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30. 03:17ㆍ美學 이야기
동양화, 문인화의 역사.....중국,한국. 동양화
그림의 이념과 효용성, 창작태도와 과정, 평가기준, 역사, 전기, 기법 등을 다룬 화리(畵理)·화평(畵評)·화설(畵說)·화사(畵史)·화법(畵法)·화결(畵訣) 등이 주종을 이룬다. 그리고 작품의 고증이나 표장(表裝)·수장(收藏)·제관(題款)·재료·감상의 방법과 태도 등에 대한 논의와 해설도 포함된다. 이러한 내용은 이들 사항을 부분 또는 종합적으로 다룬 화론서를 비롯해 그림을 보고 지은 각종 제화시문(題畵詩文)과 여러 가지 형태의 화가전(畵家傳) 등에 실려 있다. 직관적이고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주로 철학적·문학적 개념의 어휘를 사용하여 다소 애매하고 구체적이지 못하지만 근대 이전의 동양 미술론을 대변한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각 시대 회화활동의 지침서 역할을 하면서 회화사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회화의 변천·발전 요인과 회화풍토 및 상황에 대한 규명, 작가의 의식세계와 그 소산물인 작품세계를 보다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서양의 시대적 문화 예술 비교.
고대엔 서구--그리스 로마 문화가 찬란했고, 이를 이어 받은 것은 유럽이 아니라 중동의 이슬람으로 비잔틴 문화(동서양,이슬람)가 꽃을 피움.--이때의 그리스 문화가 인도를 거쳐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침-- 이후 중세 기독교 사회가 되면서 정형화되고 ,문화예술에서 종교적 엄숙주의로 경직된 표현으로 변하면서 중세 문화가 동양에 비해 초라해짐. 그래서,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로 개인이란 인간 정명(--데카르트에 의해서 인간이 스스로 자기 규정 함--)과 문화 부활을 시작함. 부활이 끝난 자리에 근대가 싹트임....자유와 개성을 중시한 문화(계몽주의, 이 계몽주의는 동양의 유학의 영향으로 피어남). -->자유와 개성을 중심으로한 창작성의 이성(理性)이 만든 과학, 이런 과학이 나타나게 한 이성으로 인하여 1.2차 대전이라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극을 초래함-->이성적 문화의 한계를 절감. 대량생산품이 기존 예술품보다 우수 -->작가는 창작하는 예술성을 중시 한다는 사고를 버리고, 작업 한다는 사고를 표현하는-- 거장이 아니라 스타가 된 예술가. 워홀-- 포스트 모던.
(서구와 인도의 나체화....그리스는 운동을 표현하기 위해 근육을 조각함.
인도는 열대 지방으로 나체가 생활이기도 함.
중국의 불교화에서 나체가 아닌 반나체화는 그리스와 인도의 영향으로 나체를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지만,
사회적으로 음란함이 있어서 욕망의 절제가 필요해 종교에서 반나체화로 표현하고 있다고 봐야 함.)
동양(중국)
고대엔 인물화 중심이었는데, 중국의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피해 자연 속으로 은둔한 귀족들이 자연에 동화된 인간의 모습(상)을 시.그림.음악으로 표현하게 됨.
그 후 동양의 예술혼은 도(道)라는 관념적이고 사의적이면서
기(氣)라는 사실적 표현함을 중시함.
(고대 동양에서 기는 자연의 이치인 도가 드러나는 수단으로 동양의 진리=자연.
고대 서양에서 우주의 진리는 신이며 자연은 현상, )
조각에선 불상을 다양하게--화려,찬란,생동감--표현.
비단과 도자기를 통하여 서구에 동양 예술 전파.
화론은
1. 중국에서
2. 유(儒)·불(佛)·도(道) 등의 사상적 기반 위에
3. 시론(詩論) 등의 영향을 통해
4. 5~6세기경 남북조시대에 형성되었으며,
5. 당·송대에 체계화되었다.
6.송대부터는 문인화론적 성향을 짙게 띠며 전개되었고,
7. 원대의 심화기를 거쳐 명·청대에는 기존의 이론이 종합·정리되었다.
(자연과 인간이 다를 수 없다는-이분법적으로 구분 할 수 없다는- 사상을 기반으로
동굴벽화에 그림과 기호<=글자>에서 시작한 기록과 표현이 문자로 정립되고, 이에 따라 시<詩>가 생겨나고,
종이와 붓에 의해서 문자로만 감정을 표현하는 시만이 아닌 서예,그림도 있었는데..이를 체계화한 이유는 지성=인격도야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어서...)
시대별 대표적인 화론서로는
남북조시대 사혁(謝赫)의 〈고화품록 古畵品錄>.
당대 주경현(朱景玄)의 〈당조명화록 唐朝名畵錄〉,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 歷代名畵記〉,
오대(五代) 형호(荊浩)의 〈필법기 筆法記〉,
북송대 황휴복(黃休復)의 〈익주명화록 益州名畵錄〉, 곽약허(郭若虛)의 〈도화견문지 圖畵見聞誌〉,
곽희(郭熙)·곽사(郭思)의 〈임천고치 林泉高致〉, 소식(蘇軾)의 〈동파제발 東坡題跋〉,
미불(米芾)의 〈화사 畵史〉, 한졸(韓拙)의 〈산수순전집 山水純全集〉,
필자 미상의 〈선화화보 宣和畵譜〉,
남송대 등춘(鄧春)의 〈화계 畵繼〉,
원대 이간(李衎)의 〈죽보 竹譜〉, 탕후(湯垕)의 〈화론 畵論〉,
하문언(夏文彦)의 〈도회보감 圖繪寶鑑〉,
명대 동기창(董其昌)의 〈화안 畵眼〉, 이개선(李開先)의 〈중록화품 中麓畵品〉,
청대 석도(石濤)의 〈화어록 畵語錄〉, 당대(唐岱)의 〈화사발미 畵事發微〉,
신종건(申宗騫)의 〈개주학화편 芥舟學畵編〉, 황월(黃鉞)의 〈이십사화품 二十四畵品〉
등이 있다.
그리고 대표적인 화론으로는 기운생동론(氣韻生動論)을 포함한 6법론(六法論)과 전신론(傳神論)·
회사후소론(繪事後素論)·....자연의 이치 표현에 중점.
시화일률론(詩畵一律論)·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
....이치는 문화=예술론.( 자연과 동양 붓의 특징 등이 혼합된 예술론)
심수상응론(心手相應). 흉중성죽론(胸中成竹論)·
....예술은 자연과 인간을 일치시켜서 표현.
즉 인간의 맘과 몸을 자연과 일치시켜서 표현
삼품론(三品論)·일기론(逸氣論)·남북종화론(南北宗畵論)·
일획론(一劃論) ......예술은 자연의 기를 표현.
등이 있다.
한국에서는 조선 후기의 몇몇 예를 제외하고는 본격적인 화론서의 형태를 갖춘 저술보다는 주로 단편적인 제화시문류 등의 형식을 통해 그림에 대한 인식과 지식을 나타냈다. 이와 같은 것은 창작과 감상 등의 회화활동에 한문학적 지식을 갖춘 문인학자들이 참여하면서부터 대두되었다. 이들 문사들은 중세적 지성의 확립을 위한 일환으로 당·송대 지식인들의 이념과 취향을 수용하여 그림의 가치와 이치에 대해 남북조시대 이래의 중국화론을 규범으로 새로운 인식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신라 말기의 최치원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던 이러한 풍조는 고려시대로 계승되어 북송과의 활발한 문화교류를 통해 점차 대두되었다. 1100(숙종 5), 1192년(명종 22)에 당 말기까지의 회화이론과 그림의 역사 등을 집대성한 장언원의 〈역대명화기〉가 〈태평어람 太平御覽〉에 수록된 상태로 유입되었다. 이 무렵 김부식(金富軾)은 회화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던 지배층 문사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기운비사론' 등에 토대를 두고 신분이나 인품이 높은 사람이 학문과 도를 추구하는 연장선상에서 유예(遊藝)하는 자세로 그린 그림을 가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흐름은 무신의 난 이후의 고려 후기로 이어져 능문능리형(能文能吏形) 사대부들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이들은 무신집권기를 통해 문인학자적 기능이 강화된 중세적 관료지식인으로 등장하여 그림을 시와 함께 자신들 상호간의 감흥교환과 심성도야 등의 내적 자원을 확충하는 데 유용한 매체로 즐겨 활용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수집하며, 완상하는 풍조가 크게 진작되었다. 특히 이들 문사들은 중세적 지성의 이상적 모델로 삼았던 북송대 사대부들의 문인화사상과 이념의 본격적인 수용을 통해 더욱 촉진되었다. 그중에서도 소식에 대한 숭배는 숭소열(崇蘇熱)을 이룰 정도로 매우 높았기 때문에 그를 중심으로 강조되었던 시화일률론과 중신사론(重神似論)을 비롯하여 흉중성죽론·신여죽화론(身與竹化論)·심수상응론(心手相應論)과 같은 문인화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시기에 이인로(李仁老)가 '시화일률론'을 개진한 것을 비롯하여 임춘(林椿)·최자(崔滋) 등도 화론 전개에 일정한 기여를 했지만, 보다 투철한 의식과 이론적 사유체계에 의해 자신의 견해를 표명한 인물은 이규보(李奎報)였다. 이규보는 사물의 외형이 아닌 생성화육(生成化育)하는 참모습을 그릴 것을 강조한 진사론(眞似論) 등을 통해 기존의 회화풍토를 비판하고 중세적 회화가 수행해야 할 실천적 지침을 제시하면서, 고려시대 그림이 감상화의 성격과 기반을 다지며 성장하는 데 계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무신집권기를 통해 활성화된 화론은 이승휴(李承休)·안축(安軸)·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 등 고려 말기의 신흥사대부를 거쳐 조선 전기로 계승되었다.
조선전기에는 〈화기 畵記〉를 쓴 신숙주(申叔舟)를 비롯하여 서거정(徐居正)·강희안(姜希顔)·강희맹(姜希孟)·성현(成俔)·김안로(金安老) 등과 같은 사대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 사대부들은 성리학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주자가 敎란 예악형정이라고 해석함.예악으로 가르치고, 그래도 않되면 형정으로 가지런하게 한다.--그림의 존재를 도의 예속적 관계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그 가치를 공리적(功利的)이고 수기적(修己的)인 측면에서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고려 후기 문사들의 문인화론을 계승하여 대상물의 창조적 생명력을 구유(具有)한 참모습을 표현할 것을 강조했으며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작품의 창작은 만물의 창조와 동질의 경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즉 작가는 창작에 임하기 전에 먼저 우주만물의 생성 근원과 법칙을 깊이 탐구·체득하여 만물을 존립시키고 변화시키는 영원한 작용을 자기의 가슴에 옮겨놓은 다음 물아(物我=정신)와 심수(心手=육체)의 일체화를 통해 대상물의 참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고 했고, 그림의 이러한 경지를 제대로 해명하고 참되게 평가하여 수용하기 위해 비평도 창작과 같은 차원에서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
(즉 자연과 내가 하나됨을 알고 난 후에 그것을 그대로 마음에 담아서 손으로 표현되야 한다. 자연과 마음과 그림이 초지일관<표현 형식에선 일필휘지라 하고, 자연과 인간과 그림의 전체성에서 일관성을 갖아야 함.>이 자연에서부터 손끝까지 이뤄져야 완성된 표현이 가능하다는 논리.)
(내생각..작가는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확실히 있으면서
사물에 대한 완전한 회화적 구상을 마음 속에 하고서
그림을 그려야 그림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함.
그래야 동양의 예술혼인 도<道>와 기<氣>를 담은 그림이 완성 되는 것으로 공감을 갖고 있었다.
비평도 마찬가지고.
도화서 화원처럼 기능공 아니라는 이야기다.)
'美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송당 김지의 동자견려도 (0) | 2016.03.30 |
---|---|
연담 김명국 "답설심매도" (0) | 2016.03.30 |
김명국 (선종화로 유명한 화가) (0) | 2016.03.30 |
조선시대 화가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 그림 (0) | 2016.03.30 |
김대환의 文響 - 26 고구려 불꽃무늬 금관(高句麗火焰文金冠) (0) | 2016.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