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차(長春茶)의 기막힌 맛

2016. 2. 12. 04:13다산의 향기



       장춘차(長春茶)의 기막힌 맛 자료 / 보정산방

2010.08.2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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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학연이 대둔사 스님께 보낸 편지

   지금 세상에서 차의 지기(知己)로는 두실(斗室) 태사(太史) 뿐입니다. 두실 태사께서 나를 통해 장춘차(長春茶) 몇 사발을 마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내가 어려서부터 중국의 이름난 차를 두루 맛보았네. 차의 품질을 품평하는 것은 스스로도 나만한 이가 없으리라 여긴다네. 무슨 놈의 기막힌 차가 저 먼 고장에서 생산되어 이제야 비로소 이름이 드러난단 말인가. 절강(浙江)과 나개(羅岕)와 동갱(銅坑)은 진품이 제법 많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맛보기가 힘들다네. 질 나쁜 중국차를 마시느니, 차라리 장춘차를 취하겠네 그려.” 이 말이 몹시 좋아 스님을 위해 외워드립니다. 내년 곡우 때는 능히 유념해 주실 수 있을런지요. 괜시리 산인(山人)께 한바탕 번뇌만 안겨드릴까 염려됩니다.


작년 꽃 필 적에 초의(艸衣) 스님과 더불어 함께 임청정(臨淸亭) 아래 앉아 묵은 소나무 사이에서 술항아리와 붓 벼루로 온종일 읊조리려 하였는데, 세속 일이 연실[藕絲]처럼 많다 보니, 마침내 뜻과 어긋나 꽃 시절을 헛되이 보내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안타깝습니다. 이제 이때가 다시 돌아왔으니 모두 환세(幻世)의 기이한 인연입니다. 16일이 마침 가까웠으니 한 잎 고깃배로 사라담(䤬鑼潭) 위로 거슬러 올라가 지난 봄 마치지 못한 빚을 보상받을까 합니다. 다만 열흘 밖에 남지 않아 또 능히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대사와 함께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며 글로 알려드립니다.


7월 4일 가(稼) 돈수



   다산 선생의 장남인 정학연(丁學淵, 1783-1859)이 해남 대둔사의 승려에게 보낸 편지다. 수신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호의(縞衣) 스님인 듯 하다. 다산은 18년간의 강진 유배 생활 동안 대둔사의 승려들과 긴밀한 교류를 나누었다. 특히 초의나 호의는 제자로서 다산초당을 출입하며 학문을 익혔고, 그 인연은 아들인 정학연에게로까지 이어졌다.


초의는 서울 걸음을 할 때면 으레 남양주 초천 가 정학연의 집에 와서 묵곤 했다. 이때마다 그는 차를 선물했는데, 정학연은 초의가 만들어온 차에 장춘차(長春茶)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장춘동(長春洞)은 해남 대둔사의 골짜기 이름이니, 장춘차는 해남 대둔사에서 만든 차란 뜻이다.


편지에서 정학연은 자신의 차 지기로 두실(斗室) 태사를 꼽았다. 두실은 심상규(沈象奎, 1766-1836)의 호다. 영의정까지 지낸 당대의 큰 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집인 가성각(嘉聲閣)에 무려 4만권의 장서를 쌓아두고, 온갖 기이한 물건을 갖춰두고 호사를 누렸던 인물이다. 온갖 진귀한 중국차도 산지별로 다 구해 맛보았다. 그는 스스로 차맛의 감별에 관한 한 자기만한 사람이 없으리라고 자부했던 모양이다. 그런 그가 정학연이 끓여준 장춘차 몇 사발을 마셔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대체 어디서 이런 기막힌 차를 구했느냐고 물었다. 정말 좋은 중국차는 구하기가 어렵고, 값만 비싼 저질품은 마실 수가 없으니, 엉터리 가짜 중국차를 마시느니 차라리 장춘차가 훨씬 낫겠다고 품평했다.


정학연은 심상규의 이 칭찬을 전하면서 슬쩍 내년 곡우 때에는 그를 위해서도 따로 차를 마련해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워낙에 차가 귀할 때였던지라 이렇게 억지를 부리지 않고는 차를 입에 대어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는 화제를 바꿔, 작년 봄 초의 스님과 초천 가에 있던 임청정(臨淸亭)에서 시회(詩會)를 열며 봄꽃 구경을 하려 했는데, 이루지 못한 애석함을 말하며, 집앞의 사라담에 일엽편주를 띄워놓고 작년의 유감 풀이나 하려한다는 사연을 적었다. 하지만 이미 대둔사에서 이때까지 대어오기는 늦은 때였으므로, 함께 하지 못해 유감이란 말로 편지를 맺었다. 편지 끝에는 7월 4일이란 날짜와 함께 ‘가(稼)’라는 서명이 보인다. 정학연의 초명이 학가(學稼)였다. 이 편지는 학연으로 개명하기 전에 보낸 비교적 젊은 시절의 편지다.


초의나 호의 스님이 만들어 보낸 차는 흔히 알려진 대로 추사에게만 갔던 것은 아니다. 정학연이나 박영보, 신위 등에게도 보내져서 장춘차란 이름으로 심상규 등에게까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신위는 초의차를 맛본 후 전다박사(煎茶博士)란 칭호를 주었고, 추사는 명선(茗禪)이란 호를 글씨로 써주었다. 한 시대 흥성하게 꽃 핀 차문화의 현장을 증언하는 귀한 편지다.


   當世茶知己, 斗室太史是已. 斗室太史緣我飮長春茶數碗, 謂余曰: “余自少也, 遍嘗中國名茶. 茶品評騭, 自以爲莫我若也. 何物槍旗, 乃産於遐陬, 今始著名也. 浙岕銅沆眞品儘多, 而東國之人, 鮮得嘗焉. 與其喫中國糠粃, 有寧取長春茶.” 此言甚好, 爲師誦之. 明年谷雨, 其能留念否. 恐致山人一場煩惱也. 昨年花發時, 欲與艸衣上人, 共坐臨淸亭下, 古松樹間, 酒壺筆硏, 嘯詠終日, 俗冗如藕絲, 竟敗人意, 虛廢花辰, 當今恨之. 今此重還, 儘是幻世奇緣. 旣望適近, 欲以一葉漁舟, 溯洄于䤬鑼潭上, 以償前春未了之債. 第猶隔一旬, 未知又能諧否也. 恨不與大師共之, 漫此書報. 七月四日, 稼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