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30. 03:20ㆍ美學 이야기
연담 김명국 "답설심매도" 글과 그림
저 남쪽 어딘가 눈발 속 첫 매화 봉오리를 찾아서
<김명국, 踏雪尋梅圖, 조선 17세기 중반, 모시에 수묵 담채, 101.7×54.9㎝, 국립중앙박물관>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 주위가 하얗게 은세계를 이룬 가운데 한 선비가 짐 든 종자從者를 앞세워 길을 떠난다. 사립문에 기대 전송하는 동자는 잠이 덜 깬 듯 목을 잔뜩 움츠리고 등을 옹송그리며 소매 속의 손을 들어 매서운 바람을 가린다. 선비도 눈보라를 피하는지 아니면 아이 혼자 두고 가는 것이 염려되는지 고개를 돌려 집을 바라본다. 이들의 옷은 맵시는커녕 되통스럽기까지 하다. 머리를 귀까지 싸매고 넉넉하게 솜을 둔 겨울옷을 껴입었기 때문이다. 나귀는 이런 일에 벌써 이력이 났다는 듯 터벅터벅 내딛는 발 모양새가 체념을 넘어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아마도 먼 길을 갈 모양이다.
멀리 눈덮인 흰 봉우리가 흐릿한 윤곽을 드러낸다. 날카롭고 각지게 힘찬 마른 붓으로 그려서 삼엄한 겨울 딱딱하게 얼어붙은 자연이 실감난다. 밤새 함박눈이 내렸을까? 아니, 양지바른 집 근처 나뭇가지에 눈이 녹은 것을 보면 겨우내 묵은 눈 같다. 그러니 봄도 이제 멀지 않았다. 다리 아래 얼음 무더기는 녹아서 흘렀다가 다시 꽁꽁 얼어 이곳에 쌓인 것이 아닌가? 오른편 아래 구석에 폭포가 꽁꽁 얼어붙었고 앙상한 나뭇가지들도 심술궂어 보이지만 그것은 모두 지난 겨울이 남긴 상흔일 뿐이다. 머지않아 가지 위에 따스한 볕이 쪼이면 매화 봉오리가 살포시 실눈을 뜰지 모른다.
하지만 선비는 조바심에 가만히 집에 앉아 기다릴 수 없다. 저 남쪽 어딘가 눈발 속에 첫 봉오리가 벌어졌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집 앞 나무는 가지가 메말라서 뼈만 남았다. 단지 나무뿐 아니라 산도 물도 모두 얼어 자연의 뼈다귀를 드러내었다. 이것이 감상자의 심금을 맑고 투명하게 울린다. 예각으로 틀어지면서 험상궂게 옹이를 드러낸 나무들. 잔가지 획을 게발처럼 뽑아 그렸기 때문에 해조묘蟹爪描라 부르는 이 필법은 혹심한 추위를 견디는 꼬장꼬장한 겨울나무의 혼이다. 겨울 끝머리에 가장 먼저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퍼뜨리는 농주미인弄珠美人 매화. 간밤 꿈 속에 선비는 '구슬을 희롱하는 미인'을 보았다.
'눈 밟고 매화 찾아가는 그림', <답설심매도踏雪尋梅圖>는 첫눈에 눈과 추위로 격리된 닫힌 공간을 보여준다. 하지만 오른편 구석 강렬한 흑백 대비의 바위를 중심으로 집, 나무, 나그네가 우선 펼쳐지고, 다시 위태롭게 솟아오른 절벽과 원산遠山이 부챗살처럼 퍼져 나간다. 보는이는 이가 시리게 매서운 추위를 느낄지 모르나 차가운 설경 속 눈서리를 무릅쓰는 선비의 마음 속엔 흐뭇한 봄의 설렘이 있다. 예부터 겨울그림은 고상하고 심지 굳은 선비들이 좋아했다. 자연이 길을 막아 절로 속세와 멀어진 뜻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겨울그림은 무더운 복중伏中에 감상하는 것이 제격이라 한다.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1600~1662년 이후)은 취옹醉翁이란 호도 있다. 화원으로서 술을 매우 좋아했고 성격도 호방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명작들은 모두 술을 마신 뒤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그린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이같은 성격에 어울리게 그의 그림은 대담하고 시원시원하다. 대표작인 <달마도>와 같은 선종화 외에도 산수화와 인물화 모두 잘 그렸다. 1636년과 1643년 조선통신사 사절단으로 일본에 갔을 때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쓰시마와 오사카 등지에 도착하자 김명국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있는 일본학자와 문인들이 몰려나와 그의 그림을 구하고자 했다. 김명국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일본인도 많았고 심지어 통신사의 숙소 밖에 줄지어 밤을 세우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18세기의 화론가인 남태웅(1687~1740)은 <청죽화사聽竹畵史>란 저서에서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평했다.
이 글은 고 오주석 지음,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2009, (주)월간미술)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1. 12. 15 새샘
blog.daum.net/micropsjj/17038685 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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