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장동팔경도(壯洞八景圖)중 세심대(洗心臺)

2016. 2. 6. 20:33美學 이야기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도(壯洞八景圖)중 세심대(洗心臺) | 고문에 관한 글

李澤容(이택용) 2013.08.31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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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팔경(壯洞八景)’은 청송당(聽松堂) · 취미대(翠微臺) · 백악산(白岳山) · 청하동(靑霞洞) ·

청풍계(淸風溪) · 수성동(水聲洞) · 인왕산(仁王山) · 세심대(洗心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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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제 정선의 한양1 - 장안연우(長安烟雨)와 장안연월(長安烟月)


 이종현 2009.03.05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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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제 정선의 한양1 - 장안연우(長安烟雨)와 장안연월(長安烟月)



정선(鄭歚, 1676년 ~ 1759년)은 조선의 화가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 (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이다.

20세에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중국남화(南畵)에서 출발했으나 30세를 전후하여

한국산수화의 독자적인 특징을 살린 산수사생(山水寫生)의 진경(眞景)으로 전환하여

동방 진경산수화의 종화(宗畵)가 되었다.

여행을 즐겨 금강산 등의 전국 명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심사정(沈師正), 조영석과 함께 삼재(三齋)라고 불렀다.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主調)로 하여

암벽(岩壁)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일대에 그쳤다.

문재(文才)가 없었던 탓으로 다만 서명과 한두 개의 낙관(落款)만이 화폭 구석에 있을 뿐,

화제(畵題)가 없는 것이 이채롭다.


화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입암도(立巖圖)>, <혼혼해색도(混混海色圖)>,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선인도해도(仙人渡海圖)>, <산창유죽도(山窓幽竹圖)>,

<의송관란도(倚松觀瀾圖:扇面)>, <노산폭포도(盧山瀑布圖)>,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

<청풍계도(淸風溪圖)〉그리고 개인 소장의 <금강산 정양사도(金剛山正陽寺圖)>,

<해금강도(海金剛圖)>, <노산초당도(盧山草堂圖)>, <통천 문암도(通川門巖圖)>,

<봉래산 불정대도(蓬萊山 佛頂臺圖)>,<석굴암도(石窟庵圖)>,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금강전도(金剛全圖)> 외에 다수가 있다.

(출처:위키백과)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은 인왕산 자락에 살면서 한양의 모습을 그린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가 자란 백악산밑 장동주변의 여덟 개의 경치를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을 남겼고,

그가 살던 인왕산 인근을 그린 작품인

인왕제색도, 필운상화, 청풍계, 풍계유택 등을 남겼다. 

더불어 양천현령으로 재직할 때 한강을 오가며 그린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은

한양인근의 산과 강, 그리고 가옥과 인물들의 모습을 그린 33장의 작품으로

그의 평생 지기인 이병연의 시와 함께 남겼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그의 저서 '겸재의 한양진경'에서

겸재의 한양작품 58편을 소개하고 있다.

 

그가 남긴 한양의 작품은

조선시대의 도성의 모습을 상상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리얼(?)한 작품으로,

그때와 크게 변한 현재의 모습과 비교하며 상상해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장안연우(長安烟雨)

- 비 안개 내려앉은 아름다운 도시 한양 -

 

 

비 온 뒤 모락모락 피어오른 안개가 도성을 덮고 있는 모습을 백악의 기슭에서 그렸다.

멀리 목멱산(남산)이 선명하고

그뒤에 톱날같은 관악산과 청계산, 우면산이 늘어서 있다.

좌우로 서있는 백악과 인왕산이 목멱산과 함께 능선을 연결하여

성벽으로 도성을 감싸고 있는데 림 오른쪽 중간쯤

인왕산의 성벽이 돈의문(서대문)방향으로 내려가고 있다.

임진왜란때 파괴된 경복궁은 궁궐의 자격을 잃어 수풀만 무성한데

뒤쪽의 집 한 채는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1670∼1718)의 사당인 육상궁으로

일부가 지금 청와대 서쪽의 궁정동에 있다.

인왕과 백악사이의 계곡에서 발원한 청계천이

계곡을 따라 내려가며 안개를 머금고 있고

멀리 목멱아래 넓게 드리운 안개와 만나 숭례문을 감추고 있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장안연우를 보며

‘꿈속의 도시인 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 서울 장안의 진경’

이라 평하였다.


 

  

장안연월(長安烟月)

- 잠자는 한양, 꿈꾸는 도성 -

 

 

 

보름달 떠오른 어느날,

겸재는 장안연우를 그린  장소에  올라가 장안을 바라본다.

만호장안 백성의 잠자리를 덮어주고 있는 그윽한 안개를

목멱 뒤에 떠오른 보름달이 훤히 비추고 있는 광경을

잠든 사람 깨우지나 않을까 하여 조심조심 붓을 그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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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제 정선의 한양2 - 삼승조망(三勝三勝朓望), 삼승정(三勝亭),   옥동척강(玉洞陟崗)

이종현 2009.03.05 21:44


겸제 정선의 한양2 - 삼승조망(三勝朓望), 삼승정(三勝亭),

                   옥동척강(玉洞陟崗)




삼승조망(三勝朓望)

- 삼승정의 눈으로 본 한양 -

 

 

영조 16(1740)년, 개인 소장

동아일보사, 『겸재의 한양진경』, 최완수, 2004년, 43면 전재(轉載)

 


이춘제는 세종의 왕자 영해군(寧海君) 당(瑭)의 10대손으로 판서를 지낸 인물로

인왕산 아래 옥류동에 살며 정선과 절친한 사이였다.

그의 후원에 있는 정자를 삼승정(三勝亭)라 하였는데,

삼승정에서 바라보는 한양전경을 친구인 겸재 정선이 그렸다.


인왕산 동쪽 삼승정에서 좌우 펼쳐진 인왕과 북악산 자락이 보이고

돌기둥만 남아있는 경회루와 송림으로 둘러 쌓인 채 페허가 된 왕궁인 경복궁,

경복궁 북문 뒤 현 청와대자리에

신하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인 회맹제을 거행하던 공신회맹단(功臣會盟壇),

광해군이 짓다가 인조반정으로 파괴되어 간 미완의 궁궐인 인경궁터,

멀리 늘어선

관악산,

목멱산,

응봉(?)

각각 작은 글자를 써서 그 위치를 표시하였다.


그의 그림 장안연우를 그렸던 날보다 따스한 날

삼승정 그 아래 펼쳐진 장안의 광경을 그윽히 내려다보며 먼 눈길을 던지고 있다.


강영조는 「풍경의 발견」에서,

‘...자기가 사는 장소를 되돌아보는 이 회억(回憶)의 조망을 맛보는 장소로서

삼승정은 각별하다.

그의 시선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윽고 멀리 회유한다.

폐허가 된 궁성을 지나 멀리 남한산성으로, 관악산으로 자유로이 활보하던 시선은

이윽고 자기가 있는 뜰안으로 되돌아온다....

아늑한 자기 공간에서 눈 아래에 펼쳐지는 광경을 내려다보는 이 시선을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에서 지배자적인 시각이라고 했지만

나는 자기 삶이 뿌리내리고 있는 대지, 그 아늑한 장소를 새삼 확인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삼승의 조망을 조망했다.


 

삼승정(三勝亭)

- 시와 그림 그리고 정자, 이병연과 정선 그리고 이춘제 -


영조 16(1740)년, 개인 소장

동아일보사, 『겸재의 한양진경』, 최완수, 2004년, 43면 전재(轉載)


이춘제는 영조 16년(1740년) 6월에 정선에게

자기집 후원에 있는 정자를 그려달라고 부탁을 하고

이에 정선은  정자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

이 때 이춘제는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나중에 영의정을 지낸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 : 1691~1752)에게 편지로 정자에 대한 이름과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이에 관하여 조현명의 문집 귀록집서원소정기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정자가 이루어진 것이 이춘제의 나이 49세가 되는 해다. 그런 까닭으로 이춘제은

정자의 이름을 사구정이라고 이름을 지을까, 또 세심대와 옥류동 사이에 있으니 세옥정(세옥정)

이라고 지을까 생각하면서 나에게 정자 이름을 청하였다.

이에 나는 정자에 올라 시를 지을 때 ‘사천 이병연의 시와 겸재 정선의 그림을

좌우에서 맞아들여 주인노릇을 한다‘라는 것에서 이름을 취해 삼승정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삼승정이란

‘정자의 빼어난 것이 이씨(二氏)를 만나서 삼승(三勝)을 갖추게 되었다’

라는 뜻을 담았고 이에 입각하여 기(記)를 지었다.


시를 잘 짓는 이병연과 그림을 잘 그리는 정선

빼어난 경치의 인왕산 기슭에 자리잡은 이춘제의 소박한 정자 삼승정

그들의 친구 조현명

그들은 그렇게 자연속에서 인간을 쌓아 나갔다.


 

 

옥동척강(玉洞陟崗)

- 옥동 언덕을 오르는 7인의 시사 -

 


 영조 15(1739)년, 개인 소장

 중앙일보 「계간미술」, 『겸재(謙齋) 정선(鄭歚)』, 2001년, 도 27 전재(轉載)




인왕산 옥동 언덕을 오르는 시서화를 즐기는 일곱 문인들의 풍류를 화폭에 옮긴 그림.

이춘제는 옥류동에 살면서 자신의 후원인 서원(西園)에서 아회(雅會)를 가졌는데

이때 조명현, 송익보, 서종벽, 심성진, 이병연 그리고 그림을 그린 정선 등이 참석하였다.


이들은 아회를 마친 뒤 옥류동에서 청풍계로 넘어가는 등산을 하였다.

이 때 이병연은 아회를 기리는 진경시를 지었고

정선은 등산장면을 진경산수화로 그렸는데 바로 옥동척강(玉洞陟崗)이다.


이미 피안인데 피안을 찾아 나서는 도인들의 유유함이 선하다.



삼승조망(三勝朓望), 삼승정(三勝亭), 옥동척강(玉洞陟崗)

이 세 그림은 정선에게 선물로 받은 이춘제가

한 시화첩으로 묶어 놓아 후대에 전해져 오는데

그들의 우정도 함께 전해져 오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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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인왕산


구구시 2010.12.21 02:50

 

안현석봉(鞍峴夕烽)

 




 

겸재 정선이 양천현의 현령으로 부임하여 양천현의 진산인 파산에서

한강 건너 인왕산 옆에 있는 안현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으로

해 떨어질 무렵 봉화불이 피어오르는 안현(鞍峴)의 봉우리와 그 뒤로 자리잡은 인왕산과

머리만 빼꼼히 내민 백악이 보인다.

 

안현(鞍峴)의 저녁 봉우리(夕烽)에 피어오른 봉화(烽火).

 봉화는 평안도 국경의 정세를 알려오는 군사통신제도로

평안도 의주에서 오는 해안 두 르트와 평안도 강계에서 오는 내륙루트가

 안산(무악산)에서 만나 목멱산으로 전해졌다.

 

도성주변 산들이 보며 그림을 그린 곳은 양천현이다.

 양천현 앞의 공암나루터 가까이 배가 지나가고 있고

오른쪽 큰바위는  광주바위(옛날 큰 홍수가 났을 때

경기도 광주에서 떠내려 왔다는 전설의 바위)이고 작은 바위는 큰 구멍이 뚤려있는 공암바위로

지금은 그 앞으로 88올림픽대로가 개통되어 공암은 사라지고

광주바위만 새로 조성된 호수공원 안에 갇혀 있다.

 

약간 어스름한 저녁 무렵 안현의 봉화가 조용히 피어오를 때


인왕은 듬직히 도성을 지키고 다.

 



 

인곡유거(仁谷幽居)

 



 

인곡(仁谷)은 인왕계곡을 이르는 말이고 유거(幽居)는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외딴 집을 이른다.

겸재가 52세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던 집이 있던 곳이 인왕곡으로

현재 옥인동 군인아파트가 있는 터이다.

옥인동은 계곡 위쪽의 옥류동과 아래쪽 인왕곡을 합쳐 일제시대에 만든 이름이다.

 

스스로의 생활모습을 그린 자화경으로,

어느 여름날 겸재는 방문을 활짝 열고 잎이 무성한 버드나무와 오동나무가 자라는 후원을

바라보고 있다.

 

인왕의 오른쪽 줄기에서 뻗어가는 련봉(碧蓮峰, 현재의 기차바위)이 차분히 뒤를 감싸고 있다.

벽련봉 위에는 겸재의 한양진경을 쓴 최완수 선생이 

'보이는 이의 눈에만 보인다!'는 공모양의 부침바위가 붙어있다. 

 


 

인곡정사(仁谷精舍)

 

 

인곡유거의 집이름(택호)은 인곡정사(仁谷精舍)

친구 이병연의 시와 어울린 '인곡정사(仁谷精舍)'라는 그림이다.

 

 


수성동(水聲洞)

 

 

'수성동(水聲洞)'은 현재의 옥인동과 누상동의 경계가 되는 지역으로

계곡 물소리가 잘들리는 한적한 계곡을 이르는 곳인데

동자를 거느린 세 선비가 기린교라는 작은 돌다리를 건너 인왕으로 올라갈 기세다.

 

지금은 40년동안 이곳에 자리잡았던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고

복개도로와 콘크리트 등으로 훼손된 부분을 원래 모습으로 살려 녹지로 조성하고 있다.

 

서울시는 최근 계곡 191m 구간과 아파트 앞 돌다리(기린교로 추정되는 다리)를

서울특별시 기념물 `인왕산 수성동 계곡`으로 지정했다

 

 


옥동척강(玉洞陟崗)

 

 

 

1739년 여름 겸재를 비롯한 8명의 동료가 이춘제의 집 후원인 서원(西園)에서 작은 모임을 가졌다.

 

서원에서 시작한 모임은

옥류동 산등성이를 넘어 세심대(洗心臺)를 지나 청풍계(淸風溪)에 이르는 산행을 하게 되는데

옥동의 언덕을 넘는 '옥동척강(玉洞陟崗)' 장면을 화폭에 담아

그날의 기록과 함께 시화첩(西園雅會帖)을 남겼다.


 

 

풍계유택(楓溪遺宅)

 

 

옥류동 산등성이를 넘으면 청풍계(淸風溪)에 이르는데

겸재가 어렸을 적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어 생활이 곤궁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외조부 박자진의 집이 있는 곳이다.

 그의 집은 그의 호 풍계(楓溪)-단풍이 아름다운 곳-를 써서 '풍계유택(楓溪遺宅)'이라 하였다.

 

풍계유택(楓溪遺宅) 대저택 뒤로 인왕산 자락이 펼쳐지고 있다.

 


 

청풍계(淸風溪)

 

청풍계(淸風溪),1730년, 비단에 채색, 96.2×36, 고대 박물관



 

청풍계(淸風溪)

 

청풍계(淸風溪),1739년, 비단에 채색, 153.6×59, 간송 미술관

 

'청풍계(淸風溪)' 는 고대 박물관과 간송 미술관 소장의 두 작품 이외에

더 많은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청풍계(淸風溪)는 현재의 청운동(과거 청풍계와 백운동을 합한 지역) 54번지 일대의 골짜기 이름으로

원래는 푸른 단풍이 많아서 청풍계(淸楓溪)였으나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다 순국한

우의정 김상용(그의 아우는 김상헌은 병자호란 후 심양으로 3년간 끌려가  있었다)이

별장을 꾸미면서부터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이라는 의미의 청풍계(淸風溪)로 바뀌었다 한다.

 

인왕산 깊은 계곡 장동 김씨 대저택에 맑은 바람이 깊게 휘젖고 있는 듯 하다.


 

 

필운대(弼雲臺)

 



 




선조 때 백사 이항복은 장인인 권율의 집에 기거하면서 호를 필운(弼雲)이라 하였고

그 바위에 필운대(弼雲臺)라 각자를 새겼다고 한다.

현재는 배화여고 뒷편에 위치한 곳으로 필운대 각자가 남겨져 있고

고종 때 영의정이었던 이항복의 9대손 이유원이 조상의 집을 찾아와

그 감흥을 시로 써서 필운대에 기록을 남겼다.

 

중종이 중국사신에게 인왕산의 이름을 요청하여 '우측에서 임금을 보필한다'라는 뜻의

우필운룡(右弼雲龍)에서 인왕산의 또 다른 이름을 필운산(弼雲山)이라고도 한다. 

 

 

필운상화 (弼雲賞花)

 

 

한양 경치가 가장 잘 보이는 필운대.

필운대 근처에는 민가에  살구나무 등 여러가지 꽃과 나무를 심어

봄이면 꽃구경(賞花)을 위해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박지원 '필운대에서 살구꽃을 구경하다(弼雲臺看杏花)'에서

"꽃 아래에 천만인이 모였다"고 하여 살구꽃 필 무렵 엄청난 인파가 모여들어

따뜻한 봄날 꽃구경에 장관을 이뤘음을 알 수 있다.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는 서울의 문화와 역사, 지리를 설명한 책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필운대 옆에 꽃나무를 많이 심어서,

성안 사람들이 봄날 꽃구경하는 곳으로는 먼저 여기를 꼽는다.

시중 사람들이 술병을 차고 와서 시를 짓느라고 날마다 모여든다.

흔히 여기서 짓는 시를 ‘필운대 풍월’이라고 한다.'

고 필운대를 소개하였다.

 

조선시대 인왕산 살구꽃 구경의 전통이 여의도 벗꽃 구경으로 이어져 오고 있나보다.

 


 

육강현(六岡峴)

 

 

후배 조영석이 이 그림을 설명하며 '농은당에서 육강현(육각현을 소리나는대로 씀)을 그렸다'고 하였다.

앞의 큰 저택이 농은당이고 그 뒤로 언덕 너머 소나무숲에 필운대가 보이고 그 너머가 육각현이다.

 

세도정치의 폐혜를 시정하기 위해 전문직 하급관리인 중인들을 등용한 대원군이

중인들이 시사(詩社)를 갖는 장소로 육각현에 칠송정(七松亭)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인왕제색(仁王霽色)

 

 


인왕산 밑에 살던 겸재 정선은 인왕산 전경을 그린 그림이 많지 않다.

멀리 보이는 목멱은 전경이 많으나 그가 인왕속에 살기때문에 전경그림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인왕을 정면으로 그린 '인왕제색(仁王霽色)'은 그의 그림인생의 모든 것이 압축된 최고의 작품이다.

 

비온 후 개인 인왕의 모습을 그려 비에 젖은 인왕의 무거움을 묵직한 먹으로 채색했다.

흰 화강암 덩어리 바위가 빗물에 젖어 마치 흘러내린 마스카라가 뒤덮은 것 같이 묘사하여

암울한 겸재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겸재가 '인왕제색(仁王霽色)'을 그리던 때는 평생지기 이병연이 병이 위중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던 때였다.

간송미술관 최완수선생에 의해 이병연이 5월 29일에 죽었음이 밝혀졌고

 승정원일기에 의해 인왕제색은 그 4~5일 전에 그려졌음이 밝혀져서

겸재 정선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병연을 보며 그 무거운 심정을 그림에 담은 것으로 보인다.

 

인왕산 아래 기와집은 병상에 있는 이병연의 집 취록헌이고

인왕은 무겁고 어두운 겸재의 얼굴로 내려보고 있는 듯하다.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은 주고받은 시와 그림을 역어 시화첩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남겼는데, 둘은 '천금을 주어도 남에게 넘기지 말자'고 맹세하며

각 그림에 천금물전(千金勿傳)이라고 낙관(落款)을 하여 영원히 우정이 변치 말 것을 약속했다.

 

 

'인왕제색(仁王霽色)'에는 친구와 이별하여 천금물전(千金勿傳)을 낙관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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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 아래서 조선을 그리다 / 겸재 정선(謙齋 鄭敾)| 韓民族 傳統文化

관운 |  2014.05.26. 19:32


 

백악 아래서 조선을 그리다 / 겸재 정선(謙齋 鄭敾)

 

 

 

 

   정선은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 중 한사람이다. 그러나 작품에 비하여 일생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따라서 한동안 정선이 선비화가가 아니라 직업화가였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선은 한양의 양반가에서 태어난 선비화가였다. 다만 14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까닭에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과거공부에 전념할 수 없었다.

 

38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관직에 나가 48세 이후 경상도의 하양과 청하의 현감직을 역임하였고, 65세 때 현재 서울 강서구 가양동 지역인 양천의 현령직을 지낸 이후 퇴임한 70여 세까지 관리로서 봉직하였다. 이러한 관직 경력을 보면 정선은 성공적인 관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선은 평생 동안 한양의 경화세족들이 모여 살던 인왕산과 백악산 주변에 살면서 당대를 이끌어가던 문인, 관료들과 막역한 관계를 가지며 새로운 사상과 예술을 실천하였다.

 

   정선은 평생 겸재라는 호를 애용하였다. 겸재란 매우 겸손한 선비라는 의미를 가진 호로 정선이 평생 동안 즐겨 읽은 주역(周易)에서 따온 것이다. 주역은 사서삼경 중 하나로 천지자연, 음양의 조화를 설명한 책이다. 진경산수화를 즐겨 그린 정선이 주역을 애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 정선은 천지자연의 조화를 논한 주역을 읽으면서 우주와 자연, 인간의 삶을 깊이 연구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좌우명을 찾아내었을 것이다.

 

정선과 평생 가까이 지낸 이웃이며 그 자신이 선비화가로서 정선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였던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은 정선이 화가로서 이름이 너무 높아져서 그의 학문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고 평하였다. 사실 정선은 학문에도 일가를 이룬 선비였다. 정선은 깊은 학문을 토대로 형성된 높고도 진취적인 식견을 기반으로 남의 뒤를 따라가는 평범한 화가가 아닌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갔다.

  

 

   정선은 그때까지 그려지던 낡은 그림을 버리고 18세기 조선사회의 역동적인 변화와 새로운 가치관을 담기 위하여 새로운 그림을 찾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17세기까지 상상과 관념의 세계를 즐겨 그리던 화습을 떨쳐버리고 눈앞에 실재하는 조선의 산천을 묘사한 진경산수화를 제시하게 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혁신이었다. 그 결과 정선은 조선의 산수화는 정선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였다는 평을 받는 등 이례적으로 높은 명성을 얻었고, 또한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정선은 167613일 한양의 유란동 난곡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유란동은 서울의 경복궁 뒤쪽, 백악산 아래에 해당하는 곳으로 현재의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한 경복고등학교 근처였다고 한다. 이곳은 지금도 백악산, 인왕산, 남산, 관악산, 멀리 한강변의 경치까지 보이며 서울 중에서도 경치가 좋기로 손꼽히고 있다. 정선은 자신이 살던 곳에서 보이는 한양의 경치를 자주 그렸다. <삼승조망도(三勝眺望圖)>, <장안연우도(長安煙雨圖)>에는 그가 늘 보았던 인왕산과 백악산 기슭에서 내려다보이는 한양시가의 전경이 담겨져 있다. 이 작품들은 지금은 고층빌딩의 숲이 되어버린 서울 시가지가 본래는 깊고 그윽한 시적 정취를 느끼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음을 보여준다.

 

1739년에 그린 <청풍계도(淸楓溪圖)>는 인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안동 김씨 선원 김상용의 고택을 나타낸 작품이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에는 안동 김씨의 후손인 모주 김시보가 살고 있었는데, 정선은 아마 그의 청을 받았는지 청풍계를 두어 번 그린 적이 있다. 청풍계는 인왕산 계곡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

 

화면에서 울울창창하게 솟은 소나무와 잣나무는 이 집안의 꼿꼿한 선비기질을 드러내는 듯하고, 화면을 가득 채우는 구성방식인 밀밀지법(密密之法)을 활용하여 활력과 기세, 흥성하는 기운을 느끼게 한다. 필선은 빠르고 곧으며 먹은 풍부하고 윤택하다. 사물은 세세한 작은 것으로부터 크고 당당한 것까지 큰 변화를 주며 표현하고 있다. 이 청풍계곡에는 정선의 외가도 있었기에 정선은 늘 이곳을 드나들며 그 자연 경치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정선은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이곳의 경치를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하여 본 것이다. 청풍계곡은 한양에서 가장 기세가 센 인왕산 계곡 중에서도 이름 높은 명승이었으니 이처럼 활달하게 표현한 것도 이해가 된다.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1751, 76세 때 그린 작품이다. 화면을 뚫고 나갈 듯이 꽉 찬 인왕산의 멧부리들은 묵직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둥글둥글하지만 기가 응축된 듯 단단해 보이는 산은 죽죽 그어 내린 힘찬 붓질과 짙고도 풍성한 먹색으로 표현하였고, 그 아래로는 하얀 등성을 드러낸 멧부리들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 구름을 두어 인왕산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76세의 노인이 그린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력과 강인함이 느껴진다. 작품에 표현된 인왕산은 하나의 큰 기념비 처럼 영원히 존재할 듯하다. 변함없는 자연의 위엄 있는 모습을 대하면서 덧없는 인생을 반추하였을까? 명작 뒤에는 많은 의문이 남기 마련이다.

 

   그는 지방에서 관리로 근무하였을 때를 제외하고는 생애의 대부분을 백악산과 인왕산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살았다. 이러한 그의 삶은 그의 작품들 속에 고스란히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곧 그 자신의 삶에서 체험하고 느꼈던 주요한 사건과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즈음 백악산과 인왕산 주변에는 당시의 정권과 학문, 문화를 주도하던 명문거족들이 대를 이어가며 살고 있었다. 정선은 한양의 사상과 문화를 이끌어가던 주변의 경화사족들과 매우 가깝게 교유하면서 당시의 새로운 시대정신과 경향에 동참하였다.1) 18세기에는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 등이 서로 고유한 학풍과 사상을 형성하며 조선의 사상과 학문, 정치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 노론은 성리학의 정통성을 가장 굳게 지켜나갔는데, 노론은 다시 낙론과 호론이라는 서로 성향이 다른 두 계보로 나뉘었다. 정선은 다양한 배경과 사상, 문화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교유하였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낙론계 인사들과 가까이 지냈다. 낙론은 경향 지역에서 대대로 살던 노론 일파들로서 영남 지역에서 살던 보수적인 호론과 달리 청과 서양의 문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보다 현실적인 사상과 문예론을 제기하는 진취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정선의 평생지기이며 당대를 주름잡던 시인 이병연(1675~?)도 낙론계 인사였고, 정선의 그림에 제발(작품의 처음과 끝에 적는 글)을 쓰고 작품성을 인정해주었던 김창흡김창협 등도 낙론을 대표하던 안동 김씨 집안의 선비들이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조유수와 조귀명, 이하곤 등 당파를 초월하여 많은 지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정선은 여러 문인들에 의하여 추앙을 받았다. 당시 노론계 석학이었던 권상하의 조카인 권섭은 정선보다 연장자이면서도 정선의 그림을 스스로 모방하였고, 손자에게 정선의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남유용(1698~1773)은 정선의 작품이 있는 곳이라 하여 일부러 그곳을 찾아간 적이 수없이 많다고 하면서, 그의 그림을 잘 아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였다.

 

   정선은 살아 생전에 이미 너무 유명해져서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구가 늘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활동할 당시에는 시에서 이병연, 그림에서 정선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을 통하여 정선이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정선은 1740, 65세의 나이로 경기도 양천, 현재는 서울시 강서구에 위치한 양천의 현령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막역한 친구 이병연과 정선은 이병연이 시를 보내면 정선이 그림으로 화답하자는 시화상간(詩畫相看)의 약속을 하였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서로 떨어져 살며 내내 그리워했던 두 친구는 끊임없이 시와 그림들을 주고받았다. 이를 모은 것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다. 위에 언급한 <독서여가도><장안연우도>는 바로 이 화첩 중에 포함된 작품으로 친구를 위하여 진솔하게 그린 작품들이다. 이 서화첩은 시와 그림, 그리고 글씨까지 곁들여 조선 후기 당시 시서화 삼절의 풍류를 즐기는 선비문화를 보여주는 예로 눈길을 끈다.

 

   또 이웃에 살며 아침, 저녁으로 정선의 집에 드나들던 선비화가 조영석도 정선을 깊이 알아준 지음(知音)이었다. 당시 서울의 동쪽 교외에는 시인으로 유명한 조유수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늘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정선도 이곳에서 당대를 주름잡던 시인과 학자, 화가인 이병연, 조유수, 홍중성, 최주악, 조하기 등과 시사(詩社: 시인들이 조직한 문학 모임)를 이루면서 교유하였다. 이들의 모임은 은둔한 선비들의 고상하고 우아한 풍류를 상징하는 고사로 유명했던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에 비견되며 장안에 이름이 높았고, 마침내 그림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정선이 새로운 문인화를 추구하고, 조선의 실재하는 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를 정립한 배경에는 정선을 후원한 세련된 경화사족들의 사상과 문화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정선은 18세기 선비들의 문화를 생생하게 기록한 작품들을 자주 그렸다. 문인들의 모임이나 계 모임, 전별연(작별하는 이를 위해 베푸는 잔치)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린 <회방연도>, <의금부도>, <육상묘도>, <서교전의도(西郊餞儀圖)>,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등은 생활풍속을 담은 그림들이다. 그중 <서교전의도>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떠나가는 일행을 보내며 베풀어진 전별연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전별연은 조선 초 이래로 꾸준히 이어지던 선비전통이었는데, 그림에 그려진 전별연은 중국사신을 맞이하고 전송하던 영은문 주변에서 벌어졌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영은문은 현재 헐렸고, 그 자리에 대신 독립문이 서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의 이별과 전송을 기록한 기념사진 같은 그림이 아니고, 영은문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담은 한 폭의 진경산수화이다. 정선은 이 성대한 모임에 참가한 인물들을 기록하는 대신 평화롭고 빼어난 경치를 담아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기뻐하는 듯하다. 그리고 보는 이로 하여금 이 전별연을 태평성세의 훌륭한 일로 느끼게끔 한다. 이처럼 진경산수화는 단순히 경치를 똑같이 묘사한 그림이 아니라 때로는 철학적, 문화적 상징을 담은 그림이었다.

  

 

   정선은 진경산수화를 그릴 때 주변의 일상적인 삶과 의미 깊은 장소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주로 선택하여 그렸고, 자신의 삶에 일어난 변화를 그때그때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18세기 이전의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그림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17세기까지 선비와 화가들은 현실보다는 명분을 중시하고 사실보다는 관념을 선호하였다. 그 결과 문예면에서도 비현실적인 의고주의(擬古主義)가 유행하여 현재의 것[]보다는 과거의 것[]을 가치있게 여겼고 관념적, 상상적인 산수화와 상징적인 사군자화를 즐겨 그렸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세상은 급속히 변화하여 오랑캐라 멸시하던 청나라는 문화적 강국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서양을 포함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은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현실에 눈을 뜨게 하였다.2) 이제 성리학의 명분론에 갇힌 시야와 인식으로는 변화된 세계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조선후기 사람들은 서서히 현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사상적, 문화적으로 큰 변화가 시작되었고, 예술면에서도 관념과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눈앞에 직면한 현실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화단에서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서양화가 유행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3) 정선은 평생 동안 조선 산천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과 발로 밟아가며 돌아보는 현장답사, 또 현장에서 그린 밑그림을 토대로 하여 진경산수화를 완성해나갔다. 현실과 경험을 중시하고 실재하는 경치와 의미 깊은 사건 및 사람들의 이야기를 표현한 새로운 그림이 나타나자 조선 후기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열광하게 되었다. 이처럼 정선은 18세기 조선의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정신과 문화를 그림으로 표현한 개척자였다.

 

  

<삼승조망도(三勝眺望圖)>1740년, 비단에 담채, 39.7×66.7cm, 개인 소장.


   이춘제(1692~1761)의 저택 후원에 있던 삼승정과 그곳에서 보이는 경치를 그린 작품이다. 이 정자에서는 인왕산과 백악산, 남산을 비롯하여 한양 시가지의 정경이 한눈에 보였다고 한다. 정선도 삼승정 주변에 살았으므로 이 같은 경치를 늘 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장안연우도(長安煙雨圖)>, 『경교명승첩』 중1741년, 종이에 수묵, 30.0×39.8cm, 간송미술관 소장.


   봄비가 내린 뒤 안개가 뽀얗게 서린 어느 날, 백악산과 인왕산 기슭에서 내려다본 한양 시가지의 전경을 담았다. 골짜기 사이로 난 길 좌우에는 효자동과 청운동, 필운동, 광화문 일대의 경관이 펼쳐진다. 화면 윗부분에는 뾰족한 남산이 우뚝 솟아 있고, 그 뒤로 관악산, 청계산, 우면산 등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청풍계도(淸楓溪圖)>종이에 담채, 96.2×36.0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인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선원 김상용의 고택을 그린 작품이다. 청풍계는 인왕산 계곡 중에서도 경치가 으뜸으로 꼽히던 곳으로 밀밀지법의 극치를 보이는 꽉 찬 구성과 울울창창하게 솟구친 소나무와 잣나무, 강한 필세와 윤택한 먹색의 구사를 통해 이 선비집안의 지조와 기세, 흥성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웅연계람도(熊淵繫纜圖)>,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 중1742년, 비단에 수묵, 33.1×93.8cm, 개인 소장.


   경기도 관찰사 홍경보와 양천현령이며 화가인 정선, 연천군수이며 문장가인 신유한이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 임진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그림이다. 소동파의 「적벽부」를 본 딴 사대부들의 풍류 넘치는 놀이문화를 전해주는 이 그림에는 웅연 주변의 뛰어난 경치가 시원하게 묘사되어 있다.

 

 

각주

1 김문식, 18세기 후반 서울 학인의 청학의식과 청문물 도입론, 규장각17(1994), 3~11; 강명관, 조선후기 경화세족과 고동서화 취미, 한국의 경학과 한문학이지형교수정년퇴임논총, 태학사, 1996, 765~802; 유봉학, 4장 경향학계의 분기와 경화사족, 조선후기 학계와 지식인, 신구문화사, 1998, 95~140; 홍선표, 조선 후기 회화 애호 풍조와 감평활동, 미술사논단5, 한국미술연구소, 1997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백악산 아래에서 조선을 그리다 (한국의 미술가, 2006.2.1, ()사회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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