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호와 문성공주 /홍정선 - 세계일보

2013. 7. 11. 17:41우리 역사 바로알기

 

 

 

홍정선의 중국 기행] 시간의 풍경을 찾아서

 

⑮ 청해호(靑海湖) 가는 길<세계일보>

 

<청해성 일월산>

 

 

 

 

 

 

 

 

 

해발 3200m의 광활한 천연호수를 품은 노란 유채꽃

우리는 자신의 목숨이나 처지가 초인간적인 어떤 힘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을 때 그것을 가리켜 운명이라 한다.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고 판단할 때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시인 백석(1912∼1996)은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이런 처지를 절실하게 경험했는지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라는 시구를 남기고 있다.

 

 

시인 청마 유치환(1908∼1967)은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이끌어 나가지 못하는 상태를 격렬하게 반성하면서 아라비아 사막의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라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백석과 청마는 과연 그들을 지배하는 운명의
얼굴을 본 것일까?

나는 일찍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가혹한 운명의 얼굴과 마주쳤던 사람으로 흑치상지(黑齒常之·630∼689)와 문성공(文成公主·625?∼680)를 기억한다. 아마도 이들은 틀림없이 자신들을 압박하는 운명의 얼굴 앞에서 저항의 몸짓과 순응의 삶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운명을 원망하고 울부짖으며 모진 목숨을 탄식했을 것이다.

내가 세 차례나 청해호를 찾아간 이유는 이들이 마주쳤던 그러한 운명적인 삶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로부터 멀고 먼 칭짱고원(靑藏高原)에 있는 바다, 해발 3200m나 되는 고지에 자리 잡고 있는 이 호수를 찾아간 것은 흑치상지와 문성공주
지역에서 밤마다 고민했을 그 운명의 얼굴을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문명과는 동떨어진, 시원의 대자연 속에 숨어 있는 청해호에 내 얼굴을 비추어 보며 운명의 모습을 가늠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청해호는 염호지만 황어(黃魚)라는 물고기가 많이 서식해 어업은 물론 주변에 유채꽃밭 등 광활한 초원이 펼쳐져 있어 목축업도 활발하다.
나는 칭하이(靑海)성에 갈 때 일부러 편한 방법을 버리고 불편한 방법을 택했다. 비행기를 타고 곧장 시닝(西寧)공항에 내린 것이 아니라 시안(西安)에서 간쑤(甘肅)성의 란저우(蘭州)까지는 기차로, 란저우에서 칭하이성의 성도인 시닝까지는 버스로 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옛사람들이 걸어가던 길을 조금이라도 가깝게 접해 보고 싶어서였다. 비록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산천과 살림살이의 의구함을 믿으면서 옛사람들이 장안의 문명세계로부터 오랑캐 땅을 향해 나아갈 때 마주쳤던 낯선 풍경과 사람들을 나도 마주쳐 보고 싶어서였다.


그런 의도에 부합하듯 란저우에서 시닝을 지나 라싸(拉薩)로 이어지는, 당번고도(唐蕃古道)를 따라가는 길은 이미 간쑤성에서부터 살풍경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무 하나 없이 황량하게 우람하기만 한 산들이 차창 밖으로 끝없이 다가오고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같은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더욱 비감하고 처량하게 자신들의 운명을 생각했을 흑치상지와 문성공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흑치상지가 당시의 토번(吐藩·지금의 티베트)을 상대로 한 최전선에 배치된 것은 그의 나이 48세 때인 677년이었다. 백제부흥운동에서 명성을 떨쳤던 무장인 그는 662년 당나라 장군 유인궤(柳仁軌)에게 항복하여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이후 그는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夫餘隆)과 함께 멸망한 백제 땅을 다스리는 형식적인 벼슬, 거의 실효성 없는 자리에 등용되어 당과 백제를 오가며 13년 동안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그가 당의 번장정책에 따라 티베트를 방어하는 도하도경략부사(?河道經略副使)에 임명되어 지금의 칭하이성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당제국 동쪽 끝의 오랑캐 나라 백제의 장군이었던 사람이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장군으로 변신하여 이번에는 제국의 서쪽 끝에서 거꾸로 오랑캐와 싸워야 하는 자리에 앉은 것이다. 흑치상지는 이 같은 엄청난 운명의 길을 걸었다.


시닝 인근의 해발 4000m가 넘는 고개를 여러 차례 넘나들며 나는 봉수대 흔적 하나라도 마주치기를 간절히 바랐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정예 기마부대를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이 시닝지역에서 발지설(跋地設)과 찬파(贊波)의 침략을 패퇴시키고 당 제국의 서쪽 변경을 안정시켰다.

 

그 공으로 그는 티베트를 방어하는 총책임자 자리인 하원도경략대사(河源道經略大使)에 올라 당시의 하원, 현재의 칭하이성 일대를 다스리게 되었다. 다스리는 동안 5000경의 광대한 땅을 농지로 개간하고 봉수대 70여곳을
설치하는 업적을 과시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흑치상지로 하여금 당나라에서 그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전쟁과 통치에 몰두하도록 만든 것일까? 그것은 그로 하여금 무엇인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태, 또 다른 실패와 좌절을 용납할 수 없는 심리구조를 만들어낸 남다른 운명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낯선 땅에서 아득한 옛날의 조상 한 사람을 추억하며 애써 봉수대를 찾았다
. 해발 4000m의 고원지대에서 한 백제인이 자신의 생애에 부과된 범상하지 않은 운명의
드라마를 어떻게 감당하며 살았는지 작은 흔적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흔적은 쉽게 보이지 않고, 광대한 고원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양떼와 마오뉴(?牛)라 부르는 야크떼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친당파’라는 말이 그때는 없었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은 바로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는 그 목가적 풍경 앞에서였다.

 

조선이 망하고 일본군 중장이 되어 비슷한 길을 걸은 홍사익(洪思翊) 장군이 ‘친일파’로 몰려 민족반역자 취급을 받고 있는 것에 비하면, 흑치상지 당신은 상대적으로
행복하다는 위로 아닌 위로를 나는 풍경을 향해 건네고 있었던 것이다.

일월산(日月山). 칭하이성 황위안(湟源)현에 있다. 지리적으로는 유목지역과 농경지역의 경계선이고, 역사적으로는 당나라와 토번의 경계선이다.
시닝에서 청해호를 향해 가는 길은 천천히 거대한 언덕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해발 2200m인 칭짱고원의 동쪽 끝 시닝에서 고원의 중심부를 방향으로 해발 3200m 지역에 있는 청해호까지 느리게 올라가는 그 길을, 옛날에 당번고도라 불렀던 그 길을 나는 문성공주를 생각하며 나아갔다.

 

 

장안에서 라싸까지 8000리에 달하는 여정을 아버지 이도종(李道宗)의 감시를 받으며 울며 시집가던 문성공주의
기구한 운명을 기억하며 나아갔다.

 

 

그리고 이 길의 중간쯤 되는 일월산(日月山) 고갯마루에 있는 두 정자에서, 문성공주가
휴식하며 거울을 던져 버렸다는 일월정(日月亭)과 그 옆의 기념사당에서 나 역시 산소결핍에 허덕이는 몸을 잠시 쉬었다.

손챈감포(松贊干布)는 라싸를 정치와 종교의 중심으로 한 현재 티베트의 원형을 만들어낸 영웅적 인물이다. 그는 640년을 전후한 시기에 분열된 티베트 고원 부족들을 통일하여 강대한 토번왕국을 세운 후 당 제국의 서쪽을 본격적으로 위협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칭하이성·간쑤성·쓰촨(四川)성 일대에 출몰하여 군사적 위협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당 제국의 부마로 만들어 달라는 화평 제안을 하면서 그는 당나라를 압박했다. 이러한 손챈감포의 압박 앞에서 당태종은 중국이 주변의 강대한 유목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방식으로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혼인정책을 선택했다. 그 정책의 희생자로 뽑힌 사람이 바로 문성공주였다.

토번(지금의 티베트)왕 손챈감포(松贊干布)에게 출가한 당나라 황실 종친의 딸 문성공주의 조각상.
문성공주는 전한 원제(元帝) 때의 왕소군(王昭君), 조조 때의 채문희(蔡文姬)와 함께 기구한 운명을 강요당한 인물이다.

 

 

그녀는 황실종친인 강하군왕(江夏郡王), 예부상서(禮部書) 이도종의 딸로 남부러울 것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바로 비극의 씨앗이었다
.

 

 

당시 황제의 친딸을 오랑캐에게 함부로 줄 수 없는 처지에서 종친의 딸을 공주로 둔갑시켜 강성한 유목민족과의 화친을 도모하던 외교정책에 따라 그녀는 문성공주라는 인물로 변신하여 라싸로 시집을 가야 하는 운명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나는 당시 농경지역과 유목지역의 자연적 경계선이자 당나라와 토번왕국의 국경선을 이루었던 일월산 고갯마루에 현재의 중국 정권이 세워 놓은 ‘문성공주진장기념비(文成公主進藏紀念碑)’를 들여다보며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개인의 영웅적 희생에 대한 국가 차원의 예찬이 과연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의심하고 의심했다.

그 기념비는 문성공주야말로 한족과 장족의 우호와 평화를 위해, 두 민족의 문화교류와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 살신성인한 인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경계선에 그녀를 기리는 비를 세운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진실은 과연 그런 것일까? 나이 어린 처녀가 애초부터 그런 생각을 정말로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당시의 권력이 문성공주를 설득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현재의 중국이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이용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오히려 진실은 자신에게 다가온 운명을 한없이 슬퍼하고 원망하며, 그럼에도 불복했을 때 가족에게 닥칠 재앙을 두려워하며 황제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그 운명을 받아들였으리라. 그랬기 때문에 당 제국의 영토를 벗어나는 이 일월산 고개에서 황제가 하사한 거울을 집어던지면서 당나라에서의 모든 생활을 잊어버리려 했으리라.

두 사람의 생애를 짓누른 비극적 운명을 생각하며 청해호를 향해 간 나의 발걸음은 그러나 저 멀리서 호수의 한없이 푸른 물빛과, 호숫가를 끝없이 수놓고 있는 유채꽃의 노란색과, 호수를 둘러싼 산록의 초원에 펼쳐진 초록색을 발견하는 순간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전체 크기의 5분의 1에 달하는 광활한 천연호수가 펼치는 푸른색과 노란색과 초록색의 향연, 운명이 거역할 수 없는 초인적인 힘이듯이, 또 다른 초인적인 힘으로 나를 무거운 생각에서 해방하고 있었다
.


광대한 푸른 호수를 둘러싸면서 엄청나게 위압적인 크기로 다가오는 유채꽃의 노란색과 초원의 초록색은 인간의 의지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색깔처럼 보였다. 그 모습 앞에서 초인간적인 힘이 비극만을 연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청해호의 투명한 물에 비친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심각해지지 않았다.

 

일월산을 넘는 문성공주가 거울을 집어던진 것은 운명에 대한 원망을 집어던진 것이라 생각하며 나도 호숫가의 조약돌을 집어서 힘껏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