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공고진주(功高震主)

2016. 3. 10. 16:38잡주머니



      

[고전 속 정치이야기] 공고진주(功高震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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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2 18: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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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지금의 강소성 회음현 출신으로 서한의 개국공신이자 중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군이었던 한신(韓信)소하(蕭何), 장량(張良)과 함께 ‘한초삼걸(漢初三杰)’ 이라 부른다. 한신은 평민 출신으로 성격이 자유로워 예절에 구속되지 않았다. 특별한 직업도 없이 남에게 의존하며 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서 높고 널찍한 곳을 찾아 매장했다. 묘지의 아래에는 1만 가구가 살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땅이 펼쳐졌다. 남창(南昌)의 정장은 이 한신을 비범한 사람으로 여겨 집을 찾아오면 밥을 주었다. 그러한 한신이 미웠던 정장의 아내는 일찍 밥을 먹어치웠다. 한신은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빈둥거리다가 심심하면 낚시를 했다. 마침 빨래하던 할머니가 불쌍히 여겨 밥을 주었다. 한신은 성공하면 반드시 할머니께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다. 할머니가 대장부가 먹고살 길을 찾지 않기에 밥을 주었을 뿐이라고 화를 냈다. 어떤 젊은이가 한신에게 “키만 큰 주제에 칼을 차고 다니지만 사실은 겁쟁이”라고 비난하더니 “죽기가 두렵지 않으면 갈을 뽑아 나를 찔러라! 죽음이 두려우면 내 다리 밑으로 기어서 지나가라!”고 놀렸다. 한신은 잠시 생각하더니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다리 밑으로 기어서 지나갔다. 자유로운 성품과 고도의 인내력은 뛰어난 전략가로서 갖춰야 할 자질이었다.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키자 한신은 항우를 거쳐 유방에게 투신했다.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마침내 초한쟁패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몇 차례나 유방의 불신을 받아 병권을 빼앗겼다. 제왕에서 초왕을 이동한 그는 유방에게 잡혀 수도로 끌려가면서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아먹고(狡兎死良狗烹), 높이 나는 새가 잡히면 좋은 활이 창고로 들어가며(高鳥盡良弓藏). 적국이 망하면 모략가가 죽는다(敵國破謀臣亡)’ 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결국 유방이 진희(陳豨)의 반란을 평정하러 갔을 때 병을 핑계로 따라가지 않았다가 반란죄를 뒤집어쓰고 여후에게 잡혀 피살됐다. 중국사상 개인과 관련된 고사성어를 가장 많이 남긴 사람이 한신이다. 그만큼 관심과 아쉬움을 많이 받은 사람도 드물다. 사마천(司馬遷)은 도덕과 겸양을 닦지 않았기 때문에 공을 세우고 너무 자신만만하다가 견제를 받아 죽었다고 아쉬워했다. 그가 반란을 도모했다는 것은 날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사마광(司馬光)은 공에 비해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한신이 불만을 품었을 수는 있지만, 자립을 권유한 괴통(蒯通)과 공이 높으면 군주를 두렵게 하니(功高震主) 항우와 연합해 정족지세를 이루라는 무섭(武涉)의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미루어 반란을 일으킬 엉뚱한 품성은 아니었다고 변호했다. 진량(陳亮)은 한신의 사람됨을 가장 먼저 알았던 소하가 한신의 살 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홍매(洪邁)는 오히려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고도 끊임없이 견제한 유방에게 책임을 돌렸다. 양옥승(梁玉繩)은 밥 한 그릇을 준 할머니에게 1천금으로 보답한 사람이 옷과 음식을 나누어준 유방을 배반했을 리가 없고, 배반하려고 했다면 차라리 영포(英布)나 팽월(彭越)과 같은 대국의 왕과 결탁할 것이지 하찮은 변방의 장수 진희와 결탁했겠느냐고 반박했다. 

   전제왕조의 개국군주가 개국공신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정권의 안정과 직결된 문제였다. 공신을 토사구팽한 대표적인 제왕은 한고조 유방과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이었다. 적절한 타협으로 공신의 권력을 삭감하는 방법을 선택해 평화롭게 정권을 안정시킨 대표적인 제왕은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이다. 정답은 없지만, 공신을 권력에서 소외시켰다는 측면에서는 공통적이다. 현대정치에서 엽관(獵官)제도는 정치권력을 획득한 세력이 권력을 공유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정당은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결사체이다. 그러나 어떤 정치제도에서도 권력을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정치적 성패를 좌우한다. 한신의 죽음은 오랜 논란거리였지만, 정치권력을 강화하려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벌어진 일화일 뿐이다. 한신은 전형적인 무인이었기 때문에 정치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아름다운 품격을 충분히 드러냈다. 그와 관련된 수많은 고사성어가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그러한 매력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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