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정(고운 최치원의 발자취를 찿아서.....)

2016. 2. 15. 22:35



       농산정(고운 최치원의 발자취를 찿아서.....)| * 신라옛길답사 *

흑선풍 |  2009.06.24. 10:47


 

얼마전  카페에 벽화이야기 시작하려고 해인사 벽화 찍으러 갔다가

나오는 길입니다.

신라말 비운의 스타 고운 최치원의 흔적이 이 계곡에 있다는 걸 알고

다른 기회에는 잘 가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에

혼자 왔을 때 찾아봤습니다.


 

[농산정]

 

 

[농산정 천정]

 

[가야산홍류동고운제시석처]

고운의 입산시가 새겨진 돌이 마멸이 심해서 알아볼 수 없게 되자

우암 송시열이 계곡 건너편 길가에 다시 쓴 것을 고운의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을

바로잡는다는 내용입니다.

고운이 남긴 것은 이 비석 바로 앞 암반(암벽이 아니고)에 있습니다.

 

[가야산홍류동고운제시석처 비석]



 

입산시가 새겨진 암반 전체사진입니다.

왼쪽위 큰 돌 앞에 서있는 까만 돌이 제시석처를 알리는 비석이고

시가 새겨진 곳은 그 오른쪽 평평한 곳 바닥(사진 가운데)입니다

 

풍류를 좀 한다는 사람들은 와서 다 새기고 갔나봅니다

주변에 온통 이름 등을 새긴 한자로 가득합니다.



 

최지원의 입산시를 새긴 곳입니다.

바닥에 새겨져 있어 물살에 거의 다 마멸되어

오른쪽 위-광분, 왼쪽 위-고교 4자만 보여 심각(좀더 깊이 새긴)했다고 합니다.

 

정면에서 봤습니다.

아래 글씨는 후세 사람들이 새긴 글자가 네모 구역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우암 송시열이 다시 썼다는 글입니다.

계곡 건너편 길가 암반에 새겨져 있습니다.

계곡에 있는 것과 같이 네모구획 안에 썼는데

네모 구획 두개가 위 아래로 있는데 위쪽입니다.



 

네모구획 두개 중 아래쪽입니다



 

위쪽-정면에서



 

아래쪽-정면에서

내천과 뫼산 밖에 모르겠습니다



 

전경입니다.

해인사로 매표소를 지나서 바로 곡선길을 돌아서면 오른쪽 암벽 아래입니다.



 

그 위에 있는 문창후유허비 입니다



 

농산정 원경입니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있어 쉽게 갈 수 있습니다

홍수 때 물이 불어나면 최치원의 글은 볼 수 없겠습니다.

 

아래에 1996년에 새긴 제시석처 비문을 옮깁니다.

내력이 소상히 실려있는 것 같습니다.



 

 


가야산홍류동고운제시석처


고운최선생은 신라가 낳은 천재적인 학자일 뿐 아니라

종교ㆍ철학ㆍ정치ㆍ시문ㆍ서도 등 각 분야에 걸쳐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이다.

선생은 12세에 입당 유학하고 28세에 귀국하였다.

22세인 황소난 때 병마제통인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지은 격문중

불유천하지인(不唯天下之人)이 개사현륙(皆思顯剹)이라

양역지중지귀(仰亦地中之鬼)도 이의음주(已議陰誅)라는 구절은

황소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885년에 귀국하여 시독겸병부시랑지서감이 되었으나

국정의 문란과 간신들의 시기로 정읍ㆍ함안ㆍ서산군수 등의 외직으로 밀려났다.

894년에 시무십조의 개혁안을 올려 아찬이 되었으나

계림 황업의 비운을 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각지로 유랑하다가

가야산에 들어온 때는 확실하지 않으나 900년에 해인사선안주원벽기를 지은 것은 입산 이전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선생이 가야산에 들어온 때는 37세인 894년 시무십조를 올린 후

고려태조의 재위년중(918~943)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918년 이후에 입산하여 현재의 고운암터에 집을 짓고 살면서

무릉교 등 13명소를 정하여 명명하고 자필로 그 이름을 새겼다 .

그 중 가장 절경인 홍류동의 농산정 동쪽 계천 중 암반에 그가 입산할 때 지은


광분첩석후중만(狂噴疊石吼重巒)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倒耳)

고교유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

이라는 입산시를 새겼으니 제시석이라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홍수광연으로 거의 마멸되고

기구인 광분2자와 결구인 고교2자 등 4자만 희미하게 남아 있으므로

우암 송시열이 농산정 맞은편 문창후유허비 북쪽 해인사로 올라가는

오른쪽 암반에 자필로 이 시를 새겨 두었는데

대부분의 인사들이 고운 진적으로 잘못 알고 있으므로

기자가 본위치를 찾아 희미하게 남아있는 4자를 다시 심각하고

후인들의 착견을 없애고자 이 비를 세워두는 바이다


불기2540년(1996) 3월 10일

가산 이지관 기

중산 최종상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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