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 보는 조선시대 이야기 (청년사/정연식)
![](http://image.aladdin.co.kr/cover/cover/8972783501_1.gif)
기생과 조선왕조 따지고 보면 조선왕조의 기녀다툼은 유래가 깊은 것이어서, 전주 이씨 태조 이성계가 관향인 전주에서 태어나지 않고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나게 된 것도, 사정의 발단은 그의 고조부 목조(穆祖) 이안사가 전주에 있을 때 관기 문제로 인하여 전주의 수령과 산성별감의 비위를 거스른 데 있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안사는 삼척으로 피신했으나 공교롭게도 예전의 산성별감이 그곳에 안렴사로 부임하게 되자 다시 함경도 덕원으로 이사하여 우여곡절 끝에 이성계가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초헌 가마라기보다는 수레에 가깝지만 특이한 것으로 2품관 판서급 이상의 관리들이 타고 다니던 초헌이 있다. 초헌은 일반 가마와는 달리 외바퀴 위에 높다랗게 좌석이 놓여 있고, 좌석 앞뒤로 길게 뻗친 끌채 양끝에 가로막대를 꿰어 이것을 밀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초헌을 끌고 가는 구종들은 특별히 키가 큰 사람을 골라 썼다. 초헌은 중국 사신이 신기하다며 한번 타보고 싶다고 해서 잠시 태워준 일도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세종 때 처음 만든 조선 특유의 탈 것이다. 초헌은 좌석이 높게 올라 있어 주위를 압도하므로 고위 관원의 위세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은사의 상징 소 말이 화려한 관원의 것이고, 나귀가 초야에서 학문을 익히는 선비의 것이라 한다면, 소는 세상일을 등지고 사는 은사의 것이었다. 노자가 함곡관을 나서 인도로 갈 때에 푸른 소를 타고 갔다는 말도 있듯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사는 은사가 타고 다니던 것이 소였다. 그래서 소를 탈 때에는 상식적인 격식을 내던지고 거꾸로 타는 것을 멋으로 여겼다. 술에 취해 소를 거꾸로 타고 세속의 일을 잊어버린 채 느릿느릿 건들거리며 가는 처사를 풍류와 격을 아는 진정한 처사로 여겼던 것이다. (일제때 일화 - 염상섭, 이관구, 오상순, 변영로)
문관은 나귀, 무관은 말
말과 나귀는 상징하는 바도 달랐다. 조선시대의 그림에도 그런 관념이 배어 있는데, 겸재 정선의 '설평기려'라는 그림에는 추운 겨울에 휘항을 덮어 쓰고 나귀를 타고 가는 선비가 나오는 데 반해, 공재 윤두서의 '기마인물도'를 보면 봄빛이 완연하여 잎이 파릇파릇한 화창한 날에 관복 차림에 당당하게 말 등에 오른 관원이 등장한다. 나귀는 싸구려인데다가 키도 작고 볼품도 없지만 오히려 그런 점에서 검소하고 질박한 선비의 상징물로 세속에 때묻지 않은 문인들의 상징으로 시나 그림에 등장하곤 하였다. 이는 당나라 시인 맹호연과 정계가 나귀 등 위에서 시상이 가장 잘 떠오르더라는 말을 남겨서 더욱 그랬다. 특히 맹호연은 초봄이 되면 나귀를 타고 장안 근처 파교를 건너 아직도 잔설이 덮인 산속의 매화꽃을 찾아다녔다 하여 이 고사를 소재로 한 <파교심매도>가 중국이나 한국 민인들의 그림에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나귀는 지구력은 있지만 기동성이 없었기 때문에 무신들은 말을 타야했다. 무신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터에서 말을 타고 달려야 되는데 평소에 느릿느릿 나귀를 타고 다녀서야 실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나귀는 허리와 어깨 쪽의 힘이 약해 엉덩이 쪽을 걸터앉아 타야 하므로 제어하기도 힘이 들어서 군마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무신들은 말을 타고 다니게 하고, 말을 타더라도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이 아니면 고삐잡이를 못 두게 되어 있었다.
버새와 노새 한편 암탕나귀와 수말을 교접시켜 낳은 것은 버새라 하고, 암말과 수탕나귀를 교접시켜 낳은 것을 노새라 하는데 노새는 말보다 힘이 훨씬 세어 운송용으로 제격이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소는 농사짓는 데 썼고, 말을 타고 다니는 데 썼으며 노새나 나귀는 짐을 실어 나르는 데 썼다. 다만 노새는 새끼를 못 낳는 것이 흠이었다.
불교에 호의적이었던 왕들
조선시대의 불교는 내내 억눌려 있기는 했지만 왕의 성향에 따라 적잖은 기복이 있었다. 세종과 세조는 비교적 불교에 호의적이었다.태조 이성계만 하더라도 무학대사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불교에 어느 정도 숨통을 터놓았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도첩제도를 엄하게 시행하여 많은 승려들을 환속시키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고 왕사.국사 제도도 폐지했다. 왕릉 근처에 죽은 왕의 명복을 빌고 재를 올리는 일을 담당할 원찰을 짓는 것도 금지하였다. 태종 때의 불교탄압이 얼마나 심했는지 벽송 지엄에게 선종의 법맥을 전했던 벽계정심은 당시 절에도 머물지 못하고 김천 직지사를 떠나 황악산 너머 물한리라는 곳에서 오두막을 짓고 땔나무를 팔아 연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올 정도이다.
그러다가 세종 후반기부터 상황이 조금씩 나아졌다. 세종은 48세 때에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을 잃고 이듬해에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마저 잃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금슬 좋던 소헌왕후와 사별하게 된 데다가 건강마저 악화되자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불교에 마음을 기울이게 되었다. 또 세종의 형님 효령대군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래서 경복궁 안에 내불당을 두었더니 유생들의 반대가 빗발쳤다. 세종은 수랏상을 물리치는 철선으로 단식투쟁을 하고 넷째아들 임영대군 집으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하였지만 그래도 유생들의 반발이 수그러들지 않자 결국 왕위를 내어놓겠다고 협박하여 반대를 무마할 수 있었다.
세조는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황보인을 죽이고 그 이후로도 노산군을 죽이는 등 손에 많은 피를 묻혔다. 세조는 자신의 업보를 어떻게 해서든지 씻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원각사를 짓고, 불경을 간행하게 하였으며 자신은 오대산 상원사, 양양 낙산사, 금강간 건봉사 등을 전전했다. 그 틈에 많은 절들이 잠시나마 평안한 호시절을 누렸다.
내리막길을 걷던 불교가 크게 기세를 펴게 되었던 때는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모후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할 때였다. 승과가 부활되었고, 어마어마한 규모로 양주 회암사가 중창되었으며 봉선사.봉은사가 교종.선종의 대표사찰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문정왕후가 죽고 나자 문정왕후의 후원을 받으며 불교계의 거봉으로 추앙받았던 태고 보우에게는 요승이라는 딱지가 붙어 당장 잡아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명종이 이를 가까스로 무마하여 제주도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결국 보우는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매맞아 죽고 말았다.
동냥 원래 동냥이란 말도 작은 종을 흔든다는 동령(動鈴)에서 나온 것이다. 고려 때 중들이 나귀를 타고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종을 흔들어 양식을 얻어가는 것을 동령이라 했는데 이 말이 천한 구걸을 뜻하는 말로 바뀌고 만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사또가 새로 부임하면 관아에서 잡일하는 사령들이 고을 원님께 문안인사 올릴 비용을 내라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종을 흔들어 대어 명분 없는 비루한 토색질에도 동령이란 말이 따라붙였다.
천연두와 장승
소독약의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전염병에 대한 최선의 방책은 그저 맞서 싸우지 않고 피하는 것이었다. 천연두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들어온 두창신은 무서워서 내쫓지 못하니 아예 처음부터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래서 마을 어귀에 마마를 막는 장승이나 벅수를 세워두기도 하였다.
장승은 본래 이정표를 겸하면서 마을에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마마신이 이정표를 보고 쉽게 찾아올 것을 염려하여 얼굴을 무섭게 만들어 비켜가게 하였다. 지금도 영암 쌍계사 터나 남원 실상사 입구에는 주장군, 당장군의 이름을 써넣은 장승이 남아 있다. 중국에서 온 강남사령, 호귀마마를 중국 주나라, 당나라의 무서운 장군을 내세워 물리치려는 것이다.
장승 가운데는 아미산(峨嵋山)의 이름을 새긴 것들도 보인다. 중국 사천성의 아미산은 경치가 뛰어나 신선들이 살고 있다던 산이다. 송나라 때 왕단이라는 사람이 맏아들을 마마로 잃고 나서 둘째아들이 다시 마마로 걸리자 전국의 의사, 술사들을 모아 치료하게 했는데, 이때 아미산에 살고 있던 도사가 둘째아들을 낫게 한 후로 아미산을 마마쫒는 신선이 사는 곳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잡상과 선전관청의 면신례
선전관청의 면신례 때에는 반드시 대궐문 누각 지붕마루 위에 놓여 있는 잡상 열개의 이름을 외게 했다. 잡상 열 개에는 대당사부, 손행자, 저팔계, 사화상, 마화상, 삼살보살, 이구룡, 천산갑, 이귀박, 나토두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대당사부는 이른바 삼장법사 현장을 가리키는 것이고 손행자.저팔계.사화상도 '서유기'에 등장하는 것들이지만 나머지는 도교의 잡귀들로서 평상시에는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것들이었다. 이 생소한 괴물들의 이름들을 숨을 쉬지 않고 단숨에 순서대로 하나도 틀림이 없이 열 번을 외게 했는데 만약 제대로 못하면 선전관청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이 풍속의 유래는 <어우야담>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선조 때 선전관청에 입사한 유조생이란 사람이 숨을 들이마신 채 오래 참으몬 기가 몸 안에 축적되어 장수한다는 괴이한 양생법을 듣고 매일 연습을 한 덕택으로 어느날 배를 타고 물을 건너다 뜻밖의 사고로 배가 가라앉자 물밑으로 걸어나와 살아났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 말이 과연 사실일까? 사실이고 아니고 간에 온갖 머리를 짜내서 어떻게 해서든지 신참을 골려먹으려는 고참들의 속셈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오래된 구경 - 살구꽃과 복사꽃 구경
금강산이나 대동강 구경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고, 사대부들에게도 어지간해서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봄이면 진해 벚꽃놀이, 가을이면 내장산 단풍구경이 전국적으로 열병처럼 번져 꽃구경, 단풍구경이 아니라 사람구경으로 북새통을 이루지만 도로와 교통 수단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그 먼 곳까지 구경을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놀이터로는 가까운 곳 가운데 경치 좋은 산속에 맑은 냇물이 흐르는 골짜기가 적격지였다. 서울로 말하자면 삼청동, 인왕산 및 인왕동, 성균관 위 골짜기의 쌍계동, 남산 및 골짜기 청학동이 이름을 떨쳤고 성 밖의 놀이터로는 맑은 물로 유명한 세검정 쪽 장의사(藏義寺) 앞 시내가 유명했으니 풍류남아 안평대군의 별장 무이정사도 그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구경 중에서 아름다운 풍경 구경이 주류를 이루었거니와 구중에도 봄의 꽃구경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단풍구경도 있었지만 꽃구경만큼 성했던 것 같지는 않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무슨 꽃을 구경했을까? 물론 벚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벚나무밭은 꽃을 구경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활의 재료인 벚나무 껍질을 얻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우이동 골짜기 벚나무는 어느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18세기 중엽 홍양호가 통신사에게 부탁하여 일본에서 얻어온 묘목을 심은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이라고도 하고, 17세기에 효종이 병자호란의 국치를 설욕한다고 불벌준비를 위해 심어놓은 것이라는 말도 있다. 지리산 쌍계사 십리 벚꽃길의 벗나무도 병자호란 후에 창자루나 칼자루를 얻으려고 심어놓은 것이라 한다. 그러니 벚꽃에 대한 감상은 심드렁했던 모양으로 이에 대해 남긴 기록을 거의 찾아 볼 길이 없다.
또한 꽃의 왕이라는 모란은 부귀의 상징으로 병풍그림에도 자주 등장하고, 국화나 매화는 세속을 벗어나 숨어사는 은사의 꽃으로 유명하지만 그런 귀티 나는 꽃이야 일부 감상가들의 눈길을 끌었을 뿐 보통 사람들은 산에 들에 무더기로 피어 장관을 이룬 꽃을 보러 다녔다. 그러면 옛날에는 진달래, 개나리를 보러 다니지 않았을까 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두견화 진달래나 야백합 개나리는 그다지 인기 있는 꽃은 아니어서 진달래, 개나리를 보러 일부러 수고스럽게 나들이를 하는 일은 드물었다. 옛날 꽃구경은 동요에도 나오듯이 복숭아꽃 살구꽃이 으뜸이었고, 다음으로 오얏꽃, 배꽃, 철쭉꽃이 뒤를 이었다. 진달래는 그 다음이었다.
아름다운 꽃 하면 복사꽃이었고, 특히 연분홍빛으로 발그레하게 피어 이슬을 머금은 복사꽃 노도화는 화사하고 요염한 아름다움의 백미로 꼽혔다. 그래서 빙허각 이씨는 <규합총서>에서 복사꽃을 요객이라 불렀고, 나중에는 도화살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던 것이다. 그런 관념이 아름다운 복사꽃이 만발한 무릉도원을 이상적인 세계로 만들어 놓았다. 조선 전기 그림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일컫는 <몽유도원도>도 안평대군이 꿈에 본 복사꽃 마을을 안견을 시켜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그 복사꽃으로 유명했던 곳이 지금의 성북동에 해당하는 성 밖 북둔이었다. 늦봄이 되면 복사꽃이 장관을 이루어 꽃구경 나온 사람들과 말, 가마가 뒤엉켜 북둔 산골짜기를 메웠다 한다. 초정 박제가가 서울풍경을 읊은 <성시전도>에서 북둔 풍속에 복숭아나무 심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했듯이 그곳 사람들은 너 나 할 것이 없이 복숭아나무 열매를 팔아 살림에 보탰다고 한다. 이밖에도 이름마저 복사골인 도화동이 유명했지만 북둔보다는 한 수 아래였다.
한편 살구꽃은 살구나무가 서울 안 곳곳에 널려 있어 자하 신위의 시에도 "왕성 10만 호가 봄이 오면 모두 행화촌이 된다."고 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했던 곳이 인왕산 및 필운대였고, 그 다음으로는 바로 옆의 세심대를 꼽았는데, 음력 3월 한 달 내내 술병을 차고 밀려드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곤 했다 한다. '필운'은 중종 때 명나라 사신이 인왕산의 별명으로 붙여준 이름인데 한편으로는 오성대감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호로서, 필운대라는 이름도 이항복이 장인 권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할 때 바위에 새겨둔 글자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한편 세심대는 1791년에 정조가 이곳에 올라와 신하들과 함께 활도 쏘고 시도 지으면서 즐긴 일이 민간의 연례 행사가 되면서 필운대 버금가는 곳으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세심대도 봄이 되면 꽃구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 틈에 한몫보려는 술장수, 떡장수에 기생들이 모여들고 화전과 꿀떡을 파는 이동식 주방까지 설치되어 법석이 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