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19. 16:06ㆍ차 이야기
일본薄茶 - 裏天家 中置薄茶手前
일본 다도종가 중 그 뿌리가 가장 깊고 서구 다인들의 대표적 교육장으로 유명한
이천가(裏千家)의 연한 가루차(薄茶) 시연으로, 이천가의 창시자 천리휴(天利休)는
백제계 왕족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일본에서 다조(茶祖)로 추앙받는 사람으로,
임진왜란 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사범으로 이름을 떨친 분입니다.
豊臣秀吉의 조선침략을 끝내 반대하다가 히데요시의 암시적인 명령에 의해
자결한 분으로, 우리가 필히 기억하고 있어야 할 다도 명인입니다.
이 다도 宗長인 센 리큐(天利休)가 죽은 후에 방계 가족이나 제자들이 다른 다도종가를
따로 만들어서 이들이 현재에도 일본 다도종가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라센께가(裏千家)는 센 리큐 사후에 리큐의 소생이 아닌 둘째부인이 데리고 들어 온
양아들 "소안(小庵)"이 나은 세 손자들에 의해 三千家(샨센께)가 형성되는 데, 그 중 셋째 손자가
가업을 이은 것을 裏千家라고 하고, 현대적인 경영 마인드와 활발한 해외교류활동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참고로 첫째 손자는 오모테 센케(表千家), 둘째 손자는
무사노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를 만들어 할아버지 센리큐의 가업을 이었다.
첫째 부인이 나은 장남 "도완"은 석주류(石州流 :세끼소류)를 창시하여, 아버지인
센리큐의 초암다도의 정통성을 이었는 데, 이 세끼소류의 작법의 특징은 일체의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단순하고 간소함을 앞세우는 검박한 초암다법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이 초암다법은 조선조 세조 제위시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금오산에 초암을 짓고 은거하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선생님이 당시 초암에 들린 울산왜관에 주재하던 일본승려를
통하여 일본에 전수시킨 다법이다. 금오산의 초암에는 방바닥에 화로 깊이 만큼 파내고 화로를
설치하여 차를 달여 마시곤 하였다는 사실과 일본승을 시제(詩題)로 쓴 시문(詩文)들이
지금까지 전하여 진다.
센 리큐는 다도 뿐만 아니라 다식인 화과자, 일본의 정원문화, 초암다실이 포함된 건축문화,
일본 요리, 꽃꽃이, 분재.분경문화, 다실용 족자나 그림 등 일본의 전통문화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아니하여 일본에서 다조(茶祖)로 추앙받고 있는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동영상 아래에 첨부한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래 동영상에 나오는 센 리큐의 후손의 얼굴을 잘 살펴 보시고
백제인(부여족<< 예맥족) 지배층 특유의 권위와 진중함을 느끼실
수 있으시다면 여러분의 눈도 밝아져 있는 것이 됩니다.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초상화
천리휴(센 리큐)의 초상
풍신수길의 오사카성 천수각
천수각에 접근하는 구불구불한 길 - 침입 암살자나 군대 방어 목적
천수각의 석축 - 이렇도록 풍신수길은 방어용 석축까지 견고히 쌓아 놓았지만
결국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동래 대룡마을의 양부하(梁敷河 : 명나라 사신 沈維敬과 모의 하에 )
에게 독살된다.
오사카성의 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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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 차의 역사
2) 중요 인물 중심의 약사(略史) - 센리큐(千利休, 천리휴, 1522~1592)
- 모모야마시대 사카이의 상인 집안 출신.
- 와비차의 경지를 구현, 집대성. 일본의 다성(茶聖).
- 차선일미(茶禪一味) 형식보다 차를 배우고 행하는 이의 마음을 더 중요시
두드러지지 않으면서 소박한 차 도구와의 조화
-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갈등으로 센리큐는 할복자살
→ 이후 자손들이 세 유파를 형성 오모테센케(表千家, 표천가)
우라센케(裏千家, 리천가) 무샤노코지센케(武子小路千家, 무자소로천가)
* 리큐와 이도다완(井戶茶碗, 정호다완) 리큐 이전은 대체 당물 중심의 다회였고
송나라의 천목다완(天目茶碗)이 다인의 비장품이었다. 그러나 주코 이후 ‘와비차가’
지향되었고 센리큐는 조선 찻사발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낸다. 이후 ‘이도다완’,
즉 조선의 분청사기는 다기의 극상품으로 인식된다.
一. 일본 차의 역사
1. 일본 차의 기원
2. 중요 인물 중심의 약사(略史)
二. 차의 종류
三. 다회의 양식
1. 건물 양식
2. 가구와 다구
3. 양식과 순서
4. 다회 양식의 근본 정신
五. 일본차의 현재모습
1. 차 문화 보호
2. 차 생산 동향
3. 차 소비량
4. 우리와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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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건집 교수의 연표로 보는 차문화사
32. 조선시대 ⑦
<한국>
조선시대
1506 중종반정(中宗反正)
1509 보우대사(普雨大師) 출생 ①
일본 사신 다례(동평관에서)
@회강다례(會講茶禮) ②
1511 유생들의 음다(飮茶) 주장 ③
1513 감찰방에서 다시(茶時)
1516 사찰 노비를 속공(屬公)시킴
1518 <속동문선>(신용개)
1520 서산대사(西山大師) 출생 ④
1521 일본사신 내조(22, 23년 등 매년)
1524 전라도 양전(量田)을 마침
1525 중궁전의 다완을 만듦 ⑤
봉선전 다례
<중국>
명대
@전춘년(錢椿年)의 활동 ⑥
1509 육수성(陸樹聲)의 출생 ⑦
@ 서헌충의 활동 ⑧
1518 이시진(李時珍)의 출생 ⑨
1521 서위(徐渭)의 출생 ⑩
1526 왕세정(王世貞)의 출생 ⑪
<일본>
@ 예아미(藝阿彌) 상아미(相阿彌)의 사원다례법 제정 ⑫
시옥종장(柴屋宗長)의 차심기 노래
1522 천리휴(千利休, 센리큐)의 출생 ⑬
왕가에서는 거의 모든 의례에 차가 빠지지 않았으니 세자궁의 회강다례도 그 한 예이다. 다기는 도자 외에 고급 은제 다기를 사용했다. 이런 풍조는 관원과 선비들에게도 불어와, 유생들이 모여 강론을 한 다음에 차를 마시자고 했을 정도다. 사사(寺社) 혁파운동은 계속되었으나 이 때에도 선승들의 차 생활은 이어졌고 뒷날 선문(禪門)을 빛낸 고승 차인들도 탄생했다.
을묘사화가 일어나 큰 소용돌이가 쳐서 많은 인적자원이 손실됐고 개혁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문적(文籍)이나 문화적 기록들을 정비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각 지방의 토지 이용 현황과 거기서 생산되는 산물의 종류나 생산량을파악하려 애썼다.
일본과의 교류는 잦아졌고, 그들은 우리 문화에 관한 것을 배우고 경서, 서책 등을 얻어갔다. 이때 일본 다도의 큰 인물인 천리휴가 태어났으니, 그는 현재 일본 다도의 기틀을 확립한 천가(千家)의 시원이 된다.
중국은 선비 중에 많은 차 마니아들이 속출하여 차 생활을 즐겼고, 또 저술을 남겨 차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① 보우대사(1509~1565): 조선 명종 때 문정왕후의 추천으로 봉은사 주지가 되어 선종사찰로 지정했다. 후에 제주도에 유배되었으며 많은 다시를 남겼다.
② 회양다례: 한 달에 두세 차례 왕세자가 스승과 빈객들을 모아 강론하고 난 후 행하던 다례.
③ 유생들의 강론이 끝나면 차를 마시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한 주장.
④ 서산대사(1520~?): 법호는 청허(淸虛), 법휘는 서산(西山),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승과에 급제하여 교종선종판사가 됐고 봉은사 주지를 지냈다. 임란 때 승군을 이끌었고 다시 여러 편을 남겼다. ‘달그림자 밝으며 시냇물 길어 차 달이는 연기 하늘 가르네’라는 구절이 유명하다.
⑤ 중궁전의 다완과 세자궁의 밥주발을 은으로 만들도록 상의원(常衣院)에 일렀다.
⑥ 전춘년: 명대 문인으로 옛것을 널리 좋아하고 차를 즐겼다. 특히 찻일을 정치하게 알아서 <다보(茶譜)>를 찬술했다.
⑦ 육수성(1509~1605): 명대 사람으로 호를 평천(平泉)이라 했다. 예부상서를 지냈고 <다료기(茶寮記)>를 찬술하여 인품(人品), 품천(品泉), 팽점(烹點) 등 일곱 가지 지켜야 할 것을 지적했다.
⑧ 서헌충: 명대인으로 오흥에서 벼슬살이를 했다. 수천 두 권에 37군데 물에 관한 품평와 차 끓이는 일을 적었다.
⑨ 이시진(1518~1593): 명대 세업의약인으로 참주 사람이다. 본초강목을 짓고 거기에 차에 관한 것을 쓴 것을 보면 조예가 일반인을 능가했음을 알 수 있다.
⑩ 서위(1521~1593): 명대 문인으로 호를 천지산인이라 했다. 시문화서에 모두 능해 많은 저술을 남겼으니 <다경> 한 권도 있다.
⑪ 왕세정(1526~1590): 명대 문인으로 형부상서를 지냈으며 차를 즐겨 차에 관한 사를 짓기도 했다.
⑫ 예아미와 상아미가 동산어물(東山御物)의 정리 및 서원(書院)의 장식과 점다법 등을 만들어 ‘동산류(東山流)’가 형성되었다.
⑬ 천리휴(1522~1591): 항구 사까이의 생선가게 아들. 능아미의 제자에게 서원식 차를 배우다가 무야소구(武野紹鷗)에게 15년 동안 사사하고 대덕사에서 성을 천(千)으로 바꾼다. 58살에 고려 직전신장(織田信長)의 다두(茶頭)가 되고 후에 풍신수길의 다두가 된다. 그의 기본은 초암차였으며 고려 다완을 아주 좋아했다. 후에 풍신수길은 역모가 있다며 그를 죽였다.
센 리큐 일대기(요약)
센 리큐 [千利休(천리휴), 1522~1591]
처음에는 다도(茶道)를 기타무키 도친[北向道陳] 에게서 배웠으나 곧 다케노 조오[武野紹鷗]에게 사사하였다. 리큐는 교토[京都]의 다이토쿠지[大德寺]에서 선(禪)을 배웠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봉사하며 다도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60세 경부터 새로운 각도로 연구하여 다사(茶事) 개혁에 전념하여 그가 좋아하는 취향이 천하에 풍미하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의 문하에 들어왔다.
1585년에는 천황 앞에서 다회(茶會)를 시연, 이로 인해 리큐[利休]라는 이름을 천황으로부터 받았다. 1587년에는 히데요시[秀吉]의 신임을 한몸에 받아 위세가 절정에 달하여 일본의 모든 다기(茶器)와 다도(茶道)의 평가는 센 리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1591년 히데요시와 충돌하여 결국 처벌을 받아 할복하였다
센 리큐(千利休)
태어난 때 | 1522 |
---|---|
태어난 곳 | 사카이[堺] |
죽은 때 | 1591. 2. 28 |
죽은 곳 | 사카이. |
소속 국가 | 일본 |
직업 | 다인(茶人) |
일본의 센고쿠[戰國],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 다도(茶道)의 대성자.
할아버지인 다나카 센나미[田中千阿彌]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도보[同朋 : 쇼군이나 다이묘의 측근에서 예능이나 다도에 종사했던 사람]직에 근무했고, 아버지 대에 이즈미 구니[和泉國]의 사카이로 이주하여 물고기 도매상이 되었으며, 가명(家名)을 센나미에서 한 자를 따 센[千]이라고 했다.
리큐는 처음에 다도를 노아미류[能阿彌流]의 기타무키 도친[北向道陳]에게 배웠으나, 곧 무라타 주코[村田珠光]의 제자의 제자인 다케노 조오[武野紹鷗]에게 사사했다. 교토[京都]의 다이토쿠 사[大德寺]에서 선(禪)도 배웠다. 리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봉사하며 다도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으며 히데요시에게서는 봉토를 받았다. 항상 히데요시의 측근에서 차에 관한 모든 일을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와 외교에도 참여하여 은연중 권세를 누렸다. 60세경부터 새로운 각도로 연구하여 다사(茶事) 개혁에 전념하여 그가 좋아하는 취향이 천하에 풍미하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의 문하에 들어왔다. 그러나 1591년 히데요시와 충돌하게 되어 결국 처벌을 받아 할복했다. 자신의 목상(木像)을 절에 안치했다는 것과 자작한 차도구가 비싼 값에 팔린 것이 처벌의 구실이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그는 기골이 있는 순수한 예술가이고 해학성이 풍부한 인물이라고 평가된다. 그는 주코 파 다도의 깊은 뜻을 연구했으며, 새 시대에 맞는 다도의 취향을 개발하고 다도의 이론도 대성했다. 리큐는 주인과 손님의 마음이 일체가 되어 다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다도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다도는 원래 부처에 봉사하는 승려의 업(業)을 속인이 모방한 것이기 때문에 주인이나 손님이 다같이 성의를 다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며, 또 부처의 은혜는 만인에 평등하게 베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다도에는 부귀비천(富貴卑賤)의 차별이 없고 모두 인간으로서 평등하다고 했다. 다도를 통해 인간생활의 진정한 가치를 느끼고 화목의 묘미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그가 확립한 다도의 이념이었다.
천리휴와 그 아들의 일화
일본 전통 다도(茶道)의 대가 센노리큐(천리휴)는 아들 쇼안이 아침 일찍 정원을 쓸고 닦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구석구석 쓸기를 마친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마당을 흘낏 쳐다보고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다시 쓸도록 하였습니다. 한참을 지나 땀을 닦으며 아들이 다시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버지는 고개를 흔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들이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쓸 곳이 없습니다. 계단도 정성스레 걸레질 하였고 화분과 이끼까지도 깨끗이 손질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마당 쓸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시는지요?” “어리석구나” 아버지는 꾸짖으시며 마당으로 내려섰습니다. 그리고는 벚꽃나무를 몇 번 흔들어댔습니다. 깨끗한 마당 위로 벚꽃이 소소히 흩어져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마당은 이렇게 쓰는 것 이니라” -08년 5월, 기독교전북방송 가급적 떨어진 꽃잎과 낙엽은 그대로 두고 정원 청소를 했을 저는, 자신이 신앙 지도자라고 여기고 대중들에게도 추앙되는 분들을
4-6월은 현실에서나 역사에서나 이래저래 ‘꽃잎’이 많이 지는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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裏千家
裏千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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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姓 | 称・清和源氏義国流 |
家祖 | 千利休 |
種別 | 地下人(茶道家) 平民 |
出身地 | 河内国堺 |
主な根拠地 | 山城国 加賀国 京都府 |
著名な人物 | 千利休 一燈宗室(8代) 精中宗室(11代) 直叟玄室(12代) 鉄中宗室(13代) 玄黙宗室(16代) |
凡例 / Category:日本の氏族 |
裏千家(うらせんけ)は、茶道流派の一つ。「裏千家」の語は、家元とその家族らで構成される宗家を指すことも、「一般財団法人今日庵」などの法人組織を指すことも、弟子・門下生を含む流派組織を指すこともある。茶道諸流派中最大の流派である。
裏千家の名称は、千利休からの家督を継いだ本家の表千家(不審菴)に対し、今日庵が通りからみて裏にある意。宗家は京都市上京区小川寺之内上ルにあり、表千家宗家と隣接している。その茶室・今日庵(こんにちあん)は裏千家の代名詞でもある。なお、今日庵の由来は、宗旦が亭主をつとめた茶席に遅れた清巌和尚に、所用があるとして留守にした宗旦が明日の来席を請うた際に残した清巌和尚の「懈怠比丘不期明日」の書き付けから。「千家」といえば本来、本家の表千家のことであったが、裏千家の活躍もあり、近年になって分家である武者小路千家と併せて「三千家」というように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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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徴[編集]
三千家の点前作法は基本的によく似通っているが、心得が無くてもわかる比較的目立った違いをいくつか挙げる。
- 裏千家は薄茶をよく泡立てる。表千家、武者小路千家では泡をあまり立てない。
- 裏千家の茶筅は白竹のものである。表千家では煤竹を、武者小路千家では胡麻竹(染み竹)を用いる。
- 菓子器は裏千家が蓋なしのいわゆる鉢、表千家と武者小路千家は蓋付きのすなわち喰籠(ジキロ)を使う。
- 近年の話だが道具の箱の紐色が裏は深い緑、表が黄、武者小路が茶と紺である。
- 女性の袱紗(ふくさ)は表千家は朱無地だが裏千家は赤または朱無地のどちらか、男性は紫無地が主流である。
許状[編集]
「許状」は、稽古することを許可する趣旨の書面であり、実力認定の意味合いが強い「免状」「免許」「段位」などとは性格が異なる。裏千家ではさらに平成12年(2000年)から「許状」と対応した「資格」制度を設けている。これは従来「初伝」「中伝」などと称していたものを改定したもので、履歴書の資格欄に書いてわかりやすいようにという学習者の便宜を目的としたものである。資格は対応する許状を全て取得すると得られる。
許状 | 概要 | 資格 |
---|---|---|
入門 | 割稽古・盆略点からはじめて薄茶・濃茶の基本の点前や炭手前など、世間一般が茶道と聞いて思い浮かべるほとんど全てを含んでいる | 初級 |
小習 | 十六ヶ条の習い事と呼ばれるもので、特別な道具や状況に即した変化を学ぶことで茶道の基本を身につけることを目的としている | |
茶箱点 | 茶箱を用いた裏千家独自の点前であり許状である。従来は「欄外」に区分されていた | |
茶通箱 | 台子点前の準備段階として重要な道具の取り扱いを学ぶことを目的とした、いわゆる「四ヶ伝」 | 中級 |
唐物 | ||
台天目 | ||
盆点 | ||
和巾点 | 名物裂と中次を用いた古法で、裏千家独自の許状である。従来は「欄外」に区分されていた | |
行之行台子 | 台子点前の基礎で、いわゆる「乱れ」 | 上級 (助講師) |
大円草 | 大円盆を用いた裏千家独自の点前であり許状である | |
引次 | 行之行台子までの許状の取次をする許可 | |
真之行台子 | 台子を用いた、いわゆる「奥儀」 | 講師 |
大円真 | 大円盆と真台子で行う格外の奥秘であり、裏千家独自の許状である | |
正引次 | 真之行台子までの許状の取次をする許可 | |
茶名 | 利休以来の通字である「宗」を含んだ名前を名乗る許可であり、また正引次までの許状の取次ができる資格でもある | 専任講師 |
準教授 | 茶名までの許状の取次をする許可 | 助教授 |
歴史[編集]
成立から幕末まで[編集]
千家3代宗旦は、不審菴を三男江岑宗左に譲り、敷地内に新たに茶室を建てて隠居し、四男仙叟宗室と共に移り住んだ。このときの茶室は今日庵(一畳台目)、利休四畳半を再現した又隠、寒雲亭(八畳)であり、これらがすべて宗室に譲られたことにより裏千家が成立する。
4代仙叟宗室は慶安5年(1652年)に加賀前田家の当時すでに隠居であった前田利常に仕官し、百五十石と小松城三の丸の屋敷を与えられた。万治元年(1658年)に前田利常と元伯宗旦が相次いで没すると、裏千家の4代を継承し、寛文11年(1671年)に前田綱紀に茶頭として仕官して百五十石と金沢城下の味噌蔵町の屋敷を与えられた。以後、元禄元年(1688年)までは金沢と京都とを往復しながら精力的に活動し、元禄10年(1697年)に没した。
仙叟宗室の没後すぐに5代常叟宗室が加賀藩に仕官したが、ほどなく辞して伊予松山藩久松家に仕官する。以降、幕末に至るまで久松家に仕官しながら前田家とも交流を続けることになる。その後8代一燈宗室のときに徳島藩蜂須賀家にも出向いている。
8代又玄斎一燈は兄の表千家7代如心斎と共に千家の中興とされる。彼らは茶の湯が大衆化していく中で、新たな稽古の方法として七事式を制定するなどして千家の茶道を広めることに成功した。今日、三千家が茶道の代表格として語られるのは、流祖である千利休の高名だけでなく、この時期に広く各地の町人富裕層に普及したことも大きな要因となっている。
天明8年(1788年)正月晦日、京都で大火があり表裏両千家は完全に焼失している。このとき伝来の道具などは大徳寺に持ち出すことができたが、数々の茶室はすべて焼失してしまった。ほとんどは9代不見斎石翁によって翌年までに再建されている。
幕末・明治以後[編集]
11代玄々斎精中は10代認得斎柏叟の女婿として10歳のときに奥殿藩松平家から養子に入った人である。それまでの歴代が禅的消極的であったのに対し、茶道以外にも華道、香道、謡曲などに通じていて、茶箱点や立礼式の創始、和巾点の復興など、明朗で積極的な人であった。立礼式は明治5年(1872年)の博覧会に際して外国人を迎えるための創案であり、また同じ年に『茶道の源意』を著して茶道は遊芸とする風潮を批判するなど、幕末から明治の変動の時代に合わせた茶道の近代化の先駆として評価されている。
明治4年、京角倉家から養子に入ったのが、12代又玅斎直叟である。明治の混乱期の中、新しい裏千家の基礎固めに努め、34歳で家督を長男駒吉(後の13代円能斎鉄中)に譲ったのちも側面から流儀の伸長をはかった。円能斎は明治29年まで6年にわたって東京に居を移して協力者を求め、京都に戻ってからも教本の出版や機関誌 「今日庵月報」などの発行を通して一般への茶道普及に尽力した。また女学校教育の中に茶道を取り入れ、かつ教授方針の一致をはかる講習会を催すなど裏千家茶道の組織化にも力を注いだ。その他、三友式の創始や、流し点や大円点の復興などの功績がある。
戦後になって14代淡々斎碩叟が茶道の学校教育への導入を働きかけた結果、学校のクラブ活動で教えられる茶道の大半は裏千家となっている。淡々斎はまた各地の寺院・神社にて献茶・供茶を行ったり、海外への普及に取り組んだりと、茶道振興に功が大きい。全国統一の同門組織として「社団法人茶道裏千家淡交会」を結成し、また家元を財団法人化するなど、裏千家茶道の組織化も引き続き行われ、流派別の茶道人口としては最大規模を誇るようになった。こうした普及・組織化の活動は15代鵬雲斎汎叟にも引き継がれ、特に海外普及に力を注がれた。鵬雲斎はまた社団法人日本青年会議所会頭を務めた。
歴代家元[編集]
千利休の没後、傍系の少庵(後妻の連子)の後を継いだ宗旦が京都に屋敷を構え、三男 宗左が紀州徳川家に茶頭として仕えたのち千家の家督を継いで本家となり表千家となった。その後、次男 宗守は武者小路千家を、四男 宗室は裏千家を興こしたのが三千家の始まりであるが、各家ともに家元は利休を初代として数える。裏千家の家元は四代である仙叟の諱「宗室」を受け継いでいる。
代 | 道号法諱 | 斎号 | 生没年 | 備考 |
---|---|---|---|---|
初 | 利休宗易 | 抛筌斎 | 1522年- 1591年2月28日 |
利休忌3月28日 |
二 | 少庵宗淳 | 1546年- 1614年9月7日 |
利休の後妻宗恩の連れ子で女婿 | |
三 | 元伯宗旦 | 咄々斎 | 1578年- 1658年12月19日 |
元叔・寒雲 |
四 | 仙叟宗室 | 臘月庵 | 1622年- 1697年1月23日 |
宗旦の末子 以後代々家督継承者は宗室を名乗る |
五 | 常叟宗室 | 不休斎 | 1673年- 1704年5月14日 |
加賀藩・松山藩茶道指南初代 指南は幕末まで継続 |
六 | 泰叟宗室 | 六閑斎 | 1694年- 1726年8月28日 |
宗安と称した |
七 | 竺叟宗室 | 最々斎 | 1709年- 1733年3月2日 |
表千家七代如心斎の弟 宗乾と称した |
八 | 一燈宗室 | 又玄斎 | 1719年- 1771年2月2日 |
表千家七代如心斎および竺叟宗室の弟 |
九 | 石翁宗室 | 不見斎 | 1746年- 1801年9月26日 |
寒雲、玄室とも称した |
十 | 柏叟宗室 | 認得斎 | 1770年- 1826年8月24日 |
夫人は松室宗江、秀でた茶人 |
十一 | 精中宗室 | 玄々斎 | 1810年- 1877年7月11日 |
三河国奥殿領主大給松平乗友の子 |
十二 | 直叟玄室 | 又玅斎 | 1852年- 1917年12月8日 |
京角倉家・角倉玄祐の子 |
十三 | 鉄中宗室 | 圓能斎 | 1872年- 1924年8月5日 |
対流軒・近代化に尽力 |
十四 | 碩叟宗室 | 無限斎 | 1893年- 1964年9月7日 |
襲名以前は玄句斎永世、玄句斎宗叔と称した 一般に淡々斎として知られている |
十五 | 汎叟宗室 | 鵬雲斎 | 1923年- |
襲名以前は宗興と称した 2002年に家元を譲り大宗匠「千玄室」と称する |
十六 | 玄黙宗室 | 坐忘斎 | 1956年- |
襲名以前は宗之と称した 当代 |
関連項目[編集]
参考文献[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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