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을 가다-2. 보령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2016. 2. 15. 23:12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을 가다-2| 마음에 남는 좋은글

02박숙화 |  2015.08.07. 14:34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을 가다-2

                                   

②보령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보령 聖住寺 郎慧和尙 白月葆光塔碑(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국보 제8호

   충남 보령에는 신라하대 구산선문의 한 중심지였던 성주산문의 성주사 옛터가 남아 있는데 이 황량한 폐사지에 승탑은 없이 탑비만이 보호비각 안에 서 있으니 이것이 바로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하나인 낭혜화상(郎慧和尙) 부도비이다.

성주사 터는 최근 어느 정도 정리되고 울타리도 쌓아 나름대로 차분해 보이지만 관리인도 안 보이고 입장료도 받지 않는 넓고 평평한 옛터에 5층 석탑과 석등 하나, 나란히 선 3층 석탑 세 개, 그리고 금당이 들어선 흔적이 있을 뿐,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저 황량해 보이는데 이래 봬도 전성기 때는 불전이 50칸, 행랑이 800칸, 고사(庫舍)가 50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의 전각과 탑, 불상들이 모두 재현된다고 하여도 저 뒤쪽 한 켠에 서 있는 보호비각 안의 탑비 하나만은 못할 터이니 바로 국보 제8호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聖住寺 郎慧和尙 白月葆光塔碑) 때문일 것이다.


낭혜화상(郎慧和尙, 801~888년)

   신라 후기의 승려. 속성은 김씨(金氏), 호는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이고, 법명이 무염(無染)이며 태종무열왕의 8대손이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9세 때 ‘해동 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다.


   12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서 출가하였으며 그 뒤 부석사의 석징(釋澄)을 찾아가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821년(헌덕 13)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 당나라에서는 이미 화엄학보다 선종(禪宗)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도 선 수행에 몰두하였으며,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여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렸다.

845년(문성왕 7년), 25년 만에 귀국하여 보령 성주사(聖住寺)를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삼아 40여 년 동안 주석하였다.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도를 구하므로 그들을 피하여 상주(尙州) 심묘사(深妙寺)에서 지내기도 하였으며 888년 89세로 입적하였다.

열반한 지 2년 뒤에 부도와 비를 세웠으니 진성여왕 4년인 890년이다. 진성여왕은 당대의 명문장가인 최치원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도록 하였으며 시호를 大郎慧(대낭혜), 사리탑을 白月葆光(백월보광)이라 하사하였다.

최치원이 지은 비문은 5천여 자에 이르는데 사촌 동생 최인곤이 글을 썼고, 이 지방 특산물인 높이 2.63m의 남포 오석의 비신에 또박또박 새긴 글씨는 누구의 솜씨인지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아쉽다. 이 비는 통일신라 탑비 중에서 가장 크고,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에서도 가장 당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보령 성주사(聖住寺)

   성주사는 본래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절로 그때 이름은 오합사(烏合寺)라고 했다. 오합사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언급되었고 또 발굴조사 때 나온 기왓조각에 오합사 글자가 있어 확실하다.

이 오합사가 백제가 멸망한 후에 어찌 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위세가 약해지고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다가 어느 지방호족이 또한 어느 고승을 만나 크게 중창하면서 되살아 난 것이라면 이곳 보령지역의 호족 김양과 낭혜화상 무염국사에 의하여 중창되었을 것이다.


   무염국사를 성인(聖人)으로 보고 성인이 주석한 절이니 성주사(聖住寺)라 이름 붙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임진왜란 때 모조리 불타버리고 오늘날 폐사지만 남아있다. 9천여 평에 달하는 넓고 평평한 성주사 터에는 금당 터 앞에 5층 석탑과 석등이 남아있고, 그 뒤쪽으로는 3개의 삼층석탑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어 그동안 3탑을 세운 절집이 없었으나 어떤 형태 어떤 의미인지 설명이 쉽지 않다.



▲성주사 터 전경. 앞쪽으로 5층 탑과 석등, 뒤쪽으로 3층 석탑 세 개가 나란히 서 있으며 왼편 뒤쪽 보호각이 부도비이다.
▲낭혜화상 부도비는 노천에 있었으나 얼마 전 이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세웠다.
▲보통 부도탑과 부도비가 한 쌍으로 세워져야 하나 아쉽게도 부도비만 홀로 서 있고 부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호각 주변에는 부도의 일부로 보이는 좌대 등 석재들이 흩어져 있지만 정작 제 짝인지는 알수 없다.
▲보호각 안의 부도비 모습. 하필 관람객 눈높이에 굵직한 보호각 가로막대를 질러놓았다. 참 무감각하다.
▲보호각 안의 부도비 모습. 하필 관람객 눈높이에 굵직한 보호각 가로막대를 질러놓았다. 참 무감각하다.
▲부도비의 귀부.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의 머리와 몸 일부가 아쉽게도 파손되었다.
▲왼쪽에서 보는 귀부의 머리부분은 다소 괜찮아 보인다. 비석을 꽂는 거북 등위의 좌대(碑坐 : 비좌)는 뭉글뭉글 구름 모양으로 떠받치고 아랫부분에는 안상과 꽃무늬를 새겨 화려하다.
▲뒤에서보니 등판에는 겹 육각형 무늬가 뚜렷하고 등줄기를 타고 긴 띠를 두른 끝에 꼬리가 한번 흔든 모습으로 보인다.
▲오석에 새긴 글씨가 5천 자가 넘는다는 비신. 기계로 한 듯 또박또박 정확하게 새겼다.
▲이수에는 제목을 써넣는 題額(제액) 부분이 평평하게 남겨져 있고 그 주위로 구름과 용이 뒤엉켜 있다.


   이러한 부도비나 각종 비석을 둘러볼 때마다 금석문에 관한 지식이 모자람이 안타깝다. 비석에 쓰인 상태로 한자를 읽고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대부분이 그렇지 못한 현실이므로 가능하다면 한자 원본과 해석본을 비치해서 볼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또한, 관련된 서적을 폭넓게 읽어서 사전에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도 탐방객들의 도리라고 본다. 아직 더 견문을 넓히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탑비에서 바라본 성주사 터. 뒤에는 3층 석탑 세 개가 나란히, 그 앞에는 금당 터, 그 앞에는 5층 석탑과 석등이 보인다.
▲왼쪽 석탑은 보물 제47호, 중앙은 보물 제20호, 오른쪽은 충남유형문화재 제26호이다. 왜 이렇게 다른지는 알 수 없다.
▲1층 몸돌에는 자물쇠 모양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어 사리를 보관하고 굳게 잠갔다는 표현인 듯하다.
▲1층 몸돌에는 자물쇠 모양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어 사리를 보관하고 굳게 잠갔다는 표현인 듯하다.
▲삼층석탑 앞에는 금당 터가 축대 위로 솟아 있고, 그 가운데에는 꽤 큰 규모의 불상 좌대가 보인다. 애초 뒤쪽의 3층 석탑 세개는 제자리가 아닌 듯 하다니 앞쪽의 5층 탑과 함께 일탑일금당 형식인듯 하다. 소문에는 거대한 철불이 있었는데 일제시대 때 일본사람들이 가져갔다고 한다.
▲금당에 오르는 계단. 좌우측의 돌사자 상은 1986년에 도난당하여 새롭게 깎아 세웠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5층 석탑. 보물 제19호이다. 그 앞의 석등까지 제대로 갖추었다.
▲삼층석탑 오른쪽 뒤편의 민불 하나. 여러 곳이 없어지고 파손된 후 어색하게 보수한 석불 입상이다.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두 번째로 보령 성주사의 낭혜화상 부도비를 찾아보았다. 낭혜화상은 봉암사의 지증대사보다 6년 늦게 입적하였으나 기록을 찾아보니 사후 2년 만에 비석이 세워졌으며 부도는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다.

지증대사는 먼저 돌아가셨지만, 사후 8년 뒤에야 일대기가 작성되고, 다시 33년 뒤에야 부도비가 세워졌으니 정작 먼저 돌아가셨지만, 부도비는 30년 이상 늦게 세워져 사산비문중 봉암사 지증대사비가 가장 늦게 세워진 연유이다. 그래서인지 국보로 승격도 가장 늦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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