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을 가다-1| 최치원문학관
지리산문학관.계간시낭송 | 조회 45 |추천 0 | 2016.03.26. 03:17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을 가다-1
①문경 봉암사(鳳巖寺) 지증대사 적조탑비(智證大師 寂照塔碑)
사산비명(四山碑銘)이란 '네 군데 산(山)에 남긴 비석의 글'이라는 뜻인데 신라 말 최치원이 남긴 네 곳의 비명(碑銘)을 말한다. 통일신라 말기 대문장가 최치원(857~?)은 뛰어난 문장을 많이 남겼는데 그가 남긴 비문 중에서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光塔碑)`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를 일컬어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칭한다.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당대 고승의 행적이나 신라왕가의 능원(陵園)과 사찰에 관해 기록한 것이다. 사산비명은 그 시기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앞설 뿐 아니라 다른 전적에서 볼 수 없는 역사 사실이 많아 한국학 연구의 필수적인 금석문이다. 4개의 비문 모두 사륙변려문(중국 육조 시대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한문 문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이 쉽지 않아 예로부터 많은 해설서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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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암사 대웅전 왼쪽으로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적조탑을 보호하는 비각이 서 있다.
때문에 우리 같은 일반인, 아마추어 답사가들이 사산비명을 찾아보고 그 비문을 읽는다거나, 뜻을 이해하고 역사적 가치를 단숨에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실제 어느 정도 해독력이 있다 하여도 현재 대숭복사비는 파손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사본이 존재), 나머지 비명들도 부분적인 훼손이나 풍화 등으로 인한 손상 등으로 식별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재의 범주를 정했다면 한 번씩 찾아보면서 신라 말기 대문장가 최치원에 대하여도 알아보고 그가 지은 명문장으로 추앙받는 사산비명을 실제로 찾아가 본다면 그 또한 뜻깊은 일이라고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최치원의 사산비명을 하나하나 찾아보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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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 내 왼쪽이 적조탑비(국보 제315호)이다. 비신을 철제로 지탱하고 있다.
ㅇ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통일신라 부도비 대표
- 보령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비(국보 제8호)
- 하동 지리산 쌍계사 진감국사비(국보 제47호)
-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국립경주박물관)… 실물(實物)은 파손, 문장만 전함
- 문경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비(보물 제138호 → 국보 제315호로 승격, 2009.12.31일)
사산비명 대부분은 당대를 살다간 고승들을 찬양하는 기록들인데 비하여 대숭복사비는 숭복사를 중창할 때 이를 기념하고 신라왕실을 찬양하는 기록인 점이 차이가 있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鳳巖寺 智證大師 寂照塔碑) 국보 제3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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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머리를 갖춘 귀부. 얼굴 앞부분이 약간 훼손되었지만 당당한 모습이다.
경북 문경 봉암사의 창건주 지증대사(智證大師)의 부도비로 적조탑비(寂照塔碑)라고 부른다. 부도인 적조탑(寂照塔)과 함께 비교적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데, 비각을 세워 그 안에 부도와 부도비를 보호하고 있으며 문경 봉암사는 일년에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인 초파일에만 개방되는 곳인지라 일반인이 만나보기가 쉽지 않다. 부도는 보물 제137호이며, 부도비는 보물 제138호였으나 2009년 12월 31일부로 국보 제315호로 승격되어 최치원 사산비명이 모두 국보가 되었다.
지증대사(智證大師)
지증대사(824~882)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9세에 출가하여 부석사에 입산하였으며 열일곱에 계를 받고 수행하던 중 꿈속에서 보현보살을 친견하기도 하였으나 경주의 세속화 되어가는 불교를 멀리했던 듯, 경문왕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고 수행에 힘쓰다가 879년 이곳에 봉암사를 창건하였다. 창건 3년 뒤인 882년 12월 18일 저녁공양을 마치고 제자들과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하던 중 가부좌로 열반하시니 세수 59세, 법랍 43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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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이 273cm의 비신 앞면은 비교적 온전해 보이지만 사실상 글자 해독이 쉽지 않다. 비신의 뒷면은 앞면과 비교하면 여러 곳이 훼손되었다. 철제로 각을 잡고 경사지게 버티고 있다.
스님이 돌아가신 이틀 후 현계산에 빈소를 차리고, 이듬해 1주년이 되었을 때 희양산 봉암사로 모시어 다비 후 부도를 세웠다. 헌강왕은 사람과 제물을 보내어 스님의 입적을 애도하였고, 3년 후 임금이 존경과 애도의 뜻으로 내린 시호가 지증(智證)이며, 부도탑을 적조(寂照)라 내리니 부도 적조탑비(寂照塔碑, 국보 제315호)라 칭하였다. 헌강왕은 대사의 시호를 내리면서 대문장가 최치원에게 대사의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최치원은 무려 8년 후에야(그때는 헌강왕은 죽고, 진성여왕 즉위 6년인 892년이다.) 대사의 일대기를 작성하였고, 33년이 지난 924년에야 부도비를 세웠으니 비문의 정식명칭은 유당 신라국 고봉암사 교시 지증대사 적조지탑비명(有唐 新羅國 故鳳巖寺 敎諡 智證大師 寂照之塔碑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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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부에 비신을 꽂는 받침 부분에 새겨진 공양하는 모습이 특이하다.
적조탑비의 지증대사의 일대기와 봉암사의 유래는 최치원이 찬하였으나 글씨는 분황사 승려 혜강이 썼는데 탑비에 (분황사 석혜강 서병각자 세팔십삼(芬黃寺 釋慧江 書幷刻字 歲八十三) : 분황사 스님 혜강이 83세에 새겼다)고 쓰여 있다.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천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모든 글자를 알아볼 수 있도록 온전하게 남아있어 ‘남한에 남아있는 금석문 중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최치원이 적조탑비(寂照塔碑)에 지증대사의 일대기를 쓰기를 그분의 일생에 있던 기이한 자취와 신비한 얘기는 이루 다 붓으로 기록할 수 없다며 여섯 가지 기이한 일(六異)과 여섯 가지 올바른 일(六是)로 추려서 적었다고 한다. 스님의 일대기를 포함한 그 많은 양을 필자가 직접 읽거나 해석할 수도 없거니와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문화재 자료 중에 비문내용을 해석본으로 라도 볼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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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의 오른쪽에는 지증대사의 부도비인 적조탑(보물 제137호)이 있다. 스님의 사리를 모신 곳이다.
아무튼, 최치원은 비문에서 지증대사가 돌아가심에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로 빠졌다(嗚呼 星廻上天 月落大海)’고 기록하여 높이 칭송하였다고 한다. 최치원답다. 옛 비문을 명(銘)이라고 하면, 비문 끝에 그분의 삶을 기리는 시구를 부기하는 것인데 글쓴이가 명(銘)을 썼으면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고 없으면 그저 부탁에 의한 것이라고 하니 비문과 비명의 차이를 이해할 것 같다.
문경 봉암사(鳳巖寺)
문경 희양산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 도헌 지증대사가 창건하였는데 지증국사 비문인 적조탑비에 따르면 스님의 명성을 들은 심충이란 사람이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니 대사가 와보고 이곳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며 절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이 개창된 것이다. 구산선문 중 장흥 보림사와 문경 봉암사만 현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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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각원당형의 탑으로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팔각 하대와 중대를 올리고 앙련의 상대석이 탑신을 받친다. 중대석 받침에는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새의 형상인 가릉빈가를 새겼으며, 그 위 중대석에는 무릎 꿇고 합장하는 공양상이 보인다. 그 오른쪽이 정면에 해당하는데 보주, 보개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사리기가 있어 이 탑에 사리를 모셨다는 상징이다.
그 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戰禍)를 입어 폐허가 되어 극락전만 남은 것을 고려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으며 조선조 세종대왕 때 험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임진왜란 때 크게 손실되었고, 그 뒤에도 여러 번의 화재와 중건이 반복되다가 구한말 의병전쟁 때 다시 전화(戰禍)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하였다.
근래 들어 조계종 종정 서암 스님과 주지 동춘 스님 후임 원행, 법연 스님 등의 원력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고 있으나 수도 도량이라는 봉암사의 명성에 비하여 이런저런 절집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은 어쩐지 낯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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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 몸돌 역시 8각형인데 앞뒤로는 자물쇠를 채운 모습을 새겼고 그 좌우에 사천왕을 새겨 사리를 지키게 하였다.
아무튼, 구산선문 중 희양산문으로 개창한 봉암사는 고려 태조 18년 정진 대사가 계실 때는 봉암사에 3천여 대중이 머물며 정진할 만큼 위세를 떨쳤으며,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가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 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봉암사를 찾았다’고 할 만큼 유서 깊은 절이었다.
이렇게 유서 깊은 선사 봉암사에 근대 선원이 다시금 부흥된 것은 1947년이다.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 스님 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는 원을 세웠다.
- ▲그 위로 팔각지붕을 실감 나게 새겼으며 노반, 복발, 보주의 상륜부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결사 도량, 봉암사를 찾아온 '봉암사 결사'를 시작으로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 도우 등 20인이 참여하여 정진하는 곳이 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단되었다. 1970년 초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기 시작하여 1972년 향곡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5명의 납자가 정진하기에 이르러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 성역화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의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토록 하였다.
1984년 6월 제13차 비상종단 상임위원회는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하고 특별수도원으로 삼으니 관할 지방정부와 함께 봉암사는 물론 인근 희양산 전역의 출입을 통제함으로써 군부대 출입보다 더 엄하게 금지된 곳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반인들은 일 년에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초파일)에만 봉암사를 개방하여 탐방이나 기도하러 들를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봉암사는 그래서 더 유명한지도 모른다. 2014년 초파일 (양력 5월 6일)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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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쉽게도 지붕돌 한쪽이 깨어졌다.
이렇게 해서 비교적 간단하게나마 사산비명 중 가장 늦은 무렵에 세워진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과 적조탑비를 둘러보았다. 나머지 3곳의 사산비명도 마저 소개할 예정이다.
관련
출처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 02박숙화
[번역문]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대당 신라국 고 희양산 봉암사 교시지증대사의 적조탑비명 및 서
입조하정 겸 연봉황화등사 조청대부 전수병부시랑 충서서원학사이며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신 최치원이 교를 받들어 지음.
서(序)에 말한다. 오상(五常)을 다섯 방위로 나눔에 동방(東方)에 짝지어진 것을 ‘인(仁)’이라하고, 삼교(三敎)의 명호(名號)를 세움에 정역(淨域)에 나타난 것을 ‘불(佛)’이라 한다. 인심(仁心)이 곧 부처이니, 부처를 ‘능인(能仁)’이라고 일컫는 것은 당연하다. 해돋는 곳〔욱이(郁夷); 신라〕의 유순한 성품의 물줄기를 인도하여, 석가모니의 자비로운 교해(敎海)에 이르도록 하니, 이는 돌을 물에 던지고 비가 모래를 모으는 것 같이 쉬웠다. 하물며 동방의 제후가 외방(外方)을 다스리는 것으로 우리처럼 위대함이 없으며, 산천이 영수(靈秀)하여 이미 호생(好生)으로 근본을 삼고 호양(互讓)으로 선무(先務)를 삼았음에랴. 화락한 태평의 봄이요, 은은한 상고(上古)의 교화로다. 게다가 성(姓)으로 석가의 종족에 참여하여, 국왕같은 분이 삭발하기도 하였으며, 언어가 범어(梵語)를 답습하여 혀를 굴리면 불경의 글자가 되었다. 이는 진실로 하늘이 환하게 서쪽으로 돌아보고, 바다가 이끌어 동방으로 흐르게 한 것이니, 마땅히 군자들이 사는 곳에 부처〔법왕(法王)〕의 도가 나날이 깊어지고 또 깊어질 것이다.
대저 노(魯)나라에서 하늘로부터 별이 떨어진 것을 기록하고, 한(漢)나라에서 금인(金人)의 목덜미에 일륜(日輪)이 채여 있음을 징험함으로부터, 부처의 자취는 모든 시내가 달을 머금은 듯하고, 설법하는 소리는 온갖 퉁소소리가 바람에 우는 것 같아, 혹 아름다운 일의 자 취를 서적〔겸상(縑緗)〕에 모으기도 하고, 혹 빛나는 사실들을 비석〔완염(琬琰)〕에 수놓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낙양을 범람케 하고 진궁(秦宮)에 거울을 걸어놓은 사적이 마치 해와 달〔합벽(合璧)〕을 걸어 놓은 듯하니, 진실로 3척의 혀와 5색의 붓이 아니면, 어찌 그 사이에 문사(文辭)를 얽고 맞추어 후세에 언설을 전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한 나라의 경우에 비추어 다른 나라의 사정을 파악하고 한 지방으로부터 다른 지방에 이른 것을 상고하니, 불법(佛法)의 바람이 사막과 험준한 지대를 지나서 오고, 그 물결이 바다의 한 모퉁이〔해동(海東)〕에 비로소 미치었다.
옛날 우리나라가 셋으로 나뉘어 솥발과 같이 서로 대치하였을 때에 백제에 ‘소도(蘇塗)’의 의식이 있었는데, 이는 감천궁(甘泉宮)에서 금인(金人)에게 제사지내는 것과 같았다. 그 뒤 섬서(陝西)의 담시(曇始)가 맥(貊) 땅에 들어온 것은, 섭마등(攝摩騰)이 동(東)으로 후한(後漢)에 들어온 것과 같았으며, 고구려의 아도(阿度)가 우리 신라에 건너온 것은, 강승회(康僧會)가 남으로 오(吳)에 간 것과 같았다.
때는 곧 양나라의 보살제가 동태사에 간지 한해 만이요, 우리 법흥왕께서 율령을 마련하신 지 팔년째였다. 역시 이미 바닷가 계림에 즐거움을 주는 근본을 심었으며, 해뜨는 곳 신라에서 늘어나고 자라나는 보배가 빛났으며, 하늘이 착한 소원을 들어주시고 땅에서 특별히 뛰어난 선인이 솟았다. 이에 귀현한 근신이 있어 제 몸을 바치고, 임금이 삭발하였으며, 비구승이 서쪽으로 가서 배우고, 아라한이 동국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혼돈의 상태가 능히 개벽되었으며, 인간 세계가 두루 교화되었으므로, 산천의 좋은 경개(景槪)를 가리어 토목의 기이한 공력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수도할 집을 화려하게 꾸미고, 수행할 길을 밝히니, 신심(信心)이 샘물같이 솟아나고, 혜력(慧力)이 바람처럼 드날렸다. 과연 여(麗)·제(濟)를 크게 무찔러서〔㵱杵〕 재앙을 제거토록 하며, 무기를 거두고 경사를 칭송하게 하니,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가 이제는 장하게도 한 집이 되었다. 탑이 구름처럼 벌려져서 문득 빈 땅이 없고, 큰 북이 우뢰같이 진동하여 제천에서 멀지 않으니, 점차 번지어 물듦에 여유가 있었고, 조용히 탐구함에 싫증이 없었다.
그 교가 일어남에 있어, 아비달마대비파사론(阿毘達磨大毘婆娑論)이 먼저 이르자 우리나라에 사체(四諦)의 법륜이 달렸고, 대승교가 뒤에 오니 전국에 일승(一乘)의 거울이 빛났다. 그러나, 의룡(義龍)이 구름처럼 뛰고, 율호(律虎)가 바람같이 오르며, 학해(學海)의 파도가 용솟음치고, 계림(戒林)의 가엽(柯葉)이 무성하며, 도가 모두 끝없는 데 융합하고, 정이 간혹 속이 있는 데 통하였으니, 문득 고인 물이 잔 물결을 잠재우고, 높은 산이 일광(日光)을 두른 듯한 사람이 대개 있었을 것이나, 세상에서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장경(長慶) 초에 이르러, 도의(道義)라는 중이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가서 서당(西堂)의 오지(奧旨)를 보았는데, 지혜의 빛이 지장선사(智藏禪師)와 비등해져서 돌아왔으니, 현계(玄契)를 처음 말한 사람이다. 그러나 원숭이의 마음에 사로잡힌 무리들이 남쪽을 향해 북쪽으로 달리는 잘못을 감싸고, 메추라기의 날개를 자랑하는 무리들이 남해를 횡단하려는 대붕의 높은 소망을 꾸짖었다. 이미 외우는 말에만 마음이 쏠려 다투어 비웃으며 ‘마어(魔語)’라고 한 까닭에 빛을 지붕 아래 숨기고, 종적을 협소한 곳에 감추었는데, 동해의 동쪽에 갈 생각을 그만두고, 마침내 북산에 은둔하였으니, 어찌 『주역(周易)』에서 말한 “세상을 피해 살아도 근심이 없다”는 것이겠는가. 꽃이 겨울 산봉우리에서 빼어나 선정의 숲에서 향기를 풍기매, 덕을 사모하는 자가 산에 가득하였고, 착하게 된 사람이 골짜기를 나섰으니, 도는 폐(廢)해질 수 없으며 때가 그러한 뒤에 행해지는 것이다.
흥덕대왕(興德大王)께서 왕위를 계승하시고 선강태자(宣康太子)께서 감무를 하시게 됨에 이르러, 사악한 것을 제거하여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선을 즐겨하여 왕가의 생활을 기름지게 하였다. 이 때 홍척대사(洪陟大師)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도 역시 서당(西堂)에게서 심인(心印)을 증득하였다. 남악(南岳)에 와서 발을 멈추니, 임금께서 하풍(下風)에 따르겠다는 소청의 뜻을 밝히셨고, 태자께서는 안개가 걷힐 것이라는 기약을 경하하였다. 드러내 보이고 은밀히 전하여 아침의 범부가 저녁에 성인이 되니, 변함이 널리 행해진 것은 아니나, 일어남이 갑작스러웠다.
시험삼아 그 종취를 엿보아 비교하건대, 수(修)한 데다 수(修)한 듯하면서 수(修)함이 없고, 증(證)한 데다 증(證)한 것 같으면서 증(證)함이 없는 것이다. 고요히 있을 때는 산이 서있는 것 같고, 움직일 때는 골짜기가 울리는 듯하였으니, 무위(無爲)의 유익함으로 다투지 않고도 이겼던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 사람의 마음의 바탕이 허령(虛靈)하게 되었는데, 능히 정리(靜利)로써 해외를 이롭게 하였으면서도, 그 이롭게 한 바를 말하지 않으니 위대하다고 하겠다.
그 후 구도승의 뱃길 왕래가 이어지고, 나타낸 바의 방편이 진도(眞道)에 융합하였으니, 그 조상들을 생각하지 않으랴. 진실로 무리가 번성하였도다. 혹 중원에서 득도하고는 돌아오지 않거나, 혹 득법(得法)한 뒤 돌아왔는데, 거두(巨頭)가 된 사람을 손꼽아 셀 만하다. 중국에 귀화한 사람으로는 정중사(靜衆寺)의 무상(無相)과 상산(常山)의 혜각(慧覺)이니, 곧 선보(禪譜)에서 익주금(益州金) 진주금(鎭州金)이라 한 사람이며, 고국에 돌아온 사람은 앞에서 말한 북산(北山)의 도의(道義)와 남악(南岳)의 홍척(洪陟),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 대안사(大安寺)의 혜철국사(慧徹國師), 혜목산(慧目山)의 현욱(玄昱), 지력문(智力聞), 쌍계사(雙溪寺)의 혜소(慧昭), 신흥언(新興彦), 통□체(涌□體), 진무휴(珍無休), 쌍봉사(雙峰寺)의 도윤(道允), 굴산사(崛山寺)의 범일(梵日), 양조국사(兩朝國師)인 성주사(聖住寺)의 무염(無染), 보리종(菩提宗) 등인데, 덕이 두터워 중생의 아버지가 되고, 도가 높아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니, 옛날에 이른바 “세상의 명예를 구하지 않아도 명예가 나를 따르며, 명성을 피해 달아나도 명성이 나를 좇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두들 교화가 중생세계에 미쳤고, 행적이 부도와 비석에 전하였으며, 좋은 형제에 많은 자손이 있어, 선정(禪定)의 숲으로 하여금 계림(鷄林)에서 빼어나도록 하고, 지혜의 물로 하여금 접수(鰈水)에서 순탄하게 흐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따로 지게문을 나가거나 들창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대도를 보며, 산에 오르거나 바다에 나가지 않고도 상보(上寶)를 얻어, 안정된 마음으로 의념을 잠재우고 담담하게 세상 맛을 잊게 되었다. 저편의 중국에 가지 않고도 도에 이르르고, 이 땅을 엄하게 하지 않고도 잘 다스려졌으니, 칠현(七賢)을 누가 비유로 취하겠는가. 십주(十住)에 계위(階位)를 정하기 어려운 사람이 현계산(賢溪山) 지증대사(智證大師) 그 사람이다.
처음 크게 이를 적에 범체대덕(梵體大德)에게서 몽매함을 깨우쳤고, 경의율사(瓊儀律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마침내 높이 도달할 적엔 혜은엄군(慧隱嚴君)에게서 현리(玄理)를 탐구하였고, 양부령자(楊孚令子)에게 묵계(黙契)를 주었다. 법의 계보를 보면, 당(唐)의 제4조 도신(道信)을 5세부(世父)로 하여 동쪽으로 점차 이땅에 전하여 왔는데, 흐름을 거슬러서 이를 헤아리면, 쌍봉(雙峰)의 제자는 법랑(法朗)이요, 손제자는 신행(愼行)이요, 증손제자는 준범(遵範)이요, 현손제자는 혜은(慧隱)이요, 내손제자(來孫弟子)가 대사이다. 법랑대사는 대의사조(大醫四祖)의 대증(大證)을 따랐는데, 중서령(中書令) 두정륜(杜正倫)이 지은 도신대사명(道信大師銘)에 이르기를, “먼 곳의 기사요 이역의 고인으로 험난한 길을 꺼리지 않고 진소(珍所)에 이르러, 보물을 움켜쥐고 돌아갔다” 하였으니, 법랑대사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다만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으므로 다시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는데, 비장한 것을 능히 찾아낸 이는 오직 신행대사뿐이었다. 그러나 때가 불리하여 도가 미처 통하지 못한지라 이에 바다를 건너갔는데, 천자에게 알려지니, 숙종(肅宗)황제께서 총애하여 시구를 내리시되, “용아(龍兒)가 바다를 건너면서 뗏목에 힘입지 않고, 봉자(鳳子)가 하늘을 날면서 달을 인정함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신행대사가 ‘산과 새’, ‘바다와 용’의 두 구로써 대답하니 깊은 뜻이 담겼다. 우리나라에 돌아와 삼대(三代)를 전하여 대사에게 이르렀는 바, 필만(畢萬)의 후대가 이에 증험된 것이다.
그의 세속 인연을 상고해 보면, 왕도(王都) 사람으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다. 호는 도헌(道憲)이요 자는 지선(智詵)이다. 아버지는 찬괴(贊瓌)이며 어머니는 이씨(伊氏)이다. 장경(長慶) 갑진년(甲辰年)에 세상에 태어나 중화(中和) 임인년(壬寅年)에 세상을 뜨니, 자자(自恣)한 지 43년이고 누린 나이가 59세였다. 그가 갖춘 체상(體相)을 보면, 키가 여덟 자 남짓했고 얼굴이 한 자 쯤이었으며, 의상(儀狀)이 뛰어나며 말소리가 웅장하고 맑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사람이었다. 잉태할 당시로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기이한 행적과 숨겨진 이야기는 귀신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 같아 붓으로는 기록할 수 없겠으나, 이제 사람들의 귀를 치켜 세우도록 한 여섯 가지의 이상한 감응과 사람들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던 여섯 가지의 옳은 操行을 간추리고 나누어 나타낸다.
처음 어머니의 꿈에 한 거인이 나타나 고하기를, “나는 과거의 비파시불(毘婆尸佛)로서 말법의 세상에 중이 되었는데, 성을 낸 까닭으로 오랫동안 용보(龍報)를 따랐으나, 업보가 이미 다 끝났으니 마땅히 법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묘연에 의탁하여 자비로운 교화를 널리 펴기를 원합니다”고 하였다. 이내 임신하여 거의 4백일을 지나 관불회(灌佛會)의 아침에 태어났는데, 일이 이무기의 복생고사(復生故事)에 징험되고 꿈이 불모(佛母)의 태몽고사에 부합되어, 스스로 경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조심하고 삼가하게 하며, 가사를 두른 자로 하여금 정밀하게 불도를 닦도록 하였으니, 탄생의 기이한 것이 첫째이다.
태어난 지 여러 날이 되도록 젖을 빨지 않고, 짜서 먹이면 울면서 목이 쉬려고 하였다. 문득 어떤 도인(道人)이 문앞을 지나다가 깨우쳐 말하기를, “아이가 울지 않도록 하려면 훈채(葷菜) 및 육류(肉類)를 참고 끊으시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 말을 따르자 마침내 아무런 탈이 없게 되었다. 젖으로 기르는 이에게 더욱 삼가하도록 하고 고기를 먹는 자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지니게 하였으니, 오랜 풍습의 기이한 것이 둘째이다.
아홉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너무 슬퍼하여 거의 훼멸하였다. 추복승이 이를 가련히 여기고 논하여 말하기를, “덧없는 몸은 사라지기 쉬우나 장한 뜻은 이루기 어렵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은혜를 갚으심에 큰 방편이 있었으니 그대는 이를 힘쓰라”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느끼고 깨달아 울음을 거두고는 어머니께 불도에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어머니는 그의 어린 것을 가엾게 여기고, 다시금 집안을 보전할 주인이 없음을 염려하여 굳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사는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고사를 듣고 곧 도망해 가서 부석산에 나아가 배웠다. 문득 하루는 마음이 놀라 자리를 여러 번 옮겼는데, 잠시 뒤에 어머니가 그를 기다리다가 병이 났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 뵈오니 병도 뒤따라 나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완효서에 견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대사에게 고질(痼疾)이 전염되어 의원에게 보여도 효험이 없었다. 여러 사람에게 점을 쳤더니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부처에게 이름을 예속시켜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전의 꿈을 돌이켜 생각해 보고는 조심스럽게 네모진 가사를 몸에 덮고 울면서 맹세하기를, “이 병에서 만약 일어나게 된다면 부처님께 아들로 삼아 달라고 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틀 밤을 자고 난 뒤에 과연 완쾌되었다. 우러러 어머니의 염려하심을 깨닫고, 마침내 평소에 품었던 뜻을 이루어, 제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식을 부처에게 선뜻 내주도록 하고, 불도를 미덥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풀게 하였으니, 효성으로 신인을 감동시킨 것의 기이함이 셋째이다.
열일곱 살에 이르러 구족계를 받고 비로소 강단에 나아갔다. 소매 속에 빛이 선명한 것을 깨닫고 이를 더듬어 한 구슬을 얻었다. 어찌 마음을 두고 구한 것이겠는가. 곧 발이 없이도 이른 것이니, 참으로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비유한 바이다. 굶주려 부르짖는 것으로 하여금 제 스스로 배부르게 하고, 취해서 넘어지는 것으로 하여금 능히 깨어나도록 하였으니, 마음을 면려한 것의 기이함이 넷째이다.
하안거를 마치고 장차 다른 곳으로 가려 하는데, 밤에 꿈속에서 보현보살이 이마를 어루만지고 귀를 끌어당기면서 말하기를, “고행을 실행하기는 어려우나 이를 행하면 반드시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꿈에서 깬 뒤 놀란 나머지 오한이 든 것 같았다. 잠자코 살과 뼈대에 새겨 이로부터 다시는 명주옷과 솜옷을 입지 않았고, 긴 실이 필요할 때는 반드시 삼이나 닥나무에서 나온 것을 사용하였으며, 어린 양가죽으로 만든 신도 신지 않았다. 하물며 새깃으로 만든 부채나 털로 만든 깔개를 사용하겠는가. 삼베옷을 입는 자로 하여금 수행에 눈을 뜨게 하고 솜옷을 입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였으니, 자신을 단속함의 기이함이 다섯째이다.
어렸을 때부터 노성한 덕이 풍부하였고, 게다가 계주(戒珠)를 밝혔는지라, 후생들이 다투어 따르면서 배우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이를 거절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큰 걱정은 남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슬기롭지 못한 사람들을 억지로 슬기롭게 하고자 해도 그것이 본보기가 되지 못한 사람들을 모범이 되게 하는 것과 같겠는가. 하물며 큰 바다에 뜬 지푸라기가 제 자신도 건너갈 겨를이 없음에랴. 그림자에게 형체를 쫓지 못하도록 한 것은 반드시 비웃음살 꼴이 되리라” 하였다. 뒤에 산길을 가는데 어떤 나뭇꾼이 앞길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선각이 후각을 깨닫게 하는 데 어찌 덧없는 몸을 아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니 문득 보이지 않았다. 이에 부끄러워 하면서도 깨닫고는 와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막지 않으니, 계람산(鷄藍山) 수석사(水石寺)에 대나무와 갈대처럼 빽빽하게 몰려들었다. 얼마 뒤에 다른 곳에 땅을 골라 집을 짓고는 말하기를, “매이지 않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나, 능히 옮겨가는 것이 귀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책의 글자만 보는 이로 하여금 세 가지를 반성하게 하고 보금자리를 꾸민 자로 하여금 아홉 가지를 생각하도록 하였으니, 훈계를 내린 것의 이상함이 여섯째이다.
태사에 추증된 경문대왕께서는 마음으로는 유(儒)·불(佛)·도(道) 3교에 융회한 분으로서 직접 대사를 만나 뵙고자 하였다. 멀리서 그의 생각을 깊이 하고, 자신을 가까이 하면서 도와주기를 희망하였다. 이에 서한을 부쳐 말하기를, “이윤은 사물에 구애받지 않은 사람이고, 송섬은 작은 것까지 살핀 사람입니다.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에 비유하면,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왕도 주위의 암거에도 자못 아름다운 곳이 있으니, 새가 앉을 나무를 가릴 수 있는 것처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봉황의 내의(來儀)를 아끼지 마십시오” 하였다. 근시 가운데 쓸만한 사람을 잘 골라 뽑았는데, 원성왕의 6대손인 입언(立言)을 사자로 삼았다. 이미 교지를 전함이 끝나자 거듭 제자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대사가 대답하기를, “자신을 닦고 남을 교화시킴에 있어 고요한 곳을 버리고 어디로 나아가겠습니까. ‘새가 나무를 가려 앉을 수 있다’는 분부는 저를 위하여 잘 말씀하신 것이오니, 바라건대 그냥 이대로 있게 해주시어, 제가 거듭되는 부름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임금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더욱 진중히 여겼다. 이로부터 그의 명예는 날개가 없이도 사방으로 전해졌으며, 대중은 말하지 않는 가운데 아주 달라졌다.
함통 5년(864) 겨울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가 미망인을 자칭하며 당래불(當來佛)에 귀의하였다. 대사를 공경하여 자신을 하생(下生)이라 이르고 상공(上供)을 후히 하였으며, 읍사(邑司)의 영유인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가 산수의 아름다움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여, 원학(猿鶴)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대사가 이에 그의 문도들에게 말하기를, “산의 이름이 현계(賢溪)이고 땅이 우곡(愚谷)과 다르며 절의 이름이 안락(安樂)이거늘, 중으로서 어찌 주지하지 않으리오” 하고는, 그 말을 따라 옮겨서 머무른즉 교화되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산과 같이 더욱 고요하게 하고, 땅을 고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중히 생각토록 하였으니, 진퇴의 옳음이 첫째이다.
어느날 문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고(故) 한찬(韓粲) 김의훈(金嶷勳)이 나를 승적(僧籍)에 넣어 중이 되게 하였으니, 공에게 불상으로써 보답하겠노라” 하고는, 곧 1장 6척되는 철불상을 주조하여 선(銑)을 발라, 이에 절을 수호하고 저승으로 인도하는데 사용하였다. 은혜를 베푸는 자로 하여금 날로 돈독하게 하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람처럼 따르도록 하였으니, 보답을 아는 것의 옳음이 둘째이다.
함통 8년(867) 정해년(丁亥年)에 이르러, 시주인 옹주가 여금(茹金) 등으로 하여금 절에다 좋은 전지와 노비의 문서를 주어 , 어느 승려라도 여관처럼 알고 찾을 수 있게 하고, 언제까지라도 바꿀 수 없도록 하였다. 대사가 그로 인해 깊이 생각해온 바를 말하되, “왕녀께서 법희(法喜)에 의뢰하심이 오히려 이와 같거늘, 불손(佛孫)인 내가 선열(禪悅)을 맛봄이 어찌 헛되이 그렇겠는가. 내 집이 가난하지 않은데 친척족당이 다 죽고 없으니, 내 재산을 길가는 사람의 손에 떨어지도록 놔두는 것보다 차라리 문제자들의 배를 채워주리라”고 하였다. 드디어 건부(乾符) 6년(879)에 장(莊) 12구(區)와 전(田) 500결(結)을 희사하여 절에 예속시키니, 밥을 두고 누가 밥주머니라고 조롱했던가. 죽도 능히 솥에 새겨졌도다. 양식에 힘입어 정토를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비록 내 땅이라 하더라도 임금의 영토 안에 있으므로, 비로소 왕손인 한찬(韓粲) 계종(繼宗)과 집사시랑(執事侍郞)인 김팔원(金八元), 김함희(金咸熙)에게 질의하여 정법사(正法司)의 대통(大統)인 석현량(釋玄亮)에게 미쳤는데, 심원한 곳에서 소리가 나 천리 밖에서 메아리치니, 태보(太傅)에 추증된 헌강대왕(獻康大王)께서 본보기로 여겨 그를 허락하시었다. 그 해 9월 남천군(南川郡)의 승통(僧統)인 훈필(訓弼)로 하여금 농장을 가리어 정장(正場)을 구획하도록 하였다. 이 모두가 밖으로는 군신이 땅을 늘리도록 도와주고, 안으로는 부모가 천계(天界)에 태어나도록 하는데 이바지한 것이다. 목숨을 이은 사람으로 하여금 인(仁)과 더불게 하고, 가기(歌妓)에게 후히 상을 준 사람으로 하여금 허물을 뉘우치도록 하였으니, 대사가 시주로서 희사한 것의 옳음이 셋째이다.
건혜(乾慧)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심충(沈忠)이라고 하였다. 그는 대사의 이치를 분별하는 칼날이 선정과 지혜에 넉넉하고, 사물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천문과 지리를 환히 들여다 보며, 의지가 담란(曇蘭)처럼 확고하고 학술이 안름(安廩)과 같이 정밀하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만나뵙는 예의를 표현한 뒤 아뢰기를, “제자에게 남아도는 땅이 있는데, 희양산 중턱에 있습니다. 봉암(鳳巖)·용곡(龍谷)으로 지경이 괴이하여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니, 바라건대 선사(禪寺)를 지으십시오” 하였다. 대사가 천천히 대답하기를, “내가 분신(分身)하지 못하거늘 어찌 이를 사용하겠는가” 라고 하였으나, 심충의 요청이 워낙 굳세고 게다가 산이 신령하여 갑옷 입은 기사를 전추(前騶)로 삼은 듯한 기이한 형상이 있었는지라, 곧 석장을 짚고 나뭇꾼이 다니는 좁은 길로 빨리 가서 두루 살피었다. 산이 사방에 병풍같이 둘러막고 있음을 보니, 붉은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에 치켜 올라가는 듯하고 물이 백 겹으로 띠처럼 두른 것을 보니, 이무기가 허리를 돌에 대고 누운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놀라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땅을 얻음이 어찌 하늘의 돌보심이 아니겠는가.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대중에 솔선하여 후환에 대한 방비를 기본으로 삼았는데, 기와로 인 처마가 사방으로 이어지도록 일으켜 지세를 진압케 하고, 쇠로 만든 불상 2구를 주조하여 절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중화(中和) 신축년(辛丑年)(881)에 전(前) 안륜사(安輪寺) 승통(僧統)인 준공(俊恭)과 숙정대(肅正臺)의 사(史)인 배율문(裵聿文)을 보내 절의 경계를 표정케 하고, 이어 ‘봉암(鳳巖)’이라고 명명하였다. 대사가 입적한 지 수년이 되었을 때, 산에 사는 백성으로 들도적이 된 자가 있어 처음에는 감히 법륜에 맞섰으나 끝내 감화하게 되었다. 능히 정심(定心)의 물을 깊이 헤아려서 미리 마산(魔山)에 물을 댄 큰 힘이 아니겠는가. 팔이 부러진 사람으로 하여금 의리를 드러내도록 하고, 용미(龍尾)를 파는 사람으로 하여금 광기를 제어하게 하였으니, 선심(善心)을 개발한 것의 옳음이 넷째이다.
태부대왕(太傅大王)은 중국의 풍속으로써 폐풍(弊風)을 일소하고, 넓은 지혜로써 마른 세상을 적시게 하셨다. 평소에 영육(靈育)의 이름을 흠앙하시고, 법심(法深)의 강론을 간절히 듣고자 했던 터라, 이에 계족산(鷄足山)에 마음을 기울이시어 학두서(鶴頭書)를 보내 부르시며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소연(小緣)을 보호하다가 잠깐 사이에 한해를 넘겨버렸으니, 안으로 대혜(大慧)를 닦을 수 있도록 한번 와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임금의 낭함(琅函)에서 “좋은 인연이 세상에 두루 미침은 (불보살이) 인간계에 섞여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한 것에 감동하여, 옥을 품고 산에서 나왔다. 거마(車馬)가 베날듯이 길에서 맞이하였다. 선원사(禪院寺)에서 휴식하게 되자, 편안히 이틀 동안을 묵게 하고는 인도하여 월지궁(月池宮)에서 ‘심(心)’을 질문하였다. 그 때는 섬세한 조라(蔦蘿)에 바람이 불지 않고 온실수(溫室樹)에 바야흐로 밤이 될 무렵이었는데, 마침 달의 그림자가 맑은 못 가운데 똑바로 비친 것을 보고는, 대사가 고개를 숙여 유심히 살피다가 다시 하늘을 우러러 보고 말하기를, “이것(月)이 곧 이것(心)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상쾌한 듯 흔연히 계합(契合)하고 말씀하시기를, “부처가 연꽃을 들어 뜻을 나타냈거니와, 전하는 유풍여류(遺風餘流)가 진실로 이에 합치되는구려!”라고 하였다. 드디어 제배(除拜)하여 망언사(忘言師)로 삼았다. 대사가 대궐을 나서자, 임금께서 충성스런 신하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타이르도록 하며, 잠시 머물러 주기를 청하니, 대사가 대답하기를, “우대우(牛戴牛)라고 이르지만, 값나가는 바는 얼마 안됩니다. 새를 새의 본성에 따라 기르신다면 시혜(施惠)됨이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작별하기를 청하오니 이를 굽히면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를 들으시고 서글퍼하시며, 운어(韻語)로써 탄식하여 말씀하시기를, “베풀어도 이미 머물지 않으니 불문(佛門)의 등후(鄧侯)로다. 대사는 ‘지둔(支遁)이 놓아둔 학(鶴)’이나, 나는 ‘속세를 초월한 갈매기’가 아니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곧 십계(十戒)를 받은 불자인 선교성부사(宣敎省副使) 풍서행(馮恕行)에게 명하여 대사가 산으로 돌아가는 데 위송(衛送)토록 하였다. 토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루터기에서 떠나게 하고, 물고기를 탐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물 만드는 것을 배우도록 하였으니, 세상에 나가서 교화하고 물러와 도를 닦는 것의 옳음이 다섯째이다.
대사는 세간에서 도를 행함에 있어 멀고 가까움과 평탄하고 험준함을 가림이 없었고, 일찍이 말이나 소에게 노고를 대신토록 하지 않았다. 산으로 돌아감에 미쳐서는 얼음이 얼고 눈이 쌓여 넘고 건너는 데 지장을 주므로, 이에 임금께서 종려나무로 만든 보여(步輿)를 내리시니, 사자에게 사절하며 말하기를, “이 어찌 정대춘(井大春)의 이른바 단순한 ‘인거(人車)’이겠습니까. 뛰어난 인물들을 우대하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바이거늘, 하물려 삭발한 중으로서야. 그러나 왕명이 이미 이르렀으니, 그것을 받아 괴로움을 구제하는 도구로 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병으로 말미암아 안락사(安樂寺)에 옮겨가고 나서 석장을 짚고도 일어날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사용하였다. 병을 병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공을 깨닫도록 하고,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니, 취사(取捨)의 옳음이 여섯째이다.
겨울 12월 기망(旣望)의 이틀 뒤에 이르러 책상다리를 하고 서로 말을 나눈 끝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아아! 별은 하늘로 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에 떨어졌도다. 종일 부는 바람이 골짜기에 진동하니 그 소리는 호계(虎溪)의 울부짖음과 같았고, 쌓인 눈이 소나무를 꺾으니 그 빛깔은 사라수(沙羅樹)와 같았다. 외물이 감응함도 이같이 극진하거늘, 사람의 슬픔이야 헤아릴 만하다. 이틀 밤을 넘겨 학계산(賢溪山)에 임시로 유체를 모셨다가, 1년 뒤의 그 날에 희야(曦野)로 옮겨 장사지냈다.
사(詞)에 이르기를,
공자는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으며, 노자는 백을 알면서도 능히 흑을 지키었네. 두 교가 한껏 천하의 본보기라 일컬었지만, 석가는 힘 겨루는 것을 나무랐으니, 십만 리 밖에 서역의 거울이 되었고, 일천 년 뒤에 동국의 촛불이 되었네.
계림의 지경은 오산의 곁에 있으며, 옛부터 선과 유에 기특한 이가 많았네. 아름다울손 희중이여! 직부에 게으르지 않고, 다시금 불일을 맞아 공과 색을 분별하였구나. 이로부터 교문이 여러 층으로 나뉘었으며, 그로 인해 말의 길이 널리 뻗게 되었네.
몸은 토끼굴에 의지하였으나 마음은 편안키 어려웠고, 발을 양기(羊崎)에 내딛으니 도리어 눈이 현혹될 정도였네. 법해(法海)가 순탄하게 흐를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데, 마음으로 안결(眼訣)을 얻었으니 참되고 극진함을 포괄하였구나. 득(得) 가운데의 득(得)은 망상(罔象)의 얻음과 같은 것이나, 묵(黙) 중의 묵(黙)은 한선(寒蟬)의 울지 않음과 다르도다.
북산의 도의(道義)가 홍곡(鴻鵠)의 날개를 드리우고, 남악의 홍척(洪陟)이 대붕(大鵬)의 날개를 펼쳤네. 해외에서 알맞은 때에 귀국하매 도는 누르기 어려웠으니, 멀리 뻗은 선의 물줄기가 막힘이 없구나.
다북쑥이 삼대에 의지하여 스스로 곧을 수 있었고, 구슬을 내 몸에서 찾으매 이웃에게 빌리는 것을 그만 두었네. 담연자약한 현계산의 선지식이여! 열두 인연이 헛된 꾸밈이 아니로다.
무엇하러 참바를 잡고 말뚝을 박을 것이며, 무엇하러 종이에게 붓을 핥도록 하고 먹물을 머금게할 것인가. 저들은 혹 멀리서 배우고 고생하며 돌아왔지만, 나는 능히 정좌(靜坐)하여 온갖 마적을 물리쳤도다.
의념(意念)의 나무를 잘못 심어 기르지 말고, 정욕(情欲)의 밭에다 농사를 그르치지 말며, 수없는 항하사(恒河沙)를 두고 만(萬)이다 억(億)이다 논하지 말고, 외로이 뜬 구름을 두고 남북을 논하지 말라.
덕행의 향기는 사방원지(四方遠地)에 치자나무 꽃처럼 알려졌고, 지혜의 교화는 한편으로 사직을 편안케 하였네. 몸소 임금의 은총을 받들어 누더기를 펄럭였고, 마음을 물에 비친 달에 비유하여 선식(禪拭)을 바쳤네.
집안의 대를 이을 부유한 처지에서 과연 누가 형극의 길에 들 것인가. 썪은 선비의 도로 대사의 정상(情狀)을 들추기가 부끄럽도다. 발자취가 보당처럼 빛나니 이름을 새길 만한데, 나의 재주가 금송(錦頌)을 감당하지 못하여 글을 짓기 어렵도다. 시끄럽고 번거로운 창자로 선열의 공양에 배부르고자, 산중으로 와서 전각을 살펴보노라.
<음기>
태부왕(太傅王)께서 의원을 보내 문병하시고 파발마를 내려 재(齋)를 지내도록 하셨다. 중정(中正)·공평(公平)하게 정무를 보시느라 여가가 없으시면서도, 능히 시종 한결같으셨으니, 보살계를 받은 불자요 건공향(建功鄕)의 수령인 김입언(金立言)에게 특별히 명하여, 외로운 여러 제자들을 위로하게 하고 ‘지증선사(智證禪師)’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호를 내리셨다. 이어 비석 세우는 것을 허락하시고, 대사의 행장을 적어 아뢰라 하시니, 문인인 성견(性蠲)·민휴(敏休)·양부(楊孚)·계미(繼徽) 등은 모두 글재주가 있는 사람들인지라, 묵은 행적을 거두어 바쳤다.
을사년(乙巳年)(885)에 이르러 국민 가운데 유도(儒道)를 매개로 하여 황제의 나라에 시집가서 이름을 계륜(桂輪)에 높이 걸고 관직이 계하사(桂下史)에 오른 이가 있어 최치원(崔致遠)이라고 하는데, 당제(唐帝)의 조서를 두 손으로 받들고 회왕(淮王)이 준 의단(衣段)을 함께 가져 왔으니, 비록 이 영광을 봉새가 높이 나는 것에 비하기는 부끄러우나, 학이 청초하게 돌아온 것엔 자못 비길 만하리라. 임금께서 신신(信臣)으로서 청신남(淸信男)인 도죽양(陶竹陽)에게 명하여, 대사의 문인들이 쓴 행장을 치원에게 주도록 하고 수교(手敎)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누더기를 걸친 동국(東國)의 선사(禪師)가 서방(西方)으로 천화(遷化)함을 이전에 슬퍼하였으나, 비단 옷을 입은 서국의 사자(使者)가 동국으로 귀환함을 매우 기뻐하노라. 불후의 대사가 인연이 있어 그대에게 이르게 된 것이니, 절묘한 작품을 아끼지 말아 장차 대사의 자비에 보답토록 하라”라고 하였다. 신이 비록 무인(武人)의 재목이 아니기 때문이긴 하나, 문인이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바야흐로 마음껏 재주를 부리려고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주상전하의 승하하심을 당하였는데, 다시 나라에서 불서(佛書)를 중히 여기고 집에서는 승사(僧史)를 간직하며, 법갈(法碣)이 서로 바라보고 선비가 가장 많게 되었다. 두루 아름다운 글을 보고 시험삼아 새롭지 못한 글도 찾아 보았는데, “무거무래(無去無來)”의 말이 다투어 말(斗)로 헤아릴 정도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말이 움직이면 수레에 실을 지경이었지만, 일찍이 『춘추(春秋)』에서와 같은 신의가 없었고, 간혹 주공(周公)의 구장(舊章)만을 쓴 것과 같을 뿐이었다. 이로써 돌이 말하지 못함을 알았고 도가 멀다고 하는 것을 더욱 체험하였다. 오직 한스러운 것은, 대사께서 돌아가신 것이 이르고 신의 귀국이 늦었다는 것이다. ‘애체(靉靆)’라는 두 글자를 두고 누가 지난 날을 알려줄 것인가. 소요원(逍遙園)에서 처럼 설법을 하셨으나, 참다운 비결을 듣지 못하였으니, 매양 감당할 수 없는 처지임을 걱정만 하였지, 서둘러 지어야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때가 늦음을 탄식하자면 이슬처럼 지나고 서리같이 다가와, 갑자기 근심으로 희어진 귀밑머리가 시들어 쇠약한 것 같고, 도의 심원함을 말하자면 하늘같이 높고 땅처럼 두터워, 겨우 뻣뻣한 붓털을 썩힐 뿐이다. 장차 얽매임이 없는 놀음에 어울리고자 비로소 공동산(崆峒山)처럼 아름다운 행실을 서술한다.
문인인 영상(英爽)이 와서 글을 재촉하였을 때 금인(金人)이 입을 다물었던 고사에 따라 돌같은 마음을 더욱 굳히었다. 참는 것은 뼈를 깎아내는 것보다 고통스럽고 요구는 몸을 새기는 것보다 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림자는 8년 동안 함께 짝하였으며, 말은 세번을 되풀이했던 것에 힘입었다. 저 여섯 가지의 기이한 일과 여섯 가지의 옳은 일로 글을 지은 것에 부끄러움이 없고 용력(勇力)을 과시하기에 여유가 있는 것은, 실로 곧 대사가 안으로 육마(六魔)를 소탕하고 밖으로 육폐(六蔽)를 제거하여, 행하면 육바라밀(六波羅密)을 포괄하고 좌선(坐禪)하면 육신통(六神通)을 증험하였기 때문이다. 일은 꽃을 따서 모은 것과 같은데, 글은 초고 없애는 것을 어렵게 하였다. 그 결과 가시나무를 쳐내지 않는 것과 같게 되었으니, 쭉정이와 겨가 앞에 있음이 부끄럽다. 자취가 ‘궁전에서의 놀음’을 따랐으매, 누구인들 ‘月池宮에서의 아름다운 만남’을 우러르지 않겠는가. 게(偈)는 칠언연구(七言聯句)를 본받았으니, 바라건데 해뜨는 곳에서 고상한 말로 비양(飛揚)하라.
분황사의 중 혜강(慧江)이 나이 83세에 글씨를 쓰고 아울러 글자를 새기다. 원주인 대덕 능선(能善)·통준(通俊), 도유나(都唯那)인 현일(玄逸)·장해(長解)·명선(鳴善), 또 시주로서 갈(碣)을 세웠으며 서□대장군(西□大將軍)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착용한 소판(蘇判) 아질미(阿叱彌), 가은현장군(加恩縣將軍) 희필(熙弼), 당현(當縣)(마멸). 용덕(龍德) 4년(924) 세차(歲次) 갑신(甲申) 6월 일에 건립을 마치다.
인용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