자문 종류를 매우 간결한 필치로 그린 소위 `추초문(秋草紋)` 형식이 성행한다. 마치 문인들이 여기로 그린 수묵의 사군자화 같은 분위기의 그림은 서정미와 고아한 문기(文氣)를 짙게 보이는 독특한 도화(陶畵)의 세계를 보인다.
이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 상회(上繪)자기가 도자기의 주류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청화백자조차 사치스러운 것으로 여겨 국가에서 이에 대한 규제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생산량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 후기(분원리 시대,1752년∼1910년)
   후기는 광주관요(廣州官窯)금사리(金沙里)에서 고개 너머 경안천(慶安川) 하류 한강(漢江) 연안의 분원(分院)으로 옮긴 이후(以後)를 말한다. 이른바 `분원리(分院里) 시대` 로 백자의 질은 앞 시기에 비해 떨어지지만 대량 생산된 시기이다.
영조(英祖)는 사옹원 도제조로 있던 왕세제 시절부터 분원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보위에 오르기 전에는 분원 자기의 유출을 막기 위한 묘책을 강구하여 시행하였고, 시·서·화에 뛰어나 도자기에 산수·화훼 등 밑그림을 직접 그린 뒤 분원에 가서 구워오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임금의 관심과 배려 속에 분원 자기의 품질은 더욱 향상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청화백자가 도자기의 주종을 차지하며 진사채(辰砂彩)가 곁들여진다. 
 
   하지만, 1910년을 하한으로 잡은 것은 실제로 조선 도자기는 갑신년(1884)년에 『분원자기공소절목(分院磁器貢所節目)』을 발표로 분원이 민영화되면서 이미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을 뿐 아니라 한일 합방으로 인해 우리나라 도자 산업에 일본의 영향이 지대하여 이미 우리나라 도자기의 고유성이나 특성 등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분원의 이설에 따른 갖가지 문제로 인해 고심 끝에 남종면 분원리에 분원을 고정시키고 이후 분원은 한 곳에 정착하여 왕성한 활동을 벌이지만 19세기 말에 재원조달의 어려움과 민간자본의 분원 유입이 심화되자 관요로서의 분원은 종말을 고한다. 
 
   후기에 접어들어 백자의 사용층이 확대되고 각종 의식(儀式)이 변화되면서 전에 없이 다양한 기형(器形)의 백자가 제작되었다. 각종 제기(祭器)와 문방구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이런 문방구중에 참신한 소재로 만든 재치 넘치는 기형들이 풍성하게 쏟아진다. 이 시기는 문양의 장식성이 강화되어 `생활의 미` 를 추구한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는 무엇보다 청화백자의 생산이 급격히 증가하여 가히 `청화백자의 시대` 라고 부를 만하다. 이 시기에는 사군자문(四君子紋)과 소상팔경(蕭湘八景) 등의 산수문, 운룡문 등의 청화문양이 성행하는데 화원이 그린 우수한 솜씨의 회화적인 문양이 많아 볼 만한 도화들이 많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반영하듯 도자 수요가 증가하면서 장식적이고 화려한 도자기가 다수(多數) 제작되었다. 대중적 수요의 뒷받침으로 경제적인 안정과 상품의 생산이 보다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지방시장의 발달과 전국적인 상품 유통으로 도자기의 소비 시장 또한 넓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청문물의 유입으로 일부 계층의 사치 풍조를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로 인해 중국 자기가 상당히 많이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이전에는 볼 수 없는 화려함과 장식성을 조선 백자에 가미시킴으로써 다양한 백자의 제작과 대중화가 이루어질 수는 있었지만 사실상 19세기 들어서면서 이러한 경향이 심화됨에 따라 조선 백자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게 된다. 또한 분원의 민영화가 이루어진 후 조선의 자기 시장은 거의 일본 자기에 의해 장악되면서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지난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자기에 의해 찬란했던 조선 백자의 멋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한 채 그 평가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조선 최대의 분원 요지는 도자사 연구의 가장 귀중한 유적이었으나 일제 침략기 때에 바로 그 자리에 초등학교를 짓느라고 크게 파괴되었고, 다시 1970년 초에 중학교를 짓는다고 나머지를 또 파괴하여 이제 유적은 흔적만이 남아 있어 안타깝다.



Ⅲ. 조선백자의 문양


1. 백자의 종류

    도자기(陶磁器)만큼 일상 생활과 밀착되어 거기서 우러나오는 미감(美感)을 순수하게 나타낸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형태는 인간의 의지를 담고 있으며, 색채, 그리고 그 표면에 처리된 모양에는 인간의 의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백자는 마음 속에 내재하는 미의식(美意識)의 본 바탕이며, 인위적인 기교가 나타나지 않는 자연스러운 미(美)로 조선조(朝鮮朝) 미술의 특징 중 하나인 한국문화의 참모습에 가까워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검소(儉素), 질박(質樸)을 생활신조로 하였던 양반 사대부들의 성리학적 미의식과 일반 대중의 소탈한 미의식이 융화되어 한국의 미의식으로 승화된 것이다. 
   이러한 조선시대 백자는 무늬의 표현 수법과 안료의 종류에 따라 순백자(純白磁)·청화백자(靑畵白磁)·철화백자(鐵畵白磁)· 진사백자(辰砂白磁)로 나뉜다.

1) 순백자(純白磁)

순백자는 무늬나 색을 넣어서 장식하지 않는 백색의 단일색 자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릇 표면을 싸고 있는 유약과 색조 및 그릇을 형성하는 선(線)이 순백자의 생명이다. 순백자는 그 형태의 변형이나 투각(透刻), 부분적인 장식으로 변화를 준다. 이런 장식 모양에 따라 소문백자(素紋白磁)·음각백자(陰刻白磁)·양각백자(陽刻白磁)·투각백자(透刻白磁)·상형백자(象形白磁)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소문백자(素紋白磁)
   그릇 표면에 전혀 장식 무늬가 없고 백색의 단일색으로 된 것이다. 이러한 그릇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만들어졌으며, 대체로 포용력(包容力)이 있고 청초(淸楚)해 보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왕실용 백자만을 전담하여 생산하던 경기도 광주의 백자가마에서 제작된 둥근 항아리로 보통 「달항아리」〈그림4〉라고 부르는 작품이다. 이 항아리는 일반적인 작품에 비하여 전체적인 크기도 크고 몸체중앙에 이음새의 흔적이 말끔하게 다듬어진 드문 예이다. 겉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순백의 태토 위에는 투명도가 매우 높은 백자유가 씌워져 있다. 표면에는 유면(釉面)에 형성된 작은 기공(氣孔)사이로 간장과 같은 색이 짙은 액체에 의한 옅은 갈색의 얼룩이 스며 운치를 더해주고 있으며, 몸체의 형태와 입과 굽의 처리에서 이 시기의 세련된 조형감을 볼 수 있다. 조선백자의 격조 높은 도자미(陶磁美)를 대표하는 명품으로 꼽을 만한 귀한 작품이다

(2)양각백자(陽刻白磁)
   순백자 위에 양각수법으로 무늬를 나타낸 것을 말한다. 무늬는 매(梅)·난(蘭)·국(菊)·죽(竹)의 사군자(四君子)가 가장 많고, 그밖에도 약간의 무늬를 첨가하거나 그림에 곁들여 문자를 양각하는 수도 있다. 19세기 작품인 「백자양각매국문병(白磁陽刻梅菊文甁)」〈그림5〉은 불룩한 몸체의 양 쪽 면에는 각각 매화절지문과 국화절지문을 양각하였는데 그 표현이 또렷하여 백색의 음영이 두드러진다. 특히 매화는 아래에서 위로 휘어 올라간 가지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가는 가지가 뻗어나가면서 그 사이에 꽃술이 내비치도록 활짝 핀 꽃과 입을 다문 봉오리를 그려 넣어 자못 운치가 있다.

(3)음각백자(陰刻白磁)
   순백자 위에 음각으로 무늬를 장식한 그릇이다. 부분적으로 음각 수법을 사용했으나, 음각 수법만으로 표면을 장식한 예는 매우 드물지만 간혹 불로장생을 바라는 인간의 욕망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화병이 등이 전해지고 있다.

(4)투각백자(透刻白磁)
   여러 무늬를 투각 수법으로 표현한 것인데 대표적인 것으로 「백자투각용문필통(白磁透刻龍文筆筒)」〈그림6〉은 19세기에 분원(分院)에서 제작한 상품(上品)의 백자로 구연(口緣)부분이 약간 밖으로 벌어진 원통형의 필통이다. 입술부분에는 완자문(卍字文)을 음각하고, 몸통부분에는 운동감있는 운룡문(雲龍文)을 정교하게 투각(透刻)하였다. 구름과 용의 몸체는 음각수법을 사용하여 세부묘사가 돋보인다.

(5)상형백자(象形白磁)
   구체적인 형태를 본떠서 만든 것으로 고려청자만큼 다양하지는 못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청화백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청화를 이용하면 부분적인 형태를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색을 좋아하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때로 표현 효과를 무시하고 백색만으로도 만들기도 했다.
「청화백자진사채잉어모양연적(靑華白磁辰砂彩鯉形硯滴)」〈그림7〉은 하늘을 향해 머리와 꼬리를 치켜들고 수면(水面)을 박차고 오르는 잉어모양의 연적으로, 입과 꼬리에 수입구(水入口)와 수출구(水出口)가 뚫려 있다. 잉어는 자손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상징하는 등용문(登龍門)의 고사(故事)에서 따온 소재로, 민화나 그릇의 문양소재로 즐겨 사용되었다. 굵고 가는 음각선으로 눈과 지느러미, 잉어를 받치고 있는 파도를 묘사한 후, 다소 어두운 청화안료로 비늘과 지느러미에 가채(加彩)하고, 입과 눈, 지느러미 일부에 진사채(辰砂彩)를 가했는데, 바탕과 안료색의 대비가 강렬하여 매우 깊은 인상을 준다.


2) 청화백자(靑華白磁)

   백토로 그릇을 만들고 그 위에 회청(回靑), 또는 토청이라 불리우는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투명한 장석계 유약을 씌워 구워낸 것이다.
맑고 푸른색의 문양이 흰 바탕 위에 시원스럽게 새겨진 청화백자가 번조(燔造)되기 시작한 것은 1457년(세조3년) 안료를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뒤 1465년 최초의 제품이 나오면서부터이다. 이후 1469년 전라도 강진에서 토청(土靑)을 안료로 사용해 청화백자를 만들면서부터 회청 안료와 함께 토청은 청화백자를 만드는 안료로 사용되었다. 
 
   청화백자에 쓰이는 무늬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등의 사군자 외에도 각종 꽃이나 새, 물고기 등 다양하다. 화원의 그림이나 문인화, 산수화 등도 청화백자의 문양이 되었는데, 초기에 여백을 많이 두던 형태에서 벗어나 전체를 활용하였으며, 용·십장생(十長生)·소상팔경(蕭湘八景) 등이 도자 그림으로 사용되었다. 후기 이후의 청화백자는 화제(畵題)종류가 풍부한 것이 특징으로 흰색과 청색의 간결한 무늬가 조화를 이뤄 청화백자에 대한 기호(嗜好)가 매우 컸다.
이렇듯, 조선의 청화백자는 중국의 청화백자와 달리 간결하고 기품있는 문양과 시원한 여백으로 청정한 멋을 만들어 냈다.


3) 철화백자(鐵畵白磁)

   백토로 그릇을 만들고 초벌구이를 한 다음, 표면에 산화철로 문양을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유약을 입혀 번조한 것으로 백자에 다갈색, 흑갈색 계통의 무늬가 나타난 자기이다.
한국에서 백자에 철분안료로 무늬를 입힌 것은 고려시대부터였으나 일반화되고 세련미(洗鍊美)를 띠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로 보인다.
16세기 후반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철화승문병(白磁鐵畵繩文甁)」〈그림8〉은 속칭 넥타이병으로도 잘 알려진 술병이다. 단출한 갈색 줄에 매달린 새하얀 백자 술병은 사대부 미감의 정수를 보여준다. 문양은 산화코발트와 산화철을 사용하여 먼저 청색으로 목에 끈을 감고 끝 한 가닥이 자연스럽게 밑으로 길게 늘어지다가 감긴 모습을 그린 후 산화철을 안료로 그 위에 엷게 유연한 필치로 농담을 섞어가면서 운치있는 줄무늬를 표현하였다. 당당하고 유려한 흐름의 백자병 위에 해학적으로 병목에 매어 늘어뜨린 줄무늬가 잘 어울려 수작으로 꼽는다. 
 
   광주관요(廣州官窯)의 것은 잘 수비(水飛:그릇 만들 흙을 물에 풀어 휘저어서 잡물을 없애는 일)된 백토와 양질의 백자유(白磁釉)에 사실적인 무늬가 주로 시문(施文)되어 포도덩굴·대나무·운룡(雲龍)·매화 등이 세련된 필치로 그려지고, 지방민요의 것은 바탕흙과 유약이 각기 특색을 지니고, 반추상화된 초(草)·죽(竹)·용(龍) 무늬 등이 자유분방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4) 진사백자(辰砂白磁)

   도자기에 진사를 사용해서 문양을 나타내는 기법은 세계에서 최초로 고려시대 즉, 12세기 후반 무렵에 쓰였다.
도자기 바탕에 산화동(酸化銅) 채료(彩料)로 그림을 그리거나 칠한 뒤 백자유약을 입혀서 구워내면 붉은색의 문양을 띠게 된다. 구리로 착색한 진홍빛의 잿물을 올린 것으로 진사만 단독으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청화, 철화와 같이 하는 경우가 많으며 양인각을 곁들이고 형태도 독특하게 만들어 다양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대체로 초기 청화백자가 번조된 시기에 극소수의 대나무, 매화, 국화 등 사실적인 문양이 그려진 것이 번조되었으며, 진사백자가 본격적으로 번조된 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이다.
이러한 사기그릇이 주점사기(朱點沙器), 진홍사기(眞紅沙器)로도 불렸으며 진사백자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체로, 기품 있고 단려한 맛을 풍기며, 뻗쳐 나오는 힘과 격식을 갖춘 엄정한 분위기를 풍만한 양감(量感)으로 잘 나타내었지만 백자진사는 다른 자기들에 비해서 희귀한 편이다.


2. 자기문양(磁器紋樣)

   조선시대(朝鮮時代) 백자문양에 나타난 회화양식은 대체로 조선조 회화의 흐름과 그 맥을 같이한다.
도자의 문양은 화제(畵題), 양식(樣式), 내용(內容), 기법(技法)에 있어 그 시대에 매우 발달한 산수화(山水畵), 화조화(花鳥畵), 문인화(文人畵), 민화(民話) 등의 영향 하에 다양한 발전을 하여 그 절정에 이루었고 빛나는 전통과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화원(畵員)이나 문인사대부들이 주로 그린 수묵산수화, 사군자 등은 도자문양의 조형적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무명화가들에 의한 민화나 풍속화(風俗畵) 등도 그 일익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자기문양에 관하여 고찰(考察)하기 전에 자기문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조선조회화의 특성에 관하여 개괄한 후 다음 단락에서는 `회화(繪畵)와 도자문양(陶磁紋樣)과의 관계(關係)` 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1)조선조회화(朝鮮朝繪畵)의 특성(特性)

  조선 초기에는 이미 도화원(圖畵院)이 설치되어 이를 중심으로 회화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실용적(實用的)인 목적을 지닌 그림뿐만 아니라 순수한 감상을 위한 회화가 크게 진작되었고 그림의 소재는 대나무, 산수, 인물, 영모(翎毛), 화조 등 다방면의 그림들이 그려졌지만 그 중에서도 산수화는 가장 널리 제작되었다. 사대부들의 계회(契會)를 묘사하는 실용적 목적의 그림에서부터 순수한 감상을 위한 목적으로도 빈번하게 제작되었다. 즉 산수화는 자연을 사랑하는 당시 사대부들의 호연지기(浩然之氣)와 밀착되어 크게 성행되었던 것이다.

   조선초기의 회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곽희파화풍(郭熙派畵風)이었으며 남송(南宋)의 원체화풍(院體畵風) 특히 마하파화풍(馬夏派畵風)도 그에 버금갔다. 특히 곽희파화풍은 조선초기 산수화단에 제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안견파화풍(安堅派畵風)의 토대가 되어 15세기 중엽에 이르면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그림9〉와 전칭작품(傳稱作品)인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그림21〉·〈그림22〉에서와 같은 개성이 강한 독자적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런 점에서 이곽파화풍(李郭派畵風)은 결과적으로 조선초기의 회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도 볼 수 있다.
「몽유도원도〈그림9〉는 안평대군의 발문과 찬시(讚詩) 2편을 비롯하여 총 22명의 글 23편이 있는데, 이것을 1947년 일본에서 긴 두루마리 2권으로 나눠 표구하였다. 상권은 그림까지 합하여 8.57m이고, 하권은 글만 11.12m이다. 즉 상하 두 두루마리는 합하면 20m에 이른다.
1447년 4월 20일에 시작하여 3일만에 완성을 본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패트론인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이 꿈속에 거닌 도원(桃源)을 묘사한 것인데, 좌측의 자연스러운 현실세계와 우측의 환상적인 도원의 세계가 현저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사방을 둘러싼 암산(岩山)들이 도원을 외계(外界)로부터 분리하고 있다. 이러한 대조적인 두 요소의 결합이 극도의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이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또 한가지 특색은 상이한 시각의 적용과 넓은 공간에 대한 관심이다. 흩어진 듯 조화를 이루는 구도, 확대된 공간의 시사, 수직과 수평의 대조 및 사선운동(斜線運動)에 의해 교묘하게 달성된 웅장감(雄壯感), 환상세계의 효율적인 구현 등 독자적 양식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구도상의 특색과 공간개념은 후대(後代)의 화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주목할 만한 그림으로는 양팽손(梁彭孫,1480∼1545)의 「산수도(山水圖)」〈그림10〉와 필자미상(筆者未詳)의 일본 대원사(大願寺) 소장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가 전해지고 있다.
양팽손 「산수도」는 당시 화단의 주류를 이루었던 안견의 작품이라 전해지는 산수도와 비슷한 화풍을 보인다. 한편으로 치우친 구도, 봉우리가 겹쳐지면서 점차 멀어지는 원경의 모습, 근경 물가의 언덕에 모인 선비들의 모습 등 당시 공통적인 산수화 양식을 보여준다. 전경(前景)에서 중경(中景)으로 이어지는 구도가 자연스럽고, 경물 사이에 연운(煙雲)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표현되어 있는 점이나,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바위의 모습 등 조선 전기의 화풍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의 하나로서 가치를 지닌다. 화면의 오른쪽 위에는 은둔 생활을 노래한 두 수의 오언시(五言詩)와 함께 양팽손의 호인 학포(學圃)라는 낙관이 되어 있고, 그 아래에 방형(方形)의 양각 도장이 찍혀 있다. 
 
   이러한 일련의 16세기 전반기적인 특색은 대원사 「소상팔경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8폭의 병풍(屛風) 중 「연사모종(煙寺暮鍾)」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편파구도(偏頗構圖) 속에 상승하며 후퇴하는 모습의 삼경(三景)이며 안개 속에 떠 있는 주산(主山), 광활한 공간 등 모든 요소들이 양팽손의 「산수도」와 동일 시기의 화풍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 곽희파화풍 외에 조선초기에 영향을 미친 중국화풍으로는 마원(馬遠)과 하규(夏珪)로 대표되는 남송(南宋)의 원체화풍(院體畵風)이 있다. 남송(南宋)의 화원(畵院)에서 활약했던 마원과 하규는 12세기 말엽과 13세기 초엽에 활약했다. 이들은 자연을 묘사하되 웅장하고 경이(驚異)로운 대자연을 전부 표현하려 들지 않고 자연의 일부분을 잡아 요점적으로 간결하게 묘사하는 경향을 보인다.
   마원은 그의 형상(形象)들의 정서적 연상(聯想)과 형상을 둘러싸고 있는 공백이 환기시키는 힘에 의존함으로써 수단의 극단적인 절약으로써 우아한 분위기 속에 주제를 감싸버린다. 하규는 표면의 질감을 거의 나타내지 않고 나아가 화면의 보다 큰 면적조차 안개 속에 모호하게 함으로써, 더욱더 전체 구성을 단순화시키고 딱딱한 형태를 배제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화면의 하단부(下端部) 한쪽 구석에 중요한 경물(景物)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이러한 구도를 일각구도(一角構圖) 또는 변각구도(邊角構圖)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파의 산수화에서는 질펀한 강이나 안개낀 공간을 시사하는 여백(餘白)이 중요시되었다. 이러한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畵風)의 영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전칭(傳稱) 이상좌(李上佐) 의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그림54〉를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조선 초기에 유행한 화풍으로 절파화풍이 있다.
명초(明初)의 절파화풍이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것은 15세기 조선초기였다.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 등을 위시한 사행원(使行員)들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현존(現存) 최고의 예(例)로 믿어진다. 
 
   여기서 분명히 유념해야 할 것은 조선 초기와 중기의 우리나라 화가들은 이러한 화풍들을 그대로 모방하기보다는 이를 토대로 중국회화와는 구분되는 `한국적(韓國的)` 화풍을 형성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이 시대 산수화가 보여주는 구성(構成), 공간개념(空間槪念), 필묵법(筆墨法), 수지법(樹枝法), 준법( 法)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뚜렷이 간취(看取)된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중국풍의 화풍과는 달리 생활주변의 사물을 소박하게 한국적 정취로 그려 낸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의 초충도(草蟲圖)가 있다.
신사임당의「초충도(草蟲圖)」〈그림11〉는 비슷한 구도의 초충이 그려진 8장으로 된 화첩이다. 이 초충도들은 수본(繡本)을 연상시켜 주는 간결한 구도, 여성다운 소재의 선정, 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