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화청자 / 다음백과

2016. 2. 21. 19:57도자 이야기



      

   철화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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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철화당초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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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철화당초문호

순청자에 철분 안료로 당초 문양을 나타낸 청자. 호림박물관 소장.

출처 이미지 사이즈 960x827 | 한국학중앙연구원






> 기획연재 > 철화청자의 원류 해남, 가치와 보존대책
해남서 제작된 철화청자, 상감청자와 쌍벽 이뤘다
해남우리신문  |  wonmok76@hanmail.net
승인 2014.04.04  18:16:19


  

  <보도 순서>

①해남 철화청자의 가치
②산이면과 화원면에 왜 대규모 가마터가 탄생했을까
③강진 상감청자와 산이 철화청자 와의 관계              
④중국에서 해남까지 철화청자 발생과 국내 유통경로        
⑤해남철화청자 어디 보관돼 있나
⑥해남철화청자 도요지 훼손과 보존정책

   1983년 전북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8000여 점에 이르는 청자가 인양됐다. 청자뿐 아니라 검은색 자기인 흑요도 함께 발굴됐다.

1983년 12월부터 다음해까지 진행된 완도 어두리 해저에서도 3만2000여점에 이르는 청자가 인양됐다. 특히 지상 발굴에서는 완형으로 나온 적이 없는 철화청자 모란무늬 장고도 나왔다. 엄청난 양의 유물, 청자와 철화청자, 검은 색 자기도 함께 쏟아졌다. 각각 다른 자기가 왜 한 곳에, 침몰된 배에 있었을까.  

1983년 산이면 진산리 도요지 발굴이 시작됐다. 도요지 발굴결과 청자를 비롯해 흑요, 철화청자 파편 등이 대량 나왔고 군산 십이동파도와 완도 어두리 해저유물에서 나온 청자와 제작방법 및 제작시기가 같음이 확인됐다.



   해저에서 인양된 유물 양으로 보아 산이면에는 거대한 도자기 마을이 존재했다. 이곳에는 고려시대인 11~12세기에 제작된 100여 기의 도요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최대 규모의 도자기 마을이 산이면에 있었던 것이다.

한때 산이 도요지에서 발굴된 철화청자는 강진 비색청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 상감청자에 버금가는 청자라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기술적인 면이나 예술성에서 고려청자에 버금간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특히 산이 진산리 일대에서 생산된 장고모양 자기는 제작기법이 뛰어나고 예술성도 인정받고 있다. 수년전 황토그림 기법의 철화장고(長鼓)가 KBS 진품명품에서 최고가인 12억으로 평가된 것도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해남 청자를 연구해온 변남주 목포대 교수는 철화기법은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전반, 고려청자 제작기법의 다양화가 이뤄졌던 시점에 등장해 발전했다고 말했다. 또 철화청자는 산이면 도요지에서 최초 제작한 고려청자의 한 종류이자 색과 제작방법에선 중국 도자기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자기라고 덧붙였다.  



   산이면에서 생산된 철화청자는 철 함량이 많은 황토로 도자기 표면에 문양을 그려 제작하는 방법이다. 이에 비해 강진청자는 상감기법을 이용해 제작한다. 비색의 강진청자가 귀족적이고 차가운 느낌이라면 산이 철화청자는 따뜻하고 서민적이다.

2013년 2월 일본 오사카시에 있는 동양도자미술관 이토(伊藤·83) 전 관장 등 3인의 도자기 학자들이 산이면 진산리 집단도요지를 찾았다.

이들의 방문은 일본에 소장돼 있는 철화청자가 과연 어디서 시작됐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다.

일본 동양도자미술관은 일본 최대의 도자기 전문박물관으로 한국과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의 도자기 2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한국산 도자기가 793점으로 제일 많은데, 이중에는 해남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화청자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산이면을 방문한 이토 전 관장 등은 이야기로만 들었던 철화청자의 고향을 직접 둘러보게 돼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또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철화청자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했다.



   변 교수는 해남의 철화청자는 강진 상감청자와 함께 고려시대 때 유행했던 고급 자기였다고 설명했다. 철화청자는 고려청자에 사용된 다양한 기법 중 하나인 철화기법을 이용한 자기였고 고려청자 가운데서도 독특한 미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기 다른 기법의 청자와 구별될 뿐만 아니라 중국 철화청자의 양상과도 차별화 된다고 한다. 때문에 비색청자와 상감청자가 주도해 간 고려청자의 흐름 속에서 철화청자의 존재는 더욱 각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남군 산이면 철화청자 가마터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우리나라 전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시피 생산량이 어마어마하다. 완도 어두리, 십이동파도, 진도 벽파 해적 유적에서 발굴된 도자기 대부분이 산이면 철화청자이다.

그만큼 고려시대 초기 산이 철화청자는 고려를 대표하는 청자였고 전 지역의 사찰․고분․가옥․제사유적에서 발굴될 만큼 전국으로 유통됐다.

고대부터 이용된 조운로와 유사한 형태의 항로를 따라 유통된 것이다. 산이면의 철화청자의 기술은 강진군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고려청자로 명명되는 상감청자 시대를 연다.

해남에는 산이 철화도요지와 함께 화원면에 초기청자 가마터가 존재한다. 두 곳 다 대규모적인 가마터이고 강진 상감청자 이전에 고려시대 자기기술을 선도했던 곳이다.

철화청자의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은 해남의 가치 중 하나를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또한 철화청자의 가치와 함께 유적지를 보호할 필요가 있으며 아직 발굴되지 않고 훼손되고 있는 도요지의 발굴 또한 시급하다.

이번 기획취재는 해남 철화청자의 가치를 지역사회에서 공유하며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도요지 일부라도 복원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기 위해서다.     
                 
박영자 기자/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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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철화양류문 통형 병 (靑磁 鐵畵楊柳文 筒形 甁) 
 


종 목: 국보 제113호

명 칭: 청자 철화양류문 통형 병 (靑磁 鐵畵楊柳文 筒形 甁)

분 류: 유물 / 생활공예 / 토도자공예 / 청자

수량/면적: 1개

지정(등록)일: 1962.12.20

소 재 지 :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에 제작된 높이 31.6㎝의 철회청자병으로 긴 통모양의 병 앞뒤에 한 그루씩의 버드나무를 붉은 흙으로 그려 넣은 소박한 병이다. 전체적으로 선의 변화가 거의 없는 직선이고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어깨 부분을 적당하게 모깎기를 하고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진 모양을 하고 있어 단조로움을 덜어주고 있다. 몸통의 양면에 있는 버드나무를 제외하고 특별한 장식이 없으며, 대담하게 단순화시킨 버드나무의 간결한 표현에서 운치있고 세련된 감각이 엿보인다. 유약은 굽는 과정에서 우연히 한쪽 면의 버드나무 아랫부분과 다른 면의 버드나무 배경 부분이 담담한 푸른색을 띠게 되었는데 이것이 마치 연못과 같은 회화적 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고려 철회청자 중에는 긴 원통형의 몸체를 지닌 특이한 형태의 병들이 몇 점 전해지고 있는데, 이 병은 그 중의 한 예로 1931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일본인 수집가로부터 사들인 것이다. 형태상의 적절한 비례와 어깨의 모깎기 형태, 몸체에 그린 자연스러운 선의 흐름, 독창적인 표현들이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다.

출처 문화재청 바로가기



www.woomunji.com/mobile/culture_01_detail.php?idx=113  





오픈지식

                                                                                   

                                                

고려시대의 철화청자
cutedrum| 2006.05.17 11:25 |

철화청자
 

    고려청자의 일종으로 청자 바탕흙으로 그릇을 빚고 표면에 흑색의 산화철을 주성분으로 한 안료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위에 청자 유약을 입혀 구워낸 자기를 말합니다. 환원염 번조의 고려청자와 는 달리 대개 산화염 번조였기 때문에 일부의 예를 제외하고는 황갈색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 대개의 경우 유약이 얇고 바탕흙속에 모래 등의 불순물이 섞인 것이 많아 표면이 매끄럽지 못합니다.


   철화청자는 중국 송, 원나라의 자주요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11세기 초에 만들어 지기시작합니다. 번조 수법이나 기형 문양에서 그 영향을 크게 벗어나지못한상태에서 고려말까지 계속됩니다. 초기의 청화청자는 조그만 접시나 바래기 등의 안쪽면 사방에 새로선을 긋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성기(盛期)에는 병종류에 당초무늬를 주로 하여 모란 무늬 이형 초목무늬 새무늬 버들무늬 시명 등이 그려지며 말기에는 간단한 당초무늬가 그려집니다.  그릇모양은 매병과 광구장경병 주전자, 기름병 등이 많으며 발색이나 문양 등에도 전형적인 고려청자와는 다소 차이가 납니다. 드물게 중국의 매병모양이지만 무늬가 간결하고 필티가 활달하거나 아니면 중국적인 문양이면서도 소박한 필치와 구도에서 고려적인 특징이 엿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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