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각다고(榷茶考)」론

2016. 3. 11. 01:09차 이야기



       차문화 - 다산의 「각다고(榷茶考)」론| 중국 차문화 관련자료

한중물류 | 2013.11.20. 08:11



다산의 「각다고(榷茶考)」론



   이덕리의 차무역론에 이어 다산의 「각다고」를 살펴보겠다. 각다(榷茶)의 각(榷)은 도거리한다는 뜻이니 국가에서 차를 전매(專賣)하여 그 이익을 전유함을 말한다. 다산은 『경세유표』 권 11, 지관(地官) 수제(修制) 부공제(賦貢制) 5에 「각다고(榷茶考)」란 논문을 실었다. 역대 중국에서 시행한 술, 소금, 철 등 각종 전매제도를 검토한 일련의 논문 가운데 하나다. 이를 통해 각다에 대한 다산의 생각을 알아보기로 한다.


전대의 각다 논의
   다산에 앞선 각다 논의는 지난 호에 살펴 본 이덕리의 논의 외에는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다. 먼저 볼 것은 『세종실록』 12년(1430) 12월 8일의 기사다.

경연에 납시어 강(講)하다가 차를 전매하는 법[搉茶法]에 이르러 말씀하셨다. “중국에서는 어찌 차를 좋아하면서 엄히 금하는가? 우리나라는 궐내에서도 차를 쓰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이 각각 다르기가 또한 이와 같구나.” 시강관(侍講官) 김빈(金鑌)이 아뢰었다. “중국 사람은 모두 기름진 고기를 먹는 까닭에 차를 마셔서 기운을 내려가게 합니다. 또 손님을 접대할 때면 반드시 먼처 차를 낸 뒤에 술을 내옵니다.”
御經筵, 講至搉茶法曰: “中國何好茶, 而嚴其禁乎? 我國闕內, 亦不用茶, 好尙各異, 亦如是也.” 侍講官金鑌曰: “中國之人, 皆食膏肉, 故飮茶令下氣. 且當對客, 必先茶後酒.”

세종은 중국에서 역대로 각다법을 시행한 것을 의아해했다. 우리는 대궐에서도 차를 마시지 않는데, 중국은 어째서 국가가 법으로 금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차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시강관 김빈은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기름진 음식을 차를 즐겨 마시는 이유로 들었다. 벌써 조선 초만 해도 고려 때 흥성했던 차문화는 이렇듯 퇴조해버렸던 것이다. 이 글은 각다에 대한 언급이기 보다는 중국에서 그토록 차문화가 흥성한데 대한 왕의 의문을 적고 있어, 당시 우리 차 문화의 실상을 증언한다.
이후 『선조실록』 29년(1596) 11월 4일자 기사에 호마(胡馬) 무역에 대한 사복시(司僕寺)의 언급이 있다.

   이제 제주목사의 보고를 보니 도체찰사(都體察使)가 요청한 말 50필은 구해 뽑아내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근년 들어 제주의 마필은 많은 숫자를 반출해 와서 그 형세가 그러한 것입니다. 이제 비록 다시 공문을 보내 숫자를 더해 뽑아내게 해도 반드시 쓸만한 말이 없을 것입니다. 전대에 중국에서는 차를 가지고 오랑캐의 말과 교역하였고, 지금 중국 조정 또한 개시(開市)에서 무역으로 교환하니, 진실로 우리에게 쓸모없는 물건을 가지고 저들의 날랜 말과 바꾼다면 전장(戰場)에 보탬이 되고 무공(武功)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今見濟州牧使啓本, 都體察使行移, 五十馬艱得以捉出云云. 近年濟州馬匹, 多數出來, 其勢然矣. 今雖更爲行移, 加數捉出, 必無可用之馬矣. 前代中國, 以茶易虜馬, 今中朝亦開市貿換, 誠以吾無用之物, 易彼追風之足, 可以資戰場而收武功也.

  군사력 강화를 위해 꼭 필요한 말을 제주 목장의 말로는 더 이상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이를 보충할 방법으로 호마(胡馬) 무역 방안을 제안한 내용이다. 중국에서는 차와 말을 교환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그다지 쓸모없는 물건을 말과 바꿔 무역할 것을 제안한 내용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단천(端川) 지역에서 나는 은자(銀子)나 인삼(人蔘) 등과 말을 교역할 것을 말했다. 이때만 해도 우리 땅에서 나는 차를 제품으로 만들어 말과 바꿀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덕리에 의해 최초로 각다 주장이 구체적 세부 지침과 함께 본격적으로 펼쳐졌고, 이를 이어 다산이 중국 역대의 각다 정책을 검토하는 논문을 제출했다. 다산은 「각다고」에 앞서 『경세유표』 권 2, 「동관공조(冬官工曹)」 중 임형시(林衡寺) 항목에서 이렇게 말했다.

   살피건대, 남쪽 여러 고을에서 나는 차는 매우 좋다. 내가 본 바로는 해남과 강진, 영암과 장흥 등 바닷가 여러 고을에는 차가 나지 않는 곳이 없다. 나는 말한다. 무릇 차가 나는 산은 지방관으로 하여금 다른 것을 심지 못하게 하고 백성들이 나무하지 못하게 한다. 이윽고 무성해지기를 기다려 해마다 차 몇 근씩을 임형시(林衡寺)로 옮겨, 만하성(滿河省)에 보내 좋은 말을 사와 목장에 나눠주게 한다면 또한 나라에서 쓰기에 충분할 것이다.
案南方諸縣, 產茶極美. 臣以所見海南康津靈巖長興, 凡沿海諸邑, 莫不產茶. 臣謂凡產茶之山, 令地方官封植, 禁民樵牧, 待其茂盛, 歲以茶幾斤輸于林衡, 送于滿河省, 以市良馬, 頒于牧場, 亦足以贍國用也.

   이른바 차 무역 제안을 한 셈인데, 앞서 본 이덕리의 차무역론에 비해서는 구체성이 떨어진다. 다산이 차 무역의 효용성에 대해 인식한 것만은 분명한데, 『경세유표』를 적을 당시까지 다산은 아직 이덕리의 『동다기』를 접하지 못했던 것이 틀림없다. 만일 다산이 이때 『동다기』를 읽었다면, 「각다고」 등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산은 『경세유표』에서 이덕리의 다른 저작인 『상두지』는 2차례 인용한 바 있다.


각다고(榷茶考)의 내용

「각다고」는 『경세유표』 지관(地官) 부공제(賦貢制) 속에 들어 있다. 국가에서 관장하는 각종 세수(稅收)와 관련된 내용을 논하면서 중국 역대 왕조에서 각다, 즉 차 전매정책을 어떤 방식으로 운영해왔으며, 그 규모와 이익, 그리고 폐해는 어떠했는지에 대해 살핀 것이다. 내용은 먼저 왕조 별로 시기와 법령 시행 내용을 밝힌 본문이 있고, 본문 아래 보충 설명을 역대 문헌의 인용으로 추가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이에 대한 자신의 안설(按說)을 제시하였다. 본문은 모두 10조목이다. 당대(唐代) 3조목, 송대(宋代) 4조목, 원대(元代) 1조목, 명대(明代) 2조목으로 되어 있다.
먼저 당대의 각다 정책을 정리해 보자. 본문 3조목 4단락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덕종(德宗) 건중(建中) 원년(780)에 차와 칠(漆), 대나무 등에 10분의 1 세금을 거두어 상평본전(常平本錢)을 삼음. 과도한 군비 충당을 위해 시행했으나 얼마 못가 혁파함.
2. 덕종 정원(貞元) 9년(793)에 다세(茶稅)를 복원시킴.
3. 목종(穆宗, 820-823) 때 천하 차세(茶稅)의 비율을 100전(錢)에서 50전씩 증액하고, 차는 근량을 더해 20량까지 이름.
4. 문종(文宗, 827-839) 때 각다(榷茶)를 재설치 해 직접 관장함. 백성의 차나무를 관장(官場)으로 옮겨 심고, 그동안 저축한 것을 전매하자 천하가 크게 원망함.


   최초로 각다정책이 시행된 것은 당 덕종(德宗) 원년(780)의 일이다. 군비(軍費)의 갑작스런 증가로 경상세(經常稅)로는 도저히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차와 칠, 그리고 대나무와 재목에 10분의 1 씩 세금을 거두어 상평본전(常平本錢)으로 삼은 것이 그 출발이다. 덕종은 이 제도의 시행을 바로 후회하고 철회했다. 하지만 덕종은 13년 뒤에 염철사(鹽鐵使) 장방(張滂)의 건의를 받아들여 차세(茶稅)를 복구시켰다. 이를 통해 해마다 40만 관(貫)의 세수(稅收)를 거두었다. 그 방법은 차가 생산되는 고장과 차 상인이 왕래하는 길목에서 10분의 1의 세금을 거두는 방식이었다.
이를 이어 목종은 차세를 50%나 인상했다. 차의 부가가치가 높아지자 약탈과 각종 간사한 범죄가 연이어 일어났다. 문종 때 정승 왕애(王涯)는 이사(二使)를 맡고 다시 각다(榷茶)를 설치했다. 차와 관련된 범죄를 처벌하는 각종 법률이 만들어져 백성의 원성이 높았다. 그래도 이익이 워낙 컸으므로 사매(私賣)의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육우(陸羽)는 이 시기에 『다경(茶經)』 3책을 써서 차 마시는 법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렇게 볼 때 당나라는 처음 차에 차세를 매긴 이후 불과 50년도 되지 않아, 이를 통한 세금 수입이 40만 관에 이르렀고, 차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크게 달라져 사매가 횡행하고, 차 마시는 법이 보급되는 등 순식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다음은 송․원대를 합쳐 각다 정책에 대한 본문 5조목, 6항목의 정리다.

1. 송 태조 건덕(乾德) 2년(964)에 세금으로 내는 차 외에는 모두 관에서 수매하고, 감춰두거나 사사로이 판매하는 자는 몰수하고 죄 주는 조처를 취함. 관리가 관차(官茶)를 일정량 이상 사무역하거나 판매하다가 적발되면 사형에 처함
2. 순화(淳化) 3년(992) 관차를 10관 이상 훔쳐 팔다 적발되면 얼굴에 자자(刺字)하고, 감옥에 보내는 조서를 내림.
3. 인종(仁宗) 초년(1022)에 차에 대한 업무 규정을 두고 해마다 크고 작은 용봉차(龍鳳茶)를 제조함. 정위(丁謂)가 시작해서 채양(蔡襄)이 완성함.
4. 신종(神宗) 희령(熙寧) 7년(1074)에서 원풍(元豊) 8년(1085)까지 촉도(蜀道)에 다장(茶場) 41개소, 경서로(京西路) 금주(金州)에 6개소, 섬서(陝西)에 332개소가 있었음. 이직(李稷) 때에는 세수(稅收)가 50만냥이 되고, 육사민(陸師閔) 때에는 100만냥에 이름.
5. 남송 효종(孝宗) 건도(乾道, 1165-1173) 말년부터 이전까지 거친 차와 오랑캐의 말과 교역하던 것을 바꿔 차음으로 세다(細茶)를 줌. 성도(成都) 이주로(利州路) 12 고을에서만 좋은 차가 2천 1백 2만근이 생산됨.
6. 원 세조(元世祖) 지원(至元) 17년(1280)에 강주(江州)에 각다도전운사(榷茶都轉運司)를 설치하여, 강ㆍ회ㆍ형ㆍ남ㆍ복ㆍ광(江淮荊南福廣)지방의 세(稅)를 총괄케하니, 말차(末茶)와 엽차(葉茶)가 있었음.

송대로 들어와서도 차의 국가 전매는 더욱 강화되었다. 관리도 엄격해져서 각종 규제와 처벌이 까다로와졌다. 다산의 안설은 이렇다.

   송나라 제도는 차를 전매함에 강릉(江陵)과 기주(蘄州) 등에 6무(務)를 두고, 기주(蘄州)와 황주(黃州) 등에 13장(場)을 두며 차 수매처(收買處)를 강남(江南)․호남(湖南)ㆍ복건(福建) 등 모두 수십 곳에 두었다. 산장(山場)의 제도는 원호(園戶)를 통솔하여 그 세금을 거두고, 나머지는 모두 관에서 사들였다. 또 따로 민호절세과(民戶折稅課)란 것이 있었다.
宋制榷茶有六務, 江陵蘄州等. 十三場, 蘄州黃州等. 又買茶之處, 江南湖南福建總數十郡. 山場之制, 領園戶, 受其租, 餘悉官市之. 又別有民戶折稅課者.

당시 국가의 차 관리가 한층 세부 조직을 갖춰 나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송대에는 차의 종류도 당대와는 달리 다양하게 발전했다. 다산의 설명을 보자.

   무릇 차는 두 종류가 있는데 편차(片茶)와 산차(散茶)가 그것이다. 편차는 쪄서 만든다. 모양틀에 채워서 가운데를 꿴다. 다만 건주(建州)와 검주(劍州)에서는 찐 뒤에 갈아서, 대로 엮어 격자를 만들어 건조실 안에 두므로 가장 정결하다. 다른 곳에서는 만들 지 못한다.
凡茶有二類。曰片。曰散。片茶蒸造。實捲摸中串之。惟建,劍則旣蒸而研。編竹爲格。置焙室中。最爲精潔。他處不能造。

   차가 쪄서 모양틀에 넣어 가운데 구멍을 뚫어 꿴 편차(片茶)와 가루차인 산차(散茶)의 두 종류 차를 설명하고,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들 차가 생산되는 대표 지역을 상세하게 나열하였다. 이로 볼 때 각 지역마다 생산되는 차의 종류가 달랐고, 품질에 따른 등급도 복잡하게 매겨졌음을 알 수 있다. 각다로 인한 수익 규모도 당 덕종 때 40만 관 수준이던 것이 지도(至道) 말년(997)에는 무려 285만 2천 900여 관으로 늘어났다. 다시 천희(天禧) 말년(1021)에는 여기서 45만여 관이 증가되었다. 이제 차는 국가 경제의 기반이 되는 중요 재원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인종(仁宗) 초년(1022)에 다무(茶務)를 세우고, 해마다 크고 작은 용봉다(龍鳳茶)를 제조해서 고급차의 생산에 들어갔다. 정위(丁謂)와 채양(蔡襄)이 만들어낸 용봉단(龍鳳團) 떡차는 차 문화사에서 오래도록 수 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냈다. 이후 차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정책 담당자에 따라 바짝 조이고 느슨하게 풀어지기를 되풀이 했다. 가우(嘉祐) 4년(1059)에 인종은 조서로 차금(茶禁)을 늦추어, 차로 인해 백성이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 6,70년이었다.
신종(神宗) 희령(熙寧) 7년(1074)에서 원풍(元豊) 8년(1085)까지 촉도(蜀道)에 다장(茶場) 41개소, 경서로(京西路) 금주(金州)에 6개소, 섬서(陝西)에 332개소가 개설되어, 차는 최대의 극성기를 맞았다. 이때부터 말차(末茶)가 성행하여 차호(茶戶)들의 말차 제조를 법령으로 금지시켜야 할 정도였고, 심지어 부족한 양을 늘이기 위해 차에 쌀과 팥을 섞어 파는 자까지 있었다. 차가 백성에게 끼치는 폐단도 점차 커져갔다.


   오랑캐의 말과 차를 맞바꾸는 교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남송 효종(孝宗) 건도(乾道, 1165-1173) 말년의 일이다. 이전에는 차를 주더라도 품질이 낮은 것만 주었는데, 이때 와서 처음으로 고급의 세차(細茶)를 그들에게 주었다. 차의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 유통되는 차의 양이 그만큼 늘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도(成都) 이주로(利州路)의 열 두 고을에서만 좋은 차가 2천 1백 2만근이나 생산되었을 정도였다. 다산은 중국에서 차마사(茶馬司)를 두어 오랑캐와의 말 교역을 관장케 한 연유를 구준(丘濬)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적었다.

   후세에 차로 오랑캐의 말과 교역한 것은 여기서 처음 보인다. 대개 당나라 때 회흘(回紇)이 입공(入貢)하면서부터 이미 말과 차를 교역했었다. 대개 오랑캐 사람들은 유락(乳酪)을 많이 마시는데, 유락은 체증을 유발하는데, 차의 성질은 순조롭게 통해 깨끗하게 씻어주기 때문이다. 송나라 사람이 처음으로 차마사(茶馬司)를 만들었다.
後世以茶易虜馬, 始見於此. 蓋自唐世, 回紇入貢, 已以馬易茶. 蓋虜人多嗜乳酪, 乳酪滯膈, 而茶性通利, 能蕩滌之故也. 宋人始制茶馬司.

   원 세조(元世祖) 지원(至元) 17년(1280)에도 강주(江州)에 각다도전운사(榷茶都轉運司)를 설치해서, 강ㆍ회ㆍ형ㆍ남ㆍ복ㆍ광(江淮荊南福廣)지방의 세(稅)를 총괄케 하였는데, 당시 차의 종류로는 말차와 엽차(葉茶)가 있었다.
이렇듯 당송을 거쳐 원나라에 이르는 동안 차는 일용의 필수품이 되어 천하가 차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물건이 되었다. 차의 제조법에도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당송 시절의 차는 모두 가늘게 가루 내어 반죽해서 떡 조각처럼 만들었다가, 마실 때 다시 차 맷돌에 갈아서 끓였다. 원나라 때도 말차(末茶), 즉 가루차가 있었는데, 이후로는 온 중국이 모두 잎이 그대로 살아있는 엽차를 마시게 되었다. 다산은 이러한 내용을 구준(丘濬)의 글을 인용하여 상세하게 설명했다.
다음은 명대 각다 정책에 대한 2조목이다.

1. 명대에는 각다 관련 사무와 첩사(貼射)와 교인(交引), 차전(茶田) 등 각종 명색을 모두 혁파함. 다만 사천(四川)에 차마사(茶馬司) 한 곳, 섬서(陝西)에 차마사 4곳을 설치함.
2. 『대명률(大明律)』에, 사사로이 차를 만들어 법을 범한 자는 소금을 사제(私製)한 것과 같은 죄로 논한다고 되어 있음.

   이로 보면 명대에는 각다 정책이 없어지고, 단지 차와 말의 교역을 담당하는 차마사(茶馬司)만 몇 곳에 존치되었다. 국가에서 생산과 판매를 독점 관리하기에는 시장 규모가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이에 이르러 각다는 없고 차마 무역만 국가의 관리 대상이 되었다.
이렇듯 당대에서 명대에 이르는 각다에 관한 역사 사실 기록은 말 그대로 간추린 차문화이기도 하다. 다산은 중국의 역사 기록에서 이와 같이 각다와 관련된 기록을 추출해서, 관련 문헌의 인용을 통해 앞 뒤 맥락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각다고」를 정리해 냈다.


역대 각다 정책에 대한 다산의 태도

   중국 역대 왕조의 각다 정책에 대한 다산의 생각은 어떠했던가? 먼저 다산이 당나라 목종 조의 기사를 소개한 후, 끝에 붙인 안설(按說)을 읽어 보자.

생각건대, 차란 물건은 처음에는 약초 중에 미미한 것이었다. 그것이 오래 되자 나르는 수레가 연잇고, 배가 잇달았다. 그리하여 현관(縣官)이 세금을 매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장사해서 판매하는 한 가지 물건이니, 마땅하게 헤아려 세금을 거두면 충분하다. 어찌 하여 관청이 직접 장사를 하면서 백성들이 사사로이 매매하는 것을 금하고, 베어 죽여도 그만 두지 않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臣謹案。茶之爲物。其始也蓋藥艸之微者也。及其久也。連軺車而方舟舶。則縣官不得不征之。然是亦商販之一物。量宜收稅。斯足矣。何至官自爲商。禁民私賣。至於誅殺而不已乎。

   이를 보면 교역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국가에서 차에 대해 세금을 매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국가가 판매를 독점하는 각다 정책에 대해서는 다산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각다고」의 끝에 붙인 글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내가 예전에 재부(財賦)의 제도를 두루 살펴보니, 비록 그 손익과 득실이 시대마다 각기 달랐다. 크게 보면 도가 있는 세상에서는 세금 거두는 것은 박한데도 재용(財用)은 반드시 넉넉했다. 도가 없는 세상에서는 세금을 거두는 것이 반드시 무겁고, 재용은 반드시 부족했다. 이는 이미 지나온 자취만 보더라도 분명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볼진대, 재정을 넉넉하게 하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 아니지만, 큰 이익은 박하게 거두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재용이 결핍되는 방법도 한 가지 뿐은 아니지만, 큰 해로움은 무겁게 거두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아아! 천하의 재원은 한정이 있고, 쓰임에는 한정이 없다. 한정 있는 재물로 한정 없는 쓰임에 부응하니, 무엇으로 이를 견디겠는가? 그런 까닭에 성인께서 법을 제정하시어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수입이란 것은 재물이고, 지출이란 것은 쓰임이다. 유한한 것을 헤아려서 무한한 것을 절제하는 것은 성인의 지혜요, 흥하여 융성하는 방법이다. 무한한 것을 멋대로 해서 유한한 것을 고갈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사내의 미혹함이요, 패망의 꾀이다. 무릇 세금을 거두는 법을 제정할 때는 먼저 나라의 쓰임새를 헤아리지 말고, 오직 백성의 힘을 가늠하고 하늘의 이치를 헤아려야 한다. 무릇 백성의 힘으로 감당치 못하는 것과 하늘 이치가 허락하지 않을 것은 터럭만큼이라도 감히 더하지 못한다. 이에 1년의 수입을 모두 계산해서 3분의 2는 1년의 비용으로 지출하고, 3분의 1은 남겨 내년의 비축으로 삼는다. 이른 바 3년을 밭 갈면 1년 양식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부족하게 되면 제사나 손님 접대로부터 아래로 수레와 복식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줄여 검소하게 해서, 서로 알맞게 되기를 기약한 뒤에 그만둔다. 이것이 옛날의 도이니, 다른 방법은 없다.


臣歷觀前古財賦之制, 雖其損益得失, 代各不同. 大較有道之世, 其賦斂之薄, 而其財用必裕. 無道之世, 其賦斂必重, 而其財用必匱. 此已然之跡, 昭昭然者也. 由是觀之, 裕財之術非一, 而其大利無過乎薄斂也. 匱財之術非一, 而其大害無踰乎重斂也.
嗚呼! 天下之財有限, 而其用無限, 以有限之財, 應無限之用, 其何以堪之? 故聖人制法曰: “量入以爲出.”, 入者財也, 出者用也. 量有限以節無限, 聖人之智也, 興隆之道也. 縱無限以竭有限, 愚夫之迷也, 敗亡之術也. 凡制賦稅者, 勿先計國用, 惟量民力揆天理. 凡民力之所不堪, 天理之所不允, 卽毫髮不敢加焉. 於是通計一年之入, 參分之以其二, 支一年之用, 留其一爲來年之蓄. 所謂三年耕, 有一年之食也. 如有不足, 自祭祀賓客, 而下乘輿服飾一應百物, 皆減之爲儉約, 期與相當而後已焉. 此古之道也, 無他術也.

   결론에서도 다산은 각다는 백성의 세금을 가중시키기만 하고, 국가의 재용이 넉넉해져도 백성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라고 하여,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수입과 지출을 규모에 맞게 하고, 없을 때는 절약하고 남을 때는 저축하는 상평(常平)의 방법으로 천리를 따르고 백성의 힘을 펴주는 정책을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각다고」의 자료 가치와 의의를 정리한다.


첫째, 「각다고」는 중국 역대의 차 전매 정책을 통해 중국의 차문화를 살핀 최초의 저술이다.
둘째, 「각다고」는 본문 아래 관련 문헌을 섭렵하여 호인(胡寅)․마단림(馬端臨)․진부량(陳傅良)․구준(丘濬) 등의 언급을 통해 각다의 이면을 소상하게 보충한 기사본말(紀事本末)의 형식을 갖춘 저술이다.
셋째, 「각다고」는 역대 중국에서 차가 국용(國用)의 마련에 한 기여와 구체적 차 산지의 이름, 제도 시행 상의 세부 내용 및 백성들에게 끼친 질고까지를 조대별로 제시하여, 차문화의 실상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게 한 저술이다.
넷째, 「각다고」는 산차(散茶)와 편차(片茶), 그리고 말차(末茶) 등 시대 변화에 따른 차의 제법과 특성, 음다법 등을 제시하여 차문화의 변천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아울러 육우의 『다경』이 출현한 문화 배경 및 의의 등을 밝혀, 사적 맥락을 짚을 수 있게 하였다.
다섯째, 그럼에도 「각다고」는 앞서 이덕리가 『동다기』에서 펼친 차마(茶馬) 무역론의 구체적 제안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지 못하고 무역의 당위만 원론 수준에서 확인한 채, 전반적으로 각다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피력한 한계를 지닌다.



*보충_명전



정약용 (조선 학자)[다산]

1762(영조 38) 경기 광주~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 /정약용 동상, 서울 남산공원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다. 본관은 나주(羅州).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자호는 다산(茶山)·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 당호(堂號)는 여유(與猶).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개혁사상 역시 이에 대응되어 나타난다.
먼저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주로 관료생활의 시기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고 15세에 서울로 올라온 후 (李家煥)과 자신의 매부인 (李承薰)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했다. 이미 이때부터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의 제자인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의 저서를 탐독했다. 이처럼 유교경전과 선학의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여, 1783년(정조 7)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었다. 이무렵 (李檗)을 통하여 서양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서양서적을 접했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검열이 되었으나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아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지평·수찬을 지내고 1794년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사건(周文謨事件)에 연루되어 금정찰방(金井察方)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다시 소환되어 좌부승지·병조참지·동부승지·부호군·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다산은 30대초까지는 아직 젊은 중앙관료로서 경학사상 등 학문체계는 물론 사회현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깊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도암행어사를 비롯하여 금정찰방 곡산부사(谷山府使) 등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농촌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이를 실천해보고자 했다. 1799년 중앙정계에 있을 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응지진농서 應旨進農書〉의 검토를 통해 토지문제를 농업체제 전반과 연결시켜 구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는데, 이후 기본 생산수단인 토지 문제의 해결이 곧 사회정치적인 문제 해결의 근본이라고 인식하고 현 농업체제를 철저히 부정한 위에 경제적으로 평등화를 지향하는 개혁론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1799년에 저술한 〈전론 田論〉의 (閭田制)는 이같은 논리가 가장 강렬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여전제의 내용은 토지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지주제를 부정하고 토지 국유를 원칙으로 하는 기초 위에, 향촌을 30가구의 여(閭) 단위로 재편성한 다음 여장(閭長)의 통솔하에 공동노동을 통해 경작하고 농민의 투하노동력을 기준으로 생산물을 분배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관련된 조세제도 개혁책으로서 정액제(定額制)를 취하고, 역제(役制)의 경우 재편성된 향촌제도와 관련시켜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원칙으로 하면서 (戶布制)로의 개혁을 고려했다. 이러한 여전제의 보급을 위해서 여내(閭內) 농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무위도식하는 선비들에게 실생활에 필요한 직업으로의 전환을 유도하고자 했다. 이처럼 여전제는 농민경제의 균산화(均産化)와 안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동시에 생산성 향상을 통한 사회적 부의 증대를 위해 노동력의 기능을 강조한 공동농장·협동농장적 경영론이다. 이는 종전의 (限田論)·(均田論) 등 토지분배에만 초점을 맞춘 개혁론에 비해 농업생산의 사회화 문제 등 농업생산이나 농업경영 전반의 변혁까지도 포괄하는 논리였다. 그러나 시행의 전제가 되는 국유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장 실현될 수 없었던 토지개혁방안이었다. 특히 〈전론〉에서 농업생산의 사회화 문제와 연결하여 공상(工商)을 농업에서 완전 분리시켜 독립적 사회분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당시 상품화폐경제와 수공업 발전의 현실을 염두에 둔 견해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농업생산에 주력하는 중농정책(重農政策)이 견지되어 사족의 상업·공업에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이상의 사회개혁론과 궤를 같이하여 혁신적 정치개혁론으로 제시된 것이 〈원정 原政〉·〈원목 原牧〉이다. 여기에서 그는 아래로부터의 정치개혁 이념을 표방하고 있다. 〈원정〉에서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왕정의 제일책으로 삼고 물화의 유통과 교환을 촉진하며 지방생산력의 불균등 발전을 완화하고 정치적 권리를 균등하게 해야 한다"고 하여 파격적인 체제개혁론을 주장했으며 이는 만년에 저술한 정치권력론·역성혁명론으로서의 〈탕론 湯論〉과 이념적 기초를 같이한다. 그는 〈원목〉에서 태고 이래 민(民)의 자유의사와 선거에 의해 이장(里長)·면정(面正)·주장(州長)·제후(諸候)·천자(天子) 등 각 계층의 통치자들이 발생했음을 지적하고 이들이 만약 민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들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행동하는 경우, 민은 자신들의 자유의사로써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가발생에 관한 학설을 담고 있는 것으로 자본주의 발생 초기 유럽의 사회계약설과 유사한 논리가 되며 해석에 따라서는 정치의 민주주의적 합의제, 선거제, 법치주의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유럽의 경우와 달리 당시의 역사발전 사실과 부합되지 않으며, 다만 극도로 부패한 봉건사회에 대한 반기로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같은 정치개혁론은 그의 사회 경제개혁론과 함께 당시의 현실 속에서 혁명을 수반하지 않고는 실현불가능한 이상론이며 궁극적인 지향점은 밝혔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지니면서 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론으로 체계화되기는 어려웠다.



   그의 학문과정과 생애 후기는 주로 유배생활의 시기이다.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한 벽파는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1801년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을 일으켰다. 이때 이가환·이승훈·권철신(權哲身)·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 그리고 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 그해 11월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의 유배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특히 1808년 봄부터 머무른 다산초당은 바로 다산학의 산실이었다. 1818년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렸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했다. 61세 때에는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했다. 그는 유배생활에서 향촌현장의 실정과 봉건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유배의 처참한 현실 속에서 개혁의 대상인 사회와 학리(學理)를 연계하여 현실성있는 학문을 완성하고자 했다. 〈주례 周禮〉 등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독자적인 경학체계의 확립과 '일표이서'(一表二書)를 중심으로 한 사회전반에 걸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회개혁론이 이때 결실을 맺었다.

   먼저 는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대하여 현재의 실행 여부에 구애되지 않고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나열하여 우리 구방(舊邦)을 새롭게 개혁해보려는 생각에서 저술했다"고 하여 당시 행정기구와 법제 및 경제제도를 대폭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경세유표〉의 구성은 경전에서의 이념적 모델을 제시하고 다음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도의 변천과정을 아울러 참조하여 개혁론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는 "고금의 이론을 찾아내고 간위(奸僞)를 열어젖혀 목민관에게 주어 백성 한 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마음씀이다"라고 하여 현 국가체제를 인정한 위에서 목민관을 중심으로 한 향촌통치의 운영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흠흠신서 欽欽新書〉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옥사에 대해 "백성의 억울함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통치자의 인정(仁政)·덕치(德治)의 규범을 명확히 하고자 저술되었다. 제도개혁에 있어서 〈경세유표〉가 전국적 범위에서 국왕·국가가 집행할 것을 모색한 데 비해 〈목민심서〉는 군현의 범위에서 목민관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는 〈목민심서〉의 형전(刑典)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같이 일표이서는 저술동기와 내용에서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1817~22년에 기초, 완성되어 후기 개혁론의 대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일표이서의 개혁론은 경학사상체계와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면서 체계화되었다. 정약용은 〈주례〉 속에서 '호천상제'(昊天上帝)의 개념을 원용한 상제관(上帝觀)을 형성하여 전통적인 천명사상(天命思想)을 매개로 이를 군주와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천명은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바뀌어 항상 유덕(有德)한 사람에게 옮겨진다는 것이다. 덕의 유무는 민심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므로 군주권의 근원은 결국 민의에 달려 있는 것이며, 천명 그 자체가 통치권의 궁극적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다산은 군주를 정점으로 한 통치질서를 회복하여 치세(治世)의 근본을 확립하고자 했지만 그와 동시에 군주의 우월성은 민의에 의해 한계가 규정된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상제와 직결된 왕권과 상제와 직결된 민의 자주권 회복에 의해 하나의 통일된 통치체계를 수립하려 할 때 그 모습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으로 나타나며 사적 중간지배층의 배제는 필수적인 사안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표이서에서 표방되는 개혁론은 전기에 비해 훨씬 온건한 것인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현실을 크게 고려하면서 실현 가능한 점진적인 방안, 단계론적 시행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경세유표〉의 〈전제 田制〉에서는 우선 토지국유제하 농민의 개별적 점유를 원칙으로 하는 (井田制)를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토지국유의 실현이 불가능한 상태를 전제하여 차선책으로 정전제에서 동시에 시행되었던 구일세제법(九一稅制法)만이라도 원용하려는 방안을 제기했다. 이는 토지제도의 개혁보다는 국가재정과 밀접한 조세제도의 개혁, 일체의 중간수탈 배제를 목적으로 한 운영의 합리화를 통해서 현안을 해결하려고 한 것으로서 점진적이고 과도기적인 개혁방안이라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다산은 사민구직(四民九職)의 직업분화와 직업의 전문화를 강조하고 사회분업을 통한 경제발전의 길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먼저 상업의 경우 농업과 완전히 분리시켜 대등하게 발전시키며 상업적 이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조세개혁을 통해 상인들을 보호하며 해외 상업을 발전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동전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금화·은화와 같은 고액화폐의 발행으로 원격지간 교역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즉 상업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되 특권적 대상인은 억제하고 중소상인은 보호하는 방식을 도모했다. 다음으로 수공업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기술도입론을 강조했다. 〈목민심서〉에서는 지방 차원에서 민간 직물업에 관련된 기술도입을 역설했고 〈경세유표〉에서는 토목공사기술 등을 국가 차원의 제도개혁을 통해 적극 도입하고자 했다. 이는 그의 중앙관제 개혁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즉 기술도입의 주체인 국가기구가 강력하게 민간산업을 보호·통제하고 기간산업을 관장함으로써 대상인의 횡포에서 중소수공업자를 보호하려 했다. 국영광산론 역시 천연의 부에 대한 특권층의 자의적 이용을 배제하여 국가 통제하에 두며 그 이익을 공전(公田) 매입에 돌림으로써 전체적으로 소농민의 이익이 되게 하는 방안이었다. 이밖에 도량형의 전국적 통일, 물화유통을 촉진하기 위한 교통수단의 정비를 제안했다. 이는 18세기말과 19세기초 유통경제의 발전과정을 염두에 둔 논리일 뿐만 아니라 그의 체제 전반에 걸친 개혁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가 제기한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에는 과 대비되는 면모가 있었다. 첫째, 주자학이 천인합일(天人合一)에 기초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일리(一理)로서의 태극이 관통하고 있음을 주장한 데 비해 다산은 천도(天道)와 인간세계를 분리하여 각각 존재의 법칙과 당위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주자학의 계급성과 불평등한 인간관을 비난하고 인간세계의 질서는 변화 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요순 3대의 제도에서 그 규범을 찾으려고 했다. 한편 그는 천인분리를 상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천의 존재를 별도로 언급했다. 이때 천은 모든 인간과 개별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모두 존엄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둘째, 기질에 따른 인간성의 차등설을 비판하고 우수한 능력자는 특정 신분에서만 배출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의 능력주의는 신분제에 입각한 국가의 교육, 과거,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론으로 연결되었다. 셋째, 욕망관[人心道心說]에서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되 적절한 통제가 병행되어야 함을 말했다. 무제한적으로 욕구를 인정하는 것은 특권층의 입장과 통하는 것이라 본 그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외적 환경에 좌우된다고 보아 구체적인 사회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주관적 심성 문제에 치중한다거나 도덕적인 호소에 의한 해결방안을 내세우는 주자학과 대별되는 주장이다. 그는 전통적 관념론에 몰두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론적 세계관을 지향했다. 이에 따라 천문·기상·지리·물리 등 제반 자연현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그의 자연과학 사상의 기초는 우주관에서 비롯되는데, 전통적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논박하고 서학과 지리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원설(地圓說)에 관해 논증했다. 물리학적인 현상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록 렌즈가 태양광선을 초점에 집중시켜 물건을 태우는 원리, 프리즘의 원리를 이용한 사진기 효과 등을 밝혀냈다. 또한 종두법(種痘法)의 실시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종두심법요지 種痘深法要旨〉를 저술했고, 각종 약초의 명칭·효능·산지·형태 등을 조사 검토하여 생물학적인 연구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인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개발로 연결되어 농기계, 관개수리시설 및 도량형기를 발명하고 정비했다. 또한 한강의 [舟橋]를 설계하고, 의 축조시 거중기·고륜(鼓輪)·활차(滑車) 등의 건설기계를 창안했다. 이와 함께 〈기예론 技藝論〉에서는 방직기술·의학·백공(百工)기술을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으며 〈원정〉에서는 수리관개사업·식수(植樹)·목축·수렵·채광기술 및 의학을 깊이 연구해야 농민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과학정책론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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