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경학은 개혁의 이론적 근거였다

2016. 2. 13. 11:34다산의 향기



       정약용의 경학은 개혁의 이론적 근거였다 자료 / 보정산방

2010.08.28. 18:07

           http://sambolove.blog.me/150092895302

번역하기 전용뷰어 보기



 



[독서신문] 최근 대학의 상아탑 안에 머물던 인문학과 고전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를 강의하는 기관이 늘어나고 있다. 본지는 이같은 인문학과 고전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지속시키고 인문학 열풍을 더욱 확산시키고자 유명 석학들의 강연내용을 지상 중계한다.  / 편집자 註
 
   “육경(六經) 사서(四書)에 대한 연구로는 수기(修己)를 삼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 천하
국가를 위하려 하였으니 본말(本末)을 구비한 것이다.”  -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자신이 추구한 학문세계와 그 결실인 저술체계를 본말의 논리로 천명한 글이다. 본말(本末)은 체용(體用)과 같은 의미로 유학의 기본 패러다임이다. ‘본=체’에 해당하는 수기(修己)는 주체의 도덕적 확립을, ‘말=용’에 해당하는 치인(治人)은 주체의 정치적 실천을 말하는데, 본말은 이 양자를 구별하면서도 통일적으로 사고하는 논법니다.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는 경학 저술을 가리키는데 주체의 도덕적 확립 내지 사회적 실천의 이론적 기초를 위한 것으로 ‘본(本)’에 속하며, ‘일표이서’는 <경세유표>와 <목민심서>·<흠흠심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말(末)’에 속하는 셈이다. 유학의 본말체용의 논리는 원칙적으로 양자 간 경중이 있을 수 없고 서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다산학은 본체에 해당하는 경학과 그 사회정치적 실천에 해당하는 경세학(經世學, 정치
경제학)으로 구축돼 있고, 그 결과로 다산은 600권에 달하는 저술을 남긴 것이다. 따라서 다산학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경학 경세학의 체용적(體用的)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 요령이다. 요컨대, 다산의 경학은 현실의 정치개혁을 위한 이론작업이라 할 수 있다. 
 
18, 19세기 한국경학은 위기의식의 소산

   유교 경전이 이 땅에 들어와 경전적 지위를 확보한 것은 사뭇 오래다. 그에 비해 경전을 비판적(학문적)으로 따져서 해석하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었다. 시기별로 대강 훑어보면 경학의 본격 저술은 17세기에 들어와 출현했고 18, 19세기는 ‘경학의 시대’라 불려도 좋을 만큼 성과가 풍성했는데, 특히 19세기는 한국경학사의 종점이 되고 말았음에도 오히려 그 성과는 풍성했다. 우리는 이런 학문적 정신현상에 주목하고 18, 19세기의 경학이 어떤 시대적 의미를 갖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세기에 있어 경전은 통치체계의 사상적 기반이요, 규범이며 지침이었다. 그래서 경전의 해석권은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주희(朱熹)<사서집주(四書集註)>와 <시집전(詩集傳)>, <서집전(書集傳)>, <주역전의(周易傳義)>에 독존적 권위가 부여된 것은 이 때문이다. 종래 학자라면 응당 경전에 치력했다. 그러다가 17세기부터 경전에 대한 자
기대로의 해석 작업들이 나타난다.




   한국 경학의 성격은 ‘주자학적 경학’ ‘탈주자학적 경학’으로 양분할 수 있을 듯하다. 전자는 주자의 경전해석을
기준으로 탐구한 것이고 후자는 주자의 해석도 여러 경학적 성과들 중 하나로 격하시킨 상태로 자유롭게 풀이한 것이다. 전자가 주자 경학의 틀에 갇혀 있다고 해서 간과하기 쉽지만 그 속에서도 깊이 사색하고 고뇌한 내용이라면 음미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하지만 역시 본격적인 경학은 탈주자학적인 비판적 경학에서 출발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17세기에 출발해 18, 19세기에 성황을 이룬 한국경학은 한마디로 위기의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만청(滿淸)이
중국대륙의 주인이 된 사태는 일차적 충격파였는데, 조선은 명청(明淸)의 각축과정에서 두 번이나 침공을 겪으면서 화이(華夷)의 전도현상을 목격, 가치관의 전도와 문명적 위기를 체감한다. 이것이 반성적 사고로 이어지고 비판적 학풍의 계기가 됐다.

그렇지만, 만청의 중국지배가 곧 안정됐고 동아시아세계는 2백년 가까이 표면적으로 평온을 유지하며 비교적 번영을 누리게 된다. 조선 또한 전에 없는
시장경제의 발흥과 사회·문화적인 활력을 보였고, 한편으로는 신분질서가 흔들리며 민중동향이 심상치 않게 변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기존 체제로 수습하기 쉽지 않은 ‘체제위기의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당시 동아시아세계가 평온하게 보였던 것은 ‘피상적’이었을 뿐, 당시 서세동점이라는 세계사적 조류를 고려하면 태풍의 전야처럼 위기가 접근하는 형국이었다. 다만 한반도상에서 잘 감지되지 않았을 따름이다.
 


실학자들의 개혁론 상고주의(尙古主義)

   16세기 말엽부터 중국에 유입되기 시작한 서학(西學)은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천주교의 종교 신앙운동으로 한반도에서도
문제시 된다. 안정복(安鼎福)은 그 사이의 정황을 대략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서양 서적은 선조 말년에 동녘으로 들어온 이래 명경(明卿) 석유(碩儒)라면 누구나 읽어 보았지만 제자서(諸子書)나 도(道)·불(佛) 등처럼 여겨서 서실에 완상물로 놓아두었으며, 취하는 바는 단지 상위(象衛:천문·역학)·구고(句股:기하학)의 학술뿐이었다. …계묘(癸卯) 갑진(甲辰)년 간(1783~1784)에 재주있는 젊은
이들이 천학설(天學設)을 창도한 것이다.
 - 천학고(天學考), 순암집(順庵集) 권17
 
당시 정부나 지식인들이 천주교에
대해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방관하고 있었던 까닭은 그것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현상적으로 아직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런데 안정복이 연도까지 명기했듯이 천주교가 종교 신앙운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1801년 소위 신유사옥(辛酉邪獄)에서 정치적 희생물이 된 이가환은 정부의 폭압적 대응방식을 두고 “몽둥이로 재(災)를 두드리는 격이니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욱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적중했고, 1839년 기해사옥, 1866년의 대박해로 이어져 병인양요를 불렀다.

지원은 천주교 신앙에 대해 탄압으로 일관하는 것을 두고 일찍이 “내가 좋아하는 바 선(善)이요, 내가 신앙하는바 천(天)이다. 어찌 선을 가로막고 천의 신앙을 금지하는가?”라고 언급한 바 있다. 박지원의 이 발언은 성리학적 정신전통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폭력적 대응방식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사상적 반성과 사유의 전환이 심각하게 요망되는 대목이다. 그것은 한자유교문화권의 사상 전통을 포기하지 않는 한 경학의 고유한 과제였다.

18, 19세기가 ‘경학의 시대’
기록된 요인은 체제의 내적위기에 따른 발본적 개혁의 과제를 응당 경학에서 근거를 찾아야 한다는 실학자들의 고뇌였던 것이다.

그런데, 경학에 기초한 현실대응 방식은 다분히 복고적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역사에서 흔히 있었던 ‘복고(르네상스)’란 문자 그대로 옛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왜 복고를 취했을까?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개혁을 주장하면 독한 공격이나 저항에 부딪히기 쉽고, 그 비난과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선 성현의 권위를 빌려야만 하는 의미가 있었을 듯싶다. 실학자들의 개혁과 경학 역시 이런 의미로, 경학은 일종의 방패막이며 탁고개제(托古改制)의 성격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즉, 실학자들의 경학과 개혁론의 관계를 단순한 ‘탁고’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경전을 한낱 방패막이로 끌어온 것이 아니고 실로 고뇌에 찬 진정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실학자들의 개혁론의 기본성격을 상고주의(尙古主義)라고 규정한다. 

 


다산 경학의 기본성격이었던 경세치용(經世致用)

   다산 경학의 방법론은 당시 실재한 성리학·훈고학·문장학·과거학·술수학의 다섯 가지 학문에 대해 하나하나 비판을 가한 ‘오학론’으로 대표된다. 위 오학은 상호 각기 차이를 보였지만 결말은 ‘손을 잡고 다함께 요순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는 것이었고, 당세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었다.

다산의 ‘오학론’은 당시의 학술 전반에 대한 부정과 발본적 문제제기였으며 새로운 학문의 길을 개척하겠다는 다산의 강렬한 의지였다. 후에 ‘실학’으로 명명된 ‘오학론’의 궁극적인 논지는 ‘요순의 문’으로 다함께 들어가고 ‘주공·공자의 도’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전적 고대’를 회복해야 할 원형으로 본 ‘상고주의’ 성격이 분명하다.

그런데, 다산이 ‘오학론’에서 가장 먼저 거론한 것은 성리학이고 둘째가 훈고학이었다. 성리학은 정통유학이요, 옛 성왕(聖王)의 정치를 목적지로 삼고 있고, 훈고학은 경전해독을 위한 방법론이었다. 그는 왜 이 둘을 비판선상에 올렸을까?

다산은 성리학을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했기에 비판의 강도가 높은 편이었다. 물론 실학은 유학을 공분모로 하기 때문에 성리학의 계승자라 할 수 있었지만 성리학의 연장선상은 아니었다. 실학은 유학이요, 성리학의 부정적 계승이었고 ‘혁신유학’이었다.

훈고학에 대한 다산의 비판은 성리학과는 각도가 달라 경전 연구를 학문의 기본으로 삼았음에도 거부가 아닌 비판적 수용에 가까웠다. 청대의 훈고학은 ‘훈고학=한학(漢學)’으로 경도돼 있었고, 다산은 자구의 천착으로는 진실한 경지에 이르기 어렵다는 문제제기를 하며 이렇게 비판한다.
 
   “그런데 (한학에서) 그 전수받은 바의 훈고가 모두 꼭 원전의 본지라고 믿을 수도 없거니와, 비록 그 본지를 얻었다 하더라도 자의를 밝히고 구절(句節)을 바로잡는데 불과하다. 선왕(先王)·선성(先聖)의 ‘도와 교리’의 근원에 미쳐서는 심오한 속을 들여다 보아 파고들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오학론 이(五學論 二)
 
요컨대 ‘주공·공자의 도’로 돌아가자는 취지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자는 주의주장이고, 그렇기에 경학을 본체로 삼았던 것이다. 다산의 경학은 이 근본 목적을 떠나서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고, 경세치용(經世致用)의 경학이 다산경학이었다.
 


‘하이상(下而上)’의 민주주의와 예치(禮治)

이제 ‘다산개혁론의 경학적 근거’를 세 가지 주제를 잡아 고찰해 보려 한다.

첫째는 다산 정치사상의 기본 문제고, 둘째는 ‘경세유표(經世遺表)’의 주제를 논하는 것, 셋째는 『목민심서』에서 다산이 강조한 ‘고과(考課)제도’다.

우선 다산의 정론을 집약한 산문 「탕론(湯論)」「원목(原牧)」에서 ‘아래에서 위로(下而上)’라는 민에 대한 진보적 정치사상을 볼 수 있다.

탕이 하나라 걸왕을 축출하고 천자에 올라 은나라를 세웠는데 그 방식이 폭력에 의한 정권교체(방벌(放伐))였기에 이것이 탕론의 문제제기였다. 방벌에 비해 평화적 정권교체는 선양(禪讓)이라 했다. 동양 전래 개념으로 요·순은 선양의 전형으로, 탕·무는 방벌의 전형으로 여겨왔기에 혁명이 정당하냐는 물음이다.  

이에 대해 다산은 “엿 도(道)요, 탕이 처음 한 일이 아니다”로 답하고 최고 통치자에 대해 근원적 물음을 던진다. 즉, 천자에 대한 천명사상, 왕권신수설에 대해 ‘아래서 위로(하이상(下二上))’의 선거제적 방식을 말했다.

또 ‘원목’의 문제제기도 ‘목-민’의 사이가 ‘수탈자-피수탈자’였던 당시 관행을 비판했던 것이며, “목은 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牧爲民有也)”라고 단안을 내린다. 즉, 전제군주제 하에서 인민이 오직 통치자를 위해 존재하는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궁극에 ‘목이 민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이상(下而上)’의 민주사상이 유교적 인정(仁政)과 민본(民本) 논리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으나 차원이 달라진 느낌을 준다.

둘째, 다산은 ‘법치’를 부정하는 대신 ‘예치’를 들고 나왔다. ‘예치’의 정신을 담은 것이 『경세유표』인데, 당초에는 책 표제까지 ‘방례초본’이라고 붙였었다.
 
   “천리에 비추어 합치되고 인정에 맞아 어울리는 것을 예라고 이르는데 대하여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바로 협박해서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덜덜 떨게 만들어 감히 저촉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법이라고 한다. 옛날의 왕들은 예로 법을 삼았고 후세의 왕들은 법으로 법을 만드니 이점이 서로 다른 점이다.”
 
다산이 문제 삼은 것은 법의 폭력성이다. 법을 원천적으로 부인한 것이 아니고 법이 예의 성질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이다. 즉 ‘제왕의 법’, 현행법을 부정하고 천리와 인정에 합당해 보편성·영구성을 담보한 새로운 법 개념을 사고한 것이다.

동양의 법에는 자고로 인권 개념이 부재했고 다산은 이에 대해 근원적으로 회의 했다. 다산은 천과 민을 하나로 묶어 통치자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라고 일깨우고, 인권 보장을 위해 천권(天權)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즉 권력자의 사욕에 이용되지 않는, 공공성과 합리성을 지닌 법의 근거를 천(天)에서 찾은 것이다.

셋째, 군현을 맡은 자들이 알아야할 실무적 내용을 치밀하고 구체적으로 엮은 『목민심서』정서(政書)의 성격뿐만 아니라 잠언적 성격견지하고 있어, 거의 전편에 걸쳐 수령의 청렴성·근면성을 일깨우고 있다.

특히 율기편에는 “밝기 전에 일어나서 촛불을 밝히고… 조용히 앉아서 정신을 함양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로 수령의 일상적 몸가짐을 거의 종교적으로 끌어가고 있다. 즉 사회 정치적으로 실천해야 할 문제를 개인의 주관적 태도에 의존하는 것으로 비쳐진다.

이처럼 주체 확립을 중시한 것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교의 특성이기도 했지만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왕정체제에서의 지방수령제는 담당 주체의 도덕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여기서 다산은 고과(考課)제도를 설정한다. 고과(考課)는 관리의 능력과 실적을 평가해 인사에 반영하는 제도다. 고적(考績) 혹은 고공(考攻)이라고도 했는데, 다산은 고과제도를 합리적으로 개정해 중앙부터 지방 말단까지 전면적 실시를 주장했다.

   “이 법이 만약 정해지면 태평의 치세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요·순이 훌륭한 치세를 기록한 것은 오직 공적의 평가, 이 한 가지 일에 있었다. 나는 이 주장이 망언이 아니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예치’를 주장한 다산의 정치학에서 주체 확립이 주요과제가 되는 것은 논리적 정합성을 갖는다. 다산은 주체의 도덕적 자세를 기본으로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감시 기능을 갖는 고과제도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 임형택 성균관대 교수·정리 김성희 기자




'다산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식 디자이너’로서의 다산 정약용  (0) 2016.02.13
다산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였다   (0) 2016.02.13
장춘차(長春茶)의 기막힌 맛  (0) 2016.02.12
스승의 편지   (0) 2016.02.12
무덤 앞의 독백   (0) 2016.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