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경밀험’을 읽어보았나…신성 강조하면 윤리 실종

2016. 2. 19. 11:30다산의 향기



      ‘심경밀험’을 읽어보았나…신성 강조하면 윤리 실종 자료 / 보정산방

2011.03.22.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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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번 한자경의 글에 대한 나의 논평은 다음 두 가지의 쟁점을 제기한 것이었다. 첫째는 한자경의 글주희정약용이 모두 유학적 가치를 긍정했던 유학자였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는 양자의 철학적 차이는 유학적 가치를 정당화하는 방법에서의 차이에 불과하지만, 양자가 유학적 가치를 정당화하는 방식도 결코 한자경의 도식, 즉 내재적 신론외재적 신론이란 도식으로 그렇게 간단하게 규정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제기된 두 가지 쟁점에 대해 한자경은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첫째 쟁점에 대해 그녀는 “유학적 가치덕목이란 표면적 사실의 확인보다 그들이 무슨 근거에서 그런 가치를 정당화하는가가 철학적으로 더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철학적으로 그들이 유학적 가치를 표방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쟁점에 대해 그녀는 “신유학이 불교와 마찬가지로 내적 초월성을 긍정하는 반면, 정약용은 마테오리치와 마찬가지로 외재주의적 신관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공·맹의 유학, 주희의 철학, 불교가 모두 마음 안에 내재하는 신성과 영성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동양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면, 마테오리치의 선교전략에 속은 정약용은 상제, 천, 신에 대한 경외감에 빠져 “동양정신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먼저 철학자는 표면적인 주장보다는 심층적인 근거에 주목해야 한다는 그녀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철학자는 언제 그리고 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지지하는 주장이 의문시될 때, 주장의 존재근거를 의심받을 때다. 위대한 철학자는 이런 외부로부터의 도전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이 지지하는 주장에 정당하고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려 했던 사람들이다. 보편성을 자임함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철학사라는 역사를 갖는 아이러니도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칸트도 철학사는 일종의 전쟁터(kampfplatz)라고 했던 것 아닐까? 어쨌든 어떤 철학자가 구성한 철학은 주장, 문제제기, 정당화[혹은 근거]라는 세 발생론적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훌륭한 철학사가는 이 세 요소를 그들의 텍스트 안에서 변별해내어 재구성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철학사가는 과연 자신이 다루고 있는 철학자가 의미있는 주장을 하고 있는지, 그에 대한 어떤 문제제기가 있었는지, 그리고 그 문제제기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정당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런데 한자경은 주희와 정약용을 읽을 때 그들의 정당화 방식만이 철학적으로 의미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그녀가 훌륭한 철학사가로서의 소양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주장이 없는 정당화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또 문제제기 없는 정당화란 가능하기라도 한 것인가.

 

3.
다음으로 한자경이 주희와 정약용에게 찾았다고 주장하는 정당화의 방식 혹은 철학적 근거에 대해 알아보자. 이전 논문이나 지금이나 그녀는 양자의 정당화 근거를 각각 내재적 신론과 외재적 신론이라고 고집스럽게 규정한다. 분명 그들의 정당화의 방식에는 내재성과 외재성이란 냄새가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내재적인 것처럼 보이는 주희의 철학에는 태극의 초월성과 외물의 외부성이란 테마가 존재하고 있고, 외재적인 것처럼 보이는 정약용의 철학에는 천명의 내재성과 내면적 반성이라는 테마가 존재한다. 이전 논평에서 내가 그녀의 도식이 거칠다고 규정하면서, 주희와 정약용의 원문 구절들을 직접 인용하였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녀의 주장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데 충분한 주희와 정약용의 원문 구절들을 인용하면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논평이 되리라 확신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의 기대는 그녀의 반론문을 보고 여지없이 좌절되었다. 반론문에서 한자경은 “만물일체를 인으로 보면 외물과 나를 하나로 여길 우려가 있다”는 주희의 생각을 퇴계의 논의와 섞어버리면서 회피해버리고, “천명이란 내면적 양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정약용의 생각에 대해서는 진지한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지론을 애써 강변하기만 했다. 왜 이렇게 그녀의 반론은 허술하고 초라해 보이는가. 이것은 주희와 정약용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그들이 지은 핵심 문헌들조차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고 성급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4.
▲천주실의 ©
한자경 도식의 단순함을 보여주기 위해 주희와 정약용의 복잡함을 조금 살펴보도록 하자. 주희의 경우 신성[=본성]은 우리에게 내재해 있다. 그러나 ‘태극도설’과 이에 대한 그의 주석을 보면 이런 내재성의 기원은 만물 이전의 太極이란 초월자에 두어져 있다. 그가 내재적인 태극을 초월적인 태극에 귀속시키는 이유는 바로 불교식의 내재적 불성론이 가진 주관주의적 경향에 맞서, 인간 마음을 넘어서는 세계에 대한 통일적 조망을 주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주희에게서 내재된 본성은 그녀의 주장처럼 내적인 통찰이나 각성의 방식으로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내재적 본성은 구체적 일용생활에서의 윤리적 실천과 그에 입각한 涵養 공부나 혹은 格物 공부처럼 외적인 노력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일용생활에서의 공부와 격물치지 공부에 타인과 외물에 대한 긍정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약용의 경우 우리 인간의 발생과 기원은 외재적 신성[=천]에 의해 설명된다. 그렇지만 신성에 대한 관계는 한자경의 주장처럼 외적인 경외나 복종이 아니라, 내면적 양심과 반성을 쟁점으로 하고 있다. 그녀는 정약용이 마테오리치의 천주교를 그대로 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천주실의’와 ‘심경밀험’을 보면 양자 사이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천주실의’에서 윤리적 행위의 최종 목적이 내세에서의 심판을 위한 것인 반면, ‘심경밀험’에서 정약용이 권고하는 윤리적 수양의 목적은 마테오리치와는 달리 현세에서윤리적 삶을 완성하는 데 있었다. 또 반드시 확인해두어야만 할 것은 인간의 마음과 관련된 ‘천주실의’의 규정(‘인간 본성이 선함을 논하고 천주교인의 올바른 배움을 논함’)과 ‘심경밀험’(‘심성총의’)에서의 다산의 규정 사이에는 심각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5.
흥미로운 것은 한자경이 공·맹이나 주희의 유학에서 발견한 근거, 즉 내재적 신론은 이제 그녀에게 있어 주장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동양정신의 정수라고 극구 찬양했던 내재적 신론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다산과 리치는 자신들이 신앙하는 외적 절대가 내적 신성의 외화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내재주의를 신성과 영성이 없는 무신론 내지 유물론으로 치부해버린 것이다. 리치가 성리학을 그렇게 폄하했고, 다산 또한 그랬다. 오늘날의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내가 묻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녀가 망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입장이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이라는 사실이다. ‘내재’와 ‘외재’라는 범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신성 혹은 무차별적 일자라는 범주를 긍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성을 관조하기 위해 내면 속으로 침잠할 때, 윤리와 실천의 논의는 신성 속으로 증발해버린다는 점이다. 외재적 신론의 높이든 아니면 내재적 신론의 깊이든 간에, 이 속에서 우리에게 이웃들은 잘해야 이차적인 관심 대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내재주의가 동양적 나르시시즘으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내재적 신론 속에서 우리는 이웃과의 불가피하고 시급한 관계를 부단히 유예하면서 내면에 갇혀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녀가 윤리와 실천을 강조했던 공자, 맹자, 주희 그리고 정약용을 온당하게 평가할 수 없었던 것도 바로 이 내재적 신론 때문은 아닐까. 이것이 내가 그녀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다.

 

- 교수신문 2005.08.02, 강신주 천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