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백자 - 정리

2016. 2. 19. 13:09도자 이야기



       조선 백자 - 정리




4-1 백자의 기원과 성격

 

   백자는 구우면 희게 보이는 태토에 투명한 유약을 발라 구운 백색 자기를 말한다. 백자는 중국에서 6세기 중엽인 남북조(南北朝)시대 말기에 처음 등장해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 때가 되는 7세기에 비로소 기법적으로 완성된다. 특히 당나라 때 만들어진 백자는 당백자(唐白子)라고 하는데 이는 신라에까지 전해져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적이 있다. 또 백제의 무녕왕릉에서도 찻잔 형태의 백자가 발견되었다. 

 

   이 무렵 중국은 남청북백(南靑北白)’ 이라고 해 남쪽 지방에서는 주로 청자를 제작하고 화북 일대는 백자를 구웠다. 한반도에 백자의 제조 기법이 전해된 것은 9세기 후반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무렵 전라도 해안지방에는 중국 남방의 월주요계통의 청자 기술이 전래되어 있었는데 백자의 제조기법 역시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고려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용인의 서리 가마터에는 이 무렵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이는 백자 파편이 다수 발굴되었다.



   백자는 도자기 제조기술의 발달이란 면에서 보면 청자보다 발전된 형태의 도자기라고 할 수 있다. 백자를 만드는 흙, 즉 백토는 청자토와 달리 철분 함유량이 적은 게 특징이다. 이런 흙, 즉 질 좋은 백토를 구하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대개 태토로 사용할 흙을 구한 뒤에도 많은 노동력이 드는 철분 제거작업이 필요하다. 그 위에 투명한 유약을 찾아내는 기술 개발도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백자는 고려 시대에도 제작되었으나 청자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면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생활 기물로 적극 받아들여지면서 크게 발전했다. 특히 백자의 흰 색은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교적 이상을 잘 반영하는 색깔이기도 해 조선 왕조는 처음부터 백자 사용을 적극 후원했다.

   조선 왕실은 건국 이후 한동안 전국 각지의 가마에서 도자기를 진상 받아 사용했으나 성종 초기 무렵 경기도 광주군 일대에 사옹원(司饔院)분원(分院)을 설치하고 관영 가마를 운영하면서 백자를 제작하게 했다.

   조선시대 백자의 특징은 백색 그 자체와 조선사회의 이상을 상징화한 문양과 형태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자의 흰색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분류에 따라서는 회백(灰白), 순백(純白), 유백(乳白), 난백(卵白), 황백(黃白), 차백(茶白), 청백(靑白) 등으로 나뉠 수 있다. 이들 흰 색을 조금 더 뭉뚱그리면 노르스름한 빛을 띠는 유백색(乳白色), 눈과 같이 흰 설백색(雪白色) 그리고 약간 푸른기가 도는 청백색(靑白色)으로 나뉜다.


   15세기에 등장하는 초기 순백자 계통은 약간 회색을 띈 백색이며 금사리 백자는 유백색 그리고 분원 초기의 백자는 설백색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19세기 이후의 분원 백자는 약간 푸른빛이 도는 백자색이다.





백자 호이대병(白磁 虎耳大甁)

초당 7세기 높이 59cm 일본 개인





백자 항아리(白磁 壺)

15~16세기 전체 높이 32.2cm 국립중앙박물관





백자양각 용문 주전자(白磁陽刻 龍文 注子)

19세기 높이21.9cm 호암미술관





       4-2 조선시대 백자의 흐름


 

   조선시대 내내 백자가 제작되었지만, 재료나 제작 기법을 살펴보면 시대별로 조금씩 특징이 다른 백자가 등장했다 사라졌다.

먼저 조선시대 들어 초기에 제작된 백자는 2가지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고려청자의 전통을 계승한 연질(軟質) 백자이다. 다른 하나는 명나라의 백자 제조기법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경질(硬質)백자 계통이다. 연질이란 말 그대로 딱딱한 정도가 덜하다는 것으로 연질 백자는 태토 속에 들어있는 장석의 양이 다소 부족해 자화(磁化)가 덜 된 상태의 백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연질 백자는 마치 석고로 도자기를 빗은 듯이 푸석푸석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두 번째는 명나라 백자의 영향 아래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경질 백자이다. 이는 좋은 백토를 사용하고 투명한 유약을 발라 높은 온도에서 구은 백자를 가리키는데 두드리면 쇳소리가 날 정도로 경도가 높다. 경질 백자는 조선 초기에 제작된 이래 사실상 말기까지 계속됐다.

   초기의 경질 백자를 문양 면에서 보면 아무런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연질 백자에 상감 문양이 되어있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리고 명나라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아 청화백자가 아주 약간 제작됐다. 한편 관요가 아닌 민간의 가마에서는 조선시대 들어 청자 제작기법의 연장선상에 있는 분청사기가 만들어져 널리 사용됐다.



   백자의 흐름으로 보면 17세기 들어 백자는 뜻하지 않게 토착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두 번에 걸친 큰 전란의 영향으로 중국의 영향, 물자 수입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타격은 중국을 거쳐 들어오던 아라비아산 안료, 즉 푸른색을 내는 산화코발트의 수입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따라서 큰 항아리에 푸른 색 안료로 용이나 매화, 대나무 등의 그림을 그려 넣어 궁중 행사에 사용하던 초기 청화백자는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푸른색의 코발트 안료 대신 붉은 색을 내는 산화철로 대체한 이른바 철화(鐵畵) 백자가 한동안 유행하게 됐다.


   시기적으로 보면 이때는 중국 대륙에서도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는 때이기도 했다. 당시 제작된 철화 백자는 명의 영향과는 무관한 조선적인 기형과 문양이 다수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적 분위기가 물씬한 철화 백자는 이후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다시 찾아온 청화 백자의 시대로 인해 급속히 자취를 감추었다.

18세기 이후 조선 백자의 주류는 청화백자라고 말할 정도로 많이 제작되었다. 이때 재등장한 청화백자를 보면 궁중에 사용되는 대형 항아리 이외에 작은 항아리, 병 등과 같은 생활 용기에서 양반사회의 취미 용품인 문방구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가 제작됐다.


   19세기에 들면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청화 백자가 더욱 유행했고 아울러 대량 생산을 위해 도안화된 장식적인 문양이 다수 등장한다. 이 당시 왕실은 물론 한양의 양반 사회 그리고 그 주변의 부유한 중인 사회를 포함한 광범위한 도자기 수요를 충당한 것은 관영의 분원 체제였다. 그러나 이 분원은 왕실 재정의 파탄 속에 1883년 민간에 불하되며 막을 내렸다. 이후 조선 말기의 도자기는 일부 이왕가미술품제작소 제작품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민간에 의해 제작되었다. 분원 이후, 즉 조선시대 말기의 도자기 제작상황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불명확한 점이 많다.





백자 항아리(白磁壺) 15~16세기 높이 31.6cm 국립중앙박물관





백자철화 호록문 항아리(白磁鐵畵虎鹿文壺)

17세기 높이 28.2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백자철화매죽문대호(白磁鐵畵梅竹文大壺)

                                                                               국보  제166호  


  

청화백자매죽문호(靑華白磁梅竹文壺)

       국보  제219호 







  백자청화매죽문병(白磁靑花梅竹文甁)

        보물  제659호  






       4-3 순백자

 

   순백자(純白磁)는 백자 표면에 아무런 문양을 그려 넣지 않은 백자를 가리킨다. 문양이 없다는 의미에서 소문(素文)이란 말을 써서, 극히 일부이지만 소문 백자라고 한다. 이는 순도 높은 태도에 잡물이 섞이지 않는 순수한 석회유를 씌워 높은 온도에서 구운 백자이다. 순백자는 조선시대 초기에서 말기까지 계속해서 제작됐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있었던, 정결한 흰색에 대한 특별한 기호나 애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초기에 만들어진 순백자는 왕족의 출산에 따른 태를 묻어두는 태항아리, 주병, 제기 등으로 많이 제작, 사용되었다.




 
백자 반합(白磁 飯盒)

15세기 전체높이 22.7cm 호림미술관 보물806호





 백자 발(白磁鉢)

15세기 높이 17.5cm 지름 21.0cm





       4-4 상감백자

 

   상감 청자처럼 백토로 기형을 빗은 다음 홈을 파고 자토를 넣어 구운 것을 상감백자(象嵌白磁)라고 한다. 상감 기법이 고려시대에 창안된 독창적인 기법인 만큼 조선 백자의 상감 기법은 고려의 기술을 이어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주로 15세기초반에서 16세기중반 무렵까지 제작되었다.  


   상감 백자에는 크게 2가지 계통이 있는데 하나는 경상도 일대의 남부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장석 성분이 다소 부족한 태토를 사용해 1200℃에서 구운 것으로 연질(軟質) 계통의 백자 분류된다. 또 다른 갈래는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구워진 상감 백자로 이는 태토 속에 장석이 충분해 자화가 잘 된 경질백자 계통이다.



 

 
백자상감 초화문 편병(白磁象嵌 草花文 扁甁)

1466년 높이 22.1cm 호암미술관 국보172호



 

 
백자상감 모란문 병(白磁象嵌 牧丹文 甁)

15세기 높이 29.6cm 호림미술관 보물807호

 




       4-5 청화백자

 

   백자 위에 푸른색 안료로 그림을 그린 도자기를 말한다. 청색 안료는 산화코발트로 아라비아 원산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푸른 색 안료를 사용한 백자는 청백자(靑白磁)로 불렸다.


   하지만 도자기에 이름 붙이는 원칙을 따른다면 백자에 청색 안료(靑)를 사용해 그림을 그린(畵) 것이므로 ‘백자 청화’라고 부르는 쪽이 맞다. 그러나 오래 동안 사용해온 언어 습관도 무시하기 힘든 법. 지금도 청색 안료를 쓴 도자기를 뭉뚱그려 가리킬 때는 청화백자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조선시대 청화백자는 15세기에 명나라의 청화백자에서 영향을 받아 만든 초기의 것과 한동안 맥이 끊긴 이후 18세기에 들어 다시 제작된 것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초기의 청화백자는 특히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고소메(古染)라고 불러서 아직도 일부에서 이런 말이 통용되고 있다. 소메(染め)는 달리 소메츠케(染付)라고도 한다.

   초기 청화백자는 당시 명나라 청화백자와 닮은 점이 많다. 대개 중국 청화백자는 도안화된 문양이 여백을 거의 남기지 않고 가득 차 있는 것이 특징인데 조선초기의 청화백자도 다분히 그렇다. 특히 명나라 8대 황제인 성화제(재위 1465~1487)때 만들어진 청화백자와 조선초기 청화백자는 매우 유사하다. 


 

   청화 안료는 중국에서도 명나라 초기 영락제(1403~1424)와 선덕제(1426~1435) 연간에 아라비아와 교류하며 아라비아산 코발트를 수입해 사용했다. 조선은 이를 다시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특히 비싸고 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당시 회교권에서 수입해온 이 청색 안료를 회청(回靑),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불렀다. 

 

   조선 초기에 비싼 수입 청화안료를 국산으로 대체하기 위해 국내에서 코발트 안료의 채굴을 시도한 적이 있다. 이때 발견한 국내산 코발트 안료를 쓴 청화백자도 전해고 있다. 이들은 아라비아산에 비해 맑고 푸른 기운이 덜하며 또 철분이 섞인 탓인지 약간 검게 발색되기도 한다. 국내산 산화코발트는 당시 토청(土靑)이라고 불렀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다시 제작하게 된 청화 백자는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양식을 보인다. 특히 18세기 전반에 경기도 광주 금사리에서 제작된 청화백자는 전형적인 조선 양식을 보여준다. 이때 제작된 청화백자에는 국화, 패랭이 등과 같은 들풀 문양이 들어있는 것이 많은데 이런 추초문(秋草文)은 시대적 특징이기도 하다.





백자청화 매죽문 항아리(白磁靑華 梅竹文 壺)

1489년(홍치2년명) 높이 48.7cm 동국대박물관





백자청화 오동학문 항아리(白磁靑華 梧桐鶴文 壺)

 18세기 높이 18.5cm 선문대 박물관





백자청화 운용문 병(白磁靑華 雲龍文 甁)

15세기 높이 각각 21.5cm, 25.0cm 호암미술관 보물 제785, 786호






       4-6 청화(靑畵)와 청화(靑花)

 

   조금 오래된 국한문 혼용의 서적에는 청화를 가리키는 한자어로 靑花, 靑畵, 靑華가 혼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옛 기록에 이들 3가지 용례가 모두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화 백자의 한자 표기는 그릴 화(畵)자를 사용한 靑畵(청화)가 맞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畵자는 ‘그릴 화’ 자로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산화철을 안료로 그림을 그린 경우에는 철화(鐵畵)라고 통일해 부르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청화백기에 대한 조선 초기의 기록을 보면 대개 花자로 쓰여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도자기관련 기록내용을 면밀히 조사한 적이 있는 고려대 방병선 교수에 따르면 세종 29년 9월1일자의 실록 기록에 ‘임금이 성균관에 청화백자 큰 잔 2개, 백자 큰 잔 2개, 백자 큰항아리 4개 그리고 술 150병과 생선 및 고기를 하사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때의 원문에 청화백자를 ‘청화사(靑畵沙)’라고 표기해 놓았다고 한다.


   방 교수에 따르면 그 이전의 실록 기록에는 모두 청화(靑花)로 표기돼 있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해 그는 중국의 영향 아래 만들게 된 청화백자에 대해 어느 정도 제작 기법을 이해하게 되자 청화를 그림(畵)으로 인식한 결과가 아닐까 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일본의 관련서적에서는 여전히 靑花라는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청화백자 뿐만 아니라 중국의 청화백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중국은 화(華)의 간자체인 华를 사용해 靑华로 통일해 쓰고 있다.


   한글 표기가 일반화되기 이전인 1990년대 중반까지 간행된 국내의 전문서를 보면 畵자와 華자가 혼용되고 있다. 드물지만 간혹 花자가 보이기도 한다.
(참고 『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도자사』)





백자청화 보상화당초문 항아리(白磁靑華 寶相華唐草文 壺)

15세기전반 높이 28.0cm


*이 그림이 수록된 일본 쇼가쿠칸(小學館) 간행의 『세계도자전집』19 이조편(1980년)에는

《白磁靑花 宝相華唐草文 壺》로 표기돼있다.






     4-7 철화 백자

 

   초벌구이 위에 철분이 많이 든 자토를 사용해 문양 그림을 그려 넣은 백자를 말한다. 이 기법은 청자에서 시작돼 조선시대에 들어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백자 위에 철사(鐵砂=산화철)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청화백자에 사용되는 코발트 안료의 수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코발트 안료는 아라비아산으로 중국을 거쳐 수입됐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수입이 한동안 불가능했다. 따라서 당시 궁중에서 열리는 연회나 의례 때에도 청화백자를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순백자에 그림을 그려 붙인 가화(假畵)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런 가운데 청화 백자를 대체한 것이 철화 백자(鐵畵白磁)였다.


   17세기에 등장한 철화 백자는 운룡문 항아리의 사례에서처럼 초기의 청화백자 문양이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이 강했던 초기의 기억이 점차 옅어지면서 철화백자의 문양은 보다 자연스럽고 해학적인 조선적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백자철화 초화문 항아리(白磁鐵畵 草花文 壺)

 17세기후반 높이 34.0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백자철화 매죽문 항아리(白磁鐵畵 梅竹文 壺)

17세기 노이 36.9cm 호암미술관







       4-8 진사 백자

 

   진사 청자와 마찬가지로, 구우면 붉은 색으로 발색되는 산화동을 사용해 문양을 그린 백자를 가리킨다. 진사(辰砂) 백자란 진사를 사용한 백자라는 정도의 이름이다. 정확한 분류 명칭은 아니다.


   산화동은 자연에서 진사(辰砂) 상태로 존재한다. 진사는 달리 주사(朱砂), 단사(丹砂)라고도 한다. 진사 백자는 엄격하게 보자면 산화동을 사용해 문양 그림을 그린 것이므로 동화(銅畵)라고 불러야 한다. 산화동을 전체에 칠했을 경우에는 동채(銅彩)라고 부르게 된다.


   산화동 안료는 비싸기도 하지만 약간의 높은 온도에서도 쉽게 날아가 버려 선명한 붉은 색을 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따라서 진사가 사용된 백자는 당시에도 매우 희귀했고 지금도 귀하게 여긴다.





백자진사 송응문 각병(白磁辰砂 松鷹文角 甁)

 18세기 높이 27.2cm 일본 개인





백자진사 호작문 항아리(白磁辰砂 虎鵲文 壺)

18세기 높이 28.9cm 일본 민예관






       4-9 조선 청자

 

   조선 청자는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청자를 말한다. 조선 시대는 흔히 백자의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극히 적은 수이지만 청자도 계속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조선 청자는 백자를 만드는 태토를 사용해 그 위에 청자 유약만 발랐다는 점에서 고려 청자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조선 청자는 푸른색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문양이 없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또 도자기의 형태, 즉 기형(器形)을 보아도 고려 청자에 보이는 것처럼 상형 청자나 향로와 같이 형태가 복잡한 것은 거의 없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청자는 특별한 목적 아래에 어느 시기에만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설은 없다. 다만 시기적으로 17세기까지만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 『광해군일기』 ‘사옹원 사기는 대전(大殿)에는 백사기를 사용하고 동궁(東宮)은 청자기를 사용한다’ 내용이 나와, 푸르다는 것을 젊고 어리다는 의미로 해석해 ‘동궁전’에 한정해 사용한 것은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 



 



청자 항아리(靑磁壺) 조선 15세기 높이 23.4cm 호림미술관





청자상감 국당초문 자라병(靑磁象嵌 菊唐草文 平甁)

조선 15세기 높이 14.5cm 호림미술관





청자 항아리(靑磁壺)

조선 15세기후반 높이 11.5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4-10 금사리 백자


   금사리는 경기도 광주군 금사리(金沙里)의 이름이다. 이곳에 있던 백자 가마에서 구워진 도자기를 금사리 백자라고 한다. 경기도 광주 일대에 설치된 사옹원지방 분원은 대개 10년 단위로 광주 일대의 이곳저곳을 이동했다. 그리고 1751년이 되면 이 분원(分院)은 광주군 분원리에 정착하게 되는데 금사리는 바로 분원리로 정착하기 직전에 자리 잡았던 가마터이다. 

 

   최근의 연구를 보면 금사리 가마는 1726년에서 1752년(분원리 정착)까지 운영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사리 가마터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운영되었지만 후대에 오랫동안 기억될 명품 도자기를 다수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것으로 순백으로 둥글게 항아리를 빗은 항아리이다. 또 청화 안료로 들풀 문양을 간략하게 넣은 추초(秋草) 문양도 이곳 만의 특징이다. 금사리 가마에서 구워진 백자는 약간 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유백색 띠는데 이 역시 여느 백자와 다른 점이기도 하다.





백자청화 죽문 각병(白磁靑畵 竹文 角甁)

18세기 높이 40.6cm 호암미술관 국보 258호





백자청화 국화조충문 항아리(白磁靑畵 菊花鳥虫文 壺)

 18세기 높이 39.8cm 호림미술관




4-11 달 항아리

 

   커다란 순백자 항아리는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계속해 제작되었다. 그런데 커다란 항아리라고 해도 자세히 구분하자면 위로 기다란 것과 옆으로 펴져 둥그스름한 것 두 가지가 있다. 한자어로 우리말 항아리를 표기하면 호(壺) 또는 준(樽, 罇, 尊)이 된다. 한자로 호라고 한 항아리는 옆으로 볼륨이 있는 형태를 가리키며 준은 위로 키가 큰 것을 가리킨다. 옆으로 퍼진 호 항아리의 용도는 대개 마른 곡식 따위를 넣어 보존하는 용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준의 경우를 보면, 궁중의 의궤 등을 그린 그림에서 꽃을 꽂아두는 용도로 쓴 사례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옆으로 볼륨이 있어 둥그런 항아리도 실은 자세히 보면 종류가 여럿이다. 위아래와 좌우의 비율이 대체로 비슷해 보름달처럼 둥실한 것이 있는가 하면 둥글기는 하되 위아래로 잡아 늘인 것처럼 기다란 것이 있고 또 반대로 아래위에서 누른 것처럼 좀 납작한 것도 있다.


   위아래 균형을 잘 갖춘 달항아리는 특히 금사리 가마에서 주로 제작됐다. 질 좋은 백토를 잘 정련해 만든 이들 달항아리의 몸체 색깔은 뽀얀 유백색이다. 또 주둥이가 굽보다 넓어 옆에서 보면 당당하고 늠름한 느낌을 주는 게 특징이다.


   달항아리를 만들 때 보면 물레를 사용해 위쪽과 아래쪽을 따로 만들어서 붙인다. 그래서 몸체 한 가운데를 가로 지르며 서로 이어붙인 자국이 남아있다. 이렇게 이어붙인 자국으로 해서 바로 달 항아리 고유의 특징이 나타난다. 즉 이어붙인 곳은 안쪽에 태토로 덧대게 되는데 이렇게 덧댄 곳과 그렇지 않은 곳 사이에는 두께 차이로 인해 구을 때 자연히 수축률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따라서 굽고 난 항아리는 이 차이로 인해 전체가 약간 불규칙하게 일그러지게 된다. 천연이 빗어낸 이 곡선이 바로 달 항아리의 깊고 그윽한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금사리에서 만들어진 달 항아리는 그 숫자가 많지 않은 데에도 불구하고 현재 4점이 국보(제261, 262, 309, 310호)로 지정돼 있으며 4점은 보물(제1437, 1438, 1439, 1441호)이다.





백자 항아리(白磁壺)

18세기 높이 44.5cm 호암미술관 국보 309호





백자 항아리(白磁壺)

18세기 높이 40.8cm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37호 *문화재청사이트





궁중계회도(宮中契會圖,

 1577년 71.3x106cm 개인)에 보이는 백자 항아리의 사용 사례




아래 참고용


국보 262 용인대학교
국보 309 리움
국보 310 신성수
보물 1437호 국박
보물 1438 개인 이정용
보물 1439호 디 아모레 뮤지움
보물 1441호 정갑봉





       4-12 추초문 항아리

 

   추초문(秋草文)은 말 그대로 풀이하면 가을풀 문양이란 뜻이다. 가을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들을 장식 문양으로 그려 넣은 항아리가 추초문 항아리이다. 가을풀 문양이 그려진 것은 비단 항아리 뿐만 아니다. 그 외에도 각항아리, 각병, 문방구 등 매우 다양하다. 추초문 항아리는 이들의 대표격일 뿐이다. 추초문이 그려진 백자는 18세기 전반 경기도 광주의 금사리 일대의 가마에서 많이 제작됐다. 

 

   추초는 일본어로 아키구사이다. 일본의 한국도자기 애호가들 중에는 이처럼 간결하고 청초한 느낌의 가을풀 문양의 도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는 개인적인 기호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 전통 미학중 하나인 애잔함(모노노아와레)를 상징한다는 이유도 있다. 모노노아와레는 사물에 담겨 있는 슬픔이나 비애를 나타내는 말로 풀이 된다. 즉 가을 들판을 배경으로 홀로 가녀리게 서있는 풀 한 포기나 꽃 한 송이는 그 자체로서 생명의 애잔함과 애처로움을 나타내는 것들이 된다. 

 

   또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추초문 청화백자에 대해 조선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 즉 고소메(古染)의 일종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1965년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의 주관으로 금사리 일대를 지속적으로 발굴하면서 이곳에서 추초 문양의 도자기 파편을 다수 발견해 이들이 18세기 전반의 금사리를 대표하는 백자인 것을 확인하게 됐다. 



 


백자청화 추초문 항아리(白磁靑畵 秋草文 壺)

18세기전반 높이 29.7cm 네즈(根津)미술관





백자청화 추초문 각항아리(白磁靑畵 秋草文 角壺)

 18세기전반 높이 24.7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4-13 청화백자 문방구

 

   문방구하면 흔히 종이, 붓, 먹, 벼루 등 문방사보(文房四寶)를 연상한다. 이외에도 지통(紙筒), 필통(筆筒), 필가(筆架), 필세(筆洗) 등을 더할 수 있다. 이런 문방구류는 고려 시대부터 도자기, 즉 청자로 만들어 사용했다. 그렇지만 청자로 만든 문방구는 연적 이외의 것들을 제외하고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청자 연적은 소년, 소녀의 형상을 딴 것, 복숭아 모습을 한 것 등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조선 시대가 되면 사회 전체가 문인 중심의 사회로 바뀌면서 도자기, 즉 백자로 만든 문방구는 종류가 훨씬 다양해진 것은 물론 수적으로도 매우 많이 남아있다.  

 

   더욱이 18세기 후반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많은데 여기에는 경제 발전과 더불어 평민 사회가 양반, 문인 생활을 동경하거나 실제로 향유할 수 있게 된 때문으로도 여겨진다. 이 당시의 문방구 중에서 특히 연적은 세계 도자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류가 대량으로 만들어졌다. 이때의 연적은 문방구뿐만 아니라 여인네의 화장용기로도 쓰였다고 한다.  

19세기의 연적은 닭, 해태, 용, 거북, 개구리, 나비 등과 같은 동물이나 곤충 형태에서 복숭아, 감, 참외, 파초 등의 식물 그리고 물고기, 집, 돈궤, 보주, 금강산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백자청화진사 무자문 필통(白磁靑畵辰砂撫子文筆筒)

19세기전반 높이 13.5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백자청화 초화문 소형연적(白磁靑畵草花文小形硯滴)

19세기 높이 2.8~1.8cm 선문대박물관







       4-14 청화백자 반상기

 

   청화백자는 18세기 들어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이때가 되면 사회 경제도 발전해 고급 도자기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경제가 발전하면 옷치레, 음식치레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이무렵 음식 문화가 다양하게 발달하면서 상차림에 필요한 그릇의 숫자가 늘어났다. 따라서 6첩, 8첩과 같이 짝수로 된 한 벌용 상차림 도자기가 부유한 계층 사이에 유행했다. 반상기(飯床器)는 일상에서 매일 사용되는 용기였으므로 현재 남아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백자청화 ‘복’명 반합 및 발(白磁靑畵福銘飯盒幷鉢)

19세기 각각 높이 17.4cm 12.2cm 호림미술관





백자양각 ‘수복’명 반상기(白磁陽刻壽福銘飯床器) 19세기 선문대박물관
덕원미술관 반상기 방병선백자 81






      4-15 명기

 

   명기(明器)는 ‘신명(神明) 즉 신령이 사용하는 기물(器物)’을 줄인 말이다. 사람이 죽은 뒤 사후 세계에서도 현세에서처럼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무덤 속에 넣은 것이 명기이다. 그래서 명기에는 다양한 것들이 포함된다. 소, 말과 같은 가축에서 사람 모습을 한 노비, 그리고 죽은 사람을 쓸 요량으로 만들어 넣은 그릇 종류 등이 있다. 또 죽은 사람의 영혼을 지켜주는 상서로운 짐승, 즉 서수(瑞獸)도 만들어 넣었다. 

 

   명기를 도자기로 만들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릇, 짐승, 탈 것, 노복처럼 보이는 인물상 등등이 있다. 그중에서 도자기로 만든 그릇 종류는 무덤 주인이 죽은 연대에 맞춰 제작한 것이므로 당연히 유사한 도자기의 제작 연대를 추정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특히 조선시대 초기의 청화백자는 그 숫자가 매우 적은데 명기에 포함된 미니어처 청화백자 그릇은 이 시대의 도자기를 연구하는 더할 나위 없는 보충자료가 된다. 물론 명기 그 자체는 앙증맞고 정교해 감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일종의 부장품인 명기는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는 장례 풍습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그 자체가 사라져 실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백자청화 초화칠보문 명기 일괄(白磁靑畵 草花七寶文 明器 一括)

16~17세기 높이 3.5~6.5cm 호암미술관





백자 마형 명기(白磁 馬形明器) 17세기 높이 6.6~7cm 선문대 박물관





원빈홍씨묘 부장품(元嬪洪氏墓 副葬品)

1779년경 병 높이 5.4cm 국립중앙박물관







       4-16 태항아리

 

   조선 시대의 왕실에서는 자녀가 태어나면 태를 함부로 없애지 않고 이른바 명당 자리를 찾아 파묻었다. 이때 태를 넣어 묻어두는 용기를 태항아리, 또는 태호(胎壺)라고 한다. 태봉(胎峰)이란 말은 이를 묻은 봉우리를 말한다.

태항아리로는 초기에 분청사기가 많이 사용됐으나 점차 순백자 항아리로 바뀌었다. 따라서 백자로 만든 태항아리 역시 형태면에서 분청사기 태항아리와 매우 유사하다.


   초기의 태항아리에는 일반적으로 뚜껑 잡이에 구멍이 나있다. 뚜껑 잡이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태토를 끈처럼 말아서 붙인 것이다. 이 경우 흙 끈을 X자로 교체시키고 약간 들어 올려 아래쪽을 실이나 끈이 드나들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또 다른 경우는 뚜껑 잡이 아래쪽에 뾰족한 것으로 아예 구멍을 뚫어 놓았다.

뚜껑 잡이에 구멍이 있는 경우는 항아리 몸체에도 실이나 끈을 꿸 수 있는 걸이 구멍이 달려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 구멍과 뚜껑 잡이의 구멍을 사용해 실이나 끈으로 항아리를 밀봉한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약간 후기에 만들어진 태항아리에는 구멍이 없는 것들도 많이 있다.

   태항아리는 여러 개가 짝이 되어 출토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탯줄을 묻는 항아리를 보호하기 위해 큰 항아리 속에 차곡차곡 넣었기 때문이다. 또 태항아리는 태어난 아이의 출생일, 부모 이름 등을 적은 태지석(胎誌石)과 함께 묻는 게 일반적이다.





백자 태항아리(白磁胎壺)와 태지석(胎誌石)

17세기 높이 각각 30.9cm 19.4cm 호림미술관





백자 태항아리(白磁胎壺)와 ‘천계칠년’명 태지접시(天啓七年銘 胎誌皿) 1627년
각각 높이 29.2cm, 18.7cm, 4.1cm 국립중앙박물관







       4-17 산뢰(山罍)

 

   뢰자는 ‘술독 뢰’자로 산뢰는 술을 담는 항아리이며 제기의 일종이다. 세종실록『오례의(五禮儀)』에는 ‘산뢰는 산준(山樽)’이라고 했으며 준은 산에 구름이 있는 형상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돼있다. 『오례의』에는 산뢰를 그림으로 그려 설명해 놓은 것이 있는데 실제 조선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산뢰가 현재까지 전해져 눈길을 끌고 있다. 호암미술관에 소장돼있는 항아리에는 그림속의 산뢰와 꼭 같은 내용이 그려져 있는데 세 개의 산과 그 위의 구름은 청화로 그려져 있고 아래의 연판문과 위쪽의 번개문(雷文)은 철화로 그려져 있다.





백자청화철화 삼산문 이부호(白磁靑畵鐵畵三山文耳附壺)

15세기 높이 27.8cm 호암미술관








       4-18 묘지석 도자기

 

   묘지 앞에 대개 비석이 서있다. 비석은 집의 문패처럼 묘지의 주인, 즉 매장돼있는 인물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표찰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이유로 이것이 없어지게 되면 무덤 주인을 확인할 수 없게 되므로 무덤 속에도 비석과 비슷한 내용의 글을 적은 묘지석(墓誌石 또는 誌石)을 만들어 넣었다. 묘지석은 주로 돌이나 금속을 사용하는데 왕실에서는 옥을 사용하기도 했다. 돌은 주로 민간에서 쓰였는데 제작에 어려움이 뒤따르고 또 시간이 많이 걸리는 까닭에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분청사기와 백자로 많이 제작됐다.


   이처럼 분청사기나 백자로 만든 묘지석을 묘지석 도자기라고 한다. 묘지석 도자기에도 비석처럼 죽은 사람의 생몰년 따위의 자료가 적혀 있어 도자사 연구에서 연대를 밝히는데 필요한 1급 자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백자상감 ‘진양군 영인정씨’명 지석(白磁象嵌晉陽郡令人鄭氏銘誌石)

1466년 높이38.0cm 호암미술관 국보172(*4-1의 초기백자와 함께 출토된 자료이다)





백자철화 모사기형 지석(白磁鐵畵茅沙器形誌石)

 1675년 높이 20.4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4-19 석간주 항아리

 

   석간주는 산화철이 많이 함유된 붉은 흙을 가리키며 달리 주토(朱土) 또는 적토(赤土)라고도 한다. 석간주 그릇은 백자 태토 위에 석간주를 원료로 한 유약을 직접 발라 구운 것이다. 유약에 들어있는 철분의 양에 따라 암적색 또는 흑갈색을 띤다. 석간주 항아리란 이렇게 구운 도자기 가운데 항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민간에서 많이 구워 사용했기 때문에 남겨진 양도 상당히 많다.

   석간주 도자기는 유약에 들어있는 산화철의 양에 따라 나타나는 색이 다른데 철분이 50% 정도 들어있는 유약의 경우는 이를 발라 구우면 암갈색을 띠게 된다. 특히 일본에서는 이런 유약색의 도자기를 물엿 색깔과 같다고 해서 ‘엿 이(飴)’자를 써 아메유(飴釉)도자기라고 부른다.

   철분의 함유량이 50%를 넘으면 유약의 투명도가 크게 떨어지면서 검은색으로 나타난다. 이런 유약의 도자기는 흑유(黑釉)도자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흑자 편병(黑磁扁甁) 15세기 높이 23.6cm 호림미술관





철유철반문 표형병(鐵釉鐵斑文 瓢形甁)

19세기 높이 43.5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4-20 상사기(常沙器)

 

   임진왜란 중인 1595년 당시의 선조실록을 보면, 전쟁 때문에 물자가 부족해 종묘 제사에도 상사기(常沙器)를 쓰고 상종자(常鐘子)로 술잔을 대신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상사기는 보통의 사기를 가리키는 말로, 즉 각종 그림이나 조각 장식을 하지 않는 도자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상사기는 갑발을 씌워 고급스럽게 구운, 즉 갑번(甲燔)과 구분하기 위해 상번(常燔)이란 말을 쓴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그릇 앞에 상(常)자를 붙이면 최상급보다는 품질이 떨어지는 그릇을 가리킨다. 분원에서는 갑발을 씌워 구웠더라도 품질이 좀 좋지 않으면 상백자라고 했다고 한다.




4-21 이도 다완

 

   일본 다도에서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제작된 도자기를 다완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들에 대해 일본에서는 시대구분 없이 한데 뭉뚱그려 고라이 다완, 즉 고려 다완(高麗茶碗)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고려시대의 다완은 상감 기법으로 운학문을 새긴 다완이 대부분이다.


   조선시대 도자기 중 다완으로 사용되는 것은 매우 다양한데 그 대표적인 것이 이도 (井戶) 다완이다. 이도 다완은 일본 다도에서 이상(理想)으로 꼽는 쓸쓸하고 적적한 분위기의 와비(わび)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고 여겨 예전부터 매우 소중히 여겼다.

이도(井戶)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이런 종류의 다완이 조선에서 일본에 전해질 때 이도라는 곳에서 왔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설이 가장 많이 통용되고 있다. 제조 기법면을 보자면, 이도 다완은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태토로 만든 막사발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내 연구자 중에는 이도 다완을 가리켜 조선시대 남부지방에서 밥공기로 사용했던 것이란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에서 이도 다완은 다이묘(大名)의 성(城)과 맞바꿀 정도로 높은 가치가 부여됐고 따라서 분류 방식도 매우 복잡 다양해졌다. 이도 다완의 경우, 크기가 큰 것은 오이도(大井戶), 작은 것은 고이도(小井戶) 그리고 약간 푸른색을 띠는 것은 아오이도(靑井戶)라고 한다. 에도시대 마쓰에번(松江藩)의 제6대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하루사토(松平治鄕, 1751~1815)가 소장했던 내력이 있는 이도 다완(별명: 기자에몬(喜左衛門))은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오이도 다완(大井戶茶碗) 기자에몬(喜左衛門)

높이 9.1cm 다이도쿠지 고호안(大德寺 孤篷庵) 일본 국보




고이도 다완(小井戶茶碗) 로소(老僧)명 높이 8.4cm 후지타(藤田)미술관





아오이도 다완(靑井戶茶碗) 세오(瀨尾)명 높이 6.2cm 후쿠오카시미술관






       4-22 주문양과 종속문양

 

   도자기 문양 가운데 몸체처럼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에 그려져 있는 문양을 주문양(主文樣)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둥이(달리 구연부(口緣部)라고도 한다)나 굽 부근처럼 두 번째로 눈길이 가는 곳에 그린 장식적 문양을 종속 문양(從屬文樣)이라 한다. 주문양과 종속문양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그 특징이 다른 게 보통이다. 그래서 도자사 연구에서 문양은 중요한 내용 중 하나가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문양만 있고 종속 문양이 없는 것도 있다. 

 

   조선시대에 사용된 종속 문양은 고려 때와 조금 다른데 고려 시대에는 대체로 연판문, 뇌문, 당초문 등이 많이 사용됐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뇌문, 파도문, 연판문, 여의두문, 당초문 등이 자주 쓰였다.




주로 청화백자에 보이는 주문양





주로 청화백자에 보이는 종속문양

*나에게 물어보고 하세요





       4-23 여의두문

 

   여의(如意)는 스님이 독경을 하거나 설법을 할 때 손에 쥐고 있는 도구를 말한다. 이는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는 지물(持物)이다. 이 여의에서 머리 부분만 장식용으로 도안화된 것이 여의두 문양이다.


   한자말 여의(如意)에는 ‘뜻대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여의두 문양에는 ‘만사가 마음먹은 대로 잘 이루어지길 바란다’기원의 뜻이 담기게 됐다. 여의두문은 주문양으로 단독으로 쓰기 보다는 항아리처럼 비교적 큰 기물의 어깨 부분이나 굽 쪽을 장식하는 종속적인 문양에 주로 쓰였다. 일본에서는 여의두문이란 용어 대신 영지운문(靈芝雲文)이란 말도 쓴다.





23-1 중국 건륭제때의 학두 여의(鶴頭如意)





백자청화 ‘수복강녕’명 항아리(白磁靑畵壽福康寧銘壺)

 19세기 높이 30.0cm 호림미술관








       4-24 상감백자의 연당초문

 

   당초 문양은 끝없이 반복되는 덩굴 잎이 도안화된 것이다. 원래는 그리스 신전에 장식된 풀 문양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후 이 문양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로 전파됐고 또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과 한반도에 이르게 됐다. 또 이슬람의 모스크에도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를 본 유럽인들은 이것을 아라베스크라고 불렀다.


   덩굴 잎이 계속해서 뻗어가는 것은 일이 잘 풀려 계속 발전하는 모습, 즉 번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당초문양은 길상(吉祥) 이미지의 하나로 정착되어 있다. 연당초문은 당초문이 연꽃 문양(蓮花文)과 함께 반복적으로 그려진 것을 말한다. 의미는 연꽃에 담긴 성스럽고 신성한 뜻이 영원히 반복,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백자상감 연당초문 발(白磁象嵌蓮唐草文鉢)

15세기전반 높이 7.8cm 국립중앙박물관





백자상감 연당초문 병(白磁象嵌蓮唐草文甁)

15세기 높이 32.3cm 부산시립박물관






       4-25 길상문

 

   예전 사람들이 세상에서 바라던 가장 큰 기원은 복(福), 녹(祿), 수(壽) 세 가지였다. 즉 살면서 큰 행운과 축복을 누리길 바라며 또 높은 벼슬에 올라 입신출세하고 그 위에 장수하길 바란 것이다. 복, 녹, 수에 관련된 이미지가 생활용기 속에 도안으로 정착한 것이 바로 길상문(吉祥文)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청화백자에 특히 길상문이 많이 등장한다. 길상문에 사용되는 것으로 먼저 동식물을 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슴은 길상 이미지중 하나인데 사슴은 그 자체가 십장생중 하나일 뿐 아니라 사슴 녹자가 복록의 녹자와 발음이 닮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물 자체의 뜻이나 이미지, 상징 이외에도 발음이 비슷해 길상 문양에 들어간 것도 많이 있다. 또 시대가 내려오면 아예 복, 녹, 수 등의 글자 자체가 길상 문양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런 길상문은 한데 뭉뚱그려 길상문으로 부르기도 하나지만 하나하나 독립한 문양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앞에 나온 글자 문양은 따로 떼어 수복강녕문, 쌍희문이라고 하고 또 불수감은 불수감문이라고 부른다. 



 



백자청화 길상문 병(白磁靑畵吉祥文甁)

19세기전반 높이 26.4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백자청화 불수감문 각접시(白磁靑畵佛手柑文角皿)

19세기전반 21.9x18.8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백자청화 수복자문 각병(白磁靑畵壽福字文角甁)

 19세기전반 높이 16.8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4-26 산수문

 

   18세기 들어 경제가 발전하면서 일반 평민도 양반 문인들의 취미 생활을 동경했으며 나아가 생활 속에서 직접 이를 누리고자 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청화백자에 문인 생활과 연관되는 문방구류가 특히 많은 것은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키가 큰 항아리나 각병 등에 중국의 명승지인 소상팔경(瀟湘八景)의 풍경이나 마치 분원 일대 같아 보이는 아기자기한 산수 경치를 그린 도자기가 등장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이는 당시 평민들 사이에 퍼진 문인 취미 가운데 하나인 남종화의 유행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도자기에 그려진 산수풍경의 문양을 산수문이라 한다.



 

 
백자청화 산수문 호형주자(白磁靑畵山水文壺形注子)

 18세기후반 높이 46cm 개인 소장




 

 
백자청화 산수문 화병(白磁靑畵山水文花甁)

18세기 높이 32.5cm 호암미술관






       4-27 십장생문

 

   십장생은 불노장생(不老長生)한다는 10가지 사물로 해, 산, 물, 돌, 소나무, 달(또는 구름), 불로초(영지), 거북, 학, 사슴 을 가리킨다. 도자기에 그려진 십장생 문양은 이들 모두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중 몇 가지가 조합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십장생 문양이 든 도자기는 회갑이나 나이든 노인의 생일 선물 또는 그런 잔치를 장식하는 기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백자청화진사 장생문 항아리(白磁靑畵辰砂長生文壺)

19세기 높이 39.9cm 국립중앙박물관







백자청화 십장생문 편병(白磁靑畵 十長生文 扁甁)

19세기 높이 21.2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백자청화 장생문 접시(白磁靑畵 長生文 楪匙)

19세기 지름15.5cm 개인





      4-28 박쥐문

 

   서양에서 박쥐는 이솝 우화에서 보듯이 부정적 이미지가 많이 있다. 하지만 동양은 정반대로 부귀를 상징한다. 이는 박쥐를 가리키는 중국어 편복(蝙蝠)이란 말의 복(蝠)자가 행복의 복(福)자와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현실 사회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바람이 커지면서 청화 백자에도 박쥐 문양이 많이 등장하게 됐다.




백자청화 편복문 발(白磁靑畵蝙蝠文鉢)

19세기 지름 24.9cm 호암미술관




 
백자양각 매죽편복문 찬합(白磁陽刻梅竹蝙蝠文饌盒)

19세기 높이 19.4cm 일본 민예관








       4-29 봉황문

 

   봉황은 상상속의 동물로 성군이 나와 세상을 다스릴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전설상의 새이다. 청와대의 문장에 봉황이 쓰인 것인 바로 이런 의미이다. 따라서 봉황을 왕실과 관련된 문양으로 여기기 쉽지만 조선 시대의 왕, 왕권, 왕실을 상징하는 동물은 용이 더 가까웠다. 조선시대 후기에 도자기에 등장하는 봉황 넓은 의미에서 상서로운 짐승 중 하나였다. 그런 점에서 길상을 대표하는 문양으로 볼 수 있다.





백자청화 봉황문 항아리(白磁靑畵鳳凰文紋)

18세기 높이 40.1cm 호림미술관





백자청화 쌍봉문 접시(白磁靑畵雙鳳文皿)

17세기 지름 29.8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4-30 분원

 

   미술 시장에서 쓰이는 분원이라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 궁중의 관청인 사옹원(司饔院)이 필요한 그릇을 조달하기 위해 지방에 만든 분원(分院)이란 의미이다.  둘째는 그런 분원에서 만들어진 백자, 즉 분원 제작의 백자 가리키는 말이다.   

사옹원은 궁중 내에 필요한 음식을 담당하던 관청이었던 만큼 많은 도자기를 필요로 했다. 건국 초기에 조선 왕실은 각 지방의 민간 가마에서 구워진 도자기를 진상 받아 사용했다. 그러나 이를 집중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생기면서 1470년 무렵 경기도 광주의 남한강가에 사옹원의 지방 조직인 분원을 설치했다. 그런 점에서 분원은 왕실 운영의 관영 사기공장이란 의미도 된다. 

분원은 도자기를 굽는데 필요한 질 좋은 태토와 땔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거의 10년 단위로 주변을 이동했다. 그러나 1751년 이후는 지금의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에 가마를 고정하고 필요할 때마다 거꾸로 주위에서 배로 땔나무와 태토를 운반해 와서 도자기를 구웠다. 


   분원 도자기 또는 분원 백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18세기 이후에 분원리에서 만들어진 상품(上品) 도자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1920년대 초부터 분원 가마터를 답사했던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橋)가 그린 광주 일대의 가마터 그림. 파랗게 칠해진 한강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바로 분원이 위치해 있는 것이 보인다.(한지에 수묵담채로 그려진 이 그림은 2011년 4월부터 7월까지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에서 열린 「스즈키 마사오(鈴木正男) 기증-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橋)가 사랑한 한국 도자기」전에 소개됐다. 스즈키 마사오는 아사카와의 사위이다. 사이즈는 61.0x41.8cm)




 

 



       4-31 분원의 그림 담당

 

   분원에서 제작된 도자기에는 뛰어난 그림 솜씨가 발휘된 것이 많다. 청화든 철화든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쉽지 않다. 조선시대 도자기는 유약을 바른 위에 그림을 그리고 다시 살짝 굽는 이른바 상회(上繪) 기법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청화백자이든 철화백자이든 모두 초벌구이한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들이다. 그런데 초벌 구이한 도자기는 마치 흙을 구워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바짝 말라있다. 여기에 붓을 대면 바짝 마른 흙이 빨아들이듯 붓이 도자기에 들러붙은 것처럼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런 초벌구이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빠른 필치의 능숙한 솜씨의 소유자가 아니면 좀처럼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림이 뛰어난 백자에 대해 분명 보통 이상의 화원 솜씨일 것이라고 추정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 조선시대 초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481년 간행)을 보면 ‘해마다 사옹원 관리가 화원을 거느리고 어기로 쓰일 그릇을 제작 감독했다(每歲司饔院官率畵員, 監造御用之器)’라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시대 초기의 일이고 후기에 들면 사정이 달라진다. 18세기후반, 19세기에는 청화백자가 보편화되면서 분원 장인 가운데 화청장(畵靑匠)이 있어 전적으로 도자기용 그림을 그린 것으로 전한다. 일제시대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분원 장인 중에 14명이 화청장으로 소속돼 있었다고 한다.




백자청화진사 연화문 항아리(白磁靑畵辰砂 蓮花文 壺)

18세기 높이 44.2cm 일본 개인







       4-32 백토 산지

 

   백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질 좋은 백토가 필수적이다. 좋은 백토란 화도가 높고 점성이 높은 흙을 가리킨다. 화도가 높다는 것은 불에 견디는 세기를 가리키는데 화도가 낮은 흙으로 빗은 도자기를 높은 온도로 구우면 가마 속에서 주저 앉아 버린다. 또 점성이 높다는 것은 높은 온도에 견디면서도 서로를 끌어당겨 형태를 잘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질 좋은 백토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 기울였다.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최상급 백토가 나온 곳으로 황해도 봉산, 평안도 선천, 강원도 양구 3곳이 꼽혔다. 그리고 그 다음 수준의 곳으로 경기도 광주, 하동, 서산, 진양, 경주가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백성들이 농사일을 제쳐두고 백토 채굴에 나서야만 하기 때문에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내용이 여러 곳에 실려 있다. 대개 백토는 산 정상에 바위 상태로 존재하고 있어 이를 캐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조선후기 분원에 백토를 대주었던 강원도 양구의 경우, 보다 못한 현감이 백성들 편에 서서 백토채굴 명령을 중단해줄 것을 상소한 글을 여러 번 올렸을 정도였다.






       4-33 갑발

 

   갑발은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울 때 가마 속의 재가 날리면서 도자기 표면에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덧씌운, 일종의 뚜껑처럼 생긴 기구를 말한다. 갑(匣)자는 작은 상자라는 말이다. 갑발(匣鉢)은 도자기보다 높은 온도를 견뎌야 하므로 불에 잘 견디는 점토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렇게 갑발을 씌워 구운 도자기를 갑번(匣燔)이라고 한다. 갑발을 씌워 굽는 것은 백자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고려 시대의 초기청자를 구울 때도 사용했다. 갑발을 사용하면 제작 효율, 즉 생산성이 높일 수 있다. 가마 속에 구울 때 잡티가 들러붙지 않아 비교적 안정된 품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발을 씌우면 가마내의 공간이 줄어드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갑발을 사용할 때에는 도자기 하나하나에 씌우기도 하지만 여러 개를 포개 넣고 그 위에 갑발 하나를 씌우는 경우도 있다. 특히 조선시대 분원에서 한 점 한 점에 갑발을 씌워 정성스레 구운 도자기를 분원 갑번이라 하며 특히 최상품 도자기로 꼽았다.





       4-34 수비

 


   태토를 정선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자연에서 채굴한 원료인 백토에는 철분을 비롯해 자갈, 굵은 모래 등 여러 불순물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를 잘게 부수어 물에 풀어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과정은 대개 여러 번 반복해 정선된 태토를 얻게 되는데 이 과정을 수비(水飛)라고 한다.





      4-35 태토

 

   태토(胎土)는 우리말로 질이라고 하며 도기나 자기를 만들 때 재료가 되는 흙을 가리킨다. 하지만 재료 흙 그 자체는 엄밀히 말하면 태토가 아니다. 백자의 재료가 되는 흙인 백토(白土) 또는 자토(磁土)를 가져다 수비 과정을 거쳐 도자기 제작용으로 만든, 이른바 정제된 흙이 바로 태토이다. 


   태토의 성분 여하에 따라 도자기 바탕색이 곱거나 탁하게 된다. 또 자화(磁化), 즉 유리질로 바뀌는 정도가 결정된다. 즉 청자 태토는 진흙처럼 찐득찐득한 점토질에 철분이 적당히 포함돼 있는 경우가 많다. 청자 태토는 주로 논바닥이나 낮은 산비탈, 그리고 강가와 바닷가 인근의 지층에서 구할 수 있다


   백자 태토는 이른바 점성과 내화도(耐火度)가 높은 점토를 가리킨다. 점성은 가마 속의 높은 온도에서도 서로 잘 뭉쳐있어 형태를 유지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달리 점력(粘力)이 높다고도 한다. 내화도는 불에 견디는 정도를 말하는데 화도라고도 한다. 즉 내화도가 높은 점토란 대개 1,200℃ 이상에서 구워도 주저앉지 않는 흙을 가리킨다. 그리고 백자 태토는 물론 철분의 함유량이 적어 흰색을 잘 내는 것이 요구된다. 백자 태토는 일반적으로 산 정상이나 지층 깊은 곳에 있다.


   채굴된 태토는 수비(水飛) 과정을 거쳐 정선된다. 수비한 백토는 장시간 건조시키는 게 보통이다. 건조 시간이 길면 길수록 강도가 높아지고 불에 견디는 힘이 세어진다. 따라서 몇 개월씩 건조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 다음에는 물을 섞어 반죽한 뒤 발로 밟거나 방망이로 두드린다. 이렇게 하면 입자속의 기포가 없어져 점력과 강도가 높아진다. 이런 과정을 모두 거친 뒤에 비로소 질 좋은 태토가 완성된다.


(참고: 방병선『백자-순백으로 빗어낸 조선의 마음』)







       4-36 분원의 인원

 

   조선시대 사옹원의 분원은 1883년에 민간에 불하되며 공식적인 관영 사기제조 체제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때 경기도 광주 분원리의 가마를 불하받은 것은 구한말 궁중의 내시들이었다. 따라서 분원리 가마에서는 이들에 의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백자가 제작됐다. 분원리에서 더 이상 백자를 굽지 않게 된 것은 그 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내에 진출한 일본인 상공업자들에 의해 막사발이 대량 생산, 유통되면서부터이다.


   이 무렵에 대한 자료는 매우 불분명한데 당시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에 취직해 조선에 건너온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는 1922년 무렵부터 형 노리다카(伯敎)와 함께 분원리 가마터를 조사했다. 분원리 조사는 그 후에도 단속적으로 이뤄졌다.

1931년 42살의 나이로 아깝게 죽은 다쿠미는 그해 1월에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明考)』를 썼는데 이 책 속에 분원 작업장 평면도, 내부 모습, 사용 도구 그리고 작업 인원 등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 소개돼 있다. 그가 남긴 기록은 조선시대 후기의 분원 모습에 가장 가깝게 묘사한 것으로 현재도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는 가마터에는 사발 대정, 잿물 대정, 불 대정으로 맡은 일이 나누어져 있었다고 했다. 대정은 장인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렇지만 가마터가 작은 곳에서는 한 가족이 모두 달라붙어 일을 했는데 어른은 주로 사발 대정(그릇 만드는 사람), 불 대정 등을 담당했고 노인이나 어린아이, 아녀자는 잿물 대정, 흙 운반, 건조 등의 돕는 식으로 나누어 일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옛날 분원이 번성했을 때의 작업 상황에 대해 「분주원보등(分廚院報騰)」이란 기록을 인용해 무려 550여명의 인원이 작업했다고 적어놓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분원 응역(應役)의 수효>
감관(監官) 1명 감독관
원역(員役) 20명 서기
사령(使令) 6명 소사(小使)
변수(邊首) 2명 사기장 우두머리
조기장(造器匠) 10명 사발 대정
마조장(磨造匠) 10명 굽 대정
건화장(乾火匠) 10명 건조
수비(水飛) 10명 뻘물(精土)
연정(練正) 10명 꼬박
참역(站役) 18명 가마 수리
화장(火匠) 7명 불 대정
조역(助役) 7명 견습공 조수
부호수(釜戶首) 2명 책임 불 대정
남화장(覽火匠) 2명 열도 관찰
화청장(畵靑匠) 14명 그림
연정(練正) 2명 잿물 수비
착수장(着水匠) 2명 잿물 대정
파기(破器) 2명 선별


<이하 잡역>
공초군(工抄軍) 186명 도토 운반
허벌군(許伐軍) 202명 대기 잡역
운회군(運灰軍) 1명 초목회 운반
부회군(浮灰軍) 1명 잿물 수비
수토재군(水土載軍) 10명 도토 하선
수토감관(水土監官) 1명 수세지기
노복군(路卜軍) 2명 도로 관리
감고(監考) 3명 출납
진상결복군(進上結卜軍) 10명 제품진상






      4-37 청화백자의 운룡문 변천

  

   백자에 코발트 안료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는 명나라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으며 조선시대 초기부터 다수 제작됐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코발트 수입이 어려워지면서 청화백자의 맥은 잠시 끊기게 된다. 대신 등장한 것이 산화철을 안료로 사용한 철화백자였다. 그 후 청화백자는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18세기 이후에 다시 등장해 조선 말기까지 활발하게 제작됐다. 따라서 청화백자에 그려진 그림 문양은 각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인다.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이 구름 속에 떠있는 운용문은 조선시대 내내 많이 그려진 문양이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표현의 변화를 읽을 수 있어 이것 하나만으로도 조선시대 청화백자의 흐름을 짐작해볼 수 있다.




백자청화 운룡문 항아리(白磁靑畵 雲龍文 壺)

明 선덕연간(1426~1435) 높이 48.3cm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구연부에 구름문양, 굽 쪽에 연판문이 그려져 있다. 몸통에는 여의두 문양처럼 생긴 구름 사이에 떠있는 용이 그려져 있다. 코발트 안료의 색이 짙은 것은 철분이 많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청화 백자에도 이처럼 검정에 가까운 짙은 감색의 청화 백자가 있다.





백자청화 운용문 항아리(靑畵白磁 雲龍文 壺)

16~17세기 높이34.5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종속 문양이 꽉 들어찬 항아리로 주둥이 부분(口緣部)에는 당초 문양을, 어깨에는 변형된 연판문(蓮瓣文,연꽃잎을 연속적으로 펼쳐놓은 문양)을 둘렀다. 그리고 그 속에 다시 화려한 보주문(寶珠文)을 그려 넣었다. 굽 쪽에는 불꽃처럼 보이는 변형 연판문을 둘렀고 그 아래에 또 구슬 문양을 그렸다. 용무늬는 얼굴 부분이 명대의 것보다 회화적이지만 몸통은 조금 딱딱한 느낌을 준다. 여의두 문양을 변형시킨 구름 문양은 명나라 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청화백자 운룡문 항아리(靑畵白磁 雲龍文 壺)

 18세기중반 높이 56.2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18세기 들어 다시 제작되기 시작한 청화백자는 먼저 과거의 사례를 충실히 재현하는 방향으로 부활했다. 이 항아리는 구연부와 어깨의 당초문양과 여의두문 그리고 굽 쪽의 변형 연판문과 여의두문양에서 16,17세기 청화백자 항아리의 모습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몸통에 그려진 용은 도안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허공을 자유롭게 날며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활달한 모습으로 표현돼 있다. 즉, 용 그림에서 초기보다 매우 회화적인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청화백자 운룡문 항아리(靑畵白磁 雲龍文 壺)

18세기중반, 높이 43.5cm 일본 고려미술관



   어깨에 살짝 여의두문을 둘렀으나 주둥이와 굽 쪽의 종속 문양은 사라졌다. 대신 몸통의 공간이 넓어지며 여백이 많아졌다. 용 그림에서는 부릅뜬 눈과 떡 벌어진 발톱 그리고 흩날리는 수염과 갈기에서 자신감 넘치는 회화적 필치를 엿볼 수 있다. 허리 밑 부분의 이중선은 금사리 백자에 자주 보이는 처리기법이다.




백자청화 운룡문 항아리(白磁靑畵 雲龍文 壺)

18세기후반~19세기, 높이 37.8cm 국립중앙박물관



    주둥이 벽의 당초문이 다시 되살아났으며 몸통이 시작되는 어깨 입구의 여의두문이 굽 쪽에도 반복되고 있다. 반면에 용이 날고 있는 구름 사이의 문양에 큰 변화가 보이는데 이제까지 만(卍)자처럼 열십자로 꺾이던 문양이 낱개로 분해되어 용 발밑에 떠있다. 또 용의 발톱도 이전 시기보다 더욱 도안화가 진행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문양의 전승이 불완전한 기억 속에 이뤄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4-38 항아리속의 청화백자 매화문 변천

 

   한 겨울에도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매화는 지조 높은 선비에 비유되며 사군자의 하나로 손꼽힌다. 매화는 문인 사대부가 사회의 근간을 이룬 조선시대 초기부터 그림과 시의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청화백자에 그려진 매화 그림 역시 시대별로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백자청화 매죽문 항아리(白磁靑華 梅竹文 壺)

15세기 높이 41.0cm 호암미술관 국보219호



   초기 청화백자로 종속문양과 주문양이 전체를 메우다시피 꽉 차있다. 이처럼 문양이 많은 것은 대개 중국의 영향으로 해석된다. 15세기에 등장하는 매죽문은 문인 취향의 소재라기보다는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쓰인 듯하다. 어깨 죽지와 굽 부분에 둘러진 연판문 속에는 보주(寶珠) 문양이 새겨져 있어 도자기 자체의 존귀함을 나타내고 있다. 등걸부분에서 줄기가 X자로 교차하는 것이 초기 매죽문양에 보이는 특징이다.

 



백자청화 매죽문 항아리(白磁靑華 梅竹文 壺)

16세기 높이16cm  국립중앙박물관


 

   초기의 청화백자 항아리 가운데 뚜껑까지 갖춘 완전한 형태는 매우 드물다. 작은 항아리이지만 구성이 완벽하다. 사진으로만 봐서는 큰 항아리처럼 느껴질 정도 자태도 늠름하다. 새 두 마리와 가지 끝의 청화색이 등걸의 색깔과 다른 것은 안료 속의 철분이 뭉친 때문이다. 등걸 옆에는 청초한 국화가 그려져 있고 뚜껑에는 대나무가 그려져 있다. 여백을 그다지 남기지 않는 것이 초기 청화백자의 특징 중 하나다.

 


 백자청화 매죽문 항아리(白磁靑華梅竹文壺)

15세기후반 높이 35.0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이 항아리는 어깨가  듬직하게 벌어진 전형적인 15세기 항아리이다. 구연부는 이 시대만의 특징으로 곡옥처럼 말려있다. 이런 형태의 구연부를 일본에서는 옥연(玉緣)식 구연부라고 한다. 세죽(細竹)의 대나무 세 그루가 벋어있는 것을 배경으로 그 앞쪽에 늙은 매화 등걸이 X자로 교차하며 얽혀있다. 가지 끝에는 화심에 네 개의 꽃잎을 단 활짝 핀 매화, 여전히 봉오리 상태인 매화가 잔뜩 달려 있다. 초기 청화백자 문양은 명나라 영향이 짙은 것과 조선의 독자적인 것으로 보이는 문양 두 가지로 나뉘는데 이 항아리는 후자에 속하며 그림의 격이 매우 높다. 



 

백자청화 매죽문 항아리(白磁靑華 梅竹文 壺)

 1481년 또는 1541년 높이31.3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명나라의 영향을 받아 문양이 꽉 들어찬 것이 특징이다. 구연부에 연꽃문, 어깨에 여두문 그리고 하단에는 변형 연판문을 돌렸다. 늙은 매화등걸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가운데 가지가 X자로 교차하는데 이 역시 이 시기의 특징이다. 매화꽃은 꽃심 위쪽으로 네 개의 꽃잎을 그리는 방식으로 통일돼 있다. 굽바닥에 「신축년 9월에 이효동이 삼가 제조했다(辛丑九月日 李孝同奉造)」고 쓰여 있다. 제조에 관련된 인물의 이름이 나오는 희귀한 항아리이다. 신축년은 학자에 따라 1481년 또는 1541년으로 본다.

 



백자청화 매화분문 쌍이각항아리(白磁靑華梅花盆文 雙耳角壺)

18세기 높이 29.2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18세기 들어 다시 제작되기 시작한 청화백자는 옛 전통을 재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 항아리도 구연부와 어깨 그리고 굽 쪽에 당초문양, 여의두문양, 연판문양 등이 그려져 있다. 몸통 문양은 18세기 들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중의 취미생활을 반영하듯 화분에 키운 매화가 그려져 있다. 매화 등걸이 X자로 교차하는 등의 형태는 구식이나 매화꽃이 단면이 아닌 위에서 본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점을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손잡이 부분에는 양쪽에 각각 만수(萬壽), 만복(萬福)이라고 쓰여 있다. 18세기 이후 종종 나타나는 구복, 장수 추구의 길상 문구다.





4-39 대표적 백자철화 운용문 항아리






백자철화 운용문 항아리(白磁鐵畵雲龍文壺)

17세기후반 높이 48cm 1996년10월 크리스티






백자철화 운용문 항아리(白磁鐵畵雲龍文壺)

17세기 높이 30.2cm 호암미술관





백자철화 운용문 항아리(白磁鐵畵雲龍文壺)

17세기 높이 42cm 국립중앙박물관






백자철화 운용문 항아리(白磁鐵畵雲龍文壺)

17세기 높이 41.5cm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중학동 출토)






백자철화 운용문 항아리(白磁鐵畵雲龍文壺)

 15세기 높이 45.8cm 이화여대 박물관






백자철화 운용문 항아리(白磁鐵畵雲龍文壺)

17세기 높이 34.6cm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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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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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개2. 개요3. 조선백자 고미술품 목록
    3.1. 국가 지정 문화재3.2. 시도 지정 문화재3.3. 일반 동산 문화재3.4. 해외 소재 문화재
    4. 참고 외부 링크5. 같이보기

    1. 소개[편집]



    朝鮮白磁.


      한국도자기로서 고려청자, 분청사기 이후에 출연한 도자기의 분류. 한국에서 고려시대의 청자와 함께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도자기이다. 백자답게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

    2. 개요[편집]

       한국에서 백자의 전통은 고려청자와 마찬가지로 송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시대의 백자인 고려백자는 그리 유명하지도 않고 유물도 적은 편이다. 고려청자는 사용 폭도 제법 넓었는데, 백자는 거의 발견되지 않아서 청자 유물이 훨씬 많다. 고려청자는 예상보다 유물이 많은데, 대부분이 지금 기준으로도 엄청난 사치성과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하지만 조선이 들어서자 동아시아의 백자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중국의 재료에는 미치지 못한 점도 있어서, 순수한 하얀 빛깔보다는 쉽게 만들어서 쓰는 내구성이나 소박한 멋으로 평가받고 있다. 애당초 백자가 발달한 배경에는 도자기 기술의 발전 이외에도, 사치를 싫어하는 유교 문화의 바탕이 깔려 있었다.

       덕분에 조선시대의 백자는 수입 염료를 사용했던 청백색 고급백자 못지않게 민중이나 중인층에서 사용했던 백자들이 유명하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시대의 막사발.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의 다이묘들이 감탄한 것은 민중이 사용했던 백자의 수준이 높았다는 점이라고... 이를테면 점심을 먹을 때 쓰던 막걸리 술병 같은 것조차 수준이 높았다고. 하지만 백자는 실제로는 청자 못지않게 비싼 것이라 실제로 민중이 사용했던 것은 평범한 목기와 도기라고 한다. 정확히는, 조선에서 백자 기술이 널리 보급되고 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침투했다는 점을 확인하여 놀랐다는 말이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일본 도자기는 크게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일부 도공들이 끌려가서 일본 백자에 영향을 주었다.

       백색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은 청자보다 어렵다. 유색 도자기는 유약이나 흙의 빛깔 때문에 생겨나는 이차적인 기술이며, 자연적인 재료만 가지고 하얀색을 만드는 쪽이 훨씬 높은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흙 자체도 청자토보다 견고한 편이 아니라서 빚어내는 것도 상대적으로 어려운 편이다.

       위의 사진을 봐도 알겠지만, 당시에 사용했던 백자는 현대의 세라믹 제품과는 다르게 청백색의 신비한 빛깔 덕분에 엄청난 중독성을 지니고 있었다. 청자보다도 오래 보면서 쓰기엔 이쪽이 낫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질리지 않는다.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도 백자를 이용한다. 청자보다는 백자의 빛깔이나 모양이 훨씬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와닿게 비유하자면, 청자보다는 백자에 담은 음식이 맛있어 보인다는 것.

       한편 서양에서는 본차이나를 통해서 백자와 같은 흰색을 내곤 하는데, 이는 뼈의 성분을 이용하여 백자의 흰색을 모방한 것이다. 물론 이 제작비화는 백자 제작에 필요한 흙을 구하기 어려웠던 과거의 서양에나 통용되던 말이고, 지금은 서양에서도 백자토와 본차이나를 잘 쓰고 있는 편.

       현대에는 통통하고 서민적인 외형 때문에 인기가 좋지 않다. 하지만 고급염료를 이용한 조선백자는 백자 특유의 청백색의 아름다움과 순수한 멋이 어우러져서, 탁하면서도 뿌연 색깔이 맑은 막걸리를 보는 듯한 중독성이 있다. 비교 대상이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었던 고려청자 유물들이기 때문에 더욱 저평가받는 감이 있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유물들은 독특한 빛깔과 단순하리만치 순수한 멋에서 예술적인 가치가 높다.



                                                                            국보 제258호 백자 청화죽문 각병




      순백자 제조기술이 점점 늘어나면서 그림을 더한 청화백자, 철화백자(철회백자), 동화백자(진사백자) 등이 생겨났다. 조선의 청화백자는 중국의 청화백자와 마찬가지로 이란코발트를 주로 써서 만들었다. 그래서 청화백자용 염료를 대놓고 회청(回靑)이라고 불렀다. 풀이하자면 아랍 청색. 그 코발트 값이 금보다 비싼 수준이라 그리 많은 양이 생산되지는 못했고, 그 때문에 대부분은 관요에서 만들어져 공납되었다. 이 코발트를 대체하기 위해 다른 염료를 사용하려는 시도 역시 많았다. 갈색 또는 흑갈색의 산화철을 이용한 철화백자와 붉은색의 산화구리를 이용한 동화백자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철화백자의 경우 백자를 만들기 위한 온도와 철화의 색을 유지하기 위한 온도의 간극이 당시 기술로 조정하기에는 매우 좁은 관계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어느 정도 생산될 수 있었다. 도자기로서의 완성도와 철화의 색감을 양립시킨 철화백자는 그 수가 매우 적고 희귀하다. 동화백자는 그 기원이 고려 중엽의 상감청자이지만 본격적으로 제작된 것은 조선시대 18~19세기이며 단순하면서도 파격적인 무늬 표현이 많다.

       하지만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백자는 점차 기술적 정교함 면에서 중국이나 일본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두차례의 대 전쟁을 겪으면서 도자기 기술자 상당수가 일본으로 납치되어 그들이 갖고 있던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제작 노하우가 단절되었고, 백자의 주된 수요자이던 양반 부유층의 취향이 쉽게 파손되지 않는 놋그릇 쪽으로 옮겨간 데다가 중국,일본과는 달리 외국과의 도자기 무역이 단절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사회적 혼란과 함께 조선 전기에 비해 성리학 교조주의가 크게 대두하였는데, 이로인해 지나친 화려함은 쓸데없는 것이나 요사스러운 것으로 취급했다. 서양이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지리적 위치와 성리학적 검소주의, 그리고 전쟁은 동아시아 3국의 역사를 갈랐고, 도자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3. 조선백자 고미술품 목록[편집]

    3.1. 국가 지정 문화재[편집]

    3.1.1. 국보[편집]

    3.1.2. 보물[편집]

    3.2. 시도 지정 문화재[편집]

    3.3. 일반 동산 문화재[편집]

    3.4. 해외 소재 문화재[편집]

    4. 참고 외부 링크[편집]

    5. 같이보기[편집]

    한국의 도자사
    토기/도기/자기의 변천사

    선사

    /삼국~남북국

    고려

    조선

    토기
    500℃~1100℃

    도자기
    1000℃ 이상

    선사

    와질→경질/도질

    즐문토기
    무문토기

    고구려/발해토기
    백제토기
    신라토기
    가야토기

    신라토기
    인화문토기
    연유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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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삼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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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청자

    분청사기

    고려백자

    조선백자

    청화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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