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 임창순 흠흠신서 / 일표이서

2016. 2. 21. 18:33다산의 향기



       해제 / 임창순 흠흠신서 / 일표이서

2014.06.0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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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흠신서 30권은 다산 정약용의 편저(編著)로 그의 목민심서와 함께 정법(政法) 관계의 2대 지주를 이룬 쌍벽의 책이다.

본서가 형정(刑政)에 관한 문제를 다룬 것인데 법률에 대한 문외한인 내가 그 해제를 시험함은 외람된 감이 없지 않으나 평소 선생의 유저(遺著) 전체에 대하여 섭렵한 나머지 후학으로서의 경모(敬慕) 또한 남에게 뒤지지 않는 바 있어 다만 그 내용을 소개하는 정도의 성질인 본고(本稿)의 정(情)을 사양하지 않았을 뿐이다.


   다산선생 일생의 편저는 그야말로 한우충동(汗牛充棟)의 대량이나 본서와 목민심서는 곧 지방행정의 책(責)을 지닌 실무자의 실용적 가치에서 일찍 여러 사람의 손에 의하여 사본이 성행되었고 인쇄된 것으로는 대한 말기 고종(高宗) 광무(光武) 5년(1991) 경성 광문사(廣文社)에서 간행된 것이 단행분으로 유일한 것이고 뒤에 1937년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한 선생의 전집(全集)인 여유당전서 중 제5집 제30권에서 39권까지 총 5책 중에 수록되었다.


  그의 자서에 의하면 그가 먼저 지방행정을 논한 목민심서에서 지방관으로서 집행해야할 범백(凡百) 직무에 대하여 유루(遺漏)없이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였지만 특히 형정에 관한 것은 인명의 생살(生殺)을 다루는 막중한 일이므로 이에 관한 전문서를 따로 편찬할 필요를 느끼어 별도로 본서를 만들었다 하였고 저작 연대가 목민심서는 순조 21년(1821)이고 본서는 동 22년인즉 본서도 심서와 함꼐 자료를 수집하였다가 심서가 탈고되는대로 곧 본서를 정리 완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조시대의 형법을 다루는 기본서는 경국대전의 형전(刑典)이 그 바탕이지만 실무적인 면에서는 중국 명조(明朝) 태조(太朝) 홍무(洪武) 30년(1396)에 제정한 대명률(大明律)이 지침서로 사용되었다. 대명률은 전서(全書)가 7개 부분에 420조에 달하는 비교적 상세한 법률서인 바 이조(李朝)에서는 초기에 이를 우리말[吏讀]로 번역하여 실무자의 편의에 공(供)하였고, 이밖에도 역시 명조에서 편선(編選)한 무원록(無寃錄-인명(人命)관계의 검증, 수사에 관한 실제적 방법을 기술한 책)이 살인사건을 다루는데 있어 실무교과서가 되었고 이밖에 선조(宣朝) 때에 된 사송유취(詞訟類聚), 청송지남(聽訟指南), 정조(正祖) 때에 된 흠휼전칙(欽恤典則) 등이 있었다. 그러나 재래의 이선 행정을 맡은 관리들이 대개 시구(詩句)나 공부하던 선비가 아니면 활이나 쏘던 무부(武夫)이므로 일선 행정에도 몽매한데 더구나 과학적 치밀한 연구와 기술을 아울러 요하는 수사(搜査) 사무와 소송 처결(處決)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으랴? 이에 대하여 다산은 서문에서 '士大夫 童習白紛 唯在詩賦雜藝 一朝司牧 芒然不知所以措手 寧任之奸胥 而弗敢知焉 彼崇貨賤義 惡能咸中'이라 하여 형률(刑律) 관계에 무식한 지방관이 오직 아전들이 하는대로만 듣게 되기 때문에 협잡과 수뢰를 일삼는 아전들의 손에서 중대한 사건이 억울하게 처리되는 예가 많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들고 그 판결 내용에 대하여도 예리한 판단을 시도하여 독자의 참고에 이바지할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서명 흠흠신서는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欽哉欽哉 惟刑之恤哉(삼가하라. 삼가하라. 오직 형률을 삼가히 다루라)에서 취한 것이다.


  이제 그 목록을 보면

  경사요의(經史要義) 3권

  비상전초(批詳雋抄) 5권

  의율차례(擬律差例) 4권

  상형추의(祥形追議) 15권

  전발지사(剪跋蕪詞) 3권

으로 되어 있다. 각항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시험키로 한다.

 

  1. 경사요의(經史要義)

  기본경전 중에서 형률에 해당한 조항만을 발췌한 것이네 각항에 분류하여 생호흠휼지의(眚怙欽恤之義), 사청의지의(辭聽衣之義) 등 13항목으로 나누고 경전(經典)은 서경(書經), 주례(周禮), 좌전(左傳), 공양전(公羊傳), 예기(禮記), 주역(周易), 맹자(孟子) 등 7종의 것을 제1권에 수록하였다. 이것은 경학자(經學者) 다산으로서의 면목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제2~3권에서는 아국 및 중국 고사(故事) 가운데서 소송문제에 관한 것을 추려서 이를 또 사건별로 분류하여 무복(誣服-허위자백), 죄인 판별, 복수(아버지의 원수, 어머니의 원수, 남편의 원수, 형제의 원수 등을 갚는 것), 존속(尊屬) 살해, 비속(卑屬) 살해, 독살 등 수십항으로 분류했는데 여기서는 그 수사 방법과 판결 과정을 아울러 서술하고 이에 대한 선인들의 비평과 자기의 견해를 부기하였다.

  이것은 물론 법률상 전문지식에 속한 문헌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취미진진(趣味津津)하게 소설을 읽기보다 오히려 더 재미있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글이다. 지면 관계로 그 중의 1, 2항이라도 소개하지 못함은 유감이다.

 

  2. 비상전초(批詳雋抄)

   다음 제4권에서 8권까지의 5권은 비상전초(批詳雋抄)다. 비(批)는 상사(上司)의 비판(批判) 즉 판결문이고, 상(詳)은 신상(申詳)의 약(略)인데 신상이란 하급관청에서 상사에 보고하는 문서로 우리나라에서 본래에 '첩보(牒報'라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청조(淸朝)의 공안(公案-판례(判例))에서 발췌한 것인데 처음에는 청조(淸朝) 신료들의 법률에 대한 건의 및 민간에 포고한 고시문(告示文) 등 10여종을 먼저 게재하여 총론의 성격을 가지도록 하였고, 그 다음에 모제가늑사상박(毛際可勒死詳駁) 이하 백여항을 실었다. 중국에서 쓰이는 법률용어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그 의의를 몰라 그것을 읽을 줄 조차 몰랐었으므로 중국에서 시행하는 법조도 이를 적용하지 못하였으니 예를 들면 '도뢰(圖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범죄사실을 강경 부인하려는 것이며, 또는 어떠한 남의 범죄행위를 이용하여 사기 협잡을 기도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다산은 '圖賴者 挾屍刁惡之名 東語賴曰臆持 自賴曰生臆持 圖賴曰謀臆持'라 하여 원어를 풀이하고 국어(國語)로서 그 대용어(代用語)를 제시하고 '大明律有圖賴反坐지法 東人不知爲何罪 故不能照本律也'라 하여 대명률에까지 명시되어있는 조문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의의를 모르기 때문에 원률(原律)을 적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러한 예로 각 문서에 대하여 그 어의를 일일히 해석하고 또 이를 우리말로 쓰는 용어를 대조 설명하였으므로 이것은 일종의 주석서 또는 사전적 구실을 겸할 수 있는 책이다.

 

  3. 의율차례(擬律差例)

   제9~12권 의률차례에서는 살인 사건에 대하여 수종지분(首從-주범(主犯), 종범(從犯)), 자타(自他-자살(自殺), 타살(他殺)), 상병(傷病-상해치사(傷害致死)), 고오(故誤-고살(故殺), 오살(誤殺) 지분(之分) 등을 위시하여 백여항에 달하는 판례를 중국 공안(公案)에서 적출(摘出)하였는데, 주로 청조의 건륭(乾隆), 가경(嘉慶) 연간(年間)의 사실을 뽑은 것이다.

 

  4. 상형추의(祥形追議)

    제13~27권은 상형추의이다. 상형(祥形)이란 말은 서경(書經) 여형편(呂刑篇)에 '고이상형(告爾祥刑)' 에서 나온 것인데 상(祥)은 상(詳)과 통용되어 형(刑)을 상밀(詳密)히 다루어야한다는 뜻이다.

  다산은 상형추의의 서언에서 '정종대왕(正宗大王) 25년에 사관들이 왕이 직접 결재한 판결문 중 수백조를 뽑아 상형고(祥刑考) 100권을 편찬할 때에 규장각에 있으면서 그 교열(校閱)의 역(役)을 보았으나, 귀양살이로 떠난 이후 다시 고열(考閱)할 길이 없었는데, 근래에 어떤 사람이 그 상형고 중에서 판결문 수백조를 초록(抄錄)해 온 것을 보니 감구지루(感舊之淚)를 금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것을 다시 종류별로 정리하여 의옥(疑獄)을 처리하는 자의 참고가 되도록 편찬한다'고 한 것을 보아 이 편은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사례만을 뽑아서 분류 수록하고 이에 대한 저자의 안설(按說-사견(私見))을 첨부한 것이다.


   총 15권으로 그 분류는 본서의 반을 차지한다. 본항에서도 그 분류는 비상전초에서와 마찬가지로 수종지별(首從之別) 21조, 자타지분(自他之分) 23조, 상병지변(傷病之辨) 13조, 고오지벽(故誤之劈) 7조 외 10항 52조로 모두 14항 116조에 달한다. 이것은 모두 어판(御判), 곧 왕의 친결(親決)에 속한 것이니 현행법으로 보면 대법원 판결에 해당하는 것으로 가장 중대한 사건을 다룬 문제만을 뽑은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판례의 집성서(集成書)이며 전문(全文)을 읽어보면 초검(初檢)과 복검(覆檢)에서와 순영(巡營)으로 올라가는 도중 그 법률 해석의 차이와 사건 실정 파악의 기술적인 착오에 인한 판결의 번복 등을 볼 수 있는 바, 이조시대의 이 방면 연구는 물론 전통과 관습을 조사하는 자료로서도 큰 의의를 가진다. 현대 법학자들이 관습법을 연구하는 자료로서도 그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할 것이다.

 

  5. 전발지사(剪跋蕪詞)

   제28~30권은 전발무사다. 본항은 다산이 곡산(谷山) 부사(府使)로 있을 때 직접 옥사(獄事)를 다룬 보고문과 형조 참의로 들어가서 다룬 중요한 판례 유항(類項)과 그가 전라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그곳에 견문한 옥사에 대하여 자작(自作)한 모의 판결문 몇 항을 합하여 도합 18조의 자작 판결문을 수록한 것이다.

  법리론적인 변석(辨석)과 풍부한 법의학적인 검증에 의한 판단을 유려한 문장으로 명석 예리한 필치로 기록한 것은 사계(斯界)의 모범이 되기에 넉넉하다. 다산은 앞서 비상전초에서 말하기를 '중국사람들은 비록 법률에 관한 판결문이라 할지라도 그 문장이 전아 유려하여 사륙문식(四六文式)의 미문(美文)으로 명백주밀(明白周密)하게 엮어나가 읽는 사람이 내용 뿐만 아니고 그 문장 자체에도 크게 고무됨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방면에 교양이 없음으로 소위 제사(題辭)라는 것이 비리지리(鄙俚支離)하여 볼 수가 없다'고 개탄한 바 있다. 이 전발무사는 이에 대한 시범으로 말미에 첨가시킨 것이다.

 

   끝으로 강진현(康津縣)에서 일어난 정씨(鄭氏) 여인의 자살 사건에 대한 다산의 모의 판결문 1조를 들어 참고에 공(供)하고자 한다.

  고금도(古今島) 정사룡(鄭士龍)의 매(妹) 정여인은 완도(莞道)로 출가했다가 그의 남편이 비명으로 억울하게 죽고 유복녀(遺腹女) 하나만을 두었다. 정여인은 나이 24인데 남편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통한하고 그의 일점 혈육이나마 잘 양육하여 남편의 뒤를 잇겠다고 생각하여 단호히 개가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있었다.


  이때 고금도의 진(鎭)의 군교(軍校)인 김상운(金尙雲)이란 자가 나이 45세인데 아들을 두지 못하여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하는 차에 마침 정과부의 소문을 듣고 처음엔 이진백(李辰白)이란 자를 시켜 정식으로 중매를 통(通)하였으나 정씨에게 거절을 당하게되자 다시 이계개(李啓介)를 시켜 오치군(吳致軍)에게 뇌물을 주어 그의 개심(改心)을 종용하도록 청한즉 치군은 '정씨의 지절(志節)은 아무의 힘으로도 돌릴 수 없으니 단념하라'하고 애당초 뇌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상운은 백방으로 수단을 써서 정씨의 마음을 돌려보려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최후의 용기를 낸 상운은 진촌(鎭村)에서 정씨와 같은 부락인 이계행(李啓行)의 집에 가서 자다가 밤에 정씨의 집에 뛰어들어 정씨를 강간하려 하였으나 정여인이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자 그의 오라비인 정사룡 등이 쫓아나와 김상운을 붙잡아 구타하여 돌려보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봉변을 당한 김상운은 계행의 집에 돌아와서 같은 진(鎭)의 군교(軍校)인 김맹갑(金孟甲), 방백령(房百齡) 등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들로 하여금 정씨에게 위협을 가하여 달라한즉 맹갑 등은 자기들은 일이 있어 갈 수 없다 하므로 마침내 이인철(李仁哲)을 시켜서 첨사(僉使)에게 정씨를 무고하여 허위 보고를 올렸다. 첨사는 실정을 조사하지도 않고 엄중한 제사를 내리어 정씨 남매를 체포하라 하고 진졸(鎭卒) 백득문(白得文)을 차사(差使)로 보내어 연행하게 하였다. 백득문은 허리에 붉은 줄[捕繩]을 차고 김상운에게 가서 서로 모의한 끝에 바로 정씨의 집으로 달려가서 백방으로 위협과 공갈을 자행하며 정씨를 포박하려 하였다.


  정씨는 자기가 아무 죄도 없는 이상 묶여가본댔자 아무 일도 없을 터이지만 한번 진(鎭)에 들어가는 날이면 결국 자기의 정조를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단정하고 살아서 당하기 보다는 차라리 깨끗이 죽고 말겠다고 생각한 끝에 빙에 들어가서 해모(海茅)줄로 목을 졸라서 벽에 기대앉은 채로 죽었다. 백득문 등은 그가 오랫동안 나오지 아니하므로 문을 부시고 들어가 본즉 벌써 절명된 뒤였다. 이에 대하여 정사룔이 본현(本縣)에 고발하였다.


  상기 사실에 대하여 다산이 자술한 발사(跋詞-기소장(起訴狀))을 대강 요약하여 다음에 소개한다(원문이 너무 세밀하고 장문이므로 이를 다 역재(譯載)하지 못한다).

  '본건은 원고 정사룡의 진술이 명백할 뿐만 아니라 검시 결과에 나타난 것이 조금도 자액(自縊)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은 즉 자살이라는 점에는 다시 논의할 바가 못된다. 그러나 자살이기 때문에 범인이 없다고 한다면 이 사건의 장본인인 김상운을 처죄(處罪)할 길이 없다. 정산녀(鄭酸女)의 수절을 각오한 지조는 그의 여러번 시험한 바로서 충분히 인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회유, 증뢰(贈賂), 강간 미수 등 갖은 만행을 다하고 미수에 그치게 되자 스스로 후회하고 개심하여도 죄를 용서받지 못할 터인데 그에서 그치지 않고 도리어 그의 관권을 남용하여 동료를 교사하여 협박 공갈을 감행하므로 마침내 정씨로 하여금 자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대명률 위핍인치사조(威逼人致死條)에 '강간에 의하여 부녀자를 위협하여 사망하게 한 자는 이를 인간위핌(因姦威逼)이라 한다'하였으니 본건은 정씨 자살의 직접 원인은 백득문에 있다 할지라도 위협의 발단은 김상운인즉 김이 주범이요 백을 종범으로 다룰 것이며 김맹갑, 방백령, 이인철, 이진백, 이계행 등도 본건을 방조한 증거가 역력하므로 공범으로 기소하며 각인이 심문서 검시장을 첨부한다.'


  이상은 원문의 사분의 일레 불과한 요역(要譯)이다. 그러나 당시의 법률 취급에 있어 살인범에 대하여 정범과 피고라는 두 종류의 술어(述語)밖에 없는데 일반적인 해석이 범(犯)이라고 하면 직접 하수자(下手者)를 의미하며 교사범에 대한 취급은 매우 가벼웠던 것이므로 그 비합리성을 다산이 논단(論斷)한 것이다.

 

  결론

  흠흠신서는 (1) 이조시대의 법 취급에 관한 실제적 지식과 (2) 이조사회의 실정을 형법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으며 (3) 중국법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적용되었는가, 또는 상호의 차이점은 무엇이었는가 (4) 법률 용어에 대한 정확한 주석을 가하였으므로 그 의의의 파악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점 등을 얻을 수 있음은 물론, 본래의 관습법 법의학의 참고 등에 크게 이바지 될 것이므로 이조 법제사 자료 및 사회사 자료로서의 본서의 가치는 극히 크다 할 것이다.(시일 관계로 보조자료, 방계서적에 대한 제시를 소홀히 하였음을 유감으로 여긴다.)


[출처] 해제 / 임창순|작성자 새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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