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30. 03:26ㆍ美學 이야기
양송당 김지의 동자견려도 문화유산
양송당 김지의 동자견려도
▲ 김지, 동자견려도 조선 16세기, 111.0 x 46.0cm 삼성미술관 리움
혹자는 조선 선조를 임진왜란을 겪은 무능한 임금으로 평하지만
그것은 재위 42년 중 마지막 8년간에 일어났던 불운이었을 뿐 후대인들은
오히려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칭송했다.
목릉은 선조의 능이다.
실제로 목릉조에는 울곡 이이, 송강 정철, 서애 유성룡, 백사 이항복, 권율 장군,
이순신 장군 등이 있었다.
화가로는 양송당(養松堂) 김지(金至 1524~1593), 글씨에서 석봉 한호, 문장에서
간이당 최립이 당대의 삼절(三絶)로 칭송되었다.
양송당은 과연 당대의 대가로 매너리즘에 빠진 기존의 서정적 소상팔경도 풍의
산수화를 벗어던지고 절파 화풍이라는 신풍을 일으켰다.
명나라 절강성 화가들이 일으킨 이 화풍은 묵법(墨法)을 많이 사용하여 먹의 쓰임
이 강렬하고 스토리텔링이 있는 인간 중심의 산수화가 특징이다.
양송당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받아 들였다.
그의 대표작인 보물 제783호<동자견려도 童子牽驢圖>를 보면 나귀와 동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그림의 주제로 삼고 있다.
본래 네발 달린 짐승은 본능적으로 땅이 아닌 곳은 밟지 않는다.
그래서 나귀는 한사코 나무다리를 건너지 않으려고 뒷걸음치고 동자는 어서 가자며
잡아끌고 있다.
이 상황의 표현이 아주 생생하여 그림 속엔 사실감과 인간미가 넘친다.
특히 양송당은 작품상에 낙관을 분명히 나타냈다.
숙종 때 남태응은<청죽화사 聽竹畵史>를 쓰면서 기록이 아니라 실작품으로 대가임
을 보여주는 조선시대 첫 화가는 양송당이라 할 정도였다.
양송당은 연안김씨 명문 출신으로 좌의정을 지낸 김안로(金安老)의 넷째 아들이다.
그러나 14살 되던 1537년,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는 바람에 출셋길이 막혀
버렸다.
부친이 사약을 받던 날은 그가 장가가는 날이었다.
다행히 이 집안은 그림의 혈통이 있어 아버지는<용천담적기 龍泉淡寂記>라는
저서에서 국초(國初)의 그림에 대해 논한 바 있고 큰 형님도 그림에 능했다.
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던 양송당은 그림의 피를 받아 일생을 살았는데 오히려 한국
미술사의 대가로 이름을 남겼고 손자 또한 화가가 되어 연안김씨는 그림의 명문가로
남게 되었다.
(유홍준의 국보순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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