黑齒常之 / 네이버 백과 外

2013. 7. 11. 16:16우리 역사 바로알기

 

 

 

 

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2167

 

 

 

 


    백제 출신의 흑치상지(黑齒常之, 630?~689)에 대해서는 중국의 [신당서]에 자세히 실려 있다. 우리의 [삼국사기]에도 ‘열전’에 전기가 실려 있다. 한편 1929년 중국의 낙양에서 흑치상지와 그의 아들 흑치준의 묘가 발굴되었는데, 거기서 그들의 생애를 일러주는 기록이 나왔다. 이는 앞의 두 책에 없는 새로운 사실들이었다. 조국을 버리고 원수의 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산 사람에게 내리는 후세의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배신자인가, 이민세대의 성공자인가, 아니면 비운의 장수인가.
 
 
흑치상지가 살아간 시대, 조국 백제의 멸망기

    흑치상지는 백제에서 태어났다. 무왕이 다스리던 서기 630년이었다. 상지의 가문은 대대로 달솔이라는 벼슬을 했는데, 중국의 병부상서 그러니까 지금의 국방부차관 같은 꽤 높은 자리였다. 실제로는 왕족 가문이었고, 흑치 지역에 봉해졌으므로 이 성을 썼다. 할아버지는 현덕이었고, 아버지는 사차였으며, 모두 달솔을 지냈다. 상지는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었고, 동작이 빠르고 힘이 세고 꾀가 넘쳐났다. 약관 스무 살에 달솔이 되었는데,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들어선 지 9년째 되는 649년이었다. 어려서부터 고상한 생각을 가졌고, 기질과 정기가 재빠르고 뛰어난 사람이었다.
 
   의자왕은 무왕의 큰아들이었다. 왕자 때의 그는 용맹하고 담력이 있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 사이에 사랑으로 지냈다. 그러기에 그는 ‘백제에 태어난 증자(曾子)’라는 평을 받았다. 이렇듯 자질이 훌륭한 사람이었음에도, 의자왕의 말년은 술과 여자에 깊이 빠졌다가, 끝내 나라를 잃은 마지막 왕이라는 불행한 이력을 남기고야 말았다. 상지는 이런 왕의 밑에서 달솔을 지냈다.
 
    이 무렵 백제의 왕족 가운데 복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도 일찍이 많은 군사를 거느렸는데,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자 승려 도침과 함께 주류성에 자리를 잡고 끝까지 당나라에 저항했다. 그는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모셔 백제 부흥운동을 꾀하였다.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이라 일컬었다. 점점 힘이 세지자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군사의 명령권을 한 손에 쥐었다. 왕에 오른 부여풍은 그저 복신의 말만 따를 뿐이었다.
 
    그때 흑치상지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 또한 달솔이라는 높은 자리에 있었으므로, 나라가 망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었다. 소정방이 사비성을 함락시켰을 때, 상지는 부하들을 데리고 임존성으로 갔다. 그러자 열흘이 못되어 그에게 찾아든 사람이 3만 명이나 되었다. 상지에 대한 당시 백제인의 신임이 상당히 두터웠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상지는 주류성에서 복신이 활약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하여 복신과 연합하고 마침내 2백여 성을 다시 찾았다. 백제가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조국 부흥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그러나 부흥운동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하였다. 복신이 너무 설쳐대자 부여풍이 앙심을 품고 그를 죽여 버리고 말았다. 상지는 고민했다. 663년, 상지의 나이 서른네 살이었다. 이때 당나라 고종은 상지가 백제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인 줄 알고 사신을 보내 설득했다. 항복하면 후하게 대접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상지는 깊이 고민하면서 친구인 지수신과 의논했다.
 
“내가 이제 당나라 황제의 말을 들으면 항복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백성은 더 고생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상황이 이러니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세.”
 
    결국 두 사람은 당나라 장수 유인궤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유인궤는 상지를 보고, “이 사람을 보건대 충성스럽고 지혜가 있다. 기회를 얻으면 공을 세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지와 지수신은 부여풍이 지키는 나머지 성을 빼앗았다. 그렇게 부흥운동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상지는 당나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지수신은 식구들을 버려두고 고구려로 가버렸다.
 
    상지는 마침내 당나라에 들어가서 양주자사가 되었다. 많은 공을 세웠고, 신임을 얻어 664년 웅진성(부여)으로 잠깐 돌아와, 남은 성안 사람들을 보살폈다. 모두 좋아했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당나라로 돌아갔다. 

 

 



당 고종은 흑치상지가 백제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인줄 알고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다. 
<출처 : Kavin07 at zh.wikipedia.com>
 
 
백제 출신이지만 당에서 승승장구하다

    흑치상지의 이름이 다시 들리는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인 672년, 마흔세 살의 나이로 충무장군이 되었다는 소식에서이다. 그는 충실한 이민자가 되었다. 어쨌건 겉으로야 당나라에 대해 제 나라를 멸망시킨 원수의 나라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듯하다. 비록 당나라의 신하가 되었지만, 그가 일하는 방법은 늘 똑같았다. 상지는 아랫사람들에게, “나는 공평한 것을 나의 소임으로 삼고, 사사로움을 잊어버리기로 했다.”라고 말하였다.
 
    황제가 이를 아름답게 여겨 좌령군장군으로 옮기고, 더 큰 마을에 땅을 내려 주었다. 사람들은, ‘장군은 무거운 문빗장을 들어 올릴 수 있었으나 힘센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지혜로는 외적을 막아낼 수 있었으나 지혜 있는 것을 떠벌리지도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데도 오히려 드러난다, 우직하게 인격을 닦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상지의 행실은 산처럼 똑바로 서서, 모든 사람이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러는 동안 상지에게 기쁜 일이 생겼다. 아들 준(俊)이 태어난 것이다. 676년, 상지의 나이 마흔일곱 살 때였다. 물론 그러는 상지를 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들이 태어난 다음 해, 상지는 서도(청해) 지방에 있으면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자 당나라 사람 이경현은 황제의 대사가 되어 그의 지휘권을 빼앗았다. 하지만 이경현이 군대를 지휘하면서 싸움마다 지는 것이었다. 황제도 그 같은 사실을 알게 되어, 상지를 좌무위장군으로 옮기고, 이경현을 대신하여 대사를 시켰다. 전쟁터에 출정하면 칭송이 뒤따랐고, 전쟁터에서 개선하면 노래가 절로 나왔다.
 

흑치상지의 사위로 알려진 순장군(珣將軍)이 조성한 석굴에서 출토된 순장군공덕기의 탁본.

    상지에게도 슬슬 불행의 그늘이 다가왔다. 쉰여섯 살 때인 684년, 서경업이라는 자가 반역을 일으키자 상지는 나가서 이를 평정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상지는 연연도대총관이 되어 돌궐을 격파하였다. 돌궐의 장수 골졸록은 상지와의 싸움에서 크게 졌다. 이 일로 상지는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 신무도경략대사(神武道經略大使)라는 벼슬을 받았다. 절정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때 상지는 동료 장군인 보벽과 의견 충돌을 빚었다. 보벽은 과감한 공격을, 상지는 신중한 처리를 주장하였다. 황제는 보벽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보벽 혼자 진공하다가 오랑캐에게 패하여, 이 때문에 온 진영이 무너지고 말았다. 보벽은 처형당했다. 그러나 상지도 온전할 수는 없었다. 당나라에 와서 겪는 첫 시련이었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689년, 상지가 예순 살을 앞둔 해였는데, 조회절이라는 자가 반역을 일으켰다. 평소 상지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던 무리가 황제 앞에서, 상지가 반역의 무리에 끼었다고 모함하였다. 처음에 황제는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 나라를 멸망시킨 당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그이야말로 의심스럽다는 신하들의 말에 황제도 귀가 솔깃했다. 그들은 상지가 반드시 신임을 얻어 옛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의심은 마치 명백한 사실인 양 되었다. 상지는 옥에 갇혀 죽으면서, “내가 내 고향 백제를 버리고 여기까지 왔다만, 이런 누명을 쓸 줄이야 몰랐구나.”라고 한탄하였다.
 
 
흑치상지는 배신자인가, 아니면 이민세대의 성공자인가

    흑치상지가 억울하게 죽은 뒤 10여 년이 흘렀다. 아들 준은 이제 스물세 살의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준은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려 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인 당나라를 떠나 이웃 나라로 갔다. 사람들은, “의로움은 목을 끊어 죽는 것과 같았고, 애처로움은 독약을 마셔 자살하는 것과 같았다.”는 말을 하였다. 황제는 이 말을 들었다. 사신을 보내 준에게 돌아오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무근의 유언비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았더니, 분함을 품고서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 누명을 벗지 못하였구나. 이제 다시 살펴보니 반역하였다는 증거가 없도다. 마땅히 분함을 씻고 죄를 면하게 하여, 무덤 속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노라.” ([신당서]에서)
 

흑치상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백제유민 예식진의 묘지석. 중국 지역에서 발굴되는 백제인의 묘지석은 망국의 한을 품고 당나라로 건너간 백제 유민이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드디어 준은 아버지의 묘를 낙양의 북망산으로 이장하였다. 황제는 장례에 드는 물건과 일할 사람을 보내주었다. 그 뒤 불과 7년 뒤인 706년, 상지의 아들 준이 낙양에서 죽었다. 겨우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였다. 사람들은 아버지와 같은 북망산에 장사지냈다.
 
    흑치상지와 그 아들 준에 대해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면 늘 따라다니는 질문이 있다. 그들은 배신자인가, 이민세대의 성공자인가. 조국을 멸망시킨 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산 것을 보면 배신자요, 출중한 능력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보면 성공자이다. 세운 전공이나 올라간 벼슬로 흑치상지는 당나라의 7대 장수로 손꼽혔다. 더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백제부흥운동의 끝자락에 희망을 접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이였다고 해야 옳을까. 마지막에 모함을 받은 것은 지나치게 높이 올라간 벼슬 때문에 당한 견제였다. 그렇다면 배신자도 성공자도 아닌 비운의 장수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다.
 
    상지가 얼마나 아랫사람을 인자하게 다스렸는지 유명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한번은 병사가 상지의 말을 때린 적이 있었다. 이를 보던 어떤 사람이 상지에게 엄히 처벌하라고 건의하였다. 그러자 상지는, “말도 소중하고, 병사도 소중하지. 그러나 사사로운 실수이거늘, 어찌 병사를 매로 다스리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는 자기가 받은 상을 아래 거느리는 부하들에게 남김없이 나누어 주었다. 자기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상지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그가 죽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였다.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이미지 연합뉴스
 
발행일  2010.03.08

 

 

(전략)

 

 

 

흑치상지 묘지석 - 1604자의 비밀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백제인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발견되었다.

 

북망산은 중국 제일의 명당으로, ‘살아서는 소주, 항주, 죽어서는 낙양의 북망’이라고 할 정도로 중국인들이 죽어서 묻히길 바라는 곳이다.

 

따라서 황제나 고관대작이 아니면 묻히기 어려웠던 묘지터가 북망산이다. 백제인 흑치상지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추적한다.

1. 중국 황제들이 묻히던 곳, 북망산

역대 중국의 황제묘는 모두 북망산에 있다. 그래서 이 곳은 무덤의 부장품들을 노리는 도굴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북망산의 도굴꾼들에 의해 흑치상지의 묘지석도 도굴되면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북망산에 있을 흑치상치의 무덤을 찾아 나섰다.


2. 도굴된 묘지석

묘지석은 그 사람의 일대기를 돌에다 적어 무덤 속에 넣어두는 것을 말한다. 도굴된 흑치상지의 묘지석은 골동품상을 통해 중국의 한 금석문 수집가에게 넘겨진 이후, 우여곡절 끝에 중국 남경 박물원에 소장되어 있었다. 흑치상지 묘지석은 박물관의 외진 복도 끝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있었다.


3. 백제의 귀족 흑치상지

1929년에 발견된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90년 북경 도서관에서 역대 지석의 탁본들을 엮어 한 권의 책으로 펴내면서이다.

 

이 묘지석을 통해 흑치라는 성씨가 원래 백제의 왕족성인 부여씨와 같은 성씨라는 것이 밝혀졌다. 전형적인 백제의 귀족으로 성장한 흑치상지는 31살에 조국의 멸망을 맞게 된다.


4.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당 식민지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 아름다운 이 백제의 탑에는 백제 멸망의 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의 정복을 기념하면서 이 정림사지 석탑에 글을 남긴 것이다.


5. 당나라의 명장수 흑치상지

백제의 부흥운동 실패 이후 당으로 건너간 흑치상지는 당나라의 무장으로서 맹활약을 한다. 607년 통일 왕국을 이룬 토번이 영토확장을 목적으로 당을 위협하자 당은 흑치상지를 내보낸다. 토번은 당시 당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적이었다. 이때 흑치상지는 3천의 군사를 이끌고 3만 여명의 토번 군사와 싸워 승리한다.


6. 태평성대

흑치상지는 전투뿐 아니라 전쟁방어에 있어서도 누구보다 뛰어난 장수였다. 흑치상지는 자신의 관할지역에 방어를 위한 봉화대를 70여 개 설치했고, 1500만평에 이르는 땅을 개간해 군사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했다.


7. 불패 신화

변방의 돌궐이 매년 혼란을 일으키고 재물과 사람을 약탈해가자 당 조정은 흑치상지를 변방으로 보내고, 흑치상지는 돌궐과의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며 돌궐족을 거의 전멸시킨다. 당나라에 건너간 이후 30여 년동안 흑치상지는 단 한차례의 전투에서도 진 적이 없었다.


8. 흑치상지의 죽음

흑치상지는 당나라의 군부서열 12위안에 드는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죄를 입어 죽임을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형에 처해진 흑치상지가 특별한 사람들의 무덤자리 북망산에 묻히게 된 것은 그의 아들 덕분이었다.

 

흑치상지가 억울하게 죽은 뒤 10여 년이 흘렀다. 아들 준은 이제 스물세 살의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준은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려 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인 당나라를 떠나 이웃 나라로 갔다.

 

사람들은, “의로움은 목을 끊어 죽는 것과 같았고, 애처로움은 독약을 마셔 자살하는 것과 같았다.”는 말을 하였다. 황제는 이 말을 들었다. 사신을 보내 준에게 돌아오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무근의 유언비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았더니, 분함을 품고서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 누명을 벗지 못하였구나. 이제 다시 살펴보니 반역하였다는 증거가 없도다. 마땅히 분함을 씻고 죄를 면하게 하여, 무덤 속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노라.” ([신당서]에서)

 

 

 

 

드디어 준은 아버지의 묘를 낙양의 북망산으로 이장하였다. 황제는 장례에 드는 물건과 일할 사람을 보내주었다. 그 뒤 불과 7년 뒤인 706년, 상지의 아들 준이 낙양에서 죽었다. 겨우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였다. 사람들은 아버지와 같은 북망산에 장사지냈다.

 

중국 하남성 낙양에 북망산이 있다.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라는 <성주풀이>의 낙양성 무덤은 북망산을 뜻한다.

 

낙양에 도읍했던 중국 여러 왕조 지배층의 귀족 묘지인데, 현재 고묘(古墓)박물관이 조성돼 있다.

 

그런데 우리와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곳에 뜻밖에도 우리 역사와 관련된 인물이 여럿 묻혀 있다.

 

1929년 10월 도굴꾼들이 백제의 유장(遺將)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지석을 발견한 곳도 북망산이다. 흑치상지는 <삼국사기>는 물론 중국의 <구당서>와 <신당서>에도 열전이 실려 있는 인물이다.

그만큼 파란만장하고 국제적인 인생을 살았음을 뜻한다. ‘흑치’라는 특이한 성씨의 유래가 수수께끼인데 흑치상지 ‘묘지명’은 “그 선조가 부여씨에서 나와서 흑치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성씨로 삼았다”라고 적고 있어서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의 지파(支派)임을 나타내고 있다. <삼국사기>와 <구·신당서> 모두 ‘백제 서부인’이라고 적고 있기 때문에 흑치는 백제의 서쪽 어디쯤으로 유추된다.

 

 

임존성 사수하자 3만 병사 모여들어

 

 

흑치상지 ‘묘지명’은 “그 가문은 대대로 달솔(達率)을 역임했는데, 달솔이란 직책은 지금의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같으며, 본국에서는 2품 관등에 해당한다”고 전한다. 흑치상지의 운명은 백제의 멸망과 함께 파란만장한 인생유전으로 접어든다.

 

 ‘묘지명’은 “당 현경(顯慶·656~660) 연간에 당나라에서 소정방을 보내 백제를 평정하자, 그 주인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입조(入朝)했고, 당나라는 이들을 만년현인(萬年縣人)에 예속시켰다”라고 간단하게 전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흑치상지가 백제 부흥군의 맹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삼국사기>는 “소정방이 늙은 왕(의자왕)을 가두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하니 흑치상지는 두려워서 측근 무장 10여 인과 도주했다”면서 “(흑치상지가) 무리를 모아서 임존성에 웅거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 되어 모여드는 이가 3만 명이나 되었는데, 소정방이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흑치상지는 드디어 200여 성을 회복시켰다”라고 전하고 있다.


백제 부흥군이 기세를 올리자 소정방은 황급히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과 귀족·장병 1만3천여 명을 당나라 장안으로 압송했다.

 

백제 부흥군의 복신·도침 등은 일본에서 귀국한 부여풍(夫餘?)을 임금으로 추대했는데, 흑치상지는 이 세력의 주요 무장이었다. 당나라는 662년 부여융을 당나라 장수 유인궤와 함께 귀국시켜 백제 부흥군에 맞서 싸우게 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백제 부흥군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흑치상지의 운명길이 달라진다. 백제 무왕의 조카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실권을 잡자 풍왕이 복신을 제거한 것이다.

 

» 낙양 북망산 고묘 박물관의 경릉. 고구려 여인 문소태후의 아들 북위 세종의 릉.

부흥군 내분으로 당나라 투항

 

 

<삼국사기> 흑치상지 열전은 “용삭(龍朔·661~663) 연간에 고종이 사자를 보내 흑치상지를 타이르니 유인궤에게 항복했다”고 전하고 있다.

 

당 고종이 사자를 보내 타일렀다는 것은 부여융이 흑치상지 회유에 적극 나섰음을 뜻하는데, 백제 부흥군에 서로 죽고 죽이는 내분이 발생했을 때 부여융이 회유하자 흑치상지는 투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나아가 그는 백제 부흥군의 수도인 임존성 함락에 가담해 결정적인 공을 세운다.

 

흑치상지는 부여융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 절충도위(折衝都尉)를 제수받고, 664년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귀국하는데

 

 ‘묘지명’은 “(흑치상지가) 웅진성에 진수하니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나라의 관점이고, 백제 유민들은 백제 부흥군의 맹장이 당나라 장수로 돌아온 것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다시 당나라로 들어간 흑치상지는 “함형(咸亨) 3년(672)에 공이 있으므로 충무장군(忠武將軍)…과 상주국(上柱國)을 제수받았다”는 ‘묘지명’의 기록처럼 승승장구한다. 그의 공은 대부분 당나라 변방을 공격한 토번(티베트)과 돌궐(투르크)과 맞서 싸운 것이었다.

 

<구당서> 흑치상지 열전에 따르면 그는 당 고종 의봉(儀鳳) 3년(678) 토번이 변방을 공격하자 이경현과 함께 격퇴하러 나섰다. 당군이 진흙 구덩이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고 있을 때 흑치상지가 야밤에 결사대 500명을 거느리고 토번의 군영을 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당 고종은 흑치상지의 지략을 높이 사 좌무위장군으로 봉하고 금 500냥과 비단 500필을 하사했다.

 

또한 토번의 찬파와 소화귀 등이 3만여 군사를 이끌고 공격했을 때도 흑치상지는 3천여 기병을 이끌고 야밤에 기습해 토번 2천여 군사의 목을 베고 양과 말 수만 필을 획득하기도 했다.

 

당 중종 수공(垂拱) 2년(686)에는 돌궐(투르크)이 변경을 침범하자 흑치상지가 다시 격퇴하러 나섰는데, 직접 기병 200명을 이끌고 선봉에서 질주하자 돌궐군이 도주했다. 흑치상지는 밤에 군영에 봉수처럼 불을 질렀는데 마침 동남쪽에서 대풍이 일자 돌궐군은 구원병이 오는 것으로 알고 도주했다고 <구당서>는 적고 있다.

 

 

 

토번과 돌궐 토벌하며 북방 호령

 

 

이처럼 서방의 티베트와 북방의 투르크를 진압한 것에 대해 ‘묘지명’은 “오랑캐의 티끌을 숙청하니 변방의 말이 살찌고, 한(漢)의 달이 훤하게 비치게 되어 하늘의 여우 기운이 사라졌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런 공으로 흑치상지는 드디어 연국공(燕國公)의 지위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당 중종 수공(垂拱) 3년(687) 돌궐이 삭주를 다시 공격했을 때 대총관(大總管)으로 격퇴에 나선 흑치상지의 운명에 암운이 깃든다. 흑치상지는 황화퇴에서 돌궐군을 크게 격파하고 40여 리나 추격했다. 돌궐군이 흩어져 적북으로 도주하자 중랑장(中?將) 찬보벽이 무리하게 추격하다가 전군이 궤멸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구당서>는 찬보벽이 “흑치상지와 상의도 하지 않았다”고 기록했지만, 찬보벽이 사형당하면서 그도 안심할 수 없었다.

 

무렵 우응양위장군 조회절 모반 사건이 발생하는데 <구당서>에 혹리(酷吏·악독한 관리)로 기록된 주흥이 흑치상지가 여기 가담했다고 무고하면서 흑치상지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신당서> 측천순성무황후(則天順聖武皇后·무측천) 영창(永昌) 원년(689)조는 그해 10월 우무위대장군 흑치상지를 죽였다(殺)라고 기록했다. 사형을 당한 것이다. <구·신당서> 흑치상지 열전과 ‘묘지명’은 스스로 목매 자살했다고 조금 달리 전하고 있다.

 

10년 후인 699년, 아들 흑치준(俊)은 부친이 누명을 썼음을 밝혀내고 무측천으로부터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을 추증받고 묘소도 귀족 무덤인 북망산으로 이장했다. ‘묘지명’은 “천하가 애통해했고, 해내(海內)가 그의 어짐을 애통해했다… 기리는 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명성은 끝이 없을 것이다”라고 끝맺고 있다.

 

백제 유장이었다가 백제 부흥군 궤멸에 앞장서고 다시 당나라로 건너가 토번과 돌궐 정벌의 공으로 연국공에 올랐다가 끝내 사형당한 흑치상지. 그에게 국가는, 또 역사는 무슨 의미였을까?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