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서(自序) 목민심서 / 일표이서

2016. 2. 23. 14:15다산의 향기



       [1] 자서(自序) 목민심서 / 일표이서

2015.02.03.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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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에 순(舜) 임금은 요(堯) 임금의 뒤를 이어 12목(牧)에게 물어, 그들로 하여금 목민(牧民)하게 하였고, 주 문왕(周文王)이 정치를 할 제, 이에 사목(司牧)을 세워 목부(牧夫)로 삼았으며, 맹자(孟子)는 평륙(平陸)으로 가서 추목(芻牧)하는 것으로 목민함에 비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양민(養民)함을 목(牧)이라 한 것은 성현이 남긴 뜻이다. 성현의 가르침에는 원래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사도(司徒)가 만백성을 가르쳐 각기 수신(修身)하도록 하고, 또 하나는 태학(太學)에서 국자(國子)를 가르쳐 각각 수신하고 치민(治民)하도록 하는 것이니, 치민하는 것이 바로 목민인 것이다. 그렇다면 군자(君子)의 학은 수신이 그 반이요, 반은 목민인 것이다. 성인의 시대가 이미 오래되었고 그 말도 없어져서 그 도가 점점 어두워졌다. 요즈음의 사목(司牧)이란 자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급급하고 어떻게 목민해야 할 것인가는 모르고 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곤궁하고 병들어 줄을 지어 진구렁이에 떨어져 죽는데도 그들 사목된 자들은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의 선친께서 성조(聖朝)의 지우(知遇)를 받아, 두 현의 현감, 한 군의 군수, 한 부의 도호부사(都護府使), 한 주의 목사를 지냈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비록 나의 불초로도 따라다니면서 배워서 다소간 들은 바가 있었고, 따라다니면서 보고는 다소간 깨달은 바도 있었으며, 뒤에 수령이 되어 이를 시험해 볼 때에도 다소간 증험이 있었지만, 이미 유락(流落)된 몸이 되어 이를 쓸 곳조차 없어졌다. 먼 변방에서 귀양살이한 지 18년 동안오경(五經)ㆍ사서(四書)를 되풀이 연구하여 수기(修己)의 학을 공부하였다. 다시 백성을 다스림은 학문의 반이라 하여, 이에 23사(史)와 우리나라의 여러 역사 및 자집(子集) 등 여러 서적을 가져다가 옛날 사목이 목민한 유적을 골라, 세밀히 고찰하여 이를 분류한 다음, 차례로 편집하였다. 남쪽의 시골은 전답의 조세(租稅)가 나오는 곳이라, 간악하고 교활한 아전들이 농단하여 그에 따른 여러 가지 폐단이 어지럽게 일어났는데, 내 처지가 비천(卑賤)하므로 들은 것이 매우 상세하였다. 이것 또한 그대로 분류하여 대강 기록하고 나의 천박한 소견을 붙였다.


   모두 12편으로 되었는데, 1은 부임(赴任), 2는 율기(律己), 3은 봉공(奉公), 4는 애민(愛民)이요, 그 다음 차례차례로 육전(六典)이 있고, 11은 진황(賑荒), 12는 해관(解官)이다. 12편이 각각 6조(條)씩 나뉘었으니 모두 72조가 된다. 혹, 몇 조를 합하여 한 권을 만들기도 하고, 혹 한 조를 나누어 몇 권을 만들기도 하였으니, 통틀어 48권으로 한 부(部)가 되었다. 비록 시대에 따르고 풍습에 순응하여 위로 선왕(先王)의 헌장(憲章)에 부합되지는 못하였지만, 목민하는 일에 있어서는 조례가 갖추어졌다.


   고려 말에 비로소 오사(五事)로 수령들을 고과(考課)하였고, 국조(國朝)에서는 그대로 하다가 뒤에 칠사(七事)로 늘렸는데, 소위 수령이 해야 할 대략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수령이라는 직책은 관장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여러 조목을 열거하여도 오히려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스스로 실행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첫머리의 부임(赴任)과 맨 끝의 해관(解官) 2편을 제외한 나머지 10편에 들어 있는 것만 해도 60조나 되니, 진실로 어진 수령이 있어 제 직분을 다할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방법에 어둡지는 않을 것이다.


   옛날에 부염(傅琰)은 《이현보(理縣譜)》를 지었고, 유이(劉彝)는 《법범(法範)》을 지었으며, 왕소(王素)에게는 《독단(獨斷)》이, 장영(張詠)에게는 《계민집(戒民集)》이 있으며, 진덕수(眞德秀)는 《정경(政經)》을, 호태초(胡太初)는 《서언(緖言)》을, 정한봉(鄭漢奉)은 〈환택편(宦澤篇)〉을 지었으니, 모두 소위 목민에 관한 서적인 것이다.
이제 그런 서적들은 거의가 전해 오지 않고 음란한 말과 기이한 구절만이 일세를 횡행하니, 내 책인들 어찌 전해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역(周易)》 〈대축(大畜)〉에 “전 사람의 말이나 지나간 행실을 많이 알아서 자기의 덕을 기른다.” 하였으니, 이는 본디 나의 덕을 기르기 위한 것이지, 하필 꼭 목민하기 위해서만이겠는가?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당저(當宁) 21년인 신사년(1821) 늦봄에 열수(洌水) 정약용(丁若鏞)은 서(序)한다.


[주D-001]12목(牧) : 12주(州)의 제후(諸侯) 즉 지방장관. 당시는 전국을 12주(州)로 나누고 주(州)마다 제후(諸侯)를 두었다. 《書經 虞書 舜典》
[주D-002]주 문왕(周文王)이 …… 삼았으며 : 주 문왕(周文王)은 훌륭한 왕으로서 정사를 할 적에 그 직책에 적당한 사람을 골라 썼는데, 백성을 다스리는 사목(司牧)도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을 썼다. 사목(司牧)은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 즉 지방장관, 목부(牧夫)는 가축을 사육하는 사람이다. 백성을 부양하는 수령을 목부에 비유한 것이다. 《書經 周書 立政》
[주D-003]맹자(孟子)는 …… 비유하였으니 : 맹자(孟子)가 제(齊)나라 고을인 평륙(平陸)의 읍재(邑宰) 공거심(孔距心)에게 한 말이다. 《孟子 公孫丑下》 추목(芻牧)은 가축을 사육한다는 뜻이다.
[주D-004]사도(司徒) : 주대(周代) 육경(六卿)의 하나로서, 지관대사도(地官大司徒)라고도 하였다. 예교(禮敎)로 백성을 교화시키는 일을 맡아보았다. 《周禮 地官司徒》 《書經 周書 周官》
[주D-005]태학(太學) : 옛날 왕이 세운 학교. 소학(小學)에서는 쇄소(灑掃)ㆍ응대(應對)ㆍ진퇴(進退)의 절차를 가르치는 데 대하여 수기(修己)ㆍ치인(治人)의 도(道)를 가르치는 최고의 학부(學府)이다.
[주D-006]국자(國子) :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자제를 말한다. 《周禮 地官司徒 師氏注》
[주D-007]도호부사(都護府使) : 도호부(都護府)의 으뜸 벼슬로 조선 때는 종3품으로 임명하였다. 도호부는 지방 관아의 하나로 대도호부(大都護府)의 다음가는 고을에 두었다. 정약용의 아버지 이름은 재원(載遠)인데, 연천(漣川)ㆍ화순(和順)의 현감, 예천 군수(醴泉郡守), 울산 부사(蔚山府使), 진주 목사(晉州牧使)를 지냈다.
[주D-008]귀양살이한 지 18년 동안 : 정약용이 순조 1년(1801)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강진(康津)에 유배(流配)되어 순조 18년(1818)까지 그곳에서 경서(經書)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저서를 남겼다.
[주D-009]오경(五經)ㆍ사서(四書) : 오경은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주역(周易)》ㆍ《예기(禮記)》ㆍ《춘추(春秋)》이고, 사서는 《논어(論語)》ㆍ《맹자(孟子)》ㆍ《대학(大學)》ㆍ《중용(中庸)》이다. 유학(儒學)의 기본서로서 조선조에서 가장 많이 읽혔다.
[주D-010]23사(史) : 23종의 중국 역사서. 중국 역대의 정사(正史)에 는 25종이 있는데 , 즉 《사기(史記)》ㆍ《한서(漢書)》ㆍ《후한서(後漢書)》ㆍ《삼국지(三國志)》ㆍ《진서(晉書)》ㆍ《송서(宋書)》ㆍ《남제서(南齊書)》ㆍ《양서(梁書)》ㆍ《진서(陳書)》ㆍ《후위서(後魏書)》ㆍ《북제서(北齊書)》ㆍ《후주서(後周書)》ㆍ《수서(隋書)》ㆍ《남사(南史)》ㆍ《북사(北史)》ㆍ《구당서(舊唐書)》ㆍ《신당서(新唐書)》ㆍ《구오대사(舊五代史)》ㆍ《신오대사(新五代史)》ㆍ《송사(宋史)》ㆍ《요사(遼史)》ㆍ《금사(金史)》ㆍ《원사(元史)》ㆍ《신원사(新元史)ㆍ《명사(明史)》, 이것을 통칭 25사(史)라 한다. 이 중에 《구당서》ㆍ《구오대사》ㆍ《신원사》를 빼고 22사라 하고, 《신원사》만 빼고 24사라 한다. 다산(茶山)이 말한 23사란 자세히 알 수 없다.
[주D-011]자집(子集) : 제자(諸子)와 시문집(詩文集)
[주D-012]육전(六典) : 이전(吏典)ㆍ호전(戶典)ㆍ예전(禮典)ㆍ병전(兵典)ㆍ형전(刑典)ㆍ공전(工典)이다.
[주D-013]오사(五事) : 수령오사(守令五事)의 준말로, 수령이 힘써야 할 다섯 가지 일. 고려 우왕(禑王) 원년(1375)에는 전야가 넓어지고〔田野闢〕, 호구가 늘고〔戶口增〕, 부역이 고르게 되고〔賦役均〕, 사송이 간편하고〔詞訟簡〕, 도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盗賊息〕 등 다섯 가지 일로써 수령을 고적(考績)하였으며, 창왕(昌王) 원년(1388)에는 조준(趙浚)의 상소로, 도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盗賊息〕 대신 ‘학교를 일으키는 것〔學校興〕’으로 바꾼 오사(五事)로 주군(州郡)을 순찰하였다. 《高麗史 卷75 志29 選擧3》 《星湖僿說 人事門 七事》
[주D-014]칠사(七事) : 수령칠사(守令七事)의 준말로, 수령이 자기 고을을 다스리는 데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일. 농상(農桑)이 진흥되고〔農桑興〕, 호구가 늘고〔戶口增〕, 학교가 일어나고〔學校興〕, 군정이 잘 되고〔軍政修〕, 부역이 고르게 되고〔賦役均〕, 사송이 간편하고〔詞訟簡〕, 간활(奸滑)이 없어지게 하는 것〔奸滑息〕 등 일곱 가지. 《經國大典 吏典 考課》 《星湖僿說 人事門 七事》
[주D-015]부염(傅琰) : 남제(南齊) 사람으로 자는 계규(季珪)이다. 유송(劉宋)에 벼슬하여 무강(武康)ㆍ산음(山陰) 두 고을의 현령이 되어 부성(傅聖)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뒤에 익주 자사(益州刺史)ㆍ행형주사(行荊州事) 등을 지냈다. 그의 저서 《이현보(理縣譜)》는 원래 《치현보(治縣譜)》였는데, 당 고종(唐高宗)의 이름인 치(治)를 피해 이(理)로 고쳤다 한다. 《南齊書 卷53 良政 傅琰》 《南史 卷70 循吏列傳 傅琰》
[주D-016]유이(劉彝) : 송(宋)나라 복주(福州) 사람으로, 자(字)는 집중(集中)이다. 구산령(朐山令)을 지냈는데, 문서를 닦고,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고, 못을 만들고, 곡식 심는 것을 가르치고, 부역을 고르게 하고, 간활(奸滑)을 억제하는 등, 무릇 백성에게 은혜로운 일은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이 그 일을 기록하여 《치범(治範)》이라 하였다. 뒤에 건주지사(虔州知事) 등을 지냈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저서로는 《칠경중의(七經中義)》ㆍ《명선집(明善集)》ㆍ《거양집(居陽集)》이 있다. 《宋史 卷334 劉彛列傳》
[주D-017]왕소(王素) : 송(宋)나라 사람으로 왕단(王旦)의 아들이며 자(字)는 중의(仲儀), 시호는 의민(懿敏)이다. 악주(鄂州)ㆍ정주(定州)의 지사(知事)를 지내고, 성도부(成都府)의 지사를 지냈는데 치적이 있었다. 그는 정사를 하되 인정에 맞게 하기를 힘썼다. 촉(蜀) 땅 사람이 그 조목을 모아서 《왕공이단(王公異斷)》이라 하였다. 뒤에 공부 상서(工部尙書)에 이르렀다. 《宋史 卷320 王素列傳》
[주D-018]장영(張詠) : 송(宋)나라 복주(濮州) 인성(鄄城)사람으로, 자는 복지(復之), 호는 괴애(乖崖),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익주(益州)ㆍ항주(杭州) 등에 지주사(知州事)로 나가 치적이 있었고, 내직으로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ㆍ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宋史 卷293 張詠列傳》
[주D-019]진덕수(眞德秀) : 송(宋)나라 사람으로, 자는 경원(景元), 뒤에 경희(景希)로 고쳤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벼슬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그의 학문은 주자(朱子)를 종주로 삼았다. 저서에는 《대학연의(大學衍義)》ㆍ《당서고의(唐書考疑)》ㆍ《독서기(讀書記)》ㆍ《문장정종(文章正宗)》ㆍ《서산갑을고(西山甲乙藁)》ㆍ《서산문집(西山文集)》ㆍ《사서집편(四書集編)》 등이 있다. 《宋史 卷437 儒林列傳 眞德秀》 《宋元學案 卷81》
[주D-020]호태초(胡太初) : 송 신종(宋神宗) 때 사람으로, 벼슬은 처주수(處州守)를 지냈다. 저서에 《주렴서론(晝簾緖論)》이 있는데, 벼슬살이하는 도리를 논차(論次)한 것이다. 《四庫提要 史 職官類》
[주D-021]정한봉(鄭漢奉) : 명 의종(明毅宗) 때 사람으로, 이름은 선(瑄), 자가 한봉(漢奉)이다. 벼슬은 응천순무(應天巡撫)를 지냈다. 저서에 《작비암일찬(昨非菴日纂)》이 있는데, 1ㆍ2ㆍ3집(集)으로서 총 20류(類)로 나뉘었다. 〈환택편(宦澤篇)〉은 곧 《작비암일찬》의 편명이다. 《四庫提要 子部 雜家類》 정약용은 《작비암일찬》의 내용을 《목민심서》에서 ‘정선왈(鄭瑄曰)’ㆍ‘정한봉왈(鄭漢奉曰)’로 인용하였고,출전을 밝히지 않고 사례로 인용한 것도 많다.
[주D-022]당저(當宁) : 그 당시의 임금. 여기서는 순조(純祖)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