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을 가다-3.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雙磎寺 眞鑑禪師塔碑)

2016. 2. 15. 23:21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을 가다-3| 마음에 남는 좋은글

02박숙화 |  2015.08.07. 14:41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을 가다-3                                 

 

③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雙磎寺 眞鑑禪師塔碑) 국보 제47호

   매화를 보기 위하여 해마다 연초가 되면 아직 추위도 채 가시지 않은 섬진강 하류 전라도 땅 광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섬진강 건너편은 경상도 하동땅,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그 유명한 화개장터이다.

하동에서 화개장터까지 섬진강변을 따라 벚꽃길 80리라 통칭하며, 다시 화개장터에서 골짜기로 꺾어들어가 화개천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천변 왼쪽은 오래된 십리 벚꽃길, 남여가 함께 걸어가면 혼인하게 된다는 일명 혼인길이며 천변 오른쪽 더 늦게 생긴 도로변에도 심어놓은 벚꽃이 이미 무성하여져서 해마다 봄이면 이 화개천변을 따라 화려한 꽃대궐이 펼쳐진다.

바로 이 화개천변 십리 벚꽃길이 끝날 즈음에 있는 절이 쌍계사(雙磎寺)이며, 세번째 소개할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진감선사탑비'(眞鑑禪師塔碑)가 이곳에 있다. (소개하는 순서가 3번째라는 뜻이지 사산비명에 따로이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진감선사(眞鑑禪師, 774~850년)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 속성은 최(崔)씨. 전주(全州) 금마(金馬) 사람으로 부모를 일찍 여의고, 불법을 구하려는 뜻이 간절하여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 창주(滄州)에 가서 신감(神鑑)에게 출가하니, 얼굴이 검다하여 흑두타(黑頭陀)라 불리웠다.

810년 숭산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앞서 당나라에 가 있던 도의(道義)를 만나 함께 다니다가 도의는 먼저 귀국하고 스님은 종남산에서 3년 동안 지관을 닦은 뒤에 길거리에서 짚신을 삼아 3년 동안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시하다가 흥덕왕 5년(830) 귀국하여서는 상주 노악산의 장백사에 있다가 지리산으로 가서 화개곡의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창건한 玉泉寺(옥천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진감선사 혜소는 불교음악인 범패를 들여와 대중화 시켜 많은 대중을 교화하였으며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문성왕 12년(850), 나이 77세, 법랍 41년에 이 곳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헌강왕이 시호 진감선사(眞鑑禪師) 탑호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하였다. 정강왕 때 옥천사를 쌍계사라 고치고, 최치원(崔致遠)으로 하여금 글을 지어 비(碑)를 세우니 국보 제47호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이다.



하동 쌍계사(雙磎寺)


   쌍계사는 신라 진성왕 21년(722) 대비(大悲), 삼법(三法) 두 화상이 선종(禪宗)의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정상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눈 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 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지금 이곳에 절을 지었다.


   그 뒤 당나라에 유학하던 진감선사가 귀국하여 퇴락한 삼법 스님 절터에 옥천사(玉泉寺)라는 대가람을 중창하였고, 그 후 정강왕 때 쌍계사로 바뀌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버린 것을 벽암(碧巖)이 인조 10년(1632)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선수행을 하는 선원(禪院),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는 강원(講院), 부처의 계율을 익히는 율원(律院)을 갖추어야 총림이라고 하는데 그동안 가야총림 해인사, 조계총림 송광사. 영축총림 통도사, 덕숭총림 수덕사. 고불총림 백양사를 일컬어 5대총림이라고 하였다. 최근에 동화사, 쌍계사, 범어사를 추가하여 8대총림으로 하였는데 쌍계사로서는 경사스러운 일이다.



진감선사탑비(眞鑑禪師塔碑, 국보 제47호)


   쌍계사의 전신 옥천사(玉泉寺)를 크게 중창한 진감선사를 기리는 탑비로 헌강왕이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탑호를 내렸으며 진성여왕 1년(887)에 세워졌는데 귀부와 비신, 이수가 모두 남아있다. 현재 대웅전 앞마당에 있으며, 비신의 훼손 상태가 심각하여 외곽을 철제 틀로 덧붙여 보존하고 있고 글씨도 마멸이 심하나 다행히 영조 1년(1725)에 전문을 목판에 옮겨 새긴 것이 보존되고 있다 한다.


   탑비의 비문은 고운 최치원이 짓고 쓴 명문장이며 모두 2,417자의 해서체 글씨가 신품(神品)이라고 칭송받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중 하나로 우리나라 금석문의 으뜸으로 꼽힌다.




▲쌍계사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진감선사탑비. 귀부, 비신, 이수가 모두 온전하게 남아있지만 비신 앞면은 부분적으로 깨어졌다.

 

▲부득이 비신의 측면과 후면으로 철판 틀을 짜서 외곽을 감싸듯 둘러서 보호하고 있다. 철근으로 뒷면을 지지하고 있던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비슷하다.


▲이수는 용틀임이 실감나게 비틀려 새겨졌고 앙화위에 보주가 올려져 있다. 중앙 네모진 부분은 두전(頭篆)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비석의 제목 제액을 쓴다. 또는 비신의 가장 윗줄에 제목(題額 : 제액)을 쓰며 대부분이 전서체로 쓰기에 전액(篆額)이라고 한다. 진감선사탑비는 두전(頭篆)에 전서체로 '해동고진감선사비(海東故眞鑑禪師碑)'라고 쓰여 있다.


▲귀부는 다른 탑비에 비하여 발도 작고 용머리도 실감이 덜하다. 아쉬운 부분이다.


                        진감선사(眞鑑禪師) 부도, 보물 제380호



   앞서 답사한 봉암사 지증대사 부도는 부도비와 함께 나란히 보호비각 안에 모셔져 있었고, 성주사지 낭혜화상 부도는 부도비만 서 있을 뿐 찾을 수 없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그러면 쌍계사 진감선사 부도는 어디 있을까?


   쌍계사 북쪽 능선, 불일폭포 가는 길 중간에 서 있는 부도 하나를 진감선사의 승탑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고 한다. 아쉽게도 관련기록이나 명문이 없는 탓이다. 게다가 이 부도는 몸돌이 제짝이 아닌 듯 아무 장식이나 조각 없이 다른 부분과 제대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 아쉽게도 필자는 진감선사 부도가 없다고 생각하여 이 부도까지 직접 올라가보질 못 하였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불일폭포도 볼겸 산행삼아 올라가 보려 한다. (문화재청 사진으로 대신한다.)



▲쌍계사 부도로 불리는 팔각원당형 부도. 부도를 받치는 기단부는 상대석은 앙련으로, 하대석은 복련으로 중대석을 포함하여 장구형태를 이룬다. 그 위에 얹힌 몸돌이 아무 장식없이 팔각모양이며, 지붕돌이 얹혀있는데 팔각모서리 귀꽃의 일부가 깨어졌다.

쌍계사로 들어서는 초입에는 왼쪽에 쌍계(雙磎),

오른쪽에 석문(石門)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 2개가 좌우로 나뉘어져 있는데

  최치원이 지팡이 끝으로 쓴 글씨라고 전해온다.

찻길이 바위 바깥쪽으로 생기는 바람에 찻길만 따라 올라가면 못 볼 수도 있다.

 

cafe.daum.net/handimunhwa/R4VM/163  고려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 동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