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와 향생활 1~6 / [박희준(향기를 찾는 사람들)]

2016. 2. 3. 06:00향 이야기



      차와 향생활 [박희준(향기를 찾는 사람들)] 1~6| ―···차(茶)이야기

모봉형진 | 조회 59 |추천 0 | 2006.06.05. 21:05

                 



차와 향생활 1



  차맛을 배우던 시절, 우리 선배 차인(효당, 의제, 응송스님)들의 차실을 방문하면 깊은 산사의 고즈녁함이 있었다. 오래된 서화에서 풍기는 깊이와 정갈한 다기에서 배어나오는 담백함, 그리고 한곁에 얌전히 자리한 찻자리 꽃은 늘 보던 꽃이지만 고요한 자리에서 새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자리에 향이 함께 하였다. 고요함 속에 한자 높이 이상 푸른연기가 힘있게 치솟으면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행여 내 날숨에 연기가 흩어질까? 두려워 함에서다. 다녀오면서 한동안 입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차향기는 그 찻자리로 다시 가게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때부터 찻벗이 오기전에 차실을 정리하고 향을 피웠고, 이야기가 머슥해지면 향을 피워 분위기를 바꾸었다. 야외에서 차를 마실때면 먼저 향 한자루를 피운 뒤 산천초목에게 차 한잔을 올리고, 집에서 혼자 차를 마실 때면 물이 끓을 동안 향 한자루를 피우고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선배차인들의 의연한 마음에 좀 더 다가서고 싶었다.

  대만에서 우리차발표회를 할 때 버릇처럼 찻자리 정리를 마친 다음 차벗들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향 한자루를 피웠다. 나는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숯불까지 피워 찻자리 준비를 하였지만, 차회를 마친 다음 아주 가까운 일본친구는 나에게 다가와서 작은 봉투하나를 건네주며 위로의 말을 하였다. '큰 슬픔 이겨내십시오' . 나는 당황하여 '왜' 였다. 그러자 무뭇거리더니 말이 이어졌다. '차실에서는 천연향을 피우는 것이 원칙이지요, 그런데 오늘 박선생이 피우신 향은 일본에서는 장례식장에서나 피우는 향이랍니다. 차회는 하나의 약속이지요. 그래서 나는 오늘 선생님의 슬픈 마음을 읽었지요.' 돌아와 내가 피웠던 향을 살펴보았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향이었다. 나는 분명 우리나라의 대형불교상품점에서 가장 좋은 향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그 향이 일본에서는 장례식장에서나 피워지는 향이라니?

   그때부터 우리향을 찾아나서기 시작하였다.여러곳을 수소문하여 우리나라의 천연향을 찾으면서, 차계의 선배님들에게도 자문을 구했다. 그런 나에게 정산선생님께서 <백장청규> 복사본을 건네주셨다. 그 책속에는 우리 불교차문화와 일본다도의 원형이 그대로 담겨있었고, 불교 향문화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차동호인들과 <백장청규>를 공부를 시작하면서, 아직 정리되지 않은 불교차문화사 정리의 필요성과 우리 향문화의 한 줄기를 알게 되었다. 또한 늘 차기록을 찾다보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향에 관한 기록이 눈에 띄였다. 왜 그럴까? 차가 만드는 여러 의문의 동심원의 하나였다. 그 의문의 동심원을 따라 우리향문화를 찾아볼까 한다.


 


차와 향생활 2 - 차 마실 때, 왜 향을 피우나



   향기로운 것은 잠이 들어도 향기롭다. 그 잠들어 있는 향기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 차생활이다. 마른 찻잎 속에 잠자는 향기를 깨워 한잔의 차를 따르면, 찻잔에는 대이슬을 머금은 찻잎에 담겼던 봄향기가 가득 피어난다. 그 차를 마시면 향기를 머금었던 청산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가 청산이 이고, 바라보는 청산이 바로 나이다. 그 자리에 향 한 자루가 피어오른다.

차를 마실 때, 왜 향을 피우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자리를 청정하게 하고, 화로에서 나는 잡내를 제거하기 위한 배려이다.

   우리나라의 향문화의 기원을 흔히 <삼국유사>에 실린 불교의 도입 시기인 묵호자에서 찾게 된다. 아직 불교가 신라의 국교가 되기 전인 19대 눌지왕 때, 중국의 양나라에서 의복과 함께 향을 보내 왔는데, 이 향으로 묵호자가 공주의 병을 고침으로써 향이 단순히 방향제가 아닌 질병의 치료에도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묵호자는 '향을 태우면 그 정성이 신성한 곳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향이 질병 치료 뿐만 아니라 소망을 비는 매개체로 쓰였다는 것과, 불교의 유임을 통하여 향문화가 전래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또다른 사서인 <한단고기>나 <규원사화>에 보면 이 향은 우리의 고대사와 직결된다. 웅녀가 먹었다는 쑥과 마늘은 향신료의 대명사이고, 우리 할아버지 환웅은 신단수를 타고 내려오셨는데, 왜 하필이면 여기에 '단(檀)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을까? 여기서 신단수의 단은 이른바 백단, 자단, 흑단의 단이라는 점을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흔히 박달나무 단이라고 새기지만, 향기로운 나무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뿐만아니라 <규원사화>에서는 단목을 향나무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신단수가 향기로운 나무였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향기롭다는 말이 우리말에서 '단내'라고 표현하는 것에서도, 신단수는 '단내가 신령스런 나무'의 한자식 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향나무와 쑥이 함께 나타나는 또 다른 예로는, 장례 의식 절차의 하나인 염(殮)이라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향나무를 삶은 물로는 머리를 닦고 쑥을 삶은 물로는 몸을 닦는다. 이는 우리가 신화라고 하는 환웅의 신단수와 웅녀의 쑥이 그대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대로 되살아나는 부분이다. 신화라고 부정하는 우리의 역사 속으로 죽어서야 비로소 돌아간다. 향나무와 쑥은 바로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상징하는 향기이기 때문이다.

무속에서도 죽은 자의 넋을 천도하는 씻김굿을 씻김이라고 하는 이유도 강신한 넋을 향물, 쑥물 그리고 청정수로 닦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향은 신화가 아닌 역사와 생활 속에서 함께 하고 있다.

그럼 이쯤에서 다시 스스로 반문을 한다. 향을 왜 피우는가? 그것은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향이 제 스스로를 태워 둘레를 맑게 하듯, 근본을 밝혀 이웃을 밝게 하는 일이다. 그렇게 나의 뿌리를 밝히는 의식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차례에서도 향을 피우고 차를 올리는 것을 보면, 차와 향은 아주 단단한 무형의 고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잠들어 있는 내 안의 향기를 찾는 일, 향기로운 향생활의 첫걸음이다.

향기로운 것은 또다른 향기로운 것을 만나는 길을 열어준다. 고요한 향을 피우고 정갈한 차를 마시는 자리에 향기로운 벗이 있다. 그 벗의 또다른 이름은 고요하고 정갈한 마음을 닮고자 노력하는 참다운 차인이 아닐까?


 


차와 향생활 3 -혹 향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혹 향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향기를 들을 때는 먼저 내 안의 더운 숨을 뱉어낸 뒤, 눈을 감고 가만히 코 안으로 밀려오는 향기를 듣는다. 이때 향기를 맡는다고 하지않고 듣는다는 문향(聞香)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문향은 동양의 향문화가 서양의 향문화에 비하여 보다 정적이고 사색적이라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는 말이다.

차를 마실 때, 특히 중국차를 마실 때는 특별히 문향배(聞香盃)라고 하여 기존의 찻잔 이외에 향기를 감상하는 찻잔이 하나 더 따라 나온다. 보다 본격적으로 향기를 즐기려는 중국인들의 배려라고 볼 수 있는데, 뜨거운 차를 한번 식혀 주는 일석이조의 효과까지 있어 실용적인 면과 어울린 감상예술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통도 실은 20-30년 안쪽에서 정립된 것이고 보면, 실용을 겸한 좋은 문화란 실로 발빠르게 전파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중국차관에 가면 눈을 감고 작은 문향배를 코에 가까이 가져가서 감상을 하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차맛보다 차향기가 먼저 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향도에서는 향기를 감상할 때는 우리의 통찻잔 만한 향완에 불씨를 담고 재를 묻은 다음 그 위에 감상할 향을 얹는다. 그리고 마치 차를 마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향완을 두손으로 잡아서 코 가까이 가져간 뒤, 한 손으로는 향완을 잡고 또 한손으로는 향완의 전부분을 감싸쥐어 향기를 모운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고 향기를 맡는다. 그리고 행여 내가 내쉬는 숨에 향기가 흩어질까 조심스레 고개를 왼편으로 돌려 날숨을 쉰다.

좋은 향기를 맡을 때는 이렇듯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는다. 깊은 산 속에 들어갔을 때 밀려오는 침엽수의 향기에 눈을 감고 두손을 벌리며 깊은 심호흡을 한다. 그때 왜 눈을 감을까? 하나의 감각기능이 사라지면 다른 감각 기능이 극대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귀로 듣는 향기의 곡에는 사뭇 우리 차인들에게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유현한 세계로 확대하는 기능이 있다. 그래서 향기를 연상의 예술이라고도 한다. 향나무 향냄새를 맡으면, 고향집 제사날이 떠오른다거나 깊은 산속의 사찰이 연상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한 예일 것이다. 아기냄새를 맡으면 자신도 모르게 어린시절로 돌아가 행복해지는 것도 또한 향기가 작용하는 연상작용의 일부이다.

그런데 이 향기의 가지수는 이 세상 사물들의 가지 수 보다 더 많다. 사물의 가지마다 포함된 복합의 향기가 서로 어울려 미묘한 변화를 주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감각기관이 인식하는 것은 극히 한정된 일부라고 한다.

향을 피운다. 조상님과 함께하는 향, 부처님과 함께 하는 향, 하느님과 함께 하는 향. 향을 피우면 그대로 조상님과 하는 시간이 되고 부처님, 하느님과 함께 하는 장소가 된다. 그 자리에서 차를 마신다. 어찌 경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듯 향 한자루에는 과거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있다.



 

차와 향생활 4 -향의 다양한 이름


   향은 그 형태에 따라 다양한 이름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인 자루 모양의 선향(線香), 뿔모양의 각향(角香), 모기향같이 말려있는 권향(卷香), 새알처럼 빚어서 만든 환향(丸香), 그리고 다식처럼 밖아서 만든 여러모양의 단향(團香), 나무재질을 작은 토막으로 만들어 피우는 편향(片香), 또한 향재료를 가루로 만들어서 피우는 분향(粉香) 등, 그 생김새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이렇게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가운데, 가장 우리 생활 가까이 있는 향인 자루향은 그 이름이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가 선향이라고 하는 향을 이웃 중국에서는 와향이라고 한다. 선향을 향로나 향꽂이에 수직으로 꽂지만, 재위에 수평으로 피우기 때문이다. 중국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굵은 향은 죽심향이라고 한다. 향가운데 대나무 심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주로 남방불교 문화권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기온이 높고 습기가 많은 그곳의 상황으로는 선향이 쉽게 눅어서 휘어지기 때문이다. 인도나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에서는 향이라고 하면 의례 죽심향을 일컫는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날 일본에서 출판된 향관련 서적을 보면, 일본 선향의 시조는 400년 전 조선인이라는 사실이다. 일본의 정창원에 보관된 유물 속에서 나온 기록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에 향로를 비롯한 여러가지 향료를 전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향을 만드는 기술과 재료까지 전해 받은 일본이 이제는 당당히 동양향문화의 선두주자가 되어 세계시장과 함께 우리 향시장을 석권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켜서 발전시키는 것과 그 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과의 큰 차이점을 단적으로 읽을 수 있는 한 부분이다. 이는 차문화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 향문화의 원형을 살피는 데 가장 관심을 끄는 자료는 안악3호분에 등장하는 귀부인들의 향생활이다. 세발 달린 몸에 투각이 된 뚜껑을 하고 있는 이 향로에서 우리는 적어도 4-5세기 경에 생활 속에서 향이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향로의 모양은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향로 모양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향로에서는 어떤 향이 피워졌을까? 대체로 향로의 모양을 보고 추론해 볼 수 있다. 불씨가 담겨 있고, 그을음이나 연기가 나지 않는 향을 피웠을 것으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아직 선향이나 권향이 나오기 전이고 가루향이 유행하기 전이므로 환향과 편향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귀족들의 분위기로 보아서 당시 최고급향인 침수향이나 전단향이 아닐까?

여기서 하나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 향생활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향이라고 하면 근엄한 제사나 불사를 떠올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이른 시기의 고구려 고분벽화의 한 장면은 향에 관한 그릇된 편견을 버릴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차와 향생활 5 -신라시대 향문화 흔적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에게 흔연히 복종하고 용화향도라고 불렀다고 한다.(公年十五歲爲花郞 時人洽然服從 號龍華香徒 <삼국사기>) 여기서 나오는 용화향도는 신라의 불교가 토착신앙과 결합한 미륵신앙의 형태로 결성된 신앙결사단체이다.

이 향도가 고려시대의 향도로 이어지고 그 향도의 전통이 다시 조선시대의 두레로 계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보기 드문 전통문화이다. 이 용화향도는 다시 고려시대의 향을 땅속에 묻었던 향도로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항두 상두로 변모하여 오늘날의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상두꾼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신라시대의 화랑이 조선시대의 재인집단인 화랭이패로 이어졌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여야 한다.

오늘날 전통 유교의식에서 망자를 목욕시키고 염을 하는 과정에서, 쑥으로는 몸을 씻고 머리는 향나무를 삶은 물로 목욕을 시킨다. 여기서 앞서 살펴보았던 환웅과 웅녀의 신단수의 단과 웅녀의 쑥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단군이 신선이 되었다는 산의 이름이 묘향산(妙香山)이고 보면, 우리의 향역사를 묵호자 시대로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한다.

더욱이 김유신이 불교적 의식이 아닌 심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향문화는 불교나 유교에 습합되기 전의 우리의 고선도 문화형 속에서의 향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 홀로 보검을 차고 인박산의 깊은 계곡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기를 중악에서 하였던 서원을 빌었다.

獨携寶劒 入咽薄山深壑之中 燒香告天 祈祝若在中嶽誓辭 <삼국사기>

여기서 <소향고천(燒香告天)>하는 의식은, 오늘날 목욕제계를 하고 향을 피우는 청정한 몸과 마음을 위한 바탕으로 보인다. 여기서 하늘과 명산대천에서 올리는 고선도의 독특한 문화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에 등장하는 향로 또한 예사롭지 않다. 흔히 <예불도>라고 소개되는데, 그 부처님의 모습이 신수 훤한 우리 할아버지 모습을 그대로 닮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유입되었어도 여전하였던 우리 고대 신앙의 한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신라시대의 향문화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흔히 에밀레종이라고 하는 성덕대왕(聖德大王)의 신종(神鐘)에는 연꽃형태의 향로를 들고 있는 비천상(飛天像)이 남아있고, 경주 단석산(斷石山) 마애불상군에서 나타나는 향공양상은 신라시대의 향로 가운데 청동으로 제작된 향로가 적지않았음을 증명한다. 안압지(雁鴨池)에서 반견된 납석(臘石)으로 된 향로 뚜껑은 신라에는 다양한 재질과 형태의 향로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잘 증명해 준다.


 


차와 향생활 6-진감선사


   우리 향문화사를 정리하다보면 아주 걸출한 향인을 만나게 된다. 바로 진감선사이다. 진감선사는 우리나라 차문화의 주요 유적지인 지리산 화개동의 쌍계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고, 그의 행적이 기록된 비문에는 무엇보다도 우리 선종의 차문화를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남기고 있어 주목받아 왔다.

어쩌다 향(胡香)을 선물하는 이가 있으면 질그릇에 잿속에 묻은 불을 담아 환을 짓지 않은 채로 사르면서 말하기를 "나는 냄새가 어떠한지 분별하지 못한다. 마음만 경건히 할 따름이다."하였으며 , 다시 차(漢茗)를 올리는 이가 있으면 땔나무로 돌가마솥에 불을 지피고는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맛이 어떠한지 분별하지 못한다. 뱃 속을 적실 뿐이다"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싫어함이 모두 이러한 것들이었다.

或有以胡香爲贈者, 則以瓦載 灰, 不爲丸而 之曰, 吾不識是何臭, 虔心而已, 復有以漢茗爲供者, 則以薪 石釜, 不爲屑而煮之曰, 吾不識是何味, 濡腹而已, 守眞 俗, 皆此類也

이 기록으로 하여 진감선사가 선풍을 날리던 시대는 가루차의 시대이자, 향재료를 가루로 내어 다시 환으로 향을 피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호향은 당시 당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안식향, 전단향, 유향, 침향 등이었을 것이라는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기록은 '질그릇에 잿속에 묻은 불을 담고, 향을 환으로 만들지 않고 태운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라시대의 향로를 하나로 질그릇을 찾을 수 있고 그 피우는 방법 가운데, 그 질그릇에 잿불을 담고 가루향을 환을 만들어서 잿불 위에 올려놓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가루향을 환으로 빚을 때는 꿀을 사용하는데, 꿀은 향에 단 맛이 돌고 하고 다른 향재료들이 보다 더 잘 어울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진감선사는 가꾸어진 향 보다는 향이 지닌 본질 즉 마음을 경건하게 하는 향의 소임에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가루향을 다시 환을 만들고 화려한 향로에 향을 피웠다는 사실을 위의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싫어하는 구체적인 진감선사의 삶을 설명할 때, 이 향과 차의 일화가 등장한 것이다. 또한 이 일화는 우리나라의 차문화나 향문화를 이웃의 일본이나 중국의 문화와 비교할 때, 바로 조선분청막사발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무기교(無技巧)의 멋을 추구하는 우리의 마음의 한부분으로 인용되는 부분이다.

진감선사의 향생활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최치원이 찬한 진감선사의비문에서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진감의 어린시절이 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태어나면서 울지 않았으니, 곧 일찍부터 소리가 작고 말이 없는 거룩한 싹을 타고 났던 것이다. 젖니를 갈 무렵이 되자, 아이들과 놀 때에는 반드시 나뭇잎을 태워 향이라고 하고, 꽃을 따서 공양하고, 간혹 서쪽을 향해 바르게 앉아 해가 기울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나뭇잎을 태워서 향이라 하고 꽃을 따서 공양하고 서녁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소년의 마음자리, 그 자리에 우리의 멋스런 차와 향생활의 싹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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