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옹원의 분원은 1883년에 민간에 불하되며 공식적인 관영 사기제조 체제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때 경기도 광주 분원리의 가마를 불하받은 것은 구한말 궁중의 내시들이었다. 따라서 분원리 가마에서는 이들에 의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백자가 제작됐다. 분원리에서 더 이상 백자를 굽지 않게 된 것은 그 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내에 진출한 일본인 상공업자들에 의해 막사발이 대량 생산, 유통되면서부터이다.
이 무렵에 대한 자료는 매우 불분명한데 당시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에 취직해 조선에 건너온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는 1922년 무렵부터 형 노리다카(伯敎)와 함께 분원리 가마터를 조사했다. 분원리 조사는 그 후에도 단속적으로 이뤄졌다.
1931년 42살의 나이로 아깝게 죽은 다쿠미는 그해 1월에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明考)』를 썼는데 이 책 속에 분원 작업장 평면도, 내부 모습, 사용 도구 그리고 작업 인원 등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 소개돼 있다. 그가 남긴 기록은 조선시대 후기의 분원 모습에 가장 가깝게 묘사한 것으로 현재도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는 가마터에는 사발 대정, 잿물 대정, 불 대정으로 맡은 일이 나누어져 있었다고 했다. 대정은 장인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렇지만 가마터가 작은 곳에서는 한 가족이 모두 달라붙어 일을 했는데 어른은 주로 사발 대정(그릇 만드는 사람), 불 대정 등을 담당했고 노인이나 어린아이, 아녀자는 잿물 대정, 흙 운반, 건조 등의 돕는 식으로 나누어 일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옛날 분원이 번성했을 때의 작업 상황에 대해 「분주원보등(分廚院報騰)」이란 기록을 인용해 무려 550여명의 인원이 작업했다고 적어놓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분원 응역(應役)의 수효>
감관(監官) 1명 감독관
원역(員役) 20명 서기
사령(使令) 6명 소사(小使)
변수(邊首) 2명 사기장 우두머리
조기장(造器匠) 10명 사발 대정
마조장(磨造匠) 10명 굽 대정
건화장(乾火匠) 10명 건조
수비(水飛) 10명 뻘물(精土)
연정(練正) 10명 꼬박
참역(站役) 18명 가마 수리
화장(火匠) 7명 불 대정
조역(助役) 7명 견습공 조수
부호수(釜戶首) 2명 책임 불 대정
남화장(覽火匠) 2명 열도 관찰
화청장(畵靑匠) 14명 그림
연정(練正) 2명 잿물 수비
착수장(着水匠) 2명 잿물 대정
파기(破器) 2명 선별
<이하 잡역>
공초군(工抄軍) 186명 도토 운반
허벌군(許伐軍) 202명 대기 잡역
운회군(運灰軍) 1명 초목회 운반
부회군(浮灰軍) 1명 잿물 수비
수토재군(水土載軍) 10명 도토 하선
수토감관(水土監官) 1명 수세지기
노복군(路卜軍) 2명 도로 관리
감고(監考) 3명 출납
진상결복군(進上結卜軍) 10명 제품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