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17. 17:47ㆍ차 이야기
우리나라 그릇의 기원(起源)이 되며 인류와 더불어 역사를 같이한 토기나 도자기(陶瓷器)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면 토기의 시초는 선사시대(先史時代)에 인간이 생활에 필요한 용구(用具)를 갖기 위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토기는 흙으로 빚어 유약(釉藥, 잿물)을 바르지 않고 700℃에서 1,000℃까지의 온도로 구워 만든다. 태토(胎土, 바탕흙)은 철분이 함유된 사토(沙土)나 점토(粘土)를 가지고 만들었으며, 굽는 방법은 처음에는 가마 없이 평평한 땅 위에서 만들다가 차츰 발전하여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서 굽게 되었다. 삼국시대(三國時代)로 접어들면서 그 양도 많아지지만 그릇의 종류도 많아 접시, 단지(항아리), 잔, 시루, 고배(高杯), 이형토기(인형, 동물형 토우(土偶), 집, 벼루, 방울잔, 가배 등) 등이 눈에 띈다. 이 시대의 그릇은 물레를 사용하여 모양이 세련되고, 솜씨가 매우 우수하였음을 보이고 있으며, 정성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도기(陶器), 석기(炻器), 자기(瓷器)의 합성어(合成語)인 도자기는 굽는 온도에 따라서 구분되는데 도기는 1,200℃ 이상에서 소성(燒成)되고, 자기는 1,300℃ 이상에서 소성된 것을 말하나 이것들의 구분은 전문가라도 잘 구분하기 어려워 도자기라고 명칭을 붙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수 천 년에 걸쳐 구워오던 토기가 유약(釉藥)을 발견하게 되어 도자기로 전환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태토(胎土)가 점토(粘土)에서 자질태토(瓷質胎土, 白土)와 잘 수비된 고령토(高嶺土), 이차점토 등으로 바뀌어졌으며, 기초 유약과 장석계(長石系)의 고급 유약을 사용하게 되었고, 화도(火度)는 1,300℃까지 구워 자기의 성질을 완벽하게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산소(酸素)가 충분히 공급되는 가마의 분위기 속에서 구워지는 경우를 ‘산화염(酸化焰)’이라고 하며,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 가마의 분위기 속에서는 가마 안의 연재(燃材)가 탈 때 산소를 더 필요로 하기 때문에 도자기의 몸체인 태토나 유약 속에 있는 산소를 빼앗아가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제2산화철(Fe2O3)의 산소를 빼앗겨 원래의 제1산화철(FeO)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러한 가마의 분위기를 ‘환원염(還元焰)’이라고 한다.
청자(靑瓷)란 푸른색의 자기를 말하는 것으로 몸체를 이루는 회색의 태토 위에 씌워진 푸른색의 유리질(琉璃質)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청자의 유약에는 실리카(SiO2)와 알루미나(Al2O3)가 주로 포함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칼슘, 나트륨 등의 성분이 미량(微量) 포함되어 반짝이는 유리질의 성분을 이루고 있고, 그 안에 푸른색의 빛깔을 내는 제2산화철(Fe2O3)이 미량 포함되어 있다. 청자는 환원염(還元焰)으로 구워질 때 유약 속에 포함된 미량(微量)의 철분(鐵分)이 작용해서 푸른색을 띄게 된다. 즉 유리질의 성분과 색깔을 내는 철분의 미묘한 조화가 태토의 바탕 위에서 마치 비취옥(翡翠玉)과 같은 푸른색을 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철분은 유약에 3% 정도가 포함되어 있을 때 가장 비취색에 가까운 청자색을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만일 철분이 5% 정도이면 암흑색(暗黑色)을 띄게 되고, 8~9%가 되면 흑갈색(黑褐色)을 띄게 되어 유약 속에 포함된 철분의 미묘한 변화가 청자의 색깔을 가늠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청자의 뒤를 이어온 분청사기(粉靑沙器)와 조선백자(朝鮮白磁)로 나눌 수 있다. 분청사기의 태토는 청자의 것보다 약간의 철분이 더 함유되고, 유약은 여러 종류의 나무 재를 사용하고, 나무 재와 장석(長石)의 비율을 4:6으로 하였고, 유약에는 거의 철분이 없으며, 소성은 청자와 마찬가지로 주로 환원염을 이용하였다. 또 백토(白土)를 주로 사용하였는데 백토를 태워 그것을 물에 녹인 다음 그릇에 바르기도 하고, 그릇 전체에 입히기도 하였다. 태토는 점토, 고령토 등을 사용하였으며, 백토를 분장(扮裝) 처리하여 여러 가지 문양을 만들어냈다. 당시의 풍부한 원료 수급으로 질이 좋고 당당한 작품을 양산(量産)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분청사기의 종류로는 인화문(印花紋)이 도안된 분청사기인화문대접, 분청사기귀얄문완, 분청사기당초문호, 분청사기덤벙문접시, 분청사기음각당초문장군(호), 분청사기철화문호, 분청사기박지국화문병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 조선이 개발한 이러한 아름다운 분청사기가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을 계기(契機)로 하여 그 맥(脈)이 끝나고 말았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쓰인 백자는 은은하고, 안정되고, 우아하며, 보수적인 색감을 띄우고 있어 한국적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순백자, 청화백자, 진사백자, 철화백자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순백자는 철분을 빼낸 백토, 고령토 등을 가지고 투명유약을 입힌 다음 1,250℃ 이상의 고온에서 소성하여 만들며, 종류로는 백자접시, 백자호, 백자사발, 백자제기, 부장품(副葬品)인 백자명기 등 다수가 있다. 청화백자는 코발트색이 나는 회회청(回回靑 : 산화코발트)을 가지고 백자에 그림을 그려 넣은 도자기를 말하는데 이 산화코발트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이나 멀리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수입하여 사용하였으므로 제한적으로 사용하였다. 오늘날 조선 초기의 청화백자가 보물급에 해당하는 것은 청화백자에 나오는 그림을 궁중(宮中)의 우수한 화원(畵員 : 화가)들이 그린 까닭에 조선조 초기 작품들은 그 수량이 적어 희귀성이 높은 이유일 것이다. 조선조 후기에는 분원(分院)에서 궁중의 사용품을 만들었고, 이곳에서 제작된 청화백자의 질은 매우 좋았으며, 청화백자연적, 청화백자필통, 청화백자필세 등의 문방구류(文房具類)와 청화백자쟁반, 청화백자용항아리, 청화백자완구 등 다수가 있다.
진사백자(辰砂白磁)는 백자의 표면에 붉은색을 띄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진사는 산화동(酸化銅)을 바르고 소성하여 만드는 백자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크게 유행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유행하지 않았으며, 관요(官窯) 계통에서 일시적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자 표면에 붉고 선명한 무늬가 조화를 이룰 때 그 느낌은 매우 인상(印象) 깊게 배려되어 좋다고 생각된다. 작품의 수는 매우 적고, 광주요(廣州窯)에서 제작된 것과 개성(開城)에서 제작된 것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진사연적, 진사병, 진사완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백자철화문자기(白磁鐵畫紋磁器)는 백자에 산화철로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을 말하는데 대부분 용(龍) 그림에 많이 이용되었고, 당초(唐草)나 꽃문양 같은 도안에도 이용하였다.
☞ 산화소성(酸化燒成)과 환원소성(還元燒成)
일반적으로 가마의 소성방범(燒成方法)은 산화소성(酸化燒成, Oxidation Firing)과 환원소성(還元燒成, Reduction Firing)으로 나눌 수 있다. 산화소성은 말 그대로 소성(燒成)을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산소(酸素)를 충분히 공급(供給)시켜 가장 불이 잘 탈 수 있는 조건(條件)을 만들어 주어 연료(燃料)가 충분히 연소(燃燒)되도록 하는 방법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금속(金屬)이 공기 중에 노출(露出)되어 빨갛게 녹이 스는 것을 산화(酸化)되었다고 하는데 산화소성을 했을 경우에는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색 그대로 발색(發色)이 된다. 따라서 연료가스에 공기가 많이 혼합(混合)되어 흙과 유약(釉藥)에 포함된 금속성분(金屬性分)들이 산화됨으로서 일반 생활자기나 안료(顔料)로 컬러링한 기물(器物)을 소성하여 원색(原色)을 많이 유지시킬 수 있다.
그러나 환원소성은 환원(還元)이라는 글자를 풀어보면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뜻인데 산화소성과는 반대로 소성작업에서 내부의 연소가스가 공급되는 산소(酸素)의 부족(不足)으로 불완전연소(不完全燃燒)가스인 co가스가 발생되어 소성제품의 원료 속에 존재하는 금속산화물(金屬酸化物)과 반응(反應)시키고자 활성(活性)을 강하게 나타내는 co가스를 소성염(燒成焰) 속에 존재하게 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가마 안의 산소(酸素) 공급(供給)을 불충분하게 하거나 공기(空氣)의 주입(注入)을 차단(遮斷)시켜 연료를 불완전연소(不完全練燒)시킴으로서 연소가스 중의 Co의 양을 증가(增加)시켜서 이 결과로 가마의 대기(大氣) 내에 생긴 유리(遊離)된 탄소(炭素)가 소지(素地)와 유약(釉藥)에 들어 있는 금속산화물(金屬酸化物)의 산소와 결합하여 이들을 환원(還元)시키고, 색깔도 변화시키는 소성기법으로 청자(靑瓷)나 백자(白瓷) 등의 전통자기의 주된 소성방법이다.
같은 안료(顔料)나 유약(釉藥)도 이 두 가지 소성방법에 따라 소성 후 색상에 큰 변화를 보이는데 예를 들면 백토(白土)나 고령토(高嶺土)를 환원소성하면 소성 후 푸른 회색(灰色)을 띤 백색도가 떨어지는 결과를 얻을 수가 있고, 청자유, 분청유, 재유 종류를 쓴 전통자기를 산화소성하면 소성 후에는 기존(旣存)과 크게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환원소성을 하는 이유는 도자기 제품을 생산할 때 소지(素地)에 포함된 철분(鐵分)이 제품의 색상(色相)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원료 속에 포함된 철분이 Fe2O3 상태로 존재하게 되면 색상을 붉고 검게 만들므로 백색도가 크게 떨어져서 백자토(白瓷土)를 산화소성하면 누렇게 나오지만 환원소성하면 흰색으로 나오고, 청자토(靑瓷土)를 산화소성하면 흙색 그대로 나오나 환원소성하면 푸른 청자 빛으로 나오며, 같은 온도로 소성했을 때에도 환원소성이 훨씬 강하게 생산된다. 우리가 청자(靑瓷)의 비색(翡色)을 설명할 때 산화철(酸化鐵)이 청자의 비색을 만든다고 하는데 청자를 산화소성하면 비취옥색(翡翠玉色)의 청자색(靑瓷色)이 아니라 쑥색과 옅은 회색(灰色)빛이 도는 어정쩡한 색이 나오게 된다. 백자(白瓷)도 마찬가지여서 산화소성하면 옅은 노랑에 가까운 탁한 색이 되며, 우유빛 푸른 백자색은 환원소성에서만 나온다.
한편 전기가마나 가스가마는 산화소성(酸化燒成)으로만 소성이 가능했으나 요즘은 전기가마나 가스가마 모두 산화(酸化), 환원(還元) 소성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전기가마는 내화열선(耐火熱線)의 발열(發熱)로 고온(高溫)을 내는 산화소성만 할 수 있었던 장치(裝置)이지만 최근에는 전기가마 안에 환원물질(還元物質)을 넣어 가마내의 분위기(雰圍氣)를 환원소성(還元燒成)으로 바꿔주기도 하며, 1,000℃ 정도에서 가스를 주입(注入)해서 환원소성을 하는 전기가마도 있다. 가스가마는 산화와 환원소성을 가마를 때는 사람이 직접 산소(酸素)의 양과 연료(燃料)의 양을 조절(調節)하여 소성하는데 보통 0℃에서 950℃ 정도까지는 산화소성방법으로 소성하다가 950℃ 이상에서 가마의 굴뚝조절기(댐퍼)를 닫아주면서 산소의 양을 조절하여 원하는 소성을 하게 된다. 환원소성은 산화소성에 비해 가스가 많이 쓰이기 때문에 시간과 연료가 많이 들지만 산화철의 발색(發色)을 좋게 하고, 점토내의 발색을 유도(誘導)해내는 이점(利點)이 있다.
(1) 선사시대(先史時代)
우리나라 토기문화의 기원은 B.C. 6,000년경부터 시작된다.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토기로는 부산직할시(釜山直轄市) 동삼동패총(東三洞貝塚)에서 출토된 원시무문토기(原始無紋土器 : 원시민무늬토기)와 원저융기문토기(圓底隆起紋土器 : 둥근덧띠무늬토기)가 있으며, 뒤이어 패각(貝殼)으로 무늬를 그린 즐문토기(櫛紋土器 : 빗살무늬토기)가 나타났다. 이어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는 무늬가 없는 토기가 발달하였으며, 철기시대(鐵器時代)에 들어와서는 평양 부근에 한(漢)나라의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어 한대 도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회도(灰陶), 회유도(灰釉陶), 녹유도(綠釉陶) 등이 제조되었다.
한편 경주시 조양동고분(朝洋洞古墳)에서는 연질토기(軟質土器)가 출토되었고, 김해시 회현동(會賢洞)에 위치한 김해패총(金海貝塚)에서 출토된 김해토기는 기면(器面)에 승석문(繩蓆紋 : 돗자리무늬)을 그려 넣어 고온에서 구워 만든 경질토기(硬質土器)이며, 그 중에는 자연유가 입혀진 것도 있다. 이 김해토기는 삼국시대(三國時代) 신라 토기의 모체(母體)가 되었으며, 일본(日本)의 쓰시마섬[對馬島], 이키섬[壹岐島], 기타큐슈[北九州]의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유적에서도 출토된 점으로 보아 일본의 경질도기인 스에기[須惠器]의 번조(燔造)에도 영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다.
(2) 삼국시대(三國時代) 및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삼국시대에는 북쪽에는 고구려(高句麗), 남쪽에는 신라(新羅)와 백제(百濟)가 형성되어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도 독자적인 도기문화를 형성하였다. 고구려의 도기는 회도(灰陶)로 중국 동북부의 도기와 유사한 점이 많으며, 후에 연유도(鉛釉陶)도 번조(燔造)되었다. 신라와 백제에서는 환원염소성(還元焰燒成)에 의한 회백색, 회흑색의 경도(硬陶), 즉 신라 토기가 주류를 이루어 발달하였다. 신라 토기는 돌이 섞이지 않은 고운 태토(胎土)로 만들어 1,000℃ 이상의 고열로 구운 것이며, 두드리면 금속성 소리가 날 정도의 경도(硬度)를 가지고 있으나 유약을 입히지 않아 흡수성(吸水性)이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았지만 가마 속에서 굽는 도중 재가 기표(器表 : 그릇의 표면)에 떨어져 자연유(自然釉)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항아리, 병, 잔, 굽다리접시, 그릇 등 종류가 풍부하고, 기면(器面)에 선각(線刻)으로 문양을 그렸다.
신라 토기는 5세기 초 일본에 전하여져 고치[河內]의 스에무라[陶邑]에서 경질도기[스에끼須惠器]가 번조되었다. 신라 토기는 이러한 일상적인 기명(器皿) 이외에도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 압형토기(鴨形土器), 토우(土偶), 기면(器面)에 인물이나 동물을 붙인 부장용(副葬用)의 명기류(明器類)도 많이 만들어졌는데 경주시 황남동(皇南洞)의 황남대총(皇南大塚)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이러한 신라 토기는 꾸밈새 없는 질감(質感), 음각(陰刻)으로 된 파상문(波狀紋), 삼각문(三角紋), 평행집선문(平行集線紋), 원권문(圓圈紋) 등의 기하학적 문양이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고졸(古拙)하면서도 소박한 고대인의 정감이 넘쳐흐르는 듯한 정신적 힘이 강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 삼국시대에는 중국 고월자(
古越瓷)의 청자(靑瓷), 흑유자(黑釉瓷) 등이 수입된 것이 최근에 밝혀지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전통적인 신라 토기 위에 녹채(綠彩), 이채(二彩), 삼채(三彩) 등의 연유도(鉛釉陶), 회유(灰釉)를 의도적으로 입힌 회유도(灰釉陶) 등이 새로 나타났다. 기면(器面)에 연속적인 인화장식을 하고 그 위에 회유, 연유를 입힌 것인데 기본적으로 신라 토기의 전통 위에서 만들어진 도기이다. 또 경주의 안압지(雁鴨池)와 황룡사(皇龍寺) 등지에서는 녹유와(綠釉瓦)가 대량으로 출토되었으며, 건축장식에 연유도(鉛釉陶)가 많이 이용되었다. 통일신라 토기의 특징은 중국의 금속기(金屬器)의 영향으로 기형과 문양이 변화되었으며, 제기적(祭器的) 성격이 농후한 신라 토기에 비하여 합리성과 실용성이 강조된 점에 있다.
(3) 고려시대(高麗時代)
고려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인 자기(瓷器)의 번조(燔造)가 이루어졌다. 개성(開城)에 도읍지를 둔 고려왕조는 계속되는 중국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왔는데 자기의 경우 월주요(越州窯)․요주요(耀州窯)의 청자(靑瓷,) 여요(汝窯)․정요(定窯)의 백자(白瓷), 경덕진요(景德鎭窯)의 청백자(靑白瓷), 건요(建窯)의 천목(天目), 광동․복건의 도자(陶瓷) 등 거의 중국 전역의 도자기가 들어왔으며, 개성 부근의 고려시대 무덤에서 이러한 중국 도자기가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도자기는 중국 도자기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도자기는 청자(靑瓷), 백자(白瓷), 흑유자(黑釉瓷), 천목(天目), 철채수(鐵彩手), 철사유(鐵砂釉), 청자진사(靑瓷辰砂), 화금자(畵金瓷) 등의 다양한 자기가 번조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는 청자이다.
초기의 청자는 반자태토(半瓷胎土)에 회유를 입힌 녹청자였으며, 본격적으로 청자가 제조된 것은 9~10세기 초엽으로 이때의 도자기는 오대(五代), 북송(北宋) 초기 월주요 청자 작풍(作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1세기경 고려에서는 완벽한 환원번조(還元燔造)로 독특한 세련미를 가진 비색청자(翡色靑磁)를 만들어 냈다. 12세기 전반기는 그 절정기로 중국의 서긍(徐兢)이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化奉使高麗圖經)?에서 「근래에 더욱 세련되고 색택이 가히 일품이다.(近年以來制作功巧 色澤尤佳)」라고 절찬(絶讚)한 것은 유명하다이때의 청자 모습은 청자과형화병(靑瓷瓜形花甁) 등으로 대표된다. 비색이란 물총새(翡翠) 날개의 푸른색을 비유한 미칭(美稱)이지만 확실히 고려청자의 훌륭함은 세계 그 어디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오묘한 유조(釉調)를 띠는 것이다.
고려청자의 최성기(最盛期)는 인종(仁宗), 의종(毅宗) 때이며, 고려 특유의 작풍을 보이는 우수한 청자가 많이 만들어졌다. 청자의 도요지로는 전라북도 부안군(扶安郡) 보안면(保安面) 유천리(柳川里)와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용운리(龍雲里), 사당리(沙堂里)가 대표 지역이다. 고려청자에는 이 밖에도 백토(白土)나 흑토(黑土)를 상감한 상감청자(象嵌靑瓷), 철(鐵)로 문양을 그린 후 청자유를 입힌 철화청자(鐵畵靑瓷), 철유(鐵釉)를 전면에 바르고 청자유를 입힌 철사유청자(鐵砂釉靑瓷), 금채(金彩)를 채색한 화금청자(畵金靑瓷), 진사(辰砂)를 입힌 진사청자(辰砂靑瓷) 등이 있다.
상감청자는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고려의 독자적인 청자로 치밀하고 섬세한 문양이 기면에 채색되어 그 은은함과 아담한 정취의 깊이는 고려 도자기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상감청자의 기법은 12세기 경 절정을 이루어 고려 말에 쇠퇴하였는데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에 그 기법이 전수되었다. 철화청자는 중국의 유하채자(釉下彩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지며, 화금청자는 그 유례가 극히 드문데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자상감원토당초문화금편호(靑磁象嵌猿兎唐草文畵金扁壺)가 대표작이다. 고려자기에는 청자 이외에도 백자, 흑유자, 철채수 등이 만들어졌지만 청자만큼 우수한 자기는 많지 않다.
(4) 조선시대(朝鮮時代)
고려시대가 중국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데 비하여 조선시대에는 민족의 독창적인 한글문자를 완성하였고, 문화적으로도 독자적인 기풍을 세우려고 하였다. 도자기에서도 고려는 청자가 주류를 이룬 데 반하여 조선에서는 백자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작풍면(作風面)에서 고려청자가 단정(端正)하고 엄격(嚴格)함을 보이는 데 비하여 조선의 백자는 중량감 있는 자유롭고 넉넉한 도자기로 만들었다. 태조 1년(1392)에는 도자기 생산을 감독하는 사선서(司膳署, 후에 사옹원(司甕院)으로 그 이름이 바뀜)가 설치되어 전국에서 도자기를 생산하는 도기소(陶器所), 자기소(瓷器所) 324개소를 감독하였다.
백자는 소박한 문양이 주체이지만 15세기에 중국으로부터 코발트를 수입하여 청화(靑華 : 남빛 무늬를 넣어 구운 자기)를 번조하였다. 초기의 청화는 명나라 초엽의 작풍을 이어받아 당초문(唐草紋) 등을 기면(器面)에 그린 여백이 없는 도자기를 제조하였으나 17세기경에는 여백을 많이 남긴 추초문(秋草紋), 어문(魚紋), 초화문(草花紋), 호도(虎圖) 등을 엷고 가는 선으로 그린 청화백자를 완성하였는데 중국의 청화에서도 볼 수 없는 부드러움을 느끼게 한다. 청화백자는 17세기 초에 일본에 전해져 이마리청화[伊萬里靑華]를 낳게 되었다. 백자는 이미 고려 초기부터 일부 제작되고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크게 성행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자공예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백자에는 순백자, 백자철화, 백자진사 등의 종류가 있다. 백자의 기면에 굵은 붓으로 용, 호랑이, 풀, 꽃, 난, 대나무 등의 그림을 그려 백자는 청화의 부드러움과는 다른 힘찬 약동감을 띠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백자만이 궁전의 집기(什器)로 사용되어 그 생산은 엄격히 감독되었으며,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는 분청사기(粉靑沙器)가 발달하였다. 분청사기는 고려청자의 전통을 이어받아 나타난 것으로 초기에는 백화장(白化粧)한 기면(器面)에 청자유를 입혀 번조(燔造)한 것이다. 시문방법(施文方法)은 고려청자로부터 이어져 온 인화문(印花紋), 상감문(象嵌紋)이 시문(施文)되었으며, 선각(線刻), 철화(鐵畵) 등으로 이어져 발달하였다. 철화는 계룡산요(鷄龍山窯)가 유명한데 부드러운 도태(陶胎) 위에 힘찬 선으로 어문(魚紋)이나 당초문(唐草紋)을 날렵하게 그린 계룡산요의 철화기법은 일본의 에카라쓰[繪唐津]로 전래되었다.
(5) 근대(近代) 도예(陶藝)
1883년 관요(官窯)가 폐지(廢止)됨으로써 조선시대 고급 백자(白瓷)의 주류는 일시에 사라지고 지방가마에서 생산되는 저급(低級)의 백자만이 간신히 명맥(命脈)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침체된 전통공예가 새로운 인식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서구 열강(列强)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서양문물을 활발하게 접촉하면서부터였다. 특히 세계만국박람회의 참가는 우리나라 공예(工藝)의 낙후성(落後性)을 깨닫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공예의 산업성과 문화적 중요성을 재인식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산업기술의 후진성(後進性)을 비판하고 선진기술의 도입을 주장했던 소수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상공업과 함께 도자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제작기술의 개발을 강조하였으며, 정부 역시 근대적인 기술교육과 개발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공업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근대화, 산업화를 꾀하려는 정부와 선각자(先覺者)들의 노력은 의욕에 비해 재정난(財政難)과 기술부족, 경영미숙 등으로 실패하면서 결국 외세(外勢)에 의한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1910년을 전후하여 일본인 소유의 도자기 공장들이 곳곳에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전통도자기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우리의 전통도자기를 조사, 연구한다는 명분(名分)하에 일본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고적조사(朝鮮古蹟調査)를 통해 많은 전통문화재를 발굴(發掘)하는 한편 상당부분이 도굴(盜掘)되고 대량 반출(搬出)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골동품들을 모방한 제품들이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였고, 1920년대에는 일본의 산업화된 자기회사와 도자기 공장 등의 진출이 본격화 되었으며,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저급한 왜사기(倭沙器)를 대량생산하여 우리의 생활 속에 침투시킴으로써 전통도자기 생산은 점점 더 위축(萎縮)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공업 생산체제의 붕괴와 기계화 과정에서 나타난 공산품의 질적 퇴조(退潮)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창립된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왕실용 미술품 및 생활용품을 제작하면서 민영공장으로 일제의 강점기 동안 약 30년간이나 운영되었다.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단절(斷絶)의 위기에 놓여있던 우리의 전통공예 기술을 이어주는 기술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며 퇴락한 수공예 기술을 부분적이나마 조선시대 경공장의 수준으로 복원시켰을 뿐만 아니라 준교육시설로서 후진양성에 힘썼다는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당시 국내 자본으로 설립된 도자기 공장들이 약 20여 곳 있었으며, 상당수의 공장들이 영세한 규모로 운영되고 있었으나 이들 중 재래식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소수의 공장을 제외한 대부분이 일본인에 의해 근대화된 도자기 공장에 흡수되었다. 근대화된 공장에서는 생산방식과 가마의 구조 등을 개량해 나갔으며, 연료도 석탄으로 대체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서양의 기계적 생산방식이 도입되어 산업자기를 생산하는 공장들이 신설되기도 하였다.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는 그나마 어렵게 유지되던 생산 공장들마저 열악(劣惡)한 경제사정과 사회적 혼란으로 문을 닫았고,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공장을 인수한 기업에서는 경영 미숙과 자금난, 에너지 부족 등으로 폐쇄 위기까지 맞게 되었다. 이처럼 재래식 공장의 생산여건이 악화되면서 생활기(生活器)의 부족현상과 함께 무겁고 깨지는 도자기의 단점으로 인하여 알루미늄으로 만든 식기가 수입과 동시에 널리 확산되었다. 한편 외국물품의 유입과정을 통해 공예가들은 서구의 공예 개념을 왜곡(歪曲)하여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점차 전통공예를 기피하면서 기능을 중시하는 실용공예 분야는 기계기술자들이 맡게 되어 질적인 하락을 초래하였다. 또한 당시 공예계는 대부분 상업성에 치우쳐 무성의한 태도로 만들어진 것들이 토산품(土産品) 또는 민예품(民藝品)이라는 이름으로 성행하였다.
도자기 공장들은 비교적 양질의 점토(粘土)가 생산되는 지역을 중심으로 건설되었으나 한국전쟁(韓國戰爭)으로 인해 그나마 남아있던 근대 도자산업의 기반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휴전(休戰) 이후에는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공장들이 시설 및 규모를 재정비하고, 요업 원료의 개발과 요업정책의 일원화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군수품(軍需品)과 함께 유입된 고급자기가 일부 부유층에서 사용되면서 구한말과 유사한 양상을 띠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밀양도자기, 행남사, 한국도자기 같은 도자기 회사가 설립되고 식기의 발전을 위한 사명감으로 지속적인 기술개발을 하면서 초기의 도자산업을 이끌었다. 도예분야에서는 비록 독자적인 도예전은 없었지만 한 두 명의 작가가 지속적인 활동을 하면서 단절되다시피 한 근대기의 도예문화를 현대도예와 연결시켜주었는데 이 시기를 전환기(轉換期)라고 할 수 있다.
(6) 현대(現代) 도예(陶藝)
전후(戰後)의 혼란 속에서도 이론가와 예술가들이 협력하여 민족문화를 진작시키고자 미국 록펠러 재단의 재정지원을 받아 국내 최초의 전통문화연구기관인 <한국조형문화연구소(韓國造形文化硏究所)>를 설립하여 전통도자기의 재현을 통해 새로운 도자기를 창조하여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였으나 도공(陶工)들이 새로운 시설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또 이와 비슷한 시기에 <한국미술품연구소(韓國美術品硏究所)>가 설립되면서 전통도자기 제작기법을 연구하고 개량해 나갔으나 심각한 경영난에 빠지면서 2년 만에 문을 닫게 되었으며, 외국기관의 원조에 의해 설립되었던 <한국수공예시범소(韓國手工藝示範所)> 역시 정부나 관계기관의 정책부재(政策不在) 속에 문을 닫게 되었다.
1950년대에는 대학에서도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전통도자기의 연구, 개발에 힘을 기울인 결과 각 대학에서 정식으로 도예 및 공예를 교육하게 되었으며, 국전(國展)에 공예부가 창설되면서 한국 근대공예는 본격적으로 변혁을 시작하게 되었다. 특히 산업화가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서구(西歐)의 디자인 개념이 확산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1950년대 말에는 유학에서 돌아온 인재들이 교수로 충원되면서 대학에서의 도예교육이 본격화되었다. 그 결과 1960년대 초에는 대학을 통해 배출된 많은 사람들이 대학교육에 대거 참여하였고, 재개된 국전을 목표로 활발한 작품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大韓民國商工美術展覽會)’를 창설하여 디자인과 산업을 연결시켜 산업디자인의 개선을 도모하고, 우수 디자인을 개발하는 외에도 1960년대에는 여러 미술전이 열려 활발한 작품활동을 선보이게 되었다.
1960년대는 대학 출신 도예가들이 주축이 된 현대도예(現代陶藝)와 특산품(特産品) 또는 민예품(民藝品)이라는 이름으로 생산되던 전승도예(傳承陶藝)로 양분된 채 발전하게 되어 이천, 광주, 여주 등지의 옹기가마나 칠기가마를 중심으로 전승도예의 제작이 싹트기 시작하였지만 스테인리스, 플라스틱 용기가 보급되면서 도자기는 수요가 감소하여 급속히 사양화되었다. 그러나 도공(陶工, 도공은 일본식 표현으로 사기장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함)들은 청자(靑瓷), 백자(白瓷), 분청사기(粉靑沙器) 같은 전통도자기를 본격적으로 제작하였으며, 1965년 한일국교(韓日國交) 정상화 이후 일본인 관광객의 증가와 함께 판매중개상의 출입이 잦아져 일본 취향의 주문생산이 크게 작용하면서 근대기와 유사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반면 1960년대의 산업도예는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교육자나 산업제품 디자이너로서의 본격적인 활동과 정부의 산업정책에 힘입어 조금씩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1970년대는 도자문화의 부흥기(復興期)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활발했던 시기로 국전(國展)을 비롯한 관전(官展)과 ‘동아공예대전’과 같은 민간공모전에서 많은 수상자가 나왔으며, 신인 도예가들의 활동도 크게 증가하였다. 도예가의 양적 배출이 현저해지면서 넓어진 작가층(作家層) 만큼이나 다양하고 새로운 조형이념과 양식의 창조가 요구되어 도예계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였다. 그러나 비밀스럽게 유지되던 정보와 지식은 서적(書籍)들을 통해 보편화(普遍化)되었으나 전승도예(傳承陶藝)와 대학출신 도예가들의 창작도예(創作陶藝)가 서로 다른 목표를 지향함으로써 전통계승과 현대화 간의 괴리(乖離)라는 문제점을 남겼다.
1970년대의 전승도예는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제고(提高)되어 계승(繼承)과 발전을 위한 정부정책이 마련됨과 동시에 학계에서의 움직임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그러나 과거의 양식과 기술로 재현된 도자기들이 전통도자기라는 이름으로 생산되는 등 전통(傳統)과 전승(傳承)의 개념 혼란은 여전히 지속되면서 양적인 팽창만을 거듭하였다. 이와 같은 과도기적인 상황에서도 전승도자기는 경기도 이천, 광주, 여주, 경북 문경 등을 중심으로 발전의 기틀을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1970년대의 산업도예는 경제의 본격적인 도약기(跳躍期)를 맞이하여 관광산업의 급속한 성장으로 수출, 관광용 공산품의 디자인이 당면과제로 대두(擡頭)됨에 따라 디자인 개발 촉진을 위한 각종 행사를 마련하였다. 또한 선진기술을 배우고자 기술자를 해외에 파견하고, 외국상품을 소개하여 디자인에 대한 산업계의 인식이 바뀌어 갔다. 그러나 수출되는 식기의 대부분이 외국의 견본품(見本品)을 바탕으로 그대로 가져다 생산하는 형식이거나 당시 외국에서 생산된 제품의 문양과 형태를 모방하는 단계에 머물렀다.
1980년대는 한국공예가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한 시기로 젊은 작가들의 단체전과 미술관이나 화랑(畵廊)에서 마련한 기획전이 한층 활성화되었으며, 공예미술전문잡지도 창간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신문사나 백화점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에도 도예강좌가 마련됨으로써 전국적으로 도예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외국유학에서 돌아온 작가들과 미술잡지, 해외여행 자율화를 통해 국제적인 미술조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80년대의 전승도예는 생활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일상용품으로서 도자기 수요가 크게 늘어나고, 가스 가마의 보급과 제반시설의 기계화에 힘입어 생산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러나 세계경제 침체와 더불어 일본을 주요 수출시장으로 삼았던 전승도자기는 일본의 수요 감소로 지나치게 싸게 판매되어 결과적으로 우리 전승도자기에 대한 신뢰감 추락과 함께 존폐의 위기에까지 처하게 되었지만 지금은 전통 도예인들의 노력으로 인간문화재, 도예명장 등이 탄생하는 한편 전통도예의 위상도 많이 격상되었다.
1980년대의 산업도자기들은 인기 있는 타사의 제품을 모방(模倣)하거나 외국회사의 디자인을 표절(剽竊), 일부 변형하는 정도의 수준이어서 내수(內需)와 수출(輸出)에서도 어려움이 있는 가운데 경기부진과 인력난으로 경영과 생산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산업도자기 생산업체들은 설비의 자동화, 자체 디자인의 개발, 수요 촉진과 홍보를 위한 행사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구책(自救策)을 마련하였으며, 소규모 공방(工房)에서 만든 도자기들이 저렴한 가격과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많은 호응을 얻으면서 붐을 이루게 되었다. 그밖에도 도시가 대형화되고 현대적인 건축물들이 늘어나면서 건축물의 내외공간을 도예작품으로 장식하는 환경도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환경조형물에 대한 표현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개념정립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1990년대는 도예전의 증가와 함께 영역 확대를 위한 여러 가지 시도(試圖)들이 있었으며, 미술계의 흐름 또한 각 부문별로 세분화, 조직화, 전문화되는 양상을 나타냈으며, 공예조형의 독자성과 전문성 확보를 위한 전문 갤러리가 문을 열어 신인작가들의 등용문(登龍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대도예의 표현양식에 관한 다양한 실험과 의지를 담은 전시 또한 자주 기획되었다. 그러나 1997년 IMF체제하의 경제침체는 미술품시장의 몰락과 함께 도예계에도 엄청난 파장(波長)을 미쳐 1990년대 중반까지 활성화되었던 각종 도예행사 및 기획 전시들은 스폰서들의 문화관련 예산이 삭감되면서 조형도자의 존폐위기론까지 대두되었으며, 시장성이 배제된 조형도자의 한계와 도예의 일차적 목적인 실용성으로의 회귀 등 현실적 문제는 기존 대학교육 시스템의 변화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IMF체제 전에 형성되었던 일반대중의 문화적 경험은 새로운 문화층의 저변확대(底邊擴大)를 마련하는 토대가 되었으며, 미술시장의 냉각기에도 불구하고 소품(小品) 위주의 미술품은 잠재적(潛在的)인 시장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후 경제가 점차 안정되면서 2001년에 경기도 여주, 광주, 이천에서 처음 개최된 격년제(隔年制)로 열리는 ‘세계도자비엔날레’를 비롯하여 각 지방자치단체나 지방대학에서 각종 도예관련 축제나 세미나, 워크샵을 열고 있어 이러한 행사들은 침체된 도예문화에 새로운 전기(轉機)가 될 것이며, 21세기 한국도예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契機)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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